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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인간혁명 제28권 제3장 혁심(24 -47 )
소년궁 책임자가 방중단 일행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소년궁에서는 방과후에 문예, 체육, 과학기술, 공예, 음악 등을 교육합니다. 현재, 매일1000명 가량이 다니고 있습니다." 신이치 일행을 합창실, 바이올린실, 민속악기실, 하모니카실, 무용실, 탁구실 등으로 안내했다. 교사의 지도에 따라 진지하게 연습하는 아동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합창실에서는 아이들이 홋카이도 민요인 '소란부시'를 일본어로 불러주었다. "야렌 소란 소란…" 신이치가 '하이하이' 하고 추임새를 넣으며 손뼉을 치자 방중단 일행도 따라 쳤다. 단숨에 마음이 한데 어우러졌다. 노래와 악기연주, 무용, 그림, 스포츠, 요리 등의 예술과 예능 그리고 문화는 민족과 이데올로기, 국경을 넘어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악수를 나누는 손이 된다. 합창이 끝나자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셰셰! 셰셰! 참 잘하는군요. 우리 일본인에게 최고의 선물입니다." 일행은 아동들과 탁구도 즐겼다. 아이들은 무술시범도 보였다. 신이치는 방문한 기념으로 팽이, 죽방울, 풍선 등 장난감과 소카(創價)학원 학생들이 전해 달라고 부탁한 그림 등을 선사했다. 아이들은 진심과 우정이 담긴 선물에 눈동자를 반짝이더니 함박 웃으며 기뻐했다. 소년궁 아이들은 답례로 종이오리기 작품, 수묵화, 습지, 판화를 선사했다. "오늘은 정말 감사합니다. 일본어린이들에게 여러분에 대해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크면 꼭 일본에 오십시오" 그리고 다 같이 기념촬영을 했다. 우정의 샘은 대하가 되어 미래로, 자자손손 흐르지 않으면 안 된다. 신이치는 교류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혁심 25] 9월 12일 저녁, 신이치를 비롯한 방중단 일행은 잡기단(雜技團)공연에 초대받았다. 잡기는 곡예 등을 말하는데 상하이 잡기단의 기예는 수준이 높기로 잘 알려져 있다. 여러 개 장대 끝에 접시를 올려놓고 돌리거나 이마 위에 큰 부채를 세우고 춤을 추는 등 난이도가 높은 화려한 연기에 장내는 열광했다. 신이치는 상하이 잡기단도 언젠가 민음(민주음악협회의 약칭)에서 초청해 우호의 상징으로서 일본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이튿날인 13일 오전, 신이치는 소카대학교 창립자로서 푸단대학교를 방문했다. 1975년에 이어 교육교류의 일환으로서 도서를 증정하기 위해서였다. 신이치 일행이 증정식 장소인 물리관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자 학생과 교수들이 큰 박수로 맞았다. 현관에는 중국의 정장인 인민복 차림에 몸집이 작은 쑤부칭 총장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들이 세월의 연륜을 말해 주었다. 초면인데도 다정한 눈빛 때문에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어서 오십시오. 푸단대학교에 잘 오셨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총장이 이렇게 말하고 손을 내밀자 신이치는 “신세를 지겠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하고 말하며 총장의 손을 꼭 잡았다. 쑤 총장은 미분기하학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1919년부터 12년 동안 일본에 유학했다. 도쿄고등공업학교(훗날 도쿄공업대학교)를 졸업한 뒤 도호쿠제국대학교(훗날 도호쿠대학교) 이학부 수학과에 진학해 이학박사학위를 취득한다. 현대 중국 수학계의 기초를 다진 한 사람이다. 이러한 명성 때문에 문화대혁명 때는‘부르주아’ ‘반혁명’이라고 규탄 받았다. 그 폭풍이 겨우 잠잠해지자 이해 1978년에 총장에 취임했다.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는 “진실은 늘 박해를 이겨낸다”고 말했다. 신이치는 중국의 미래는 밝다고 느꼈다.
