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스위스에서 강연을 마친 후 스위스에서 하룻밤 머물렀습니다. 새벽에 눈을 뜨니 밖이 환하게 밝아있었습니다. 날씨마저 좋아 시계를 보지 않으면 새벽인지 모를 풍경이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3시부터 한국과 소통하며 업무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네 한 바퀴를 산책했습니다.
오늘은 천주교의 성자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의 기념일이라 스위스의 일부 주는 공휴일이라고 합니다. 스위스에 살고 있는 전복덕 님의 남편 Doni Serato님이 아펜첼에 있는 에벤알프(Ebenalp)를 소개해준다고 하여 함께 산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아침 6시에 전복덕 님 부부와 아펜첼로 출발했습니다.
스위스 북동쪽 아펜첼의 알프스 에벤알프는 해발 1,640m이며 하이킹으로 인기 있는 산입니다. 매년 2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에벤알프에 도착하니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하이킹 장비를 가지고 에벤알프의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습니다.
에벤알프에 오르니 야생화의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어제 리치몬드 공원에서는 잘 가꾼 정원과 예쁘게 다듬은 아름다운 꽃들을 보았다면 여기는 작지만 소박하고 아름다운 들꽃의 향연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꽃과 고산 식물도 여럿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작고 소박하지만 어제 리치몬드 공원에서 본 꽃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들꽃이었습니다. ‘꽃은 꽃 그대로 아름다울 뿐’이라는 스님의 말씀처럼 하나하나 아름다웠습니다. 사람도 각자 아름다운 꽃들인데 누가 더 예쁘니, 누가 더 잘났니 서로 비교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꽃이 꼭 스스로 존귀한 부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 같았습니다.
스님은 오늘 하이킹 안내를 해준 Doni Serato님에게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정상에서 함께 기념사진 촬영을 했습니다.
정상에 있는 카페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싶었지만 독일행 기차를 타기 위해 서둘러 내려왔습니다. 스님도 공기도 좋고 풍경도 아름다운 곳에서 오랜만에 하이킹을 해서 그런지 발걸음이 더욱 가벼워 보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와서 짐을 싣고 기차를 타기 위해 샤프하우젠으로 출발했습니다. 샤프하우젠 역에서 유럽지구 정토행자 대회를 참석하기 위해 떠나는 이혜경 님을 만났습니다.
독일 쾰른까지 가려면 슈타가르트 행 기차를 타고 가다가 중간에 내려서 다시 쾰른으로 가는 고속 기차를 타야 했습니다. 스님은 이전에 프랑크푸르트행 기차를 타야 하는데 반대 방향의 기차를 타서 한참 가다가 다시 내려서 완행으로 겨우겨우 도착했던 일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슈타가르트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열차 안에서 이혜경 님이 준비해 온 샌드위치와 과일로 점심식사를 하고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단잠에 빠진 사이 어느새 스위스와 독일 국경을 넘어섰습니다. 입출국 심사도 없이 바로 국경을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하루빨리 남북이 통일되어 기차를 타고 유럽까지 가는 꿈을 꾸어 보았습니다.
쾰른(Cologne)은 기원전 38년 로마제국에 의해 세워졌으며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들 중 하나입니다.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에 이어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로 인구는 백만 명 정도입니다. 유명한 라인강과 로마 가톨릭 교회 쾰른 대주교의 소재지인 쾰른 대성당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오후 4시, 쾰른역에 도착하니 유럽지구 정토행자 대회를 위해 미리 와서 준비를 하고 있던 선주 법사님과 유럽지구장 김선희 님이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쾰른 대성당이 바로 눈앞에 있었지만 강연이 바로 5시부터라 바로 강연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쾰른 공대에서 미팅이 있어 잠깐 와본 것 외에는 이 도시를 돌아보거나 강연을 한 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쾰른 대성당을 보니 오래된 건축물의 느낌이 물씬 풍겨났습니다. 오래된 도시 곳곳에 있을 역사박물관과 유적지를 찬찬히 돌아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강연장에 도착하니 뒤셀도르프 총무 최순진 님과 자원봉사자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독일 쾰른에서는 즉문즉설 강연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독일 뒤셀도르프 정토 법회 회원들과 행자 대회에 참여하는 런던, 스위스, 파리, 아일랜드, 베를린 등 유럽 전역의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강연을 준비했습니다.
15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날씨도 궂은데 많이 참석해주셨네요.”
스님은 반갑게 인사를 건넨 뒤 먼저 즉문즉설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주었습니다.
