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무원불자연합회
(중국 성지순례 )
남경.중경.대족.삼협크루즈.무한.선종사찰.남경
출발일 : 2013년 07월27일 (토) 12:30시-도착 8월 3일(토)18:00시
장강삼협 : 장강삼협이란 중경시 봉절의 백제성에서 동쪽으로 호북성 의창시의 남진관에 이르는 총 길이 193㎞ 구간을가리킨다. 중국에서 제일 길뿐만아니라 세계에서 세번째로 긴 장강은 총길이가 6,300㎞이며 지 류가 700여개다.
장강이 티벳고원에서 상해경유 동해로 흘러내려가면서 유명한 협곡은 운남의 호도협하고 중경이창의 삼협이다.
구당협(瞿塘峽: 취탕샤)·무협(巫峽: 우샤)·서릉협(西陵峽: 시링샤) 세 개의 협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협의 형성은 강렬한 조산운동에 의한 해륙 변천과 가하천 발육의 결과다. 삼협풍경은 웅장함, 험준 함, 기묘함,고요함이 어우러져 항상 관광객들을 매료시키며, 강 주변의 수많은 명승고적을 비롯한 인 문경광도 많다.이곳을 여행하려면 크루즈를 타고 양자강의 협곡을 누비며 웅대한 자연의 절경을 즐기 는것이 제일이다. 삼협 크루즈는 1980년부터 개발하여 크루즈를 운행했다

중국돈 10원에 등장하는 멋진 장소
봉절(奉節 : 훵지에)
삼협 서쪽에 위치한 이름난 고성으로, 원래 명칭은 '어복(魚服)'이었다. 당(唐)대 초부터 봉절이라고 불렸고, 오늘날의 봉절성은 명(明) 성화 10년(1474년)에 축조한 것으로 5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당대의 유명한시인 두보(杜甫)는 이 곳에 2년여간 거주하면서 400여 수의 시가를 썼다.
(白帝城 : 바이띠청)
백제성은 봉절에서 아래로 약 5㎞ 내려간 구당협 어구의 북안에 위치한 관광지이다. 백제성의 역사는 1700여년전의 동한시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현존하는 백제묘의 주건물은 명·청시기에 지어진 것이다. 백제성은 지세가 험악하고 역대 군사가들이 서로 쟁탈하던곳으로, 촉한 유비 또한 이곳에서 임 종하며 제갈량에게 자신의 후사를 부탁했다고 전해진다.
[구당협]
서쪽 봉절의 백제성에서 동쪽 무산현의 대계진에 이르는 총 길이 8㎞의 협곡으로 삼협 중 제일 짧고 좁아 삼협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험준한 협곡이다. 구당협에는 명승고적과 문화유산이 매우 많다. 구당 협의 북안 고봉은 적갑산이고 남안 고봉은 백염산으로, 마주선 두산 사이를 세차게 흐르는 강물은 장 강삼협의 상징인 천하 제1문인 기문'을 형성했다.
[무협]
서쪽에 있는 무산현의 대녕하 어구에서 동쪽에 있는 호북성 파동현의 관도 어구에 이르는 40㎞ 길이의 협곡이다. 삼협 중 가장 정연한 협곡이며, 깊고 그윽한 경치로 유명하다. 골이 깊고 굽이가 많아 구불구 불한데다가 안개 구름이 휘돌아 변화가 무궁하다. 무협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무산 12봉인데, 12봉은 장 강의 남북쪽에 각각 6봉씩 나뉘어 있다.
[신녀봉(神女峰)]
무산 12봉은 무협의 가장 높고 유명한 관광지이다. 그 중 신녀봉은 선녀 요희가 백성들의 피해를 덜어 주고 대우를 도와 치수를 하다가 신녀봉 바위로 변하여 삼협항로의 평안을 기원해준다는 전설이 있어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있다. 옛 초의 양왕이 신녀를 사모해 그녀을 보러 이곳에 왔으나 못만나고 꿈으 로만 뜻을 이뤘다고 한다.