[혁심 26] 신이치는 쑤 총장이 머지않아 일흔여섯이 된다고 들었다. 그러나 허리가 꼿꼿한 정정한 모습은 그 나이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물리관 회의실에서 도서 증정식을 열었다. 푸단대학교 측은 총장을 비롯해 부총장, 도서관장, 경제학부, 역사학부 교수를 포함한 교직원과 학생대표가 참석했다. 신이치는 증정식 인사말에서 푸단대학교를 다시 방문하게 되어 기쁘다고 말하고 환영해준 관계자에게 사의를 표했다. 또 이번 제4차 방중은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체결되어 미래를 향한 새로운 결의에 불타고 있다고 강조하고 도서증정에 대한 심정을 말했다. “정성을 담아 준비한 자연과학 관련 전문서적 등 1000권을 기증하고자 합니다. ‘4대 현대화’를 목표로 나아가는 중국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중일 교류의 역사를 되돌아보았다. “양국은 전쟁이라는 불행한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절에 사람들의 왕래는 양국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옛날에는 일본에서 파견한 견수사나 견당사가 귀국의 선진문화를 배웠습니다. 가깝게는 20세기에 들어선 뒤에도 귀국의 위대한 지도자인 저우언라이 총리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일본에 유학했습니다. 또 1904년에 센다이의학전문학교(도호쿠대학교의 학부 전신)에서 공부한 루쉰과 해부학 교수인 후지노의 마음 따듯한 교류는 국경을 뛰어넘은 중일의 우정을 상징하는 일화입니다. 쑤 총장도 센다이의 도호쿠대학교에서 공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교육교류는 지금까지 양국의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정을 영원히 이어가려면 대학교류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정치나 외교의 세계에서 중일관계가 흔들려도 학술과 교육면에서 교류가 있으면 중국의 장래를 짊어질 젊은 리더 들과 상호이해를 도모하고 더 강한 우정을 맺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심 27] 신이치는 인사말에서 ‘인류의 평화를 지키는 요새가 되어라’는 바람을 담아 창립한 소카대학교에서 중국에서 온 유학생이 진지하게 면학에 힘쓰고 있다고 말하고, 저우 총리를 기려 ‘저우 벚나무’를 대학교정에 심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4월부터 중국에서 여학생 두 명이 소카대학교에 새로 유학을 왔다고 소개하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러한 착실한 교류로 한 사람 한사람의 마음속에 우정과 신뢰의 유대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미래에 현란한 우정의 꽃을 피우는 원인이 된다고 확신합니다. 지금은 눈에 띄지 않더라도 문화와 교육교류의 길을 꾸준히 걸을 결심입니다. 특히 교육은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분야입니다. 서로 좋은 면을 배우고 뛰어난 부분을 받아들이는 이러한 교육교류의 확대는 앞으로 더욱더 중요해 질것이므로 함께 힘을 합쳐 추진하고자 염원합니다.” 공감의 박수가 일었다. 인사를 끝낸 신이치는 쑤 총장에게 도서 1000권을 기록한 증정목록과 책 일부를 전달했다. 다시 큰 박수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어서 총장이 인사했다. 방중단 일행에게 환영의 뜻을 전하고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여러분이 중일 양국 인민의 우정을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 하신 점을 높이 평가하는 바입니다. 특히 야마모토 선생님이 일관해서 중일평화 우호조약체결을 지지하신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중일평화우호조약 체결’이라는 말을 언급했을 때 기분 탓인지 총장의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다감한 청년시절에 일본에서 생활하고 공부한 사람이다. 전쟁이라는 국가와 국가의 반목과 대립을 넘어 많은 일본인 친구와 우정을 맺어왔을 것이다. 진정한 평화우호는 사람들의 ‘마음의 대지’에 우정의 뿌리가 무수히 뻗어야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혁심 28] 쑤 총장은 중국과 일본의 평화우호조약 체결은 가까운 이웃나라인 양국의 선린우호관계를 자자손손 전해 빛나는 역사를 새로 써갈 것이라는 확신을 말했다. 이어서 도서증정을 언급하고 이번에 받은 도서는 1975년에 기증한 도서 2000여권과 함께 문과와 이과를 망라한 각 학부의 수업이나 과학연구에 더한층 큰 역할을 할 것이라 말하고 이렇게 힘주어 외쳤다. “이러한 중일 양국의 인민이 정성껏 기른 문화교류의 꽃은 반드시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새로운 기점으로 해서 더 풍요로운 우정의 열매를 맺으리라 굳게 믿습니다. 서로 손을 마주잡고 힘을 합쳐 중일평화우호 관계의 새로운 장을 쓰기 위해 함께 분투하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장내는 큰 박수소리에 휩싸였다. 증정식이 끝난 뒤에는 간담회가 이어졌다. 12년 동안 일본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쑤 총장은 유창한 일본어를 섞어 방중단의 질문에 대답했다. 푸단대학교는 전교생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 학생 예닐곱 명이 한방을 쓰며 화기애애하게 서로 배우고 있다고 한다. 학생들의 이야기로는 도서관도 완비되어 있고 방세와 전기세도 무료고 아플 때는 진료도 받을 수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교육환경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의 말에서 나라를 신뢰하고 고마워 한다는 것을 느꼈다. 신이치는 이러한 신뢰가 바로 국가의 중요한 기반이라고 생각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신뢰를 잃으면 건국의 토대는 무너진다. ‘사인방’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시대가 막을 내리자 중국인민은 국가와 중국공산당에 큰 기대를 걸고 신뢰하는 듯했다. 화제가 푸단대학교의 일본어 교육으로 옮겨지고 교수진 등을 소개할 때 총장이 이렇게 말했다. “실은 제 아들도 일본어 교수입니다. 곧 일본에 갈 예정입니다.” “부모 자식 2대가 일본에서 생활하고 중일의 가교가 되는군요. 굉장합니다!” 총장은 신이치의 말에 웃음 지었다.
