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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일에 순천시 조계산 산행을 갑니다.
순천시는 우리나라 강남(江南)의 원조(元祖)입니다. 본래 “강남 갔다 온 제비”라고 할 때 “강남”은 지금의 상하이 인근으로 “강소성(江蘇省)” “안휘성(安徽省)”“절강성(浙江省)” 등의 3개 성(省)을 말하는데, 이 지역에서도 범위를 좁혀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여긴 소주(蘇州), 항주(杭州)를“소강남(小江南)”이라 합니다. 이를 표현하는 말로서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 항주가 있음 -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전래적으로 순천시를 ‘소강남’으로 호칭해왔는데, 또한 조계산을 소강남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 지역은 드넓은 평야지대와 잘 발달한 개펄, 풍부한 어족자원이 있는 연안, 주변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 등이 있어서, 여타 지역보다 물산이 풍부하고 기후가 온화해서 살기에 좋았었기 때문에 이런 별칭으로 불러왔을 것입니다. 실제로 전국에 흉년이 들어도 순천은 흉년이 드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합니다. 산해진미(山海珍味)가 나는 곳이어서 그런지 순천시는 우리나라 3대 미인의 고장 중 한 곳이기도 합니다.
산행지 도착을 얼마 남겨두고서 있은 ‘인솔대장님’의 산행안내 말미에 앞자리 앉은 분이 산행시간을 “30분” 연장해줄 것을 건의합니다. 아마 사찰을 둘러보고 싶은 모양입니다. 저도 귀가 번쩍 뜨입니다. ‘30분’이 연장되면 차분히 점심식사도 하고 사찰도 둘러볼 수 있겠다 싶어서입니다. 산행대장님이 ‘10분’을 줄여 ‘20분’ 연장으로 하여 모두에게 물으니 반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산행종료시간을 “5시 20분”으로 결정합니다. 이럴 경우에 산행에 이력이 좀 있다 하는 사람의 반대도 있을 법한데 모두 흔쾌히 찬성을 하니 기독교신자인 저도 이 순간은 마음속으로,
“나무관세음보살...”
“모두 성불하소서...”
하는 기분입니다.
차에서 내려서 곧장 식당을 찾는데 저만치에 “장원식당”이라는 간판이 보입니다. 그 “장원”이 “장원(壯元)”을 의미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은 수능일이니 “장원(壯元)”으로 생각하고 식당을 선택을 합니다. 들어가니 할머니 두 분이 장사를 하시는데 ‘뜨거운 물을 줄까요, 찬물을 줄까요.’ 하고 묻습니다. 연세에 비해서 참 ‘센스쟁이’이십니다. 뜨거운 물을 받아서 목을 축이니 장시간의 버스 탑승으로 인한 약간의 피로감이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시간 절약을 위해서 “산채비빔밥”을 시켰습니다. 그런데 기대하지 않았던 반찬이 여럿 나와서 가지 수를 세어보니 ‘10가지’입니다. 된장에 버무린 ‘취나물’도 별미이고 김장김치도 진미입니다. 비쥬얼을 올려봅니다.
오늘 카메라와 캠코더를 가져왔는데 카메라 셔터를 누르니 작동이 안 됩니다. 베터리 방전입니다. 카메라 무게를 줄일까 하여 급히 타고 온 버스가 아직 있는지 보았는데 이미 가고 없습니다. 이럴 때는 현실을 빨리 인정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카메라는 배낭 깊숙이 넣고 저의 시대착오적(?) “폴더폰”으로 사진촬영을 하기로 합니다.
입장권을 구매한 후 산행을 시작합니다. “조계산 도립공원안내도” 옆에 이곳이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임을 알리는 간판이 보입니다.
