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 안선모 / 그림 : 신지수
“아함! 잘 잤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던 꾸룩이는 문득 아래쪽을 보았어요.
아랫배가 불룩하게 나왔어요.
“어, 이상하다. 배가 고픈데 왜 배가 불룩 나왔지?”

그때 할머니가 빨갛게 녹슨 펌프 정수리에
마중물 한 바가지를 붓고 있었어요.
“할머니, 힘 좀 내봐, 힘 좀. 나 목 마르단 말이야.”
“오냐, 오냐! 애써 보마.”
펌프질을 몇 번이나 한 끝에
땅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물이 겨우 끌어 올려졌어요.
꾸룩이는 긴 부리를 집어넣어 꾸룩꾸룩 물을 들이켰어요.

“할머니, 밥 언제 줄 거야?
빨리 서둘러.
나 배 고프단 말이야.”
할머니가 눈을 비비며 아궁이에 불을 집어넣고 있는 사이,
꾸룩이는 이 밭 저 밭을 다니며 상추를 뜯어먹었어요.
“꾸룩아, 밥 먹자, 얼른 오렴.”
“에이, 반찬이 이게 뭐야?”
꾸룩이가 상을 흘낏 보며 말했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생선 한 젓가락을 집어 올려
꾸룩이 입에 넣어주었어요.
꾸룩이는 투정도 잘 부리고, 게으르고, 버릇도 없어요.
하지만 할머니는 꾸룩이가 있어서 외롭지 않지요.

“어, 갑자기 배가 아프네.
할머니, 나 배 아파!”
꾸룩이가 뽕나무 밭으로 내려가 납작 엎드렸어요.
앗,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죠?
갑자기 뱃속에서 뭔가가 꾸물꾸물 대더니 커다란 알이
쑥 나오는 게 아니겠어요?
‘이게 뭐지?’
꾸룩이는 덜컥 겁이 났어요.
그런 꾸룩이를 보며 할머니가 기특하다는 듯
등을 쓰다듬어 주며 말했어요.
“이게 바로 알이라는 거다.
옛날옛날에 너도 이 알에서 태어났단다.
이 알을 품어주면 아기가 태어나는 것이야.”
‘이 알을 품으면 아기가 나온다고?’
꾸룩이는 갑자기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어요.

꾸룩이는 자기가 낳은 알을 이리저리 쳐다보았어요.
‘그런데 도대체 이 알을 어떻게 품어야 하지?
이렇게? 아니면 저렇게?’
꾸룩이는 알을 날개 죽지 속에 넣어보기도 하고,
앞가슴에 넣어보기도 하였어요.

“꾸룩아, 밥 먹자.”
저녁때가 되어 할머니가 불렀지만 꾸룩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어요.
알을 잘 품어서 꼭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거든요.

꾸룩이가 목이 말라 물 먹으러 갔다 오니 알이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꾸룩이는 깜짝 놀라 여기저기 알을 찾으러 다녔어요.
“네가 알 가져갔니?”
“내가 뭣 때문에?”
수탉이 볏을 세게 흔들었어요.

“너니?”
“내가 뭣 때문에?”
토끼가 귀를 쫑긋하며 말했어요.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꾸룩이는 알을 낳았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에요.
꾸룩이가 잠깐 자리를 비울 때마다
감쪽같이 알이 없어지곤 하는 거예요.
꾸룩이는 마음속으로 굳게 결심을 했어요.
‘이게 마지막 알이야.
잘 품어서 꼭 아기가 태어나게 할 거야.’
꾸룩이는 며칠 동안 물도 먹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알을 품었어요.
갑갑했지만 꾹 참았어요.