“즉문즉설은 대화를 통해 사물의 전모를 보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통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 통을 위에서만 보고 ‘이 통은 이런데요!’라고 질문하면 제가 아래에서 본 모양을 이야기해줍니다. 그래도 왼쪽에서 보면 이렇다고 이야기하면 오른쪽에서 본 모양을 이야기해줍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누다 보면 통의 전모를 볼 수 있어요. 자기 입장에서만 보는 것을 편견이라고 합니다. 대화를 하다 보면 전모를 볼 수 있습니다. 전모를 보는 것을 통찰력 또는 지혜라고 해요. 전모를 보면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대화를 나누기 전에는 틀림없이 화날 일인데, 전모를 보면 ‘그게 화날 일인가?’ 돌아보게 되고, 분명히 슬펐던 일인데 ‘그게 슬퍼할 일인가?’하고 돌아보게 됩니다. 이렇게 대화를 하다 보면 ‘어? 괴로울 일이 없네?’하고 깨닫게 됩니다. 진실을 보면 그냥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이게 즉문즉설입니다.
인생에는 그 무엇도 답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확률적으로 어느 것이 더 나에게 유리한지 살펴서 선택해나가는 거예요. 여러분의 질문은 대화의 소재일 뿐이라는 겁니다. 여기는 상담해주는 곳이 아니에요. 여러분의 고뇌를 소재로 진리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눈치 보지 말고 솔직하게 질문해보세요.”
이어서 질문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총 5명이 질문했고, 학생들의 질문이 많았습니다. 그중 성이 바뀌었다는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남자가 되었다는 친구,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이런 종류도 있고, 저런 종류도 있고, 이런 빛깔도 있고, 저런 빛깔도 있고요. 생물학적으로 같은 인간 종 안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피그미족 같이 키가 작은 종자도 있고, 북유럽에서처럼 키가 큰 종도 있고, 피부가 검은 종도 있고, 흰 종도 있고요. 언어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자연이라는 것은 다양한 것이 원래의 모습입니다.
인간의 육신도 태어날 때 4종류로 나옵니다. 성기가 남성인 사람, 여성인 사람, 남성 성기도 없고 여성 성기도 없는 사람, 남성과 여성이 다 있는 사람, 이렇게요. 남성이나 여성 성기 하나만 가진 사람이 대다수이고, 성기가 없거나 둘 다 있는 사람은 0.1%도 안 됩니다. 다수인 남성, 여성을 정상이라고 말하고, 소수인 두 종류는 신의 저주라고 부르거나 병신 취급을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 왔습니다. 그런데 자연 속에는 이 4종류의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소수라고 해서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옛날에 잘 몰랐는데, 성애를 기준으로도 4종류가 있다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성애는 어떤 사람에게 성적 호감이 가느냐를 말합니다. 남자이면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이면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이성애입니다. 남자인데 남자를 좋아하거나 여자인데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동성애입니다. 남자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양성애, 남자도 안 좋아하고 여자도 안 좋아하는 무성애, 이렇게 4종류가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양성이거나 무성인 것은 아주 소수인데, 정신적으로 동성애이거나 양성애, 무성애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것이 왜 형성됐는지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안 밝혀졌습니다. 원래 존재가 이런데,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고 여자는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 다수이다 보니까 그것을 정상이라고 하고, 나머지는 비정상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나 양성애의 역사는 이미 3천 년 전부터 역사 기록에 있었습니다. 옛날에는 그 존재를 잘 모르니까 이상한 짓으로만 이해를 했습니다. 성적으로 남자인데 남자를 좋아하는 성애는 ‘이상한 성애’가 아니에요. 이 사람은 호감이 그렇게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이 사회적으로 죄악시되면서 억압이 되어있었습니다. 지금은 ‘우리도 성애를 사실대로 표현하는 것이 좋지 않냐’라고 해서 시작된 게 동성애 고백입니다. 여성이 차별받다가 남성과 여성이 평등해졌고, 천민이라고 차별받다가 계급이 해방되었고, 인종적으로 검다고 차별받다가 인종차별에서 해방되었고, 온갖 것이 해결됐는데도 제일 늦게까지 인간이 편견을 갖고 있는 것이 동성애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이 이것만큼은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특히 종교에서 이를 죄악시까지 했습니다.
