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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청천벽력같은 일들 앞에서도 항상 침묵과 기도와 자아성찰에 충실하셨던 성모님!
제가 사는 곳은 워낙 외진 곳이라 밤이 되면 인적이 뚝 끊깁니다. 그러다 보니 야생동물들이 자주 출몰합니다. 밤길을 운전할 때면 늘 전후좌우를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야행성 들짐승들이 차량의 불빛을 보고 갑자기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일을 겪었습니다. 평소 밤길 운전하면서 주로 만나는 친구들은 고라니나 오소리, 너구리나 들고양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친구는 체구가 어마어마한 맷돼지였습니다.
갑작스레 제가 운전하던 차 앞으로 휙 지나갔는데, 적어도 200kg은 족히 되는 것 같았습니다.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더라면 상호 간에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 순간이 마치 영화속에 한 장면처럼 제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 눈앞을 스쳐지나간 초대형 맷돼지의 얼굴 표정이며, 유선형의 몸 형태며, 털색깔이며...저는 그 순간 이게 꿈이냐 생시냐, 했습니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 청천벽력같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일을 자헌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성모님의 한평생은 청천벽력같은 에피소드들의 연속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단 한 번도 겪지 못했을 일을 성모님은 셀 수도 없이 많이 겪으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마리아에게 전해진 수태고지, 그야말로 청천벽력같은 메시지였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호적 등록을 하러 갔을 때, 갑자기 진통이 시작되었는데, 해산할 방 한칸 구하지 못해,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출산했습니다.
깜짝 놀랄 일들은 계속됩니다.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한 일, 아무리 곱씹고 음미해도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 하나하나가 성모님께는 큰 고통이요, 상처요, 슬픔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성모님은 예수님으로부터 기가 막힌 말씀을 듣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었으면 부모 입장에서 벼락같이 화를 낼만한 말씀입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8-50)
뜻밖의 반응에 성모님께서는 속이 많이 상하셨겠지만, 기도하고 인내하시면서, 예수님 말씀에 담긴 진의(眞意)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십니다.
이렇게 성모님의 한 평생은 신비스럽고 심오한 존재, 예수님, 그리고 그분이 던지시는 영적 말씀을 이해하고 헤아리기 위해 끝도 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신 나날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마리아의 부모였던 요아킴과 안나에 대한 언급이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전승을 통해서 두분의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요아킴은 나자렛 출신으로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어머니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의 신심깊은 여인이었습니다. 두 분은 열심한 신앙인이었지만 연세가 들도록 자녀가 없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요아킴은 자녀를 청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40일간 단식하며 기도를 했습니다. 안나 역시 집에 남아서 탄식하며 기도를 바쳤습니다. 두 분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침내 주님께서 응답을 들어주셨습니다.
천사가 안나에게 나타나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아기를 낳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안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광야에서 기도하던 요아킴 역시 안나와 비슷한 환시를 받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요아킴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나는 성문앞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두분은 서로 부둥켜 않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드디어 출산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보니, 결과는?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많이 실망했지만,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아기에게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또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마리아가 세살이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데려가서 그곳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맡겼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마태오 12,46-50
당신의 제단이 당신의 인간관계를 만든다
덴마크의 황량한 바닷가 마을, 회색빛 하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엄격한 율법에 매여 서로를 정죄하고 미워하던 이 척박한 마을에 프랑스 여인 바베트가 찾아옵니다.
그녀는 14년 동안 무보수로 헌신하다가, 어느 날 복권에 당첨되어 1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얻게 됩니다.
모두가 그녀가 돈을 가지고 떠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베트는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그 모든 돈을 쏟아부어 마을 사람들을 위한 단 한 번의 프랑스 정찬을 준비한 것입니다.
그녀가 준비한 최고의 음식과 와인 앞에서, 얼음장 같던 노인들의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미움은 사라지고, 서로 용서하며 하나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재산을 다 써버린 그녀에게 "이제 가난해져서 어떡하냐"고 묻자, 바베트는 이렇게 답합니다.
"아닙니다.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바베트에게는 돈보다 더 중요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술'이라는 제단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돈과 에너지를 그 제단에 봉헌했기에, 사람들에게 환희와 화해를 선물할 수 있었고 그 관계 안에서 천국을 맛보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바베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안방에, 당신의 심장 한가운데에 어떤 제단을 쌓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자신을 바치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는 '돈'이라는 제단을 쌓고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칩니다.