한동안 올라가니 “순천전통야생차 체험관” 간판이 보입니다. 이곳을 구경하기로 하고 우측으로 난 진입로로 들어갑니다. 예전에도 온 적이 있었으나 문이 닫혀져 있어서 겉모습만 보았는데 오늘은 문을 열었는지 궁금합니다. 멀리서 보니 차량 한 대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니 오늘은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 들어가서 동영상 촬영을 했습니다. 다도(茶道) 체험을 위해서 온 사람들이 있는지 “다식체험실”에서 강의하는 말소리가 새어나옵니다. 이곳을 구경하고 다시 산행을 진행합니다.
선암사의 랜드마크인 보물 400호” 승선교(昇仙橋)“가 보입니다. 사진으로만 승선교를 본 사람은 이곳에 홍교가 하나인 줄 알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홍교는 두 곳이며 타원형의 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래쪽의 조금 작은 홍교 쪽으로 내려가서 잘 알려져 있는 위쪽의 승선교를 올려다보면서 동영상을 촬영하고 이어서 승선교 전체를 봅니다. 승선교에 오르니 보물 위를 걷고 있음에 황송한 기분이 들어서 마음이 겸손해지고 교각의 이름을 해석해보니 제가 마치 신선이 되는 기분이 들어서 이 시간만은 세상잡사에서 초연하고 싶어집니다. 승선교의 전설을 적은 글을 옮깁니다.
- 임진왜란 이후 불에 타서 무너진 선암사를 중건할 때 이 다리를 놓은 것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조선 숙종 24년(1698) 호암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그 기도가 헛되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는데, 이 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다.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세웠다고 한다. -
승선교는 선암사 방문객들의 필수 “포토 스팟”입니다. 오늘도 나중에 온 방문객들이 사진촬영을 위해서 기다리고 있어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고 계속 산행을 진행합니다.
삼인당(三印塘)에 이릅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연못입니다. 절 입구에 연못을 조성한 것은 풍수지리에 기인한 것이라 합니다. 도선국사는 선암사에 무려 35년간 머무르며 주석하였다고 합니다. 선암사를 일견하면 건축물의 기본구성은 도선국사에 의해 완성된 것을 짐직할 수 있습니다. ‘삼인당’에 대한 글을 옮깁니다.
- 삼인당은 긴 알모양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말한다. -
부연하면 "모든 것은 변하여 머무르는 것이 없고(제행무상諸行無常),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제법무아諸法無我), 이를 깨달으면 열반에 들어가게 된다(열반적정悅槃寂靜)“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답니다. 그런데 이 조그만 연못으로 상징적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하니 참으로 대단한 조형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어서 선암사 일주문에 도착합니다. 이 일주문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도 소실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라 합니다. 맞배지붕 건축물인데 외관상의 조형미가 뛰어나고 그 구조를 속속들이 보면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일주문을 통과하니 범종루(梵鐘樓)가 나옵니다. 이곳은 커다란 쇠북이 있는 이층으로 된 건축물입니다. 이어서 “육조고사(六朝古寺)”라고 적힌 현판을 단 “무량수각(無量壽閣)”이 보입니다. “육조고사” 현판의 힘찬 글씨는 구운몽의 저자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인 김익겸의 글씨라고 합니다.
