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 근대와 인간 주체의 탄생
인간은 이성을 통해 만물에 질서·규칙성 부여… 철저한 계획에 맞춰 세계를 가공하며 자연을 지배하게 돼
기술 발전으로 풍요를 누렸지만 종교는 본래 의미 상실… 근대는 늘 조급하고 경쟁하고 피로한 사회로 변질
‘인간 주체’가 탄생한 ‘근대’에서 자연 만물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은 이성이며, 이성이 가진 원리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다. 세계의 본질은 수학적 질서가 되고, 학문이 갖춰야 할 이상 역시 수적 계산의 ‘정밀성’이 된다.
우리는 ‘인간 주체’라는 표현을 종종 쓴다. 또한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자 등의 표현을 쓰기도 한다. 도대체 ‘주체’가 뭐길래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체’이기를 열망하는 걸까?
‘인간 주체’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세계 속에 담겨있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방향 짓는, 우리가 그 안에 담겨 사는, 요람이란 무엇인가? 바로 ‘근대(modern times)’이다. 근대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우리는 객관적인 연표상에서 근대가 어디인지 궁금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는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에서 근대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영어 ‘모던 타임스’와 프랑스어 ‘텅 모데른’은 1800년경을 중심으로 이전의 3세기를 서술한다.”(이진우 역) 보통 이 시기를 우리는 근대라는 명칭 아래 들여다본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점은 근대란 연표상의 객관적인 어떤 기간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의 ‘태도’라는 점이다. ‘근대(moder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형용사 ‘modernus’는 ‘가까운’이라는 뜻을 지닌다. 가까움이란 지금의 시점에 대해 가까운 것이니, 곧 새롭다는 것을 뜻한다. ‘근대’란 자신의 현재를 새로운 시기로 감지하는 태도인 것이다. 이 점은 근대를 대표하는 저작들의 제목에서부터 표현되고 있다. 예를 들면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의 ‘신기관’과 잠바티스타 비코(1668∼1744)의 ‘새로운 학문’.
구체적으로, 근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헤겔은 ‘정신현상학’(1807)에서 자신의 시대를 다음과 같이 ‘새로운’ 시대로 이해한다. “우리의 시대가 탄생의 시대이며 새로운 시기를 향한 여명기임을 알아차리기란 어렵지 않다. 정신은 지금까지의 일상 세계나 관념 세계에 결별을 고하고 이를 과거의 품속에 묻어버린 채 바야흐로 변혁을 이룩할 찰나에 이르러 있다.”(임석진 역) 혹시 자기 시대를 새로운 시대로 진단하는 헤겔의 저 말이 평범하게 보인다면, 이는 우리가 늘 ‘신상품’ 같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근대적 삶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어느 시대건 새로움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과거 성인들의 경전에서 이상(理想)을 발견하고, 상실한 과거로 끊임없이 회귀하려는 복고적인 노력을 보인 시대들이 더욱 많다. 반대로 근대는 새롭게 되는 것 자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새로운 순간을 계속 갱신해나가는 것, 그것이 근대이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근대인들에게 ‘새롭다’는 것은 과거보다 악화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이 과거보다 발전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비코의 ‘새로운 학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을 수 있다. “오늘날에는 완벽한 인간 문명이 모든 민족에게 널리 퍼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조한욱 역) 한마디로 근대는 자신감의 시대이다. 그것은 과거와 단절한 채 새롭게 발전해 나가는 시대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이 새로움을 이루는 주된 내용, 그리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인간 주체’의 출현이다. 인간 주체가 근대에 출현했다는 것은, 곧 ‘주체’는 애초부터 ‘인간’은 아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주체란 도대체 무엇인가? 주체라는 개념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히포케이메논(Hypokeimenon)’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말은 ‘근거로서 모든 것을 떠받쳐 주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다양한 것들을 근거 지워주는 ‘하나의 원리’로서 자연(피시스)을 이 히포케이메논이라는 개념 아래서 발견하고자 했다. 이 그리스어 개념이 라틴어로 학문하는 시대가 되었을 때 라틴어 단어 subjectum(수브?툼)으로 번역되었고, 이 수브?툼이 오늘날의 서양말에서는 subject(주체)가 된 것이다.
그러니 주체라는 말은 애초에 인간과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주체’를 소유하게 된 것일까? 어떻게 ‘인간 주체’가 탄생하게 된 것일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근대 학문의 본성을 이해해야 한다. 데카르트로부터 형성된 근대 학문의 특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의 한 구절이 있다.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현상들에서 그 질서와 규칙성을 우리는 스스로 집어넣는다.”(백종현 역) 즉 다양한 자연 만물에 규칙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리 ‘이성’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는가?
근대성의 본질을 탐색하는, 하이데거의 ‘세계상의 시대’는 어떻게 인간 이성이 만물의 원리가 되는지 그려 보인다. 이성이 가진 원리들의 기본을 이루는 것은 ‘수(數)’이다. 이성은 수를 가지고 연구 공간을 열어놓고, 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대상으로 파악한다. 즉 수학적·물리학적 질서가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부여되는 것이다. 더불어 학문이 갖추어야 할 이상이 수적 계산의 ‘정밀성’이 된다. 수가 본질적인 것이 됨으로써, 근대는 어떤 시대에도 보지 못했던 정밀함의 시대가 된다. 강물은 수량으로 측정되는 수자원으로, 임야는 생산할 수 있는 목재의 총량으로 계산된다. 자연에 대한 이런 수학적 파악을 바탕으로, 자연을 가공할 수 있는 근대 기술이 탄생한다. 근대 기술은 무엇을 위한 기술인가? 바로 인간에게 유용하기 위한 기술이다.