왜 동성애가 문제가 될까요? 이성애는 다수이기 때문에 문제를 안 삼습니다. 그런데 이성애도 문제 삼는 집단이 있습니다. 승려나 신부는 이것을 문제 삼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건데도 이 두 집단에서는 이들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인 것처럼 난리를 피웁니다. 문제를 삼으니까 삼아지는 겁니다. 그런데 보통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양성애는 잘 눈에 안 띕니다. 이성애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성애를 갖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 눈에 잘 안 띕니다. 무성애는 결혼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큰 고통인데 눈에 잘 안 띕니다. 성애가 없으니까 이런 사람이 신부나 스님이 되면 가만히 있어도 성인 취급을 받습니다. (모두 웃음)
신부나 승려의 도를 평가할 때 성애를 제어하느냐 안 하느냐를 기준으로 잡다 보니 이런 사람은 저절로 성인이 됩니다. 당나라 측천무후 같은 경우는 고승인지 아닌지를 성애로 평가했습니다. 황궁에 초청해서 목욕을 시키면서 아리따운 10대 처녀가 시중을 들게 합니다. 그때 발기를 하면 파면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고승으로 추앙했습니다. 무성애자이면 저절로 고승의 반열에 오르는 겁니다.
무성애자는 결혼생활을 하면 상대가 굉장히 힘듭니다. 결혼했는데 남자가 무성애자라면, 부인한테 성애를 안 느끼잖아요. 부인이 생각할 때는 다른 여자가 있다고 생각할 거 아니겠어요. 굉장한 오해가 발생합니다. 만약 여성이 무성애자라면 남편이 부인하고 즐거움을 못 느끼는 거예요. 마네킹 하고 껴안는 것과 같으니까요. 결혼생활에서 성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하지만 바깥으로 크게 표현이 안 되는 거예요.
그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밖으로 문제 삼는 것은 동성애예요. 남자가 남자를, 여자가 여자하고 만나니까 눈에 띄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는 존재론적으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으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동성애 자체를 범죄시 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그런데 동성애 결혼을 법적으로 허용할 거냐 말 거냐는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결혼은 생물학적인 결합이 아니라 사회적인 계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를 범죄시 하면 안 되지만, 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거냐 하는 것은 사회가 용인을 해야 됩니다. 사회적 합의이니까요. 특히 자녀 입양을 허용할 거냐 하는 것은 더 큰 과제입니다. 그 아이는 그런 가정에서 자라게 되면, 동성애자의 영향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에 아이에게 선택의 권한이 없잖아요. 동성애를 인정하는 것,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것과 자녀 양육을 허용하는 것은 각각 다른 문제입니다.
부모나 다른 사람들은 육체를 갖고 나의 성별을 규정하지만, 나 자신은 살아가는데 너무 힘든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여자 몸이어서 사람들이 육체를 갖고 나를 여자라고 하지만, 내 마음은 전혀 여자라는 생각이 없고 남자인 경우가 그렇습니다. 여자의 몸을 갖고 있지만 여자애들을 보면 이성으로 좋은 감정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남자다’라고 선언하는 거예요. 그런데 무조건 본인이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인정되는 것은 아니고, 약간의 의학적인 진단이 필요하겠지요. 여자가 ‘나는 남자 할래’ 이러면서 누구나 쉽게 원하는 대로 성을 바꾸면 사회에 혼란이 올 겁니다. 그래서 조금 더 면밀히 조사해서 정말 그렇다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마음은 남자라도 몸은 여자이기 때문에, 남자한테 강제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면 아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전환 수술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용인을 할 거냐 하는 것은 사회적 공감도 필요하지만, 우선 본인이 ‘나는 몸이 어떻게 되었든 남자다’ 이렇게 얘기하면 인정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친구가 평소에 여자로 있을 때부터 행동이나 어떤 면에서 좀 다른 걸 느꼈어요?”
“못 느꼈습니다.”
“그냥 나는 남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는 안 되고 조금 더 의학적으로 조사를 해야 해요. 그렇다 하더라도 본인이 그렇게 얘기하면 우리는 인정을 해줘야 합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성별 표시란에 남자, 여자 두 개의 선택 항목만 있으면 성적인 것을 차별한다고 위법이 됩니다. 어떤 문서를 작성할 때 성별을 적어야 한다면 남자 여자 중에 선택하게 되어 있잖아요. 요즘은 남성, 여성, 기타 3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윤리 도덕이 혼란스러워졌거나 사회가 퇴폐해서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
“알겠습니다.”
