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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금강산 가는 길목! 천혜의 비경 두타연은 어드메뇨?
2024년 11월 고을학교는 <양구고을>
깊어가는 가을, 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금강산 가는 길목에 있으면서 펀치볼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분지가 있는 최전선 접경지역 <양구고을>로 갑니다. 특히 금강산 가는 길, 두타연 계곡은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됐던 천혜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그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합니다. 또한 자연친화적인 아름다운 공원이 파로호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접경지역인 양구 기행에는 꼭 신분증을 지참해야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두타연계곡은 1천 년 전 두타사란 절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으로, 민간인 출입통제선 이북에 위치하여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특히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의 최대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양구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3강은 2024년 11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3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양구읍(양구향교/꽃섬/한반도섬)-방산면(옛가마터/직연폭포/백자박물관)-점심식사겸뒤풀이-금강산가는길안내소(두타연이목정안내소)-두타연-서울의 순입니다.
▲<양구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3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소양강과 만나 북한강이 됩니다.
양구의 지형은 북쪽으로 대우산(1,178m) 가칠봉(1242m)이 휴전선 건너 북한의 창도군 금강군과, 동쪽으로는 대암산(1,304m)이 인제군과, 서쪽으로는 사명산(1,198m) 성주봉(626m)이 화천군과, 남쪽으로는 봉화산(874m) 계명산(763m)이 춘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 계곡을 지나 파로호에 잠기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소양강과 합류하여 북한강이 됩니다. 양구의 남쪽에는 소양호, 서쪽에는 파로호가 있습니다.
양구의 역사는 고구려 요은홀차에서 시작됩니다.
양구(楊口)의 역사는 고구려의 ‘요은홀차’에서 시작하여 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에 양록군이 되었다가 고려 시대에 양구현으로 고쳐 춘주(지금의 춘천)에 예속되었고, 그 후 다시 양구로 고쳐 1106년(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으나 낭천(지금의 화천) 감무가 겸임하여 오다가 1393년(태조 2)에 각각 분리되었습니다. 1404년(태조 13)에 현감을 두게 되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정건’에 의하여 전국이 23부로 개편되어 강원도 춘천부 양구군이 되어 군내면, 상동면, 하동면, 서면, 남면, 북면, 방산면, 해안면, 수입면 등 9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1908년(융희 2)에는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어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7개 면 85개 리로 개편하였습니다. 그 후 1917년 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40년 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되어 1941년 북면을 폐면하여 양구면과 방산면에 각각 분할 편입시켰고 1945년에 38도선이 생김에 따라 남면 일부를 제외하고 전 지역이 북한에 강점되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수복되어 1954년 3월부터 군정을 펴오다가 그 해 11월 17일 민간정부에 이양과 동시에 수입면은 완충지대가 되고 해안면은 인제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안 지역이 다시 양구군 동면으로 편입되면서 해안출장소가 되었고 1979년 5월 1일 양구면의 읍 승격으로 양구읍, 남면, 동면, 방산면의 4개 읍면을 이루었으며 1983년 2월 15일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됨으로써 5개 읍면 76개 리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섬은 파로호 상류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습지로,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국토 정중앙에 떠 있다.Ⓒ양구군
양구는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습니다.
국토의 정중앙점은 양구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3조에 근거한 우리나라 영토의 개념이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인 점을 고려할 때 섬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동서남북 4극 지점을 잡을 수 있는데 2002년의 우리나라의 4극 지점인 독도 동단(동경 131° 52' 20"), 평북 용천군 용천면 마안도 서단(동경 124° 11' 45"),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 남단(북위 33° 06' 40"), 함북 온성군 유포면 북단(북위 43° 00' 35")을 기준으로 한 중앙위선과 중앙경선이 만나는 중앙 지점이 인공위성을 이용한 측정으로 국토정중앙면 도촌리 산48번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양구는 읍치 구역의 유적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양구향교는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어 옛 성현을 모시고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며 비봉산 영봉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향교는 현 비봉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광복과 함께 국토가 양단되어 유교 사상은 침체되었고 향교 유지가 곤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소장된 문서와 문헌들이 불타버렸습니다.