대웅전과 무량수각은 일직선상에 위치합니다. 무량수각을 보고 왼쪽으로 돌아서 대웅전에 뜰에 이릅니다. 대웅전 앞뜰에는 좌우측으로 있는 3층 석탑(보물 제 395호)이 세워져 있는데 갸름한 조형미가 절집의 분위기를 단정하게 하는 인상입니다. 선암사 경내를 둘러보면서 경관을 캠코더에 담습니다. 새봄을 기다리는 400년 수령의 “선암매(仙巖梅, 천연기념물 488호)”도 보고 그 유명한 누워서 자라는 와송(臥松)도 봅니다. 와송을 지나서 있는 연못을 보니 비단잉어 두 마리가 사이좋게 어울리고 있습니다. 캠코더로 촬영을 하며 경내를 한 바퀴 돌면서 전각들을 찬찬히 보고나니 지금까지 선암사를 20여회 방문하면서도 얼마나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보아왔었나를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선암사는 “삼무(三無)의 사찰”이라고 합니다. 첫째, ‘사천왕문’이 없고, 둘째, 대웅전 기둥에 “주련(柱聯)”이 없고, 셋째, 대웅전 정 중앙문인 어간문(御間門)이 없습니다. 또는 대웅전 본전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좌우에서 호위하는 협시보살(脇侍菩薩) 이 없는 것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사천왕문이 없는 것은 선암사 뒷산인 “장군봉”이 있어서 지켜주므로 호법신인 사천왕을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주련은 사찰이나 서원 또는 한옥의 기둥이나 바람벽 등에 장식으로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를 말하는데 선암사 대웅전에는 여느 사찰과 다르게 주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문자를 쓰거나 말을 하면 ‘개구즉착(開口卽錯)“ 즉, 어떠한 미사여구도 본질에서 먼 것이라 하여 주련을 붙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웅전에 어간문이 없는 것은 부처가 아닌 깨달음이 없는 중생은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도록 난간으로 막아놓았다 합니다. 그래서 선암사 대웅전은 한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양쪽 측면에 있는 문으로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협시보살이 없이 석가모니불만 모셔져 있는 이유는, 주존불인 석가모니불이 마왕파순(魔王波旬)의 항복을 받고 깨달음을 이뤄 부처가 되는 순간을 뜻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오른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선암사를 나오면서 일주문을 안쪽에서 보니 현판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저도 오늘 처음 인지했습니다. 들어가서 안쪽에서 나오면서 보면 이 일주문에는 '고청량산 해천사(古淸凉山 海川寺)‘로 적힌 다른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 현판이 조계산의 원래 이름은 청량산이었으며 사찰명도 해천사였다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선암사가 화재가 잦았다고 하는데 풍수지리로 볼 때 선암사의 위치가 산강수약(山强水弱)인 곳이라 산 이름을 청량산(淸凉山)이라 하고 절이름을 해천사(海川寺)라 하여 화기(火氣)를 비보하려 했다고 합니다. 해동 제일의 명당이라고 하는 선암사도 한두 가지 부족함은 있었나봅니다.
선암사에서는 유명한 영화가 여러 편 촬영되었는데 특히 이곳의 비구니가 출연배우로 참여했던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세계 4대 영화제로 꼽히는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배우 강수연씨가 당당히 여우주연상을 받음으로써 한국영화인의 세계영화제에서의 첫 번째 수상이라는 쾌거를 올렸습니다.
선암사를 소개하는 글을 옮깁니다.
조계산 기슭 동쪽에 자리잡은 선암사는 백제 성왕 7년(529년)에 아도화상이 비로암을 짓고, 신라 경문왕1년 도선국사가 선종 9산 중 동리산문 선풍으로 지금의 선암사를 창건하셨다. 반대편 서쪽 산 중턱에는 유명한 승보사찰 송광사가 자리하고 있다. 선암사 주위로는 수령 수 백 년 되는 상수리, 동백, 단풍, 밤나무 등이 울창하고 특히 가을 단풍이 유명하다. 또한, 절 앞에 아치형의 승선교가 있는데 (보물 제400호), 받침대가 자연 암반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며, 중앙부의 용머리가 매우 신비롭다. 대웅전 앞 좌우에 서 있는 삼층석탑도(보물 제 395호) 관광객의 시선을 끈다.
사찰 전통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절의 하나로 보물 7점 외에도 장엄하고 화려한 대웅전, 팔상전, 원통전, 금동향료, 일주문 등 지방 문화재 12점이 있고, 선암사 본찰 왼편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높이 7m, 넓이 2m에 이르는 거대한 바위에 조각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800년 전통을 지닌 자생 다원, 송광사에서 선암사를 잇는 조계산 등산로, 수정 같은 계곡물, 울창한 수목과 가을 단풍이 이곳의 멋을 더해 준다. 또한, 선암사 인근에는 지리산과 백운산과 마찬가지로 고로쇠나무가 자생하고 있어 매년 경칩을 전후하여 약수를 맛볼 수 있다.