“질문자가 지혜로운 자라면, 다른 친구들은 오해하더라도 질문자는 ‘그 사람이 그렇다면 우리는 받아들이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동조한다고 비판도 받겠지만, 오히려 또래 친구들 중에 앞서가는 선지자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 자녀 중에서 이런 자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는 안 그러겠지’ 그러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자녀가 있으면 세상은 못 받아들여도 부모는 그걸 이해해야 되는데, 세상은 이해해도 부모가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동성애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한국에서의 차별 때문에 외국에 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해외 강연 중에 만난 여자 두 명이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어요. 왜 여기 와서 사냐고 물으니까 한국에서는 차별 때문에 도저히 못 살아서 여기로 왔다고 얘기하더라고요. 북유럽 쪽에서는 대부분 동성애가 허용이 되어 있으니까요.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하게 대만에서만 합법적으로 허용이 됐습니다.
저는 동성애가 좋다 나쁘다 이런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애가 어떻든, 신체가 어떻게 생겼든, 피부 빛깔이 어떻든, 이념이 어떻든, 그건 그 사람 개인의 자유이고, 사람은 누구나 다 그걸 선택해서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걸 보장해줘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가 모르는 어떤 것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근본적으로는 ‘모든 존재는 그대로 온전하다’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부모들의 가장 잘못된 인식은 신체장애를 죄의 과보로 생각하는 겁니다. 아이가 지체부자유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애를 낳았나’, ‘하나님이 벌주셨나 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신체장애는 전생에 죄를 짓거나 하나님이 벌을 줘서 생긴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긴 거예요.
신체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열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다만 불편할 뿐입니다. 차별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불편한 것은 개선할 수 있습니다. 팔이 없으면 의수를 해 넣고, 다리가 없으면 의족을 해 넣고요. 앞으로 육안보다 나은 전자 눈이 개발될 수도 있습니다. 육안은 장막 밖을 못 보지만, 전자 눈은 장막 밖을 볼 수도 있고, 육안은 옷 입은 속을 못 보지만 전자 눈은 볼 수 있다면 육안을 빼고 전자 눈을 넣는 사람이 생깁니다.
성형은 원래 상처를 치료하는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미용 기술로 쓰이는 것과 같습니다. 성형은 원래 신체가 훼손됐을 때 복원하는 기술이었잖아요. 그런데 복원하는 기술이 점점 더 좋아지니까 멀쩡한 얼굴을 성형하는 사람이 많아진 겁니다. 만약에 팔이 하나 없어서 의수를 해 넣었는데, 의수가 원래 팔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면 멀쩡한 팔을 자르고 의수를 해 넣을 사람도 생길 겁니다. (모두 웃음)
왜 웃어요. 코 세우고, 턱 깎고, 다 하면서, 그걸 여러분들이 아니라고 얘기하면 안 돼요. 미래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게 될 거예요. 첫째, 유기체적인 인간, 둘째, 반인 반기계, 즉 팔이나 눈이나 신체의 일부를 보강한 사이보그, 셋째, 완전히 인공지능이 탑재된 기계 인간입니다.
요즘 애들은 사람하고 대화하기보다 인공지능 하고 대화를 잘해요. 인공지능에게 뭐 물어보면, ‘나 그거 모르겠다. 연구해서 가르쳐줄게’ 이런 대답까지 나와요. 여러분들은 강아지를 왜 키워요? 강아지는 나한테 따지고 잔소리 안 하니까 예뻐하면서 키울 수 있는 겁니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도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지, 나한테 항의하고 잔소리하지는 않아요. 그래서 집에서 보조 인력으로 쓰기에는 사람보다 훨씬 좋습니다. 어쩌면 친구로 삼기에도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을 더 좋아할 수 있어요.
인간은 인식상의 오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의 관계가 피곤한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짐승을 좋아하잖아요. 사람보다 강아지한테 의지하고 살잖아요. 동물을 사랑해서 생긴 현상이 아니에요. 강아지한테 위로를 받는 거예요. 얼마나 불쌍합니까. 인간이 얼마나 못났으면 강아지한테 위로를 받고 살아요. 이런 현상은 자기 존재의 본래 주어진 모습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 중에 동성애인 자녀가 있으면 놀라지 말고 우선 자세히 확인을 해야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 아이도 행복하게 살 길을 같이 열어나가야 됩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전부 다 자기 욕망으로만 대합니다. ‘남이 알면 어쩌나’ 하는 걱정부터 먼저 하잖아요.”
이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이 1년 남았는데 뚜렷한 목표는 없이 거창한 꿈만 있어요. 저는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도록 기여를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지금 뭘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2년을 함께 산 남편이 저를 기만했습니다. 제 친한 친구의 부인과 저희 남편이 2년 동안 바람이 났습니다. 시누이도 그 여자와 친구가 되어 있고, 시어머님도 제 편이 아닙니다. 남편은 이혼은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요?