1955년 수복 후 뜻있는 유림들이 귀향하여, 초석과 깨진 그릇 등이 강변 또는 빈터에 널려 있어 애통히 여긴 나머지, 1963년 전 전교인 조순재가 유림들과 협의한 후, 향교 토지를 매각하여 현재의 자리에 대성전, 명륜당을 건립함으로써, 양구향교의 석존을 배향케 되었습니다. 현재도 지역 학생들에게 생활 예절과 한자를 가르치는 등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 제례가 봉행됩니다.
팔효자각은 조선 헌종 때 당시의 양구군 내 효자 8위를 모시기 위하여 양구읍 상리, 지금의 장터 부근에 건립하고 효행을 목판에 상세히 기록하여 후손이 보존 관리해 왔으나 일제 강점기 때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1993년도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당시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회양군 수입면이 양구로 편입되면서 이무엽이라는 효자 한 분이 양구로 옮겨와 팔효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무엽 효자는 현재 평창이씨 문중에서 군량리에 두 평 정도의 각을 지어 따로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팔효자에 대한 효행 기록은 당시 목판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효자각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남아 있는 후손들도 전혀 문헌이나 자료를 소장하지 못하여 지금은 족보와 <양구현지> <양구읍지>에 그 일부만이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는 금강산 가는 길목! 천혜의 비경 두타연은 어드메뇨?
2024년 11월 고을학교는 <양구고을>
깊어가는 가을, 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금강산 가는 길목에 있으면서 펀치볼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분지가 있는 최전선 접경지역 <양구고을>로 갑니다. 특히 금강산 가는 길, 두타연 계곡은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됐던 천혜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그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합니다. 또한 자연친화적인 아름다운 공원이 파로호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접경지역인 양구 기행에는 꼭 신분증을 지참해야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두타연계곡은 1천 년 전 두타사란 절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으로, 민간인 출입통제선 이북에 위치하여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특히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의 최대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양구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3강은 2024년 11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3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양구읍(양구향교/꽃섬/한반도섬)-방산면(옛가마터/직연폭포/백자박물관)-점심식사겸뒤풀이-금강산가는길안내소(두타연이목정안내소)-두타연-서울의 순입니다.
▲<양구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3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소양강과 만나 북한강이 됩니다.
양구의 지형은 북쪽으로 대우산(1,178m) 가칠봉(1242m)이 휴전선 건너 북한의 창도군 금강군과, 동쪽으로는 대암산(1,304m)이 인제군과, 서쪽으로는 사명산(1,198m) 성주봉(626m)이 화천군과, 남쪽으로는 봉화산(874m) 계명산(763m)이 춘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 계곡을 지나 파로호에 잠기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소양강과 합류하여 북한강이 됩니다. 양구의 남쪽에는 소양호, 서쪽에는 파로호가 있습니다.
양구의 역사는 고구려 요은홀차에서 시작됩니다.
양구(楊口)의 역사는 고구려의 ‘요은홀차’에서 시작하여 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에 양록군이 되었다가 고려 시대에 양구현으로 고쳐 춘주(지금의 춘천)에 예속되었고, 그 후 다시 양구로 고쳐 1106년(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으나 낭천(지금의 화천) 감무가 겸임하여 오다가 1393년(태조 2)에 각각 분리되었습니다. 1404년(태조 13)에 현감을 두게 되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정건’에 의하여 전국이 23부로 개편되어 강원도 춘천부 양구군이 되어 군내면, 상동면, 하동면, 서면, 남면, 북면, 방산면, 해안면, 수입면 등 9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1908년(융희 2)에는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어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7개 면 85개 리로 개편하였습니다. 그 후 1917년 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40년 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되어 1941년 북면을 폐면하여 양구면과 방산면에 각각 분할 편입시켰고 1945년에 38도선이 생김에 따라 남면 일부를 제외하고 전 지역이 북한에 강점되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수복되어 1954년 3월부터 군정을 펴오다가 그 해 11월 17일 민간정부에 이양과 동시에 수입면은 완충지대가 되고 해안면은 인제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안 지역이 다시 양구군 동면으로 편입되면서 해안출장소가 되었고 1979년 5월 1일 양구면의 읍 승격으로 양구읍, 남면, 동면, 방산면의 4개 읍면을 이루었으며 1983년 2월 15일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됨으로써 5개 읍면 76개 리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섬은 파로호 상류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습지로,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국토 정중앙에 떠 있다.Ⓒ양구군
양구는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습니다.