* 선암사 칠전선원 *
전남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 선암사에 있는 참선 장소. 태고종의 유일한 총림인 태고총림으로서 강원과 선원에서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있는 종합수도 도량이다. '칠전'이란 선암사에서 가장 위쪽에 있는 일곱 채의 건물군이다. 선암사 뒤편의 야생차밭에 800년이 넘는 자생 차가 군락지가 있다. 차배지에서 생산한 야생차는 화개차를 최상품으로 치지만, 순 자연산 야생차는 선암사 차를 최고로 친다. 선암사 야생차의 특징을 '구수하고 깊은 맛'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차나무가 삼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진 음지에서 자라 찻잎이 연하고 운무와 습한 기후가 깊은 맛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선암사 차를 맛보기란 쉽지 않다. 선암사 차밭은 규모가 크지 않아 수확량도 적고 귀한 대접을 받는다.
-이 글에 한 가지 더합니다. 도선국사 다음에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선암사 전성기 때는 전각이 무려 100여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참으로 오늘날에도 보기 드문 대찰이었던 것입니다. -
선암사를 나와서 남도삼백리길인 천년불심길(千年佛心길)로 접어듭니다. 당초에는 선암사 ⇒ 장군봉 ⇒ 천자암 ⇒ 송광사 ⇒ 감로암 순으로 산행을 하려 했으나 시간상 무리인 것으로 생각되어서 오늘은 장군봉을 가지 않고 쉬운 길을 선택합니다.
조계산 생태체험 야외학습장이 나옵니다.
야외학습장의 왼쪽 편은 울창한 삼나무 숲인데 여타지역의 이런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이 숲이 울창하고 나무의 키가 큽니다. 숲속을 들어가서 한 동안 심호흡을 하고 나와서 큰굴목재로 갑니다. 산길의 우측으로 실개천이 흐르는데 아무도 없는 곳에서 바람소리, 물소리, 새소리에 몸을 맡기니 심신이 치유되는 느낌입니다. 계속 진행하다보니 조그만 아치교가 나오는데 이곳을 지나면 실개천이 있는 위치가 좌측으로 바뀝니다.
조계산 이름 내역 이라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잠시 휴식을 취할 겸 읽어봅니다.
이 안내판을 보니 올 1월에 중국의 조계산을 방문한 기억이 새삼 떠오릅니다. 중국 조계산이 있는 곳은 “양원석(陽元石)” “음원석(陰元石)”으로 유명한 “광동성 사오관시(韶关市 ) ”입니다. 산의 이름을 “조계산”이라고 붙인 내력을 적은 글을 옮겨봅니다.
“조계산”이란 이름은 송광사와 선암사(불교)에 의해서 태어났다. “조계”라 하면 우리나라 불교의 조계종을 떠올리게 되며 고려시대에 신라의 구산선문을 통합한 한 종파라고 말한다.
본디 조계산이란 이름은 중국으로부터 비롯된다. 당나라의 대감선사가 육조를 제수 받고 증표인 황매 법인(노란 매화나무로 새긴 인장)을 받아 허리에 차고 홀로 외로이 황금 지팡이를 짚고 돌아가던 중 영남 소조부(현 광동성 곡강현)의 조씨 마을에 이르렀을 때 쌍계원에 절을 짓고 스님을 모셨더니, 선사께서 감사의 뜻으로 조숙량의 성 “조(曹)”와 쌍계원(송광사 지에는 大溪)의 “계(溪)”를 따서 조계산이라 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순천 조계산은 어떤 경로로 거쳐 ‘조계산’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송광사지’에 의하면 고려 희종 4년(1209년) 어릴 적부터 존경하던 보조국사가 옛 길상사 터에 수선사를 세우고 승풍(僧風) 쇄신운동인 정혜결사를 펼친다는 보고를 받으시고 기뻐하여 “조계산 수선사”라는 편액을 내리고 널리 찬양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조계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1921년 세운 ‘선암사 사적비’에는 고려 고종 때 대각국사가 중창하고 산의 이름을 조계산으로 바꾸고... 라는 기록도 있다.