어떤 이는 '성공'이나 '자식', 혹은 '쾌락'이라는 제단에 자신의 에너지를 쏟아붓습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람들을 모으려 합니다.
돈으로 사람을 사고, 외모로 사람을 홀리고, 권력으로 사람을 묶어둡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마르지 않는 샘은 하느님뿐이십니다.
돈, 명예, 육체적 매력, 이 모든 것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동화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보십시오. 나무가 사과와 가지를 줄 수 있을 때 소년은 곁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다 털리고 그루터기만 남았을 때, 소년은 떠나갔습니다.
여러분의 제단 위에 있는 것이 말라버리면, 그것을 보고 모여들었던 사람들도 떠나갑니다.
돈이 떨어지면 돈을 보고 모인 이들이 떠나고, 젊음이 사라지면 육체를 탐했던 이들이
떠납니다.
그런 인간관계에는 '친밀함'이 없습니다.
거래만 있을 뿐입니다.
행복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껍데기뿐인 관계, 그것이 하느님 없는 제단을 쌓은 사람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그렇다면, 떠나지 않는 사람들, 참다운 사랑을 주고받는 '하느님 나라의 공동체'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에 그 답이 있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의 부귀영화나 헛된 우상에게 제단을 내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오직 하느님께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셨습니다.
당신의 몸과 마음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제단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제단 위로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잉태되셨습니다.
성모님은 사람들에게 돈이나 쾌락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그랬기에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수많은 신앙인이 성모님을 어머니라 부르며 그분 곁에 모여듭니다.
성모님의 제단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기에 결코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성가정을 이루고, 친밀한 공동체를 만드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냉정하게 나의 제단을 점검해 봅시다.
나는 오늘 하루, 나의 뜻과 에너지를 어디에 봉헌했습니까?
구약 성경 열왕기에 나오는 사렙타의 과부를 기억하십시오.
그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식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예언자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마지막 한 줌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고 하느님의 사람을 위한 제단에 바쳤습니다.
자신의 생존 본능보다 하느님의 약속을 더 신뢰하며 자신을 봉헌했을 때, 성경은 "주님께서 땅에 비를 다시 내려 주실 때까지,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증언합니다.
여러분의 인간관계는 여러분 안의 제단에 의해 결정됩니다. 나를 위해 쌓은 제단은 고독을 낳지만, 하느님을 위해 봉헌한 제단은 사랑을 낳습니다. 오늘 성모님처럼, 여러분의 의지와 욕망, 그리고 여러분의 가장 소중한 것을 하느님의 제단 위에 올려놓으십시오.
내가 내어놓은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마르지 않는 은총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여러분은 가족과 이웃에게 참된 기쁨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여러분의 곁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히 머물게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12,46-50: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 교회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을 지낸다. 이날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의 전 생애가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삶이었다는 것을 묵상하는 거룩한 날이다.
1. 성모 마리아의 봉헌
전승에 따르면, 성모님의 부모 요아킴과 안나는 세 살 된 어린 마리아를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했다. 어린 마리아가 성전의 계단을 오를 때 발자국마다 장미가 피어났다는 이야기는, 마리아의 삶이 하느님께 드려진 향기로운 제물임을 상징한다. 사실 성모님의 봉헌은 단순한 어린 시절의 한 사건이 아니라, 원죄 없이 잉태되실 때부터 성령의 은총 안에서 준비된 삶의 방향이었다.
2. 복음 말씀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 12,46-50)에서 예수님은 친족 관계를 넘어서는 더 깊은 가족 관계를 선포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시며 제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50절) 이는 피와 혈육이 아닌, 말씀을 실천하는 순종이야말로 참된 친교의 기준임을 보여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가 복된 것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였기 때문이다.”(Sermo 25,7) 즉, 마리아의 참된 위대함은 단순히 예수님을 낳으셨다는 데 있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며 끝까지 실천하셨다는 사실에 있다.
3. 신학적 의미: 마리아와 교회
예수님께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교회 안에서 모든 신자가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가족이 된다는 보편적 초대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마리아는 믿음과 순종으로 새로운 하와가 되어, 온 인류를 위한 구원의 역사에 협력하였다.”(교회 56항) 따라서 성모님의 봉헌은 교회의 모상이며, 우리 신자 각자에게도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여 말씀을 실천하는 삶의 본보기가 된다.