국토의 정중앙점은 양구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3조에 근거한 우리나라 영토의 개념이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인 점을 고려할 때 섬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동서남북 4극 지점을 잡을 수 있는데 2002년의 우리나라의 4극 지점인 독도 동단(동경 131° 52' 20"), 평북 용천군 용천면 마안도 서단(동경 124° 11' 45"),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 남단(북위 33° 06' 40"), 함북 온성군 유포면 북단(북위 43° 00' 35")을 기준으로 한 중앙위선과 중앙경선이 만나는 중앙 지점이 인공위성을 이용한 측정으로 국토정중앙면 도촌리 산48번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양구는 읍치 구역의 유적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양구향교는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어 옛 성현을 모시고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며 비봉산 영봉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향교는 현 비봉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광복과 함께 국토가 양단되어 유교 사상은 침체되었고 향교 유지가 곤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소장된 문서와 문헌들이 불타버렸습니다.
1955년 수복 후 뜻있는 유림들이 귀향하여, 초석과 깨진 그릇 등이 강변 또는 빈터에 널려 있어 애통히 여긴 나머지, 1963년 전 전교인 조순재가 유림들과 협의한 후, 향교 토지를 매각하여 현재의 자리에 대성전, 명륜당을 건립함으로써, 양구향교의 석존을 배향케 되었습니다. 현재도 지역 학생들에게 생활 예절과 한자를 가르치는 등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 제례가 봉행됩니다.
팔효자각은 조선 헌종 때 당시의 양구군 내 효자 8위를 모시기 위하여 양구읍 상리, 지금의 장터 부근에 건립하고 효행을 목판에 상세히 기록하여 후손이 보존 관리해 왔으나 일제 강점기 때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1993년도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당시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회양군 수입면이 양구로 편입되면서 이무엽이라는 효자 한 분이 양구로 옮겨와 팔효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무엽 효자는 현재 평창이씨 문중에서 군량리에 두 평 정도의 각을 지어 따로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팔효자에 대한 효행 기록은 당시 목판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효자각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남아 있는 후손들도 전혀 문헌이나 자료를 소장하지 못하여 지금은 족보와 <양구현지> <양구읍지>에 그 일부만이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는 금강산 가는 길목! 천혜의 비경 두타연은 어드메뇨?
2024년 11월 고을학교는 <양구고을>
깊어가는 가을, 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답사전문가)는 금강산 가는 길목에 있으면서 펀치볼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분지가 있는 최전선 접경지역 <양구고을>로 갑니다. 특히 금강산 가는 길, 두타연 계곡은 한국전쟁 이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됐던 천혜의 아름다운 계곡으로 그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합니다. 또한 자연친화적인 아름다운 공원이 파로호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접경지역인 양구 기행에는 꼭 신분증을 지참해야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두타연계곡은 1천 년 전 두타사란 절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된 이름으로, 민간인 출입통제선 이북에 위치하여 오염되지 않은 자연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특히 천연기념물인 열목어의 최대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양구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하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113강은 2024년 11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 출발하니 출발시각 꼭 지켜주세요.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온누리여행사)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13강 여는 모임에 이어,
이날의 답사 코스는 서울-양구읍(양구향교/꽃섬/한반도섬)-방산면(옛가마터/직연폭포/백자박물관)-점심식사겸뒤풀이-금강산가는길안내소(두타연이목정안내소)-두타연-서울의 순입니다.
▲<양구고을> 답사 안내도Ⓒ고을학교
*코로나19와 독감 등 감염병 예방을 위해 참가회원님은 항상 차내·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를 권합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13강 답사지 설명을 듣습니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소양강과 만나 북한강이 됩니다.
양구의 지형은 북쪽으로 대우산(1,178m) 가칠봉(1242m)이 휴전선 건너 북한의 창도군 금강군과, 동쪽으로는 대암산(1,304m)이 인제군과, 서쪽으로는 사명산(1,198m) 성주봉(626m)이 화천군과, 남쪽으로는 봉화산(874m) 계명산(763m)이 춘천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물줄기는 금강산에서 발원한 수입천이 두타연 계곡을 지나 파로호에 잠기고 다시 남쪽으로 흘러 소양강과 합류하여 북한강이 됩니다. 양구의 남쪽에는 소양호, 서쪽에는 파로호가 있습니다.