아무튼 문헌으로 보아 조계산이 되기 이전에는 선암사측 주봉인 장군봉은 청량산, 송광사 측의 효령봉(연산봉)은 송광산 이란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린 것이 사실이며 두 사찰과 산 이름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송광사는 송광산-길상사(신라) ⇒ 송광산-수선사(고려) ⇒ 조계산-송광사(조선), 선암사는 “청량산-해천사” ⇒ 청량산-선암사 ⇒ 조계산-선암사로 시대에 따라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조계”라는 단어는 당시 불교의 으뜸 단어로서 한 종파가 아닌 우리나라 불교 대표사찰의 통합 성산의 이름으로 붙여지는 것이 당연하였을지도 모른다.
- 曹溪山人 樂山 ~~~ - (촬영해온 사진에 글자가 다 보이지 않아 저자를 밝혀 적지 못함)
부연해 봅니다. 중국 사오관시에 있는 조계산 남화선사가 있는 곳은 우리들에게 ‘삼국지’를 통해서 익히 알려진 위나라의 조조(曹操)의 손자가 은거하여 “조씨(曹氏)” 집성촌이 생겨난 곳이라 합니다. 그런데 조조의 현손(玄孫)인 조숙량(曹叔良)이 육조(六祖)대사를 흠모해 보림(寶林)의 옛터인 쌍봉(雙峯) 아래 대계(大溪) 벌에 절을 지어주니 대사가 그 은혜를 못 잊어 조숙량의 성인 '조(曹)'에 쌍봉 대계의 '계(溪)'자를 결합하여 조계산이라 이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 절의 이름이 남화선사(南華禪寺)이고 육조대사 혜능스님의 진신등신불이 봉안되어 있는 곳입니다. 한국불교는 대체로 중국의 남종선(南宗禪)의 조종인 육조대사 혜능스님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다고 보여 집니다. 한국 최대의 불교종파인“조계종” 명칭은 송광사가 위치한 조계산에서 유래했다 하여 붙여진 것이라 합니다. 고려시대 때는 국사(國師), 왕사(王師)의 위상이 수상인 문하시중(門下侍中)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16국사를 배출한 송광사는 고려 말에 나라의 정치경제를 장악하게 되는데, 이 때 고려 전역의 모든 사찰이 송광사의 말사(末寺)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서 한국의 대찰(大刹)은 대부분 조계종 사찰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하다 다시 산행을 진행합니다. 마른 개울에 징검다리처럼 돌이 놓인 곳을 지나면 다시 개울물은 처음처럼 우측에 위치합니다.
산은 점점 깊어져서 적막한데 이따금씩 불어와서 몸을 식혀주는 바람소리, 살가운 새소리,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물소리...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이라는 글귀를 떠올리게 합니다.
“숯가마터” 안내판이 나옵니다. 숯가마터 뒤쪽을 보니 마치 허물어진 돌무지 같은 흔적만 있습니다. 내용을 읽어보니 옛날에는 이 일대에서 숯을 많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굴목재에 도착하니 “큰 굴목재”에 대한 지명의 유래를 적은 안내 간판이 보입니다.
이 때 중년신사 한 분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행을 하는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 산을 오르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분의 산행속도에 맞추기로 하고 먼발치에서 따라갑니다. 두 개의 돌무더기가 나옵니다. 저는 처음 마주친 돌무더기 중간쯤에 조그만 돌맹이를 하나 올려놓았습니다. 오늘은 겸손한 산행을 바라서 높은 곳이나 큰 돌이 아닌 것으로 택했습니다. 이곳에서 중년부부를 만났는데 활달한 여성분이 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저쪽에서 오던데 선생님은 왜 이쪽에서 오십니까.’ 했다. 순간 처음 만난 분이 어떻게 제가 산악회를 통해서 온 것을 아는가 하는 찰라 ‘배낭에 매달린 표찰을 보고 알았다.’고 했습니다. 남편 분은 함께 온 일행이 보리밥집에 갔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라고 알려주었다. 출발 전에 산행대장님이 챙겨준 산악회 표찰이 의외의 쓰임이 있다는 것에 놀라웠습니다.