[소삼협(小三峽)]
장강삼협의 지류로서 마치 삼협의 경치를 축소시켜 놓은 듯 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문협(龍門峽)· 파무협(巴霧峽)· 적취협(滴翠峽)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길이가 50㎞이다.
협곡지대는 산이 높고 골이 좁으며, 물 또한 맑다. 관광객들은 배를 타고 자연과 야생동물을 감상할 수 있다. 산여울 강물바위 급류의 관광이 하나되어 예로부터 삼협이 아니지만 삼협보다 낫다고 칭송받고 있다.
[서릉협]
자귀의 향계하구에서 의창의 남진관에 이르는 총 길이 75㎞의 구간이다. 이곳은 삼협중 가장 긴 협곡으 로 안개속에 반쯤 가려져 있으며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신비스러운 분위기다. 서릉협은 동서 두 구간 으로 나뉘며, 중간은 길이 약 31㎞의 묘남관곡이다. 서릉협에는 여울이 많고 물살이 세어 역사적으로 이름난 험탄이었던 신탄,공령탄 등이 모두 이 협곡에 있었다. 현재는 물론 여러 해 동안의 정비를 거쳐 이러한 험탄이 모두 사라졌다.
(황학루)
황학루는 호남 악양의 악양루(岳陽樓)와 강서 남창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名樓), 천 하절경(天下絶景)이라 일컬어 지는 곳이다. 1,700여년을 내려 오면서 이곳은 7번 소실되고 7번 중건되 었는데, 지금의 모양은 제일 마지막에 중건된 1985년의 것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 내릴 수 있는 최신식의 누각이다.
황학루는 삼국 오나라 황무2년에 무창 사산(蛇山)에 처음 세워졌으며, 꼭대기에 동탑이 앉은 약28m의 3층 건축물이었다. 여러 전란을 지나 청대의 양식으로 새로 건설한 황학루는 더욱 웅장한 모양의 것으 로 총 높이가 51.4m인5층 높이가 되었다. 이곳은 누각을 중심으로 정자와, 회랑, 비방(牌坊), 시비(詩碑) 로 구성되어 있다. 황학루는 사산위에 있으면서 장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고 운치 있다. 그 때문인지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육요(陸游), 양신(楊愼), 장거정(張居正) 등의 많은 문인 과 시인이 시로 읊었는데, 기록에 남아있는것만 300수 이상이다. 그중에서도 당대의 시인인 최호(崔顥) 가 이곳에 올라 쓴 '황학루'라는 시가 가장 유명하다.
황학루는 적지 않은 전설들이 담겨져 있는데, 그중 극은록(極恩錄)에 따르면 황학루는 원래 신씨가 개 설한 주점으로 한 도사가 그녀의 은덕에 감사하며, 지나가는 길에 벽에다가 한마리 학을 그렸는데, 그 모양이 춤을 추듯아름답다고 알려지면서 이곳의 장사도 날로 번창했다고 한다. 10년 후, 도사가 다시 왔는데 학을 타고 구름위로날라갔고, 신씨가 그걸 보고 황학과 도사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에 누각을 짓고 이름을 황학루라 불렀다는것이다.

(삼조사)
삼조사는 또 ‘건원선사’라고도 불리우는데 안휘성 점산현내의 풍경이 수려한 천주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여 있다.