[혁심 29] 푸단대학교에서 도서 증정식을 마친 신이치 일행은 13일 오후 상하이에서 급행열차를 타고 쑤저우로 갔다. 당초 일행은 상하이에서 우시로 바로 갈 예정이었으나 “하늘에 극락이 있다면 땅에는 쑤저우, 항저우가 있다”고 할 정도로 유명한 강남의 경승지를 안내하려는 중국 측의 배려로 쑤저우에서 하룻밤 묵기로 했다. 열차 안에서 3년 5개월 만에 방문한 상하이의 인상을 서로 이야기했다. 거리에서 파마를 한 여성이 눈에 띄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중국은 점점 바뀌고 있군요. 여성들의 표정에 생기가 넘칩니다. 자유를 얻은 기쁨과 새로운 시대를 짊어지려는 기개가 느껴집니다. 중국은 앞으로 급속도로 발전하지 않을까요.” 이것이 부인부의 소감이었다. 또 신이치는 중일우호협회 쑨핑화 비서장과 바람직한 우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4년 전 중국을 처음 방문했을 때 어떻게 하면 중일우호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겠느냐 에 관해 쑨 비서장과 의견을 교환한 적이 있었다. 그때 쑨 비서장이 루쉰이 쓴 ‘고향’의 한 구절을 인용해 한 말을 신이치는 잊지 못했다. “루쉰은 ‘본디 땅 위에는 길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우호의 길도 그렇게 만들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한걸음 또 한걸음 밟고 지나다닌다, 그것이 쌓여 평화의 대도(大道)가 된다.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때 신이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와 아내도 앞으로 몇 번이고 중국에 오겠습니다. 아니, 우리만이 아니라 젊은 세대도 많이 데리고 오겠습니다. 중일의평화우호와 미래를 위해 함께 길을 엽시다.” 쑨 비서장도 그날의 대화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대로 행동으로 옮겨 훌륭한 길을 만드셨습니다. 고맙습니다.” 두 사람은 또 다시 굳은 악수를 나눴다. 쑤 저우로 가는 차창 밖으로 한가로운 전원풍경이 끝없이 펼쳐졌다. 이기작(二期作)을 했는지 아직 어린 푸른 벼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때마침 물소 등에 올라탄 아이들의 모습도 보였다. 종횡으로 뻗은 수로 위로 흰 돛을 단 작은 배가 물결을 일으키며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신이치를 단장으로 한 방중단 일행은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물의 도시’로 불리는 쑤저우에 도착했다. 상하이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 쑤저우는 ‘정원 도시’로도 유명하다. ‘강남의 정원은 천하제일, 쑤저우의 정원은 강남제일’이라고 할 정도로 예전에는 정원이 20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일행은 중국 4대 정원 중 하나인 졸정원(拙政團)으로 안내를 받았다. 이 정원은 16세기 초 명나라 때 만든 것으로 5만 제곱미터가 넘는 부지에 크고 작은 연못과 수로가 있고 석가산과 회랑, 정자가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당나라 시인 장계가 읊은 ‘풍교야박(楓橋夜泊)’으로 유명한 한산사(寒山寺)를 견학하고 밤에는 정성스럽게 마련한 환영연에 참석했다. 이번 방문은 쑤저우 견학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중국 측의 깊은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가령 이 무렵 중국은 아직 자동차가 많지 않았다. 사람들의 교통수단은 대부분 자전거였다. 그런데도 상하이에서도, 쑤저우에서도 일행의 이동수단은 버스가 아니라 승용차인데다 멤버 한두 사람당 한 대씩 제공했다. 한 멤버가 그러한 사실을 이야기 하자 중일우호협회 쑨핑화 비서장이 힘주어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야마모토 선생님을 비롯해 창가학회 여러분이 어떤 심정으로 중일우호의 흐름을 열어왔는지 또 그것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우리는 잘 알기 때문입니다. 야마모토 선생님이 계셨기에 중일국교정상화가 가능했고 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신의와 은의를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우호와 평화의 꽃밭을 만드는 작업은 ‘신의’를 관철하고 신뢰의 토양을 일구는 일에서 시작된다.