4.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우리도 신앙 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제자매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분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뜻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그리스도의 어머니이다.”(Sermo 72A,7) 즉,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다른 이들의 마음에 주님을 낳게 할 때,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마리아께서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셔서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우리도 말씀을 실천하며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한다.
5. 맺음말
오늘 마리아 자헌 기념일은 우리에게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삶”이야말로 하느님께 봉헌된 참된 길임을 가르쳐 준다. 성모님을 닮아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말씀을 통해 세상 안에 그리스도를 낳는 도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자.
“주님,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가족으로 당신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게 하시며, 특히 마리아의 삶을 본받아 성모님과 같이 사랑이신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는 삶으로 구원을 전하게 해 주소서.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배를 만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칩니다.
2) 기도하게 합니다.
3) 무한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합니다.
정답은 3번입니다. 이는 생텍쥐페리의 말입니다.
“배를 만들게 하고 싶다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무한한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갖게 하라.”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도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배 만드는 것이 즐겁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일로만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바다에 대한 그리움이 있으면 배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도 적극적으로 배를 만들려고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으로 전례를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그리움이 없다면 금세 자기가 하던 것을 멈출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 대한 그리움 없이 친목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대부분 냉담으로 이어지는 것을 자주 봅니다.
주님께 대한 그리움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절로 기도하게 되고, 미사를 비롯한 전례에 집중할 것이며, 성경 공부하는 것도 적극적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그리움에 집중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철저하게 주님 중심이었고, 이는 태어나신 뒤부터 계속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가 늙은 나이에 얻은 귀한 딸을 3세가 되었을 때 예루살렘 성전으로 데려가 하느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그때 어린 성모님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기쁘게 성전 계단을 올랐으며, 그곳에서 하느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셨다고 하지요.
이 봉헌은 ‘자헌’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타의에 의한 봉헌이 아니라 성모님 스스로가 당신 의지로 하느님께 온 존재를 바쳤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 탄생 예고에서 보여 주셨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에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성모님의 이 모범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성모님처럼 주님께 대한 그리움에 집중하는 삶, 사랑에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님 안에서 커다란 기쁨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이다(노자 ‘도덕경’)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11.21.금.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마태 12,49)
자헌은
우리가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께 속한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새로운 관계는
언제나
봉헌입니다.
봉헌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자신 전체를
맡기는 행위입니다.
자신을 내어줄 때
우리는 성장합니다.
내어줌이
성장입니다.
봉헌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맡기는 삶을
깨닫게 됩니다.
봉헌은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봉헌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행하십니다.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모두
하느님과
나누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의미를
우리가 이루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는 것으로
전환했습니다.
봉헌이
새 시대를
엽니다.
봉헌은 비움이고
비움은
내어드림이고
내어드림은
생명의 길입니다.
내어드리는
자헌의 길은
새롭게 태어나는
길입니다.
자헌으로
사랑과 겸손을
살아가는
오늘 되십시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 조용히 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여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이토록 말도 많고
사건도 많은 세상에서
가당키나 하겠습니까?”라며
주님께 고자질을 했습니다.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을 만나는 곳,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묵시 21,22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뵙고
그분의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세상 돌아가는 꼴에
마음이 꺾이고
힘이 빠지는 우리를 향해서
오늘 주님께서 이르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매사를 응원하고 격려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진정,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천국 가족입니다.
이 자긍심으로
성모님처럼 자신을 단장하여 봉헌함으로
하늘나라의 기쁨이 되어 주시길,
간곡히 당부드립니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굿뉴스
즈카2,14-17 마태12,46-50
자헌(自獻)의 기쁨, 자헌의 여정
“마리아 성모님은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루카1,46ㄴ-47)
성모님과 함께 자헌의 기쁨을 노래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아침 찬미가도 아름답고 향기로웠습니다.
"덕스러운 백합화 꽃피는 골짝
즐거움이 가득한 어머니시여
어머니의 전구로 굽어보시어
우리들을 어서와 도와주소서."
성모님께서 원죄없이 잉태되실 때 가득했던 그 성령의 감도로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 내용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2세기 말 이전 이집트에서 씌어진 위경인 <야고보의 원복음>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자녀를 주신다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한대로, 마리아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속에 태어났기에 이미 세 살때에 자기 스스로를 하느님께 바쳤고, 일곱 살 때에 양친이 성전에 봉헌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셨음을 기념하는 날이기에 성모 자헌 축일이라 불렀습니다.
