- 반소(班昭) - 반초의 여동생
《한서(漢書)》의 편찬자 반고(班固)와 서역 경영에 활약한 무장 반초(班超 33~102)의 누이동생으로
박학다식한 그녀는 반고가 《한서》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자, 화제(和帝) 의 명을 받고 그 일을 계승하여
《한서》 중 8편의〈표(表)〉와 〈천문지(天文志)〉를 완성함으로써 《한서》 편찬을 완결하였다.
그 후 그녀는 궁중에 초빙되어 황후를 비롯한 여러 부인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또 그녀가 지어낸
《여계(女誡)》 7편의 저서는 정숙한 부녀의 도(道)를 논술(論述)한 것이다. 그 외의 저서로, 여행 체험에
의거하여 지어낸 《동정부(東征賦)》가 있고, 부(賦)ㆍ송(頌)ㆍ명(銘)ㆍ뇌(誄)ㆍ문(問)ㆍ주(注)ㆍ애사(哀
辭) 등을 합하여 16편이 있다.
- 채문희(蔡文姬)
채문희는 후한의 학자이며 시인으로 이름을 떨친 채옹(蔡邕)의 딸인데, 어려서부터 박학다식하여 변설에
능하고 음악적 재능을 갖춘 재원이었다. 문희는 부친의 총애를 믿고 약간은 경박하기도 했다. 문희는 처음
에 위중도(衛仲道)에게 출가했는데 얼마 안되어 남편이 죽자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때 동탁의 난이 일어났고 그녀는 흉노족에게 납치되어 남흉노 좌현왕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여기서 좌현왕과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조조는 채옹과 절친한 사이였는데 채옹의 후손이 끊기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좌현왕에게 천금을 주고
문희를 데려와 동사에게 출가시켰다. (AD208년) 잡혀간지 무려 12년만의 귀국이었다. 조조는 옛날
절친했던 채옹과의 정분을 생각해서인지 동관 근처 남전 땅에 장원을 세우고 그곳에서 살도록 배려를
했다고 한다.
이 때 지은 곡이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 으로 머나먼 타향에서 그리워 하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
과 흉노에 사는 동안 낳은 두 명의 아이들과 이별하는 슬픔의 갈등을 담았다.
《호가십팔박(胡笳十八拍)》은 중국 2대 금곡(琴曲)으로 손꼽히는 명곡이기도 하다. (또 다른 중국 2대
금곡(琴曲)은 《광릉산(廣陵散)》으로 곡에 얽힌 이야기가 그녀의 아버지 채옹(蔡邕)이 저서인 《금조(琴
操)》에 수록되어 있다.) 부친이 남긴 저서 수백권이 전쟁 중에 불타고 없어지자 조조의 부탁으로 한번 보
았던 기억을 되살려 다시 400여권이나 복원할 만큼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 당완(唐琬)
남송대 시인 육유(陸游)(1125-1210)의 사촌여동생이자 처. 원래 남편 육유와 금슬이 좋았지만, 시어머니의
미움을 사 서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훗날, 절강성(浙江省) 소흥(紹興)(옛지명 : 회계(會稽))의
심원(沈園)을 들렸다가 둘은 우연히 해후를 하여 서로 이별의 아픔을 노래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녀는 시름시름 앓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육유는 96세까지 장수하였으며 만
년에 이 심원에 들러 그녀를 그리는 수많은 글을 지었다고 한다. 육유는 수많은 시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여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시만도 9,200여 수나 된다고 한다. 그 중 그녀를 기린 시는 얼마나 될련지....
다음은 그 유명한 <釵頭鳳(차두봉)- 비녀머리의 봉황 >이란 사패이다. 심원에서 육유가 지은 시에 그녀가
화답한 시라고 합니다.
世情薄, 人情惡, 세정은 야박하고, 인정은 악합니다.
雨送黃昏花易落. 비는 황혼의 꽃을 쉬이 떨어뜨리고,
曉風干, 淚痕殘. 새벽바람 불어와 눈물자욱을 남기네요
意緘心事, 獨語斜欄. 마음을 적어보내고 싶지만 난간에 기대어 혼잣말만 합니다.