[혁심 31] 9월 14일, 신이치 일행은 자수연구소를 방문해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쑤저우 자수를 만드는 과정을 견학했다. 맨 처음 안내받은 방에는 높이 2미터의 여섯 면으로 된 병풍이 놓여있었다. 매화꽃과 동백꽃, 대나무 그리고 새를 그려 넣은 훌륭한 구도와 화려한 색채에 일행은 시선을 빼앗겼다. 놀랍게도 병풍 뒷면도 같은 문양으로 자수가 새겨져 있었다. 신이치는 정교한 기술에 감탄하며 작업을 보고 있자 담당자가 이렇게 설명했다. “쑤저우 자수는 전통적으로 가내 수공예로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 뒤로는 연구소를 만들어 기술향상과 후계자 육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 결과, 실은 1000종류를 헤아리고 자수기법도 18가지에서 50가지로 늘었습니다. 또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디자인도 획일화 되고 노동을 강조하는 작품이 중심이었는데 지금은 다양한 그림을 수놓고 있습니다. 만리장성 등의 풍경이나 꽃, 새, 물고기, 벌레 종류에도 도전하고 있습니다.” 문화대혁명 시대가 끝나고 자유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자유 없이 인간의 행복은 없다. 그러나 자유를 얻고 행복을 확립하려면 한 사람 한사람이 반드시 자신을 규제하고 향상시켜야 한다. 즉 인간혁명의 철학이 필요해 질 것이다. 신이치는 이것이 앞으로 큰 과제가 되리라 생각했다. 일행은 자수연구소에 이어 쑤저우 시내 북서부에 있는 경승지 ‘후추(虎丘)’를 방문했다. 후추는 2500년 전 춘추시대 오나라 왕인 합려를 묻은 곳으로 사흘 뒤 흰 호랑이가 그 위에 웅크리고 않았다는 전설에서 ‘후추’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30미터 정도 되는 언덕 정상에는 벽돌로 쌓은 후추탑(운암사탑)이 우뚝 솟아 있다. 8각형 7층인 이 탑은 높이가 47.8미터 정도로 961년에 완성했다. 탑은 지반침하로 약3도 가량 기울어져 있어 ‘동양판 피사의 사탑’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혁심 32] 신이치 일행은 후추탑을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한 뒤 탑 아래에 있는 휴게소에서 쑤저우시 관계자와 잠시 간담을 나눴다. 신이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에게 감사의 뜻을 담아 제가 작사한 노래를 발표하겠습니다. 이 노래는 일본의 주고쿠(中國)방면 멤버에게 선사하려고 지었는데 이번에 가사를 일부 수정해 중국어로 번역했습니다. 또 노래제목을 ‘사랑하는 중국(中國)의 노래’로 고쳐 여러분에게 우정의 증표로 선사하겠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중국어로 쓴 가사를 보면서 함께 불러주시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중국어 가사를 나눠 주었다. 일행이 가져온 카세트에서 흐르는 ‘사랑하는 중국의 노래’가락에 맞춰 방중단 통역을 맡은 저우쯔잉이 노래했다. 이어서 쑤저우 사람들 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한번 듣고 부르는 것이라 노래가 막혔다. 그러자 저우쯔잉과 방중단 멤버들이 중국어로 부르며 거들었다. 그 뒤 방중단이 일본어로 열창했다. 환희 넘치는 중국에/ 평화의 출범도 활기차다 아- 붉고 붉게 벗은 불타 벗은 불타/ 뛰어나가자 손에 손잡고
“가사가 참 좋습니다. 중국을 생각하는 야마모토 선생님의 마음을 잘 알겠습니다.” “부르기 쉬운 노래입니다. 벌써 외웠습니다.” 신이치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우리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여러분을 생각할 것입니다. 쑤저우에 우정을 넓힌 것이 큰 수확입니다. 기쁩니다.” 노래는 마음을 하나로 묶는다. 노래에 담긴 환희와 희망, 사랑, 우정 그리고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인류공통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노래는 같은 인간으로서 혼의 공명을 낳는다.