산행에 속도를 붙입니다.
“천자암 가는길”과 “보리밥집”을 안내하는 소박하게 페인트로 적힌 바위에 도착합니다.
시간 관계상 식사는 하지 않고 보리밥집을 지납니다.
보리밥집을 지나서 한 200여 미터 정도를 가니 큰굴목재에서 만난 중년신사를 다시 마주칩니다. 보리밥집에서 식사를 하고 싶다면서 문을 열었는지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즐거운 산행 되세요’하면서 총총한 걸음으로 보리밥집으로 내려갑니다. 아마 많이 시장했던가 봅니다. 여기서부터는 평지는 뛰고 경사가 있는 곳은 상체를 좌우로 흔들면서 속보로 진행합니다.
‘천자암 1.8km’ 이정표에 이릅니다. 배낭을 다시 고쳐 매고 뛰어갑니다.
‘천자암 0.8km’ 이정표에 다다릅니다. 천자암에 가까이 다다른 거리라서 완보를 하여 갑니다.
천자암이 보이는 길 어귀에 도착하니 이곳에서 송광사까지 거리가 3.5km입니다.
천자암(天子庵)에 들어가서 캠코더로 경내를 촬영합니다. 보고 싶었던 “쌍향수(雙香樹)”는 옛 전설을 간직한 채 겨울에도 푸르디 푸릅니다. 스님 한 분을 마주쳤는데 캠코더에 말소리가 들어갈까 봐서 인사를 건네지 못했습니다. 아는 채 하지 않아서 스님이 서운한 감정을 가지셨을까 염려되어서 나중에 돌아서 나올 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천자암에 대한 기록을 옮깁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산내암자이다. 송광사의 제9세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하였으며, 담당이 금나라 왕자였으므로 천자암이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 뒤 1633년(인조 11) 설묵대사(雪默大師)가 중창하였고, 1730년(영조 6) 자원대사(自願大師)가 중건하였으며, 1740년 지수(指修)·자징(慈澄) 등이 만세루(萬歲樓)를 중건하였다. 1797년(정조 21) 제운(霽雲)·두월(斗月)이 중건, 1893년(고종 30) 구연대사(九淵大師)가 성산각(星山閣)을 신축하였으며, 1924년 기산(綺山)·해은(海隱)이 중수, 1939년 금당화상(錦堂和尙)이 칠성각을 건립하였으며, 1992년에 법당을 지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을 비롯해서 나한전·산신각·법왕루·요사 등이 있다. 암자의 뒤쪽에는 천연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된 쌍향수가 있다. 이 두 그루의 곱향나무에는 창건자인 담당국사와 연관된 전설이 전한다. 보조국사가 금나라 장종(章宗)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하여준 것이 인연이 되어 그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아 데리고 귀국한 뒤, 짚고 온 지팡이들을 암자의 뒤뜰에 꽂아둔 것이 자란 것이라고 전한다. 이 나무는 수령 800년에 높이 12.5m에 이른다. 그러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연대적 차이가 100여년에 이르므로 이 전설을 믿기는 어렵다. 천자암은 대표적인 조계종 참선도량의 하나로서 수행자들의 정진 장소가 되어 있다.
오늘은 수능시험일이니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사제동행 전설이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길을 내려갑니다. “천자암 ⇒ 운구재 ⇒ 송광사”로 이어지는 길을 저는 “천년사제동행길(千年師弟同行길)”이라고 부릅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산우들께서는 처음 듣는 이름일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제가 그렇게 지어서 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송광사로 가기 위해서는 천자암 종각(鐘閣)으로 내려와야 합니다. 이곳부터는 산보하기에 참 좋은 길입니다.