難, 難, 難! 힘들고, 힘들고, 힘듭니다.
人成各, 今非昨, 사람은 각각이 되었고, 오늘은 어제가 아닙니다.
病魂常似秋千索. 角聲寒, 병든 마음은 그네끈처럼 길고, 뿔피리 소리 차가워
夜岸珊 . 밤을 깊어가게 하네요.
怕人詢問, 咽淚裝歡 누군가 물어볼까 두려워 눈물화장 삼키고 기쁜 척 합니다.
瞞, 瞞, 瞞! 감추고, 감추고, 감춥니다.
- 도온 - 사도온(謝道韞)
동진(東晋)의 명재상 사안(謝安)의 질녀이며 왕응지(王凝之 : 왕희지(王羲之)의 차남)의 처로 총명하고
재변이 있기로 유명하였다.《진서ㆍ왕의지처사씨전(晋書ㆍ王凝之妻謝 氏傳)》의 고사를 따르자면 친척
들이 모인 어느 날 갑자기 내리는 눈을 보고 사안 (謝安)이 묻기를
"쉴 새 없이 내리는 흰 눈은 무엇을 닮았는가? (白雪紛紛何所似)"라 하자, 사랑(謝朗)은
"공중에 소금을 뿌린 듯 하옵니다. (散鹽空中差可擬)"라고 하였으나, 그녀는
"(하지만) 바람에 일어난 버들개지만 못 하옵니다. (未若柳絮因風起)"라고 하여
사람들이 크게 탄복하였으니 이후 그녀는 영서재(詠絮才)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시(詩)·송(頌)·부(賦)·뇌(誄)등을 지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매우 드물어 《등산(登山)》, 《의혜중산영송
(擬嵇中散詠松)》등의 시만 전해진다. 버들개지 : 버드나무의 꽃. 솜과 비슷하며, 바람에 날려 흩어짐.
柳絮 : 한문으로 직역 풀이하면 '버드나무(의) 솜'으로, 중국어로 버들개지라는 뜻이다.
영서재(詠絮才) : 버들개지[絮]를 노래한[詠] 재녀[才] 라는 뜻.
- 후부인(侯夫人) - 수양제(隋煬帝)의 후궁
- 화연 - 화예부인(花蕊夫人)
혜비(慧妃) 서씨(徐氏).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후촉(後蜀)의 왕 맹창(孟昶)의 처. 시사에 정통하였고
재모겸비하여 화예부인(花蕊夫人)이라 불렀다. 건덕 2년 11월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충무절
도사(忠武節度使) 왕전빈(王全斌)으로 하여금 군사 6만을 이끌고 촉으로 진공하도록 명령하였다.
14만이나 되는 군대를 지닌 촉이었지만 맥없이 지고 만다. 이에 맹창은 화예부인에게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우리 부자가 사십년을 풍족하게 병사를 길러왔지만 일단 적을 만나니 동쪽을 향해 화살 한 발 쏘지
못하는구려! " 맹창이 죽자 송태조는 화예부인이 사작(詞作)에 능함을 전해 들었기에 그녀를 불러 시를
짓게 했는데 그녀는 당당하게 망국의 한을 읊었다고 전해진다.
君王城上樹降旗 군왕이 성 위에 항복 깃발 세웠다지만
妾在深宮那得知 첩은 깊은 궁에 있어 알 길이 없었네.
十四萬人齊解甲 14만명이 모두 갑옷을 벗었다 하니
寧無一個是男兒 남아는 하나도 없었던 것인가!
오히려 굳은 충정에 크게 감명한 송태조는 그녀를 비로 삼았는데 후에 그녀는 조광윤을 죽이려 하였으나
이를 실패하자 스스로 자진하였다고 한다
- 측천무후(則天武后)
이름 조(照). 후에 조(曌)라는 글자를 새로이 만들어 이름을 바꿈. 당나라 창업에 공헌한 무확(武朕)의 딸. 뛰어난 미모로 14세 때 태종(太宗)의 후궁이 되었으나, 황제가 죽자 고종(高宗)의 눈에 띄게 되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그후 간계를 써서 황후 왕씨(王氏)를 쫓아내고 655년 황후가 되었다.