[혁심 33] 9월 14일 오후 3시, 신이치를 비롯한 방중단 일행은 쑤저우에서 열차로 우시로 이동했다. 우시역에 4, 50분 만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중국의 4대 호수 중 하나인 타이후호를 유람하면서 우시시 관계자들과 활기차게 대화하며 우정을 나눴다. 이튿날 15일은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장쑤성 이싱현의 ‘이싱자사공예공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150만 년 전에 생겼다는 종유굴인 ‘산쥐안둥’에도 갔다. 신이치는 가는 곳마다 대화를 나누며 우정의 다리를 놓고 오후 4시 전에 우시에서 열차를 타고 난징으로 갔다. 잠시 뒤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차창을 물들였다. 난징에 도착하기 약 20분 전에 일본인 청년이 신이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창가학회 야마모토 회장님이시지요.” “예, 그렇습니다만‥‥‥.” 청년은 “저는 학회원이 아닙니다만” 하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도쿄에서 해운회사에 다니는데 연수차 중국에 왔다고 한다. 청년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실은 부탁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에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학회 여자부원이 있습니다. 그 분이 오늘 결혼식을 올립니다. 마침 야마모토 선생님을 뵈었기에 기념으로 축하의 말을 꼭 받았으면 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렇습니까. 그것 때문에 일부러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시를 선사하지요.” 청년은 수첩을 내밀었다. 신이치는 바로 시 한편을 적었다. “중국에서/ 두 사람의 행복을/ 기원하는 여행길”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는 청년을 보니 그 여자부원이 직장에서 얼마나 큰 신뢰를 받고 있는지가 느껴져 기뻤다. 신뢰를 넓히는 일이 광선유포를 넓히는 일이 된다. “아무쪼록 결혼하는 친구 분에게 안부 말씀 잘 전해 주십시오.” 신이치는 신랑신부의 영원한 행복과 건승을 바라며 마음속으로 제목을 보냈다.
[혁심 34] 신이치 일행이 탄 열차는 오후 5시 반이 지나서 난징에 도착했다. 난징역에서는 장쑤성 관계자들이 웃는 얼굴로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난징은 장쑤성의 성도로 고대부터 도읍지였다. 중화민국이 성립 했을 때는 임시정부를 세워 국민당 정부의 수도가 되기도 했다. 1937년에는 중일전쟁 때 일본군이 침공해 큰 참화를 입은 역사의 무대였다. 신이치는 수많은 존귀한 생명이 이곳에서 처참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매우 아팠다. 이날 밤, 난징호텔에서 연 환영연에서 신이치는 중일전쟁 때 이곳 난징은 큰 피해를 입어 중국인민이 많이 희생당했다고 언급하고 이렇게 말했다. “창가학회는 평화와 문화를 추진하는 민중단체로 포악한 군국주의 권력의 탄압으로 마키구치(牧口) 초대회장은 옥사하고 도다(巨田) 제2대 회장도 2년 동안 감옥에 갇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귀국의 수많은 인민이 군국주의에 희생되고 우리도 그 난폭한 힘에 탄압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기에 ‘두 번 다시 이러한 군국주의의 유린을 용서하면 안 된다. 인류의 영원한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중일의 평화와 우호에 앞장섰습니다. 우리는 중일전쟁의 희생자에게 진심으로 애도를 표하며, 비참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 훌륭한 도시로 거듭난 난징의 모습을 일본에 전하겠습니다.” 신이치는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한 이때, 중국을 방문해 중일전쟁의 가장 비참한 역사가 각인된 난징의 땅에 선 것에 깊은 의의를 느꼈다. ‘이제부터 중일의 평화행진이 시작된다. 난징을 그 새로운 출발의 기점으로 삼아야 한다. 전쟁의 처참한 역사가 있는 땅이기에 평화와 우호의 일대 거점으로 만들어야 한다.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를 건설하는 힘으로 한다. 그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의 사명이다.’ 난징에 도착한 이튿날인 9월 16일은 아침부터 파란하늘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신이치를 비롯한 방중단 일행은 오전 10시가 넘어 시내에 있는 위화타이(雨花臺) 열사능원에 갔다. 위화타이에는 이런 전설이 있다. 6세기 초, 이 언덕에서 법사가 경문을 독송하자 하늘에서 꽃이 비처럼 떨어졌다. 그래서 위화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들의 푸른 잎사귀가 쏟아지는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위화타이라는 아름다운 이름과는 반대로 이곳은 난징의 국민당 정부에 맞서 신중국 건설에 목숨을 건 수많은 열사가 처형당한 땅이다. 능원 책임자는 처참한 위화타이의 역사를 일행에게 설명했다. “1949년에 신중국을 건국할 때까지 처형당한 열사는 10만 명이 넘습니다. 더욱이 1937년에는 일본군이 난징을 침공해 많은 희생자를 낸 처참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거리도 불탔습니다. 중화인민에게 위화타이는 사람들의 피로 물든 잊지 못할 땅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 군국주의자들이 한 짓으로 일본인민은 관계없습니다. 물론 중국은 큰 희생을 치렀지만 일본인민도 이 전쟁으로 큰 비극을 맛보았습니다. 중일 양국 사이에는 전쟁이라는 불행한 시기가 있었지만 2000년이 넘는 중일문화교류의 역사에서 보면 그것은 짧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양국이 평화우호조약을 조인한 뒤에 더욱 신뢰를 돈독히 하려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세세손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책임자는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신이치는 마음속 깊이 이렇게 생각했다. ‘이러한 역사를 절대 외면하지 말고, 지금 바로 만대에 걸친 중일의 평화와 우호의 길을 열어야 한다. 그것이 가여운 희생자를 추도하는 일이고 순국한 분들에게 보답하는 길이다.’