1983년에는 국무원으로부터 한족 지역의 전국 중점 불교사찰로 지정되었으며 1984년 부터는 불교단체에서 관리하고 사용하며 대외적인 활동 장소로 개방되었다.천주산 계 곡입구에 봉형산이 있는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삼조사’라고 부른다.해당 지역은 춘추 시대 대부 완백의 영지로서 영지내에는 ‘환산’과 ‘환수’가 있었다고 한다.현재의 안휘성 약칭’환’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한무제가 남방을 순시할 때 바로 여기에 제단을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천주산을 ‘남 악’으로 봉하였다.기재에 따르면 남조 양무제시기, 건강도림사 고승인 보지스님과 강남 운유방사 백학도인 문법스님이 봉형산에 머물러서 절을 짓고 교리를 전하였는데 처음 에는 ‘보리암’으로 불리웠고 무제인 소연이 이 소식을 들은 뒤 ‘산곡사’라는 이름을 하 사하였다고 한다.그 후 수나라의 소찬(510-606년)스님이 선종 2조이신 혜가로부터 선맥 을 이어 받은 뒤, 이 곳에 은거하면서 절의 규모를 확대하면서 선종을 널리 홍보하여 ‘ 삼조사’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당고조 무덕년간(618-626년)사이에는 보월선사가 산곡사에 머물렀고 현종 천보4년(745 년)에 서주별가인 이창이 3조의 유골을 화장하여 오색 사리 300개를 얻었는데 그 중 100개는 조정에 받치고 100개는 고향인 조군에 모셨으며 나머지 100개로는 승찬상과 삼조사리탑을 만들었다.건원 원년(758년) 소종 이형이 ‘삼조산건원선사’라는 이름을 하 사하였다.대력7년(772년)에는 대종 이예가 삼조탑에 ‘각적탑’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고 승찬스님에게 ‘검지선사’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회찬법난’때는 탑이 파괴를 받은 적이 있다.
송조 평흥국 7년(982년)에는 산민 가악이 노송 아래에서 돌로 된 관인을 파냈는데 그 이에는 보지스님이 친필로 쓰신 ‘승조면원’이라는 네 글짜가 새겨져 있었다.관인이 조 정에 받쳐진 후 태종 조광의는 ‘서석’이라는 이름을 지었고, 삼조사에는 직접 사절을 파견하여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보지스님에게 ‘보공’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호를 ‘도림진각선사’라고 하였다.송휘종 정화 년간에는 법종법사가 이 절에서 수행을 하셨 는데 향불이 그칠사이가 없었고 ‘삼천승인팔백도’라는 이름도 남겼으며 그 뒤로는 흥망을 반복하였다.
삼조사는 지금으로부터 140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갖은 고초를 겪어 온 사 찰이다.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는 고대 건축물로는 장경루, 각적탑, 입화정, 삼고정 등 이 있고 이 몇년 사이에는 기타 전당과 스님들의 숙소도 다시 건설되고 있다.
천주산의 야채구로부터 봉형산으로 올라가면 바로 산문이다.돌계단 옆으로는 소나무 가 손님을 맞이하고 대나무가 깊게 기울어져 있으며 왼 쪽에는 명나라 안경군수 호 찬종이 운 ‘산곡’이라는 큰 비석이 있고 오른 쪽에는 청나라 환강군수 장해가 친필 로 쓴 ‘향암’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한계단 한계단씩 삼백여개 돌 계단을 톺아 올라서야 사원의 건축물에 도달할수 있는데 여기서 서쪽으로 굽어보면 ‘석우고동’과 ‘산곡유천’이고 동쪽으로는 한무제가 이름을 하사했던 누대가 멀리 보인다.북쪽으로 는 사명진원궁사당, 응몽정이 한눈에 안겨오고 남쪽으로는 고안오당, 사애주조 등 명승지가 안겨온다.절 안의 벽에는 남송 소희2년10월(1191년) 장동이 지은 시가 새 겨져 있다.‘양조사에서 수행을 하면서 불법을 전수받노라, 저기저 불단은 고목과 같 고 산곡에는 청우가 누운듯하네, 야밤부터 아침까지 바람이 불어오고 산곡에는 일년 내내 물이 흐르니, 선림에서 누가 제일이드냐, 이 곳이 남주에서 으뜸이라네’