수년 후 고종의 건강을 핑계 삼아 스스로 정무를 맡아보며 독재권력을 휘둘렀으며, 문예와 이무(吏務)에 뛰어난 신흥관리를 등용하여 세력을 구축하고 구귀족층을 배척 하였다. 683년 고종이 죽자 자신의 아들 중종(中宗)·예종(睿宗)을 차례로 즉위시키고, 그녀에게 반항하여 난을 일으킨 서경업(徐敬業)과 당나라의 황족 등을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690년 국호를 주(周)로 개칭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중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 로서 약 15년간 전국을 지배하였다. 705년 장간지(張柬之) 등이 정변을 일으켜 중종이 복위되고 당왕조가 부흥하였다.
- 소군 - 왕소군 (王昭君)
"낙안(落雁)" -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졌다.
한(漢)나라 왕소군은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이다. 이름은 장(嬙 ·檣 ·牆). 자 소군. 일설에는 소군이 이름
이고 장이 자라고도 한다. 남군(南郡)의 양가집 딸로 한나라 원제의 후궁으로 들어갔으나, 황제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비관하고 있었다. 당시 흉노(匈奴)의 침입에 고민하던 한나라는 그들과의 우호 수단으로 흔히
중국 여자를 보내어 결혼시키고 있었다. BC 33년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
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지(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다. 호한야가 죽은 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다. 이러한 소군의 설화는 세월이 흘러감에 따
라 윤색되고, 흉노와의 화친정책 때문에 희생된 비극적 여주인공으로 전하여 왔으나 대부분은 사실(史實)
로 인정할 수 없다.
한나라 원제는 북쪽의 흉노과 화친을 위해 왕소군을 선발하여 선우와 결혼을 하게 하였다. 집을 떠나가는
도중 그녀는 멀리서 날아가고 있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생각이나 금(琴)을 연주하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그
소리를 듣고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에 왕소군은 낙안(落雁)이라는 칭호를 얻었
다.
후한(後漢) 때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의하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畵工)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
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에 얼굴
이 추하게 그려졌고, 그 때문에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어 버렸다. 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즈음에 원제
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였으므로 크게 후회하였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제는
크게 노하여 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毛延壽)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진
(晉)나라 때에는 문제(文帝) 사마 소(司馬昭)의 이름과 글자가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하여 왕명군(王明君)이
라 하였고, 명비(明妃)라고도 불렸다. 그 뒤 그녀의 슬픈 이야기는 중국문학에 허다한 소재를 제공하였다.
《소군사(昭君辭)》《명군탄(明君歎)》이라는 한나라의 악부(樂府)가 가장 오래 된 것이고, 그녀를 소재로
한 희곡으로는 원(元)나라 때의 마치원(馬致遠)이 지은 《파유몽고안한궁추잡극(破幽夢孤鴈漢宮秋雜劇:漢
宮秋)》이 가장 유명하다. 진나라의 석계륜(石季倫)이 지은 《왕명군사병서(王明君辭幷序)》가 있고, 당(
唐)나라 이후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등 많은 시인들이 그녀를 소재로 시를 읊었다. 또 둔황[敦煌]에서
발굴된 《명비변문(明妃變文)》에 의하여, 당말 오대(五代)경부터 구전문학(口傳文學)의 소재가 되었음이
밝혀졌다.
- 서시(西施)
"침어(沈魚)" -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숨었다.
서시는 춘추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이다. 어느 날 그녀는 강변에 있었는데 맑고 투명한 강물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추었다. 그 모습을 본 수중의 물고기가 수영하는 것을 잊고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浸魚)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서시는 오(吳)나라
부차(夫差)에게 패한 월왕 구천(勾踐)의 충신 범려(范蠡)가 보복을 위해 그녀에게 예능을 가르
쳐서 호색가인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다. 부차는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치를 돌보지
않게 되어 마침내 월나라에 패망하였다.