위화타이 열사능원에서 야마모토 신이치 일행은 순국기념비에 헌화했다. 빨강과 분홍색 장미꽃으로 장식한 화환을 든 방중단 멤버 두 사람을 선두로 신이치 일행은 돌바닥을 걸어 기념비 앞으로 갔다. 기념비에는 마오쩌둥이 쓴 '사난열사만세(死難烈士萬歲)'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앞에 화환을 놓았다, 일행은 존귀한 목숨을 바친 열사들을 비롯해 중일전쟁으로 희생된 모든 사람의 명복을 빌며 창제했다. 낭랑한 창제소리가 난징의 땅과 밝게 갠 하늘에 울려 퍼졌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창제하는 일행을 멀찍이 에워싸고 바라보았다. 신이치는 창제를 끝내자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니하오!(안녕하세요!)"하고 웃으며 인사했다. 그러자 다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눈동자를 빛내며 "니하오!"하고 대답했다. 일본인이 난징을 찾아와 열사비 앞에서 합장하고 창제하는 모습에 깊이 감명한 듯했다. 신이치 일행이 손을 내밀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반갑게 악수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고 명복을 비는 마음에 국경은 없다, 기원하는 마음은 인간을 하나로 묶는다. 일행을 안내한 장쑤성 관계자가 "창가학회 야마모토 회장을 단장으로 하는 방중단 멤버들입니다. 야마모토 선생님은 중일우호의 다리를 놓은 분입니다."하고 소개했다. 빙 둘러선 채로 온화한 분위기에서 간담을 나눴다. 신이치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열사를 비롯해 전쟁으로 희생당한 모든 분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또 난징 여러분이 영원히 행복하시길 기원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전쟁으로 가족과 친척을 잃은 분도 계시겠지요. 저도 가장 좋아 하는 큰형을 잃었습니다. 전쟁은 비참합니다. 잔혹합니다. 전쟁 따위 절대 일으키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중일 양국의 평화와 우호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결심입니다."
[혁심 37] 위화타이 열사능원에 있던 사람들이 평화건설을 향한 신이치의 각오를 듣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치는 이어서 말했다. "저는 어머니가 전쟁에서 큰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탄에 빠져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껴 우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같은 아픔을 겪었을 여러분의 괴로움과 슬픔도 잘 압니다. 그래서 저는 평화를 위해 살자고 결심했습니다. 일본과 중국 사이에 무너지지 않는 우호의 다리를 놓겠다고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번에 난징을 방문해 여러분을 만나 새로운 벗이 생겼습니다. 우호의 다리는 더욱더 넓혀졌습니다. 영원한 평화의 무지개다리를 함께 놓읍시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중국어로 "옳소, 맞는 말이다"하고 말하며 감동한 얼굴로 다시 신이치에게 악수를 청했다. 열사능원을 뒤로한 일행은 난징시의 북서부에 있는 난징창장대교를 시찰했다. 창장(長江)은 양쯔강을 말하는데 창장대교는 중국 동부를 남북으로 잇는 대동맥이다. 일행이 현지에 도착하자 300분의 1 크기로 만든 모형 앞에서 담당자가 자세히 설명했다. 담당자는 스무살 전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창장대교 건설은 1960년부터 1968년까지 햇수로 9년이 걸렀습니다. 다리 윗부분은 도로이고 아랫부분은 철도인 2층 구조입니다. 철도다리 길이는 6772미터이고 도로다리 길이는 4589미터 폭은 19.5미터입니다, 이 다리는 중국인민의 손으로 설계해 중국인민의 기술로 세웠습니다." 중소대립으로 당초 예정된 소련의 원조를 받지 못했지만,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훌륭히 완성했다고 한다. 신이치는 가슴을 펴고 발랄하게 설명하는 담당자의 모습에서 미래의 희망을 느꼈다. 왜냐하면 국가도 단체도 청년이 자신감과 자부심에 넘쳐 즐겁게 전진하는 곳은 번영하고 발전하기 때문이다.