송광사 전성기에는 5000여명의 문도(門徒)가 함께했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송광사는 중세시대에 동서양을 막론해서 세계최대의 인문대학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곳에는 고려와 중국의 로얄패밀리들이 와서 공부를 했기 때문에 ‘중앙관직에서 벼슬살이 좀 한다고 해서 난 채하지 말라’라는 의미로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라.” 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송광사는 귀족사찰로 전통사회에서는 일 년 중 사월초파일 딱 하루만 일반 대중에게 개방했다고 합니다.
“운구재” 안내판에 다다릅니다. 순천시에서 만든 운구재에 대한 기술은 설명내용이 주객 바뀌어 있어서 다른 분의 운구재에 대한 설명 글을 옮깁니다.
순천시는 ‘운구재’의 바른 지명을 찾아서 “인구재(人求峙)”로 표기하는 것이 바른 행정일 것입니다. 인구재에 대한 유래에 ‘호랑이’ 전설을 말하나 제가 보기에는 “인구재”는 송광사와 관련하여 붙인 고개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구재(人求峙)”는 “중생구제(衆生救濟)”의 절집인 송광사와 “사가(私家)”가 있는 마을과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집니다.
인구재를 내려가면서 송광사를 빠르게 둘러보고 “감로암(甘露庵)”으로 직행하기로 작정합니다. 다소 시간이 촉박하나 부지런히 움직이면 될 것 같습니다.
송광사에 가면 ‘수능시험’과 관련하여 기도처로 안내하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감로암(甘露庵)”입니다. 송광사 감로암에 대한 소개 글을 옮겨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산내암자이다. 송광사의 제6세 국사인 충지(冲止)가 창건한 사찰로서, 일찍이 충지가 김해감로사(甘露寺)에서 수행하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 절의 이름을 ‘감로암’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창건 이후의 자세한 역사는 전래되지 않으나, 1775년(영조 51)부터 이듬해까지 묵암최눌(默庵最訥, 1717∼1790)이 주석했다. 1842년(헌종 8)혁암도순(奕庵度莼)·후원(厚源) 등이 공루(拱樓)를 세웠으며, 1879년(고종 16)경원(敬圓)과 재신(裁臣) 등이 중창하였고, 1920년 성봉(性峯)이 별실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6·25 때 모든 건물이 소진되어 폐허화하였던 것을, 1971년 여신도 일심화(一心華)의 시주로 중건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2층 누각형식을 취한 관음전과 원통문, 그리고 2동의 요사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본당 북쪽 평지에 원감국사(圓鑑國師 : 충지)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비가 있다.
송광사 경내의 유일한 비구니 수도처이기도 하다. 지금 송광사 약사전에 봉안된 후불탱화는 18세기 중반 감로암에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원감국사는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원감국사와 바로 아래 아우가 ‘장원급제’를 하였습니다. 원감국사는 19세에 소년등과(少年登科)하여 고위관료로 대일외교(對日外交)에도 활약하였는데 29세에 출가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에는 왕족, 귀족 자제 중에 1인을 출가시키는 관습이 있었는데 출가한 자제들은 종교적으로 또한 ‘인너서클’을 형성하여 귀족사회의 연대를 매개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송광사 16국사의 대부분은 본래 유학(儒學)을 한 관료출신으로서 유학적 교양이 높은 분입니다. 유교적 소양을 가진 분들이 출가한 결과 자연스럽게 불교사상과 유교사상이 결합하게 되었고 이것이 조선의 사상적 근간인 성리학 태동의 토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송광사는 고려시대 선불교의 중심사찰이자 조선시대 성리학의 탯자리입니다. - 퇴계 이황 선생은 소시적에 동자승(童子僧)이었습니다. -
원감국사의 법력이 멀리 중원대륙까지 알려져서 국사를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 황제가 스승으로 청하여 황도(皇都)를 왕림하게 되었던 바, 관련유물이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능견난사(能見難思)”와 “티벳트문 법지(보물 제1376호)”입니다.
오늘 산행을 정리할 생각을 하면서 완보를 하여 내려가는데 송광사 위쪽에 있는 배추밭이 나옵니다.