543년 11월21일 오늘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성모 마리아의 봉헌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고 축복한 날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의 기원이 됩니다. 이 축일은 7-8세기경 콘스탄티노플에도 전해졌고, 9세기경 동방교회에서는 이 축일에 관한 다양한 강론이 나왔으며, 이미 남부 이탈리아의 수도원들에서, 14세기경에는 영국에서도 축일을 지냅니다. 1373년 아비뇽에서는 교황에 의해 축일 전례를 거행했으며, 마침내 1472년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전 교회의 축일로 지내게 됩니다. 교황 성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 8항에서 단호히 천명합니다.
“외경적인 요소는 차치하더라도, 탁월하고 모범적인 이 축일은 특히 동방교회에서 기원하여 유서 깊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감사와 기쁨으로 오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자헌 기념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신비롭고 거룩한 축일인지요! 흡사 하루하루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자신을 봉헌하는 자헌 축일 같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성모님의 자헌 축일이자 우리 하나하나 모두의 자헌 축일입니다. 스스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자헌 축일입니다. 그러니 자헌의 감사, 자헌의 겸손, 자헌의 자유, 자헌의 평화, 자헌의 기쁨, 자헌의 행복, 자헌의 아름다움을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어떻게 성모님처럼 자헌의 자녀답게 아름다운 자헌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서 당신을 에워싸고 당신 말씀을 경청하는 제자들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이 거룩한 미사중 당신 제대를 에워싸고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답입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모든 이가 예수님의 참가족이요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할 때 비로소 자헌의 완성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하루하루 날마다 스스로 자신을 봉헌하는 <자헌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날마다 <새롭게>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자헌은 우리 삶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나도 내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즈카르야서가 자헌의 기쁨을 소개합니다. 딸 시온이 상징하는 바 자헌된 성모님이요 날마다 자발적 기쁨으로 이 거룩한 미사중 자신을 봉헌하는 우리들입니다.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을 삶의 공동체의 중심에 모시고 자헌의 감사와 기쁨을 노래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화답송은 바로 우리가 저녁기도때 마다 성모님과 함께 자헌의 기쁨을 노래하며 하느님께 바치는 성모님의 <감사찬미가>입니다. 진정 자기 봉헌의, 자기 비움의 자헌의 삶을 살 때 옛 현자의 말씀처럼 참나의 중화(中和)의 삶일 것입니다.
“마음에는 저마다의 알맞은 자리가 있다. 감정의 자리를 찾을 수 있어야 흔들리지 않게 된다.”<다산>
“희로애락이 생겨나지 않은 평온한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질서에 맞게 감정을 발현하는 것을 ‘화(和)’라고 한다.”<중용>
오늘도 우리 모두 자헌의 평화와 기쁨, 감사의 하루를 살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루카11,28). 아멘.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50)
'예수님의 참가족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12,46-50)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마태12,47)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그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마태12,48)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12,49-50)
오늘은 성모님께서 하느님께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입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모님의 부모인 '요아킴과 안나'는 성모님께서 세 살 되시던 해에 성전에서 하느님께 성모님을 바쳤다고 전해집니다.
하느님께 바쳐진 '하느님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은 '예수님의 첫 제자요 참제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잉태 예고를 순명으로 받아들이신 후,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모범이 되셨고,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모님을 공경하면서 닮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서로를 부를 때 세례명을 붙여서 이렇게 부릅니다. "마태오 형제(님)!" 또는 "사비나 자매(님)!"
그렇게 불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가족'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예수님의 참가족'이 됩시다! 그렇게 우리도 하느님께 나 자신을 봉헌하도록 합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딸 시온아, 즐거워하여라. 내가 이제 가서 머무르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14-17
14 “딸 시온아,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정녕 내가 이제 가서 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15 그날에 많은 민족이 주님과 결합하여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 한가운데에 머무르리라.”
그때에 너는 만군의 주님께서 나를 너에게 보내셨음을 알게 되리라.
16 주님께서는 이 거룩한 땅에서 유다를 당신 몫으로 삼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리라.
17 모든 인간은 주님 앞에서 조용히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의 거룩한 처소에서 일어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6-50
그때에 46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48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49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