[혁심 38] 16일 오후, 방중단 일행은 메이위앤틴춘(梅園新村)기념관을 방문했다. 이곳은 1946년 5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이 화평 교섭할 때 저우언라이 등이 사무소와 숙소로 이용한 장소다. 중국은 1937년에 제2차 국공합작을 통해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고 일본과 싸운다. 1945년,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고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중국은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국공 양당의 대립은 점점 격렬해졌다. 미국은 내전을 피해 중국이 연합정부를 수립할 수 있도록 양당사이에서 중개역할을 했다, 8월 말에 공산당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이 국민당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가 장제스와 화해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 결과 정전협정을 맺고 정치협상회의를 열자 평화의 흐름이 만들어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 뒤 분규가 발생해 사태는 어려워진다, 1946년 5월, 국민당은 정부를 충칭에서 난징으로 옮긴다. 그리고 공산당은 난징의 총통부와 가까운 이곳 메이위앤틴춘에 사무소를 마련하고 저우언라이가 국민당을 상대로 절충에 나섰다. 아내인 덩잉차오도 이곳에 거주하며 평화의 길을 열고자 사력을 다해 노력했다. 덩잉차오는 이때 정치협상회의의 중국공산당 대표 7명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기념관은 책상과 소파, 침대, 서적 등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었다. 전시품들 사이에 붉은 돌이 여러 개 놓여있었다. 이 돌은 위화타이에서 희생된 순국자들의 피가 묻은 돌이라고 한다. 부부가 고된 업무 속에서 틈틈이 위화타이를 찾아가 주워온 것이다, 동지들에게 이 돌을 보이며 존귀한 목숨을 바친 선인들의 혼을 계승해 새로운 중국을 구축하자고 외쳤다. 순난(殉難)을 두려워하지 않는 감투정신과 행동이 있어야 개혁을 해 낼 수 있다. 평화를 건설하는 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고매한 이상을 외쳐도 그것을 이루려는 강인한 의지와 구체적인 실천이 없다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신이치는 메이위앤틴춘기념관을 둘러보며 미네코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정말로 위대한 지도자셨다. 이번에는 베이징에서 부인인 덩잉차오 여사를 만날 수 있겠군. 기대가 되오. 덩 여사는 저우 총리와 함께 신중국 건설에 인생을 바치셨지. 사람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민의 어머니'로서 지금도 저우 총리의 유지를 이어 인민의 행복을 위해 분투하시는 분이오," 여사의 생애는 그야말로 질풍노도이고 간난신고였다. 덩잉차오는 1904년에 중국 광시성 난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덩팅충은 지방 관리였는데 신장으로 유배되어 덩잉차오가 유년기에 세상을 떠난다. 중국의학을 공부한 어머니 양쩐더가 광저우, 상하이 톈진 등을 전전하며 홀로 딸을 키웠다. 성적이 우수한 덩잉차오는 겨우 열두살 때 톈진의 직례제일여자사범학교 본과에 진학한다. 그리고 1919년 열다섯살 때 '5•4운동'에 참가한다. 그것은 독일이 가지고 있던 산둥성에 대한 권익 등이 중국에 반환되지 않고 일본에 양도된 것에 분노한 학생들이 일본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베이징 정부에 대항해 일으킨 시위운동으로 비롯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운동이다. 덩잉차오는 톈진에서 베이징 학생들을 지원하자고 외치고 톈진여계애국동지회에 가담해 강연대장을 맡는다. 중국인민을 차별하고 학대하는 열강의 무도한 행태를 간과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저우언라이와 만난다. 저우언라이는 남학생으로 조직된 톈진학생연합회에 들어가 운동에 정열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톈진학생연합과 톈진여계애국동지회가 합쳐지면서 중핵의 멤버로 '각오사(覺悟社)'를 결성한다. 여기서 말하는 '각오'는 '깨달아 각성한다'는 의미다. 젊은 시절을 어떻게 사느냐가 일생을 결정한다. 사람들의 행복을 실현한다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살아갈 때 청춘은 가장 고귀한 빛을 발한다.