배추밭을 지나서 대나무 숲을 통과하여 송광사에 도착합니다. 캠코더를 다시 꺼내서 경내를 둘러보면서 촬영을 합니다.
송광사 소개글을 옮깁니다.
송광사는 전라 남도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에 있는 큰 절이다. 신라 말기에 혜린 선사 체징이 작은 암자를 짓고 길상사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다. 고려 명종 때 보조 국사 지눌이 크게 고쳐 지었다. '송광' 이라는 이름은 조계산의 옛 이름인 송광산에서 비롯되었다.
송광(松廣)이란 ‘십팔공(十八公)이 배출되어 불법을 널리 펼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것은 송(松)자를 파자하여 18명의 공으로, 또한 광(廣)자를 불법으로 널리 펼친다(佛法廣布)는 의미로 풀이한 것이다. 하지만 송광사의 유래로 가장 신뢰성이 높은 것은 이 지방 사람들이 이 산을 솔갱이, 솔뫼라 부른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송광사가 승보사찰이라는 점에서 볼 때 ‘송’을 ‘십팔공’으로 보는 파자 전설은 일리가 있다.
그 뒤 이 절에서 16명이나 되는 국사가 나와 승보 사찰로 유명해졌다. 불교도가 존경하고 섬기는 불 · 법 · 승을 삼보라 하는데, 불의 통도사, 법의 해인사, 승의 송광사를 삼보 사찰이라고 한다. 현재 16국사의 영정이 국사전에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빈 터만 남아 있았고, 1842년 큰불이 나서 대웅전과 함께 많은 건물이 타기도 했다. 또 여순사건과 6 ·25 전쟁 등을 겪으며 절 주변의 숲이 못쓰게 되고 대웅전 등이 불타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때마다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렀다. 고려 명종 때 80여 동의 건물이 꽉 들어찬 전국 제일가는 절의 규모를 갖추었으나, 난리를 거치면서 30여 동이 불타 없어져 지금은 50여 동의 건물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제일 큰 절로 남아 있다. 이곳에는 국보인 '목조 삼존 불감', '고려 고종 제서', '국사전'을 비롯하여, 10여 가지의 보물 등 많은 문화재가 있다.
그런데 캠코더를 닫아 끄고서 “감로암”으로 가려하는데 휴대폰 벨소리가 울립니다. 받아보니 ‘산행대장님’입니다. “지금 어딥니까.” 하고 묻습니다. 순간 휴대폰을 괜히 받았나 하는 ‘직감’이 듭니다. ‘송광사’라고 했더니, 산우들 대부분이 산행을 마치고 버스에 탑승해 있으니 ‘5시’에 출발할 수 있도록 내려오라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대세에 호응하자 싶어서 5시까지 내려가겠다고 합니다. 아침에 보았던 “관세음보살”님은 어디로 가고, “감로암” 방문계획은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천천히 내려가며 “청량각(淸凉閣)”을 캠코더에 담으면서 보니 저만치에 노란색 ‘다-산 표찰’을 단 산행객이 보입니다. 조금 기다려서 함께 내려왔는데 이분이 바로 오늘 아침에 산행을 “30분” 연장해달고 했던 분이었습니다.
버스에 도착하여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해보니 4시 59분입니다.
버스에 올라 ‘출발시각’과 관련하여 있었던 일을 생각하니 “아쉬움 半” “우서움 半”입니다.
30분 출발시간을 앞당긴 덕분(?)에 양재역에 도착하니 저녁 8시 30분입니다. 곧장 근처에 있는 김밥집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합니다. 식사를 마치고나니 코로나 19로 인한 식당 영업 제한시각인 저녁 9시입니다. 식당 여사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는 분이 하루 전날 1박 2일로 진도 동석산에 다녀왔다고 합니다. 이따금씩 산악회에서 김밥주문도 받는다고 합니다. 이 식당은 양재역 앞이라서 산행객들이 자주 찾는 곳인가 봅니다.
친절하게 맞아준 식당 여사장님과의 감사인사로 오늘 산행의 대미(大尾)를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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