결국 인간 이성이 자연 안의 모든 대상의 원리(수학과 물리학)를 제공하는 대상 세계의 ‘근거’, 히포케이메논(주체)이 된 것이다. 또 수리 물리학적으로 파악된 대상은 근대 기술을 통해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귀결된다. 세계의 근거와 귀결의 자리 모두에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인간 주체의 등장을 우리는 ‘인간중심주의’라는 말로 불러도 좋겠다. 인간중심주의가 근대의 곳곳에서 목격된다. 예를 들어 근대 종교가 있다. 앞서 우리는 근대에 자연은 수리 물리학적으로 파악되며, 이를 바탕으로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고 했다. 이는 곧 자연으로부터 신들이 떠나갔다는 뜻이다. 이제 숲에 사는 정령도 없고, 산을 지키는 신령도 없다.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는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의 한 장면.
잠깐 애니메이션 ‘모노노케 히메’(2003)를 떠올려보자. 이 작품은 근대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힐 수 있는데, 이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되는 무로마치 시대 철광 개발의 비약적 발전은 자연에 대한 근대적 착취의 상징이다. 철광의 개발과 함께 신성한 동물 신들은 죽임을 당했다. 철광을 개발해 총을 제작하는 인물 에보시의 이런 인상 깊은 대사가 있다. “옛 신들만 사라지면 괴물들도 보통 짐승이 되지…… 풍요로운 국가를 만들 수 있어.” 이제 자연을 지키던 신들은 그저 동물일 뿐이고, 근대의 기술은 자연을 착취해 인간의 풍요를 이룬다. 근대는 부산물로서 재앙신(災殃神)을, 즉 근대의 고질적인 병폐인 환경문제를 낳는다.
사람들은 지금껏, 예컨대 풍어제와 같은 의식을 통해 나날의 생활 속에서 신들을 만나왔다. 신들은 삶의 요람이었다. 그러나 근대에는 풍어제와 같은 것은 그 액면 그대로의 의미는 상실한 채 박물관에 넣어두듯 보존만이 추구되는 전통문화로 파악되며, 더 이상 생활 속에서 신들과 더불어 사는 방식이 아니다. 수와 합리성이 지배한 자연에서는 신이 떠나갔고, 이제 신은 ‘믿음’이나 불신 같은 인간의 ‘심리적 교신 상대’일 뿐이다. 인간 심리가 신이 나타날 수 있는 지평이 된 것이다. 이것이 종교에서의 인간중심주의라 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는 예술의 영역으로도 파고들었다. 바로 ‘미학’이 근대에 등장한 사실이 이를 알려준다. 미학은 고대부터 있어 왔던 예술 철학 일반과 혼동되어서는 안 되는 특수한 의미를 지닌 근대 학문이다. 미학을 뜻하는 aesthetik의 원래 의미는 ‘아이스테시스(aisthesis)’에 관한 학문이다. 그리스 말 아이스테시스란 감각적 지각을 뜻한다. 그러므로 에스테틱이란 감각적 지각을 가능케 하는 인간 마음의 능력인 감성에 관한 학문, 즉 ‘감성론’이다. 그런데 어쩌다 감성론이 미학이 되었을까? 바로 근대는 아름다움의 척도를 인간의 감각하는 능력, 즉 감성에서 찾으려 했기 때문이다. 인식론과 존재론에서 일어난 근대의 혁명이 예술의 영역에서도 일어난 것이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된 이 혁명은 인간 주체의 생각함(코기토)을 모든 지식과 존재의 토대로 만들었다. 미(美)의 영역에서는 미학의 출현과 더불어 인간의 감성이 아름다움의 척도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근대의 여러 영역에서 인간은 주체라는 개념을 소유하게 되었다. 즉 만물의 근거가 되었다. 이렇게 근거가 되는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모든 능력을 통해 세계를 인간의 계획에 맞추어 가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근대 국가란 바로 이 인간 주체의 힘을 실현하기 위한 공동체로서 동서양의 인간들은 경쟁적으로 이 공동체를 이루려고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도련님의 시대’는 ‘혹독한 근대 및 생기 넘치는 메이지인’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런 흥미로운 구절을 읽을 수 있다. “국가를 급조하느라 이 40년 동안 쌓인 피로, 그것도 알겠습니다. 일본은 많은 모순과 대면하며 잰걸음으로 걷고 있지요.”(오주원 역) ‘국가의 급조’와 ‘잰걸음’, 이것이 주체로서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 늘 조급하고, 늘 바쁘고, 늘 경쟁하며, 늘 피로와 자연의 파괴를 끌고 다니는 근대인의 모습이다.
‘인간의 주체 되기’라는 이 프로그램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우리는 지금도 근대인이며, ‘근대’는 곧 ‘현대’를 뜻할 것이다. 반면 인간이 더 이상 주체가 아니라면, 즉 주체로서의 인간이 죽었다면, 우리는 근대라는 인간의 계획을 뒤로 한 채 미지의 시간으로 나아가는 현대인일 것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본문에 언급된 근대철학 작품
근대의 문을 연 철학자 중 한 사람인 베이컨의 ‘신기관’(1622)은 근대의 새로운 과학적 접근 방식을 정립한 책이다. 학문의 방해물인 우상들을 분류하고, 과학의 견인차 역할을 할 귀납법이라는 새로운 논리학을 제시한다. 비코의 ‘새로운 학문’(1725)은 인간의 능동적 활동의 소산으로서 사회와 역사를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은 인간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려는 책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1807)은 정신의 능동적 발전 과정으로서 역사와 그 완성을 다룬다.
첫댓글 너무 어려워요.
쉽게 쉽게,,나는 먹어야 살수있다.고로 존재한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