삼조사에서 가장 특색이 있는 건축물은 각적탑으로 일명 ‘삼조사탑’이라고도 한다.앞 에서도 말했다싶이 이 탑은 당현종 천보 을축년(745년) 에 서주 별가 하남성 소윤조 군의 이상이 기부하여 지은 것으로서 탑 아래에는 3조 승창상이 있다.당나라 대력년 간에는 양주목어사대부 장연상이 조정에 청을 하여 ‘각적’으로 책봉 받았다. 이 탑은 당무종이 불교를 멸 할때 파괴를 받았으며 당현종 대중초년(847년)에 보수,재건되었 고 송명년간에도 여러 차례 보수를 하였다.현재 탑은 모두 7층으로 나뉘며 높이는 9 장, 각 층에는 네 개의 문이 서로 마주하여 있는데 두개는 진짜이고 두개는 가짜 문 이다.각 층은 계단으로 올라 갈 수 있고 각 층의 둘레마다 난간이 있어 난간을 통해 주위의 경치를 둘러 볼 수 있다.탑안에는 명나라 가정 34년 (1555년) 에 료영스님이 다시 공사하면서 세운 비문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탑정상 상륜은 높이가 1.5 장 으로 송건도8년(1172년)에 세워진 것이다.상륜은 9개 절로 나뉘고 밑바닥은 가마를 엎어 놓은 듯하며 위에는 170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서주회녕현 옥주향(지 금의 점산현 매성 일대) 불교신도 황씨와 호종명이 강철을 기부하여 탑을 지은 사연 을 기재한 것이다.탑정상의 상륜은 나무 기둥으로 세운 것인데 탑 상부에 직립하여 있으며 여덟 개의 철 사슬이 탑정상으로부터 팔방으로 드리워져 있고 위에는 방울 이 달려 있어 바람이 불면 딸랑딸랑 소리가 나 여간 듣기 좋은 것이 아니다.
입화탑은 3조 승찬선사가 큰 나무 아래에서 설법 하실 때 합장하시면서 정립하신 모습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탑체는 높이가 3미터이고 불좌는 육각형태이며 탑모양은 원형이고 가운데는 비었다.탑정상은 육각형으로써 두 개 층으로 되었는데 전문가들은 이 탑은 라마탑 스타일로 명나라 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삼고정”은 땅을 기여하여 절을 짓게 한 세 명의 고사를 위하여 세운 것이다.전하는 데 의하면 양무제때 고사 허규, 허점, 허윤 삼형제는 관록을 탐내지 않고 이곳에 은 거하면서 허씨서원을 세우고 자유롭게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나중에 그들은 서원을 보지선사에게 기여하여 사원으로 개조하게 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들을 기념하 기 위하여 비석과 정자를 세웠다.”삼조산마애석각”은 현재 300여폭이 남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오랜 것은 당나라 문학가이신 이고가 남긴 석각이고 다른 하나는 당삼 주측사 이덕수가 남긴 석각이다.송조 석각은 100폭이 남아 있는데 이 중 왕안석, 이사중, 소동파, 황정견 등이 남긴 석각이 가장 유명하고 내용이 직접 삼조사로 된 것은 여섯 폭이다.1981년, 안휘성인민정부는 “산곡유천달애석각”을 성 중점문물보호 단체로 지정하였다. 삼조사 주위에는 명승지가 굉장히 많다.보지선사가 개산하시면서 살던 보공동이 있 는가 하면 보지선사가 석장으로 땅을 짚었던 곳, 석장으로 우물 파낸 석장정, 탁석 천 등이 있다.샘천은 지금도 맑디 맑아 이 물로 천주산의 천무차를 우리면 찻물은 파란 색을 띠고 맛은 향기로워 관광객들이 즐길 수 있는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삼조사 역대의 조사와 유명한 스님들로는: 개산조사 보지(418-514년)스님, 보지 스 님은 남조제양시기 강소 김성인으로서 양무제소연이 사부로 모셨었고 송태종 조광 의가 “도림전각”선사라는 호를 하사하였다.