- 견황후 (甄皇后)
문소황후(文昭皇后). 본명 복(宓). 원소의 아들 원식의 처였다가 후에 조비의 처가 되었다. 삼국지 등장
여인중 미색으로 치면 초선 다음이요, 재주로 치면 따를 이가 없었다고 한다. (초선은 삼국연의의 허구의
인물이기 때문에 폐월(閉月)은 견씨를 칭하는 말이라는 설도 있다.)
어려서 집안의 뜻에 따라 원소의 집안으로 출가를 했고자라서는 단지 아름답기 때문에 마치 전리품처럼
조조의 집안으로 끌려간 비운의 여인. 의처증이 심했던 조비는 아들 조예와 딸 동향공주가 평범하게
생긴 자신과는 달리 너무 아름다워 자식들의 모습에서 그녀를 흠모하였던 동생 조창과 조식을 떠올렸
다고 한다.
그래서 그 둘을 박해하더니 조창은 독살을 하기에 이르렀고 후에 첩인 곽씨의 모함에 혹해 그녀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된다. 조식은 사랑하는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 강에 뛰어들려고 하였는데 그때
홀연히 여신의 모습을 한 그녀가 나타나 조식을 말리는 환상을 겪었다고 한다.
이 내용을 노래한 시가 바로 조식을 이백, 두보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시성으로 만든 낙신부(洛神賦)다.
원제는 감견부(感甄賦 : 견씨를 느끼며 지은 부)였으나,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의 의심으로 죽임을
당한 어머니를 항상 애통히 여겼던 조예가 어머니의 명예를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위해 낙신부(洛神賦)
로 개명하였다고 한다.
遠而望之 皎若太陽升朝霞 멀리서 바라보면 태양이 떠오르는 새벽하늘처럼 빛나고,
迫而察之 灼若芙蕖出淥波 가까이서 보면 흰 연꽃이 녹빛 물 위에 피어난 것 같네.
襛纖得衷 修短合度 몸매는 날씬하고 키도 적당하며
肩若削成 腹如束素 어깨선은 깎은 듯 매끄럽고 허리는 흰 비단을 두른 것 같다.
延頸秀項 皓質呈露 덜미는 길고 갸름하며 흰 살결을 드러내고 있다.
芳澤弗加 鉛華弗御 기로운 연지를 바르지도 않고 분도 바르지 않았다.
雲髻峨峨 修眉聯娟 름같은 모양으로 머리는 높직하고, 길게 그린 눈썹은 가늘게 흐른다.
丹唇外朗 皓齒內鮮 빨간 입술은 선연하게 눈길을 끌고 하얀 이는 입술 사이에서 빛난다.
明眸善睞 靨輔承權 은 눈동자로 때로 곁눈질 치고 보조개는 귀엽기 그지없도다.
- '침어낙안 沈魚落雁, 폐월수화 閉月羞花'와 더불어 미인을 칭하는 단어인
'명모호치(明眸皓齒 :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가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 양옥환 (楊玉環) - 양귀비(楊貴妃)
"수화(羞花)" -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
미인이란 단어를 생각하면 누구든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이름, 바로 그 양귀비이다. 당대(唐代)의
미녀 양옥환(楊玉環)은 당명황(唐明皇) 현종의 에게 간택되어져 입궁한 후로 하루 종일 우울했다.
어느 날 그녀가 화원에 가서 꽃을 감상하며 우울함을 달래는데 무의식중에 함수화(含羞花)를 건
드렸다. 함수화는 바로 잎을 말아 올렸다.
당명황이 그녀의 ' 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 에 찬탄하고는 그녀를 '절대가인 (絶對佳人)'이라고
칭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武惠妃)의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로 궁궐에 들어
갔다. 당시 양귀비는 17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런데 어느날 현종이 우연히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다. 그날 이후부터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 (高力士)를 불러 이 일을 의논하였다.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다. 양귀비
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 양귀비도 본래 수왕(壽王)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
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華山)으로 가서 여도사(女道士)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왔다. 양태진(楊太眞)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 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는 다소 미안했든지 위씨(韋氏)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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