친구들 사이에서 소외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서운해지곤 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볼 친구들인데 이런 감정이 들 때마다 제가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편안할 수 있을까요?
깨달음의 장을 하고 화내는 것은 좋아졌지만 출산 후 취직이 잘 안되어서 힘들어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질문자들의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5명 하고 더 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지났네요. 질문자들의 소감을 들어보겠습니다. 깨달았나 못 깨달았나 한마디 들으면 알 수 있어요.” (모두 웃음)
먼저 학생들이 소감을 말했습니다.
“제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말씀 덕분에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제가 즉문즉설은 지식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고 했는데요.”(모두 웃음)
스님의 한 마디에 한바탕 웃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워 괴롭다는 질문자도 소감을 말해주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스님 말씀을 많이 들어서 어떤 말씀을 하실 거란 예상은 했어요. (웃음) 매 순간 현명하게 살겠습니다.”
“그래서 결론은 뭐예요?”
“잘 모르겠어요. 그 남자 없어도 살 수는 있는데, 가끔 연민이 들어요. 그 사람을 너무 잘 알아서 그런 거 같아요.”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못 찾아먹는 것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바보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선택해서 ‘내 권리를 너에게 줄게’ 이렇게 하는 것은 도네이션입니다. 제가 볼 때 여러분들은 도네이션 할 수준이 전혀 안 됩니다. 그러니 우선 자기 것이라도 제대로 찾아먹으세요. 이런 영리함이 먼저 있어야, 그다음에는 위축되지 않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스님이 ‘영리하게 살아라’라고 하는 게 이상하게 들려요? 아니에요. 영리하지 못한 사람을 범부 중생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범부중생은 남도 괴롭히고 자기도 괴롭히는 삶을 삽니다. 영리하게 사는 데에는 네 가지 과정이 필요합니다. 첫째, 남을 괴롭히지는 마라. 둘째, 나도 괴롭지 마라. 셋째, 남에게 도움이 되어라. 넷째, 나도 행복하게 살아라.
우선 첫 번째 단계인 남도 괴롭히지 말고 나도 괴롭지 마라, 이 정도는 해야 안 되겠어요? 부부간에 헤어지더라도 상대가 좀 아쉬워하는 수준의 사람은 되어야지요. 헤어지는 게 속이 시원하다면 내가 잘못 산 겁니다.
‘우리 엄마도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선택하라면 우리 엄마가 괜찮아.’
‘우리 남편과 아내도 문제가 많지만, 그래도 내 수준에서 그만한 인간을 만나기는 쉽지 않아.’
상대가 이렇게 말할 정도의 아내나 남편은 되어야 해요.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요. 무슨 연민 같은 소리 하고 있어요. 감정 낭비하지 말고요.
현실을 중요시해야 돼요. 자기가 자기 현실을 딱 직시해 보세요. ‘흠결이 좀 있지만, 현실에서 선택하라고 하면 이만한 인간이 드물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남편을 지금 딱 받아들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남편이 비록 죄는 지었지만 고맙게 생각합니다. 너무 많이 애를 먹이면 나중에 반발이 생겨요.
애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 잘못했을 때 딱 야단을 치고 그 후로는 잊어줘야 교육 효과가 있습니다. 애들이 잘못했다고 두 번 세 번 너무 야단을 쳐버리면, 나는 시원할지 몰라도 아이는 억울한 심정을 갖게 되어 교육 효과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을 갖고 너무 물고 늘어지면 안 됩니다.
반발이 생기니까 잘못한 사람이 더 큰소리치잖아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이 오히려 성질을 내고 억지소리를 하거든요. 인생을 행복하게 살려면 적절하게 조율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웃음이 넘쳐나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교 학생부터 바람난 남편에 대한 고민까지 스님은 따뜻한 마음으로 지금 그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책 사인회까지 마치고, 다 함께 쾰른에서 열린 첫 강연을 자축하며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내일부터 3일 동안 쾰른 인근 청소년 캠프에서 유럽지구 정토행자 대회가 열립니다. 스님은 강연이 끝나자마자 행자 대회장소로 출발했습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유럽지구 팀장들과 총무님들이 행자 대회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녁식사를 하고 나니 9시가 되었지만 밖은 아직 환했습니다. 스님은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내일부터 3일 동안 유럽지구 정토행자 대회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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