양구의 역사는 고구려 요은홀차에서 시작됩니다.
양구(楊口)의 역사는 고구려의 ‘요은홀차’에서 시작하여 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에 양록군이 되었다가 고려 시대에 양구현으로 고쳐 춘주(지금의 춘천)에 예속되었고, 그 후 다시 양구로 고쳐 1106년(예종 원년)에 감무를 두었으나 낭천(지금의 화천) 감무가 겸임하여 오다가 1393년(태조 2)에 각각 분리되었습니다. 1404년(태조 13)에 현감을 두게 되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개정건’에 의하여 전국이 23부로 개편되어 강원도 춘천부 양구군이 되어 군내면, 상동면, 하동면, 서면, 남면, 북면, 방산면, 해안면, 수입면 등 9개 면을 관할하였습니다.
1908년(융희 2)에는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어 1914년 3월 1일 ‘지방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7개 면 85개 리로 개편하였습니다. 그 후 1917년 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40년 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되어 1941년 북면을 폐면하여 양구면과 방산면에 각각 분할 편입시켰고 1945년에 38도선이 생김에 따라 남면 일부를 제외하고 전 지역이 북한에 강점되었습니다. 한국전쟁 후 수복되어 1954년 3월부터 군정을 펴오다가 그 해 11월 17일 민간정부에 이양과 동시에 수입면은 완충지대가 되고 해안면은 인제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안 지역이 다시 양구군 동면으로 편입되면서 해안출장소가 되었고 1979년 5월 1일 양구면의 읍 승격으로 양구읍, 남면, 동면, 방산면의 4개 읍면을 이루었으며 1983년 2월 15일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됨으로써 5개 읍면 76개 리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한반도섬은 파로호 상류에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인공습지로, 한반도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국토 정중앙에 떠 있다.Ⓒ양구군
양구는 한반도의 정중앙에 있습니다.
국토의 정중앙점은 양구에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3조에 근거한 우리나라 영토의 개념이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인 점을 고려할 때 섬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동서남북 4극 지점을 잡을 수 있는데 2002년의 우리나라의 4극 지점인 독도 동단(동경 131° 52' 20"), 평북 용천군 용천면 마안도 서단(동경 124° 11' 45"), 제주도 남제주군 마라도 남단(북위 33° 06' 40"), 함북 온성군 유포면 북단(북위 43° 00' 35")을 기준으로 한 중앙위선과 중앙경선이 만나는 중앙 지점이 인공위성을 이용한 측정으로 국토정중앙면 도촌리 산48번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양구는 읍치 구역의 유적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양구향교는 1405년(태종 5)에 창건되어 옛 성현을 모시고 인재를 육성하는 곳이며 비봉산 영봉의 바로 아래에 있습니다. 향교는 현 비봉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나, 광복과 함께 국토가 양단되어 유교 사상은 침체되었고 향교 유지가 곤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전쟁으로 소장된 문서와 문헌들이 불타버렸습니다.
1955년 수복 후 뜻있는 유림들이 귀향하여, 초석과 깨진 그릇 등이 강변 또는 빈터에 널려 있어 애통히 여긴 나머지, 1963년 전 전교인 조순재가 유림들과 협의한 후, 향교 토지를 매각하여 현재의 자리에 대성전, 명륜당을 건립함으로써, 양구향교의 석존을 배향케 되었습니다. 현재도 지역 학생들에게 생활 예절과 한자를 가르치는 등 지역의 교육기관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매년 봄가을에는 석전 제례가 봉행됩니다.
팔효자각은 조선 헌종 때 당시의 양구군 내 효자 8위를 모시기 위하여 양구읍 상리, 지금의 장터 부근에 건립하고 효행을 목판에 상세히 기록하여 후손이 보존 관리해 왔으나 일제 강점기 때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1993년도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당시 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회양군 수입면이 양구로 편입되면서 이무엽이라는 효자 한 분이 양구로 옮겨와 팔효자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이무엽 효자는 현재 평창이씨 문중에서 군량리에 두 평 정도의 각을 지어 따로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팔효자에 대한 효행 기록은 당시 목판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효자각이 소실되어 없어지고 남아 있는 후손들도 전혀 문헌이나 자료를 소장하지 못하여 지금은 족보와 <양구현지> <양구읍지>에 그 일부만이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