선종 3조 승찬(510년-606년)스님은 북조 및 수나라 변주 진류사람으로서 2조 혜가로부터 도포를 물러 받아 사리 300개 남 기셨는데 당나라 대종 이예로부터 “견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다.그가 저작한 ‘신심 명’은 선종경전으로 불려진다.선종 4조 도신(580-651)은 수당시기 하남 심양사람으 로서 승찬스님의 도포를 물려받고 산곡사에서 16년간 수련하셨고 쌍봉산에서 5조 홍인스님에게 도포를 넘겨주셨다.우두선사 지암은 당나라 초기 강소 곡아사람으로 서 수나라 장령으로 있은 적도 있는데 뛰어난 전적을 가지고 있다.수나라가 멸망한 뒤 출가하여 산곡사에서 20 여 년 수련하였다.천주산스님, 당말 오대시기의 서주인 으로서 청원단지를 받아 삼조사의 주지 스님으로 지냈다.아천철문선사, 송나라 초 기의 촉군서무인으로서 예사원백존속에 20여 년간 있다가 나중에는 남산유일스님 으로부터 깨 달음을 받았고 산곡사 주지 스님으로 수년간 지내셨다.천의회선사지사 원지스님, 송나라 임안인으로서 삼곡사의 주지 스님으로 있었다.성동(?-1597년)은 명나라 황산인, 구화산 도장 주지 스님으로 있다가 완역시기 삼곡사 주지 스님으로 요청을 받았다.중흥조사 지해스님(1615-1683년), 청나라 강녕 고순사람, 순치시기에 사부님을 따라 삼조사에 들어갔고 사부님이 원적하신 뒤 그 뒤를 이어 삼조사 주 지 스님으로 있으면서 삼조사를 크게 진흥시켰다.주지 스님 월해(1895-1969년) 안휘 성 호주인, 항일전쟁 시기에 일본 왜적에게 살해될 뻔한 적이 있으며 삼조사 주지 스님으로 수년간 계셨다.
1981년부터 전후로 근부각개, 항원, 관강 노스님이 삼조사 주지로 계셨고 1988년 관강 스님이 원적하신 뒤 제자인 홍행이 뒤를 이어 지금까지 주지 스님으로 일을 맡아 하신다.1987-1997년의 10 여 년간 삼조사는 선후로 무수한 천불전, 대웅보전, 산문전, 법당, 객당, 오관당, 상빈료, 동서료방, 탑원동료루, 원통문, 해회당 등 불교 건물을 건축하였는데 총 면적은 7천 여 제곱미터에 달하며 총투자금액은 1천1백여 만원에 달한다.또한 선후로 5.5미터 높이에 십여톤 되는 한백옥 석가모니불상, 2.5 미터 높이에 각각 1톤의 무게를 가진 가엽, 아남 한백옥상, 동질의 석가태자, 천수 천안관음, 미륵, 위태, 달마, 혜가, 승찬, 보지 등 각각 300-500여 근에 달하는 조각 상을 조각 혹은 주조하였다.사원 내에는 승려들의 영골묘탑이 29개 있고 여러 비석 조각이 17개 있으며 ‘용장’ 2부를 소장고 있다.오늘의 삼조사는 누각이 화려하고 전 당이 빛나며 조상을 빛내우고 있다.
삼조사 선임 주지 스님 송해법사의 연세는 66세, 안휘성 왕강인으로 1982년에 출가 하여 관강 스님을 사부님으로 모셨었고 중국 법교협회의 이사, 안휘성 정협위원, 점산현정협위원 등 직무를 겸하고 있다.현임 감원위화법사의 연세는 60세, 안휘성 점산인으로 1988년에 출가하여 홍행법사를 사부님으로 모셨으며 현재 안휘성 점산 현 정협위원직을 겸하고 있다.
천주산 삼조사 및 천주산
천주산은 안후이성 안칭시 젠산현에 있는 국가급 풍경명승구로 1,489.8m 산세
가 수려하고 폭포가 많고 400여 마애 비각이 있다
웅장한 화강암과 바위들이 절경으로 왕복산행 시간은 4시간이다



사람얼굴 바위


수억년 흘러 내린 빗물에 의거 바위가 팽겼다
비가 내리면 저런 자리가 폭포로 변한다고한다
추신 : 금번 중국 장강(양자강) 지역 문화 탐사는 더운 날씨지만 보람있는 여행을 무사
히 마무리 지었다
자세한 자료나 설명은 다음카페 "당진지역아동센터후원회" 해외 여행방에 기
록하였다
첫댓글 아이고 편집하느라 수고 많이 했네요.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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