어느 날 아침이었어요.
할머니가 소쿠리를 들고 나오며 말했어요.
“꾸룩아, 장에 갔다 올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어.”
꾸룩이는 순간 보았어요.
소쿠리 안에는 커다란 알이 가득 들어 있었어요.
“이, 이거, 혹시?”
“그래, 맞아. 모두 네가 낳은 알이다.
장에 내다 팔려고 한단다.”
“뭐라고요?
그 동안 내 알을 훔쳐 간 게 바로 할머니였어요?”
“꾸룩아, 내 말 좀 들어봐.
그 알은 말이야, 아무 소용이 없어.
그래서 내가⋯⋯.”

할머니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꾸룩이는 꽥꽥대며 소리소리 질러댔어요.
“그 알 모두 내놓아요. 내 거예요.”
“소용도 없는 알을 왜 달라고 하는 거야?”
할머니가 소쿠리를 등 뒤로 감추며 말했어요.
그 말에 꾸룩이는 화가 났어요.
“뭐라고요? 소용이 없다고요?
그러는 할머니는 알도 못 낳잖아요.
나처럼 알도 못 낳으니까 샘나서 그러는 거죠?”
꾸룩이의 말에 할머니는 말없이 꾸룩이를 쳐다보았어요.
“그 알들 내놓으란 말이에요, 당장!”

“네가 아무리 그래도 이 알은 줄 수가 없어!”
할머니는 재빨리 소쿠리를 머리에 이고 잰 걸음으로 대문을 나갔어요.
그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꾸룩이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어요.

화가 난 꾸룩이는 씩씩대며 할머니의 밭을 죄다 헤쳐 놓았어요.
또 할머니가 아끼는 꽃들도 죄다 꺾어 놓았어요.
그래도 성이 풀리지 않아서 꾸룩이는 소리를 지르며
마당을 왔다 갔다 했어요.

해가 지고 별이 하나 둘 보이는데도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어요.
“치, 누가 걱정할까 봐.
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꾸룩이는 숨겨놓았던 알을 다시 품었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좀 가라앉았어요.
“ 아기가 태어나면 할머니랑 안 놀 거야!
할머니는 없어도 된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꾸룩이는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여태까지 이렇게 오랫동안
혼자 있은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꾸룩이는 알을 마른풀로 살짝 덮어놓고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아무래도 할머니를 찾아나서야 할 것 같았어요.
꾸룩이는 뒤뚱뒤뚱 마을길로 나갔어요.
저 멀리 어두운 길에서 허리가 굽은 그림자 하나가
느릿느릿 걸어오는 게 보였어요.
바로 할머니였어요.
할머니 얼굴을 보자, 꾸룩이는 다짜고짜 소리를 버럭 질렀어요.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거야?
나 혼자 하루 종일 놔두고! 밥도 안 차려주고!”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소쿠리에서 뭔가를 꺼내 땅에 내려놓았어요.
“자, 네 신랑이다.
네 신랑을 데려오느라 이렇게 늦었어.”
깨룩깨룩.
소쿠리에서 나온 작고 볼품없는 하얀 거위가 시끄럽게 울어댔어요.
“혼자서 낳은 알에서는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단다.
하지만 네 신랑이 생겼으니,
내년에는 아기들이 태어날 수 있을 거야.”


작은 거위 깨룩이는 꾸룩이 꽁무니를 졸졸 따라왔어요.
꾸룩이가 화를 내는데도
깨룩이는 아랑곳 하지 않고
졸졸 쫓아왔어요.


연못으로 가면 연못으로 쫓아오고,
고추밭에 가면 고추밭까지 쫓아오고.


뽕나무 밑에 오자 꾸룩이가 귀찮은 듯 말했어요.
“저리 가!
나는 알을 품어야 한단 말이야.”
“아직도 몰라요?
그 알에서는 아기가 태어날 수 없어요.”
“뭐라고!
너도 할머니랑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난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할머니가 장에서 알을 팔아서 나를 사려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누구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
꼬마 신랑 깨룩이는 꾸룩이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어요.
‘난 그것도 모르고⋯⋯.’

꾸룩이는 할머니가 주무시고 있는 안방을 한참동안 바라보았어요.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가 떠올랐어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