[혁심 40] 저우언라이는 '각오사'결성에 즈음해서 '각오사선언'의 초안을 작성한다. 그 초안에는 '혁심(革心)'과 '혁신'의 정신을 근본으로 운동을 추진한다고 씌어 있다. 사회를 '혁신'하려면 '혁심'즉 마음을 반드시 바꿔야 한다. 거기에 젊은 저우언라이의 혜안이 있었다.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다만 마음만이 중요하니라"(어서1192쪽)하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모든 일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늘 연마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회개혁을 이루고 아무리 우수한 제도를 마련해도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인간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을 개혁하지 않으면 제도는 형식만 남아 악용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도, 사람들이 행복을 향유할 수도 없다. 개혁의 이상(理想)은 권력을 잡은 사람의 '욕망의 파도'에 휩쓸려 죽은 해초처럼 사리지고 만다. 자신을 바라보고 바로 잡아야 한다. 즉 '혁심'없이는 진정한 사회개혁도 없다. '각오사'의 청년들은 자신을 개혁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선구적인 지식인 등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어 탐닉하듯 열심히 배우고 다양한 주제를 정해 연구에도 도전했다. 덩잉차오는 가정개혁을 연구했다. '각오사'는 회보<각오>를 창간한다. 정부가 눈을 번득이며 감시하던 시절이었다. 멤버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번호로 지은 가명을 쓰기로 했다. 덩잉차오는 회보에 '이(壹)'라는 필명으로 '왜‥‥‥?'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학생의 사상, 삶의 자세에 날카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왜, 남을 경멸하는가?' '왜, 남을 질투하는가?' '왜, 나쁜 습관에 물드는가?' '왜, 무익한 책이나 잡지를 볼 필요가 있는가?'등 학생들의 고매한 주장과 현실 속 생각이나 행동의 괴리, 모순을 신랄하게 짚어냈다.
군대와 경찰이 점점 더 격렬하게 탄압했다. 동지가 부당하게 체포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그것에 항의하러 간 저우언라이도 체포되었다. 학생들은 경찰 책임자를 엄중히 처분하도록 요구하고 수업을 거부하며 저항했다.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학생들은 감옥 에서도 단식투쟁 등을 하며 계속해서 싸웠다. 덩잉차오는 학생 20여명과 함께 이불을 들고 경찰서로가 연좌농성을 벌였다. 구금한 동지를 즉시 석방하고 우리를 대신 가두라고 외쳤다. 경찰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론은 용감한 여학생들의 항의를 지지했다. 결국 경찰은 저우언라이와 학생들을 석방했다. 자신이 대신 감옥에 가겠다며 석방을 요구한 덩잉차오의 행동은 동지의 신뢰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기주의에 치우치면 상호 불신을 부채질하게 되지만 동지를 위하는 용감한 투쟁은 단결의 유대를 두텁고 강하게 만든다. 1920년 여름 덩잉차오는 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베이징의 초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한다. 아직 열여섯살의 어린 교사였다. 또 저우언라이는 '각오사'의 두 멤버와 함께 프랑스로 유학을 간다. 유학이라고 해도 일하면서 공부하는 '근공검학(勤工儉學)'으로 근대지식을 폭넓게 익혀 새로운 사회건설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일하면서 공부한다고는 하지만 프랑스로 갈 여비 등이 일단 필요했다. 저우언라이는 난카이학교 창립자를 비롯한 사람들에게 지원을 받아 유학길에 오른다. 다른 두 사람은 경제적인 걱정은 없었다. 덩잉차오도 유학해 자신의 눈으로 직접 세계를 보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덩잉차오에게 반드시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한다. 덩잉차오는 이별을 앞두고 스웨터를 짜서 선물한다. 안쪽에 '당신에게 온기를'이라고 작게 수를 놓았다.
덩잉차오는 베이징에서 돌아와 텐진의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텐진에서 덩잉차오가 가장 정열을 쏟은 일은 중국의 봉건적인 사상과 습관, 제도 속에서 자유와 존엄을 빼앗겨 ‘노예’처럼 살아가는 많은 여성의 해방이었다. 1923년, 덩잉차오는 억압받는 여성을 구하는 운동을 펼치기 위해 동지와 함께‘여성사(女星社)’를 조직한다. 그리고 순간지(旬刊誌) ‘여성(女星)’을 창간하고 이듬해에는 여성신문 ‘부녀일보’도 발간한다. 여성의 고통을 해결하려면 사회를 개혁 할 수밖에 없다. 그럼 여성이 해방되어 자립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덩잉차오는 깊이 고민한다. ‘사람들은 무지하기 때문에 속고 지배당하고 인간의 권리도 박탈당한다. 교육의 문호를 열자. 교육이 바로 인민을 지탱하고 육성하는 힘’이라고 덩잉차오는 결론을 내린다. 바로 가난한 주부들을 위해 ‘여성일요의무보습학교’를 설립한다. 교사는 ‘여성사’멤버로 하고 학비는 무료였다. 더 나아가 덩잉차오는 다른 단체와 협력해서 ‘직례성평민교육촉진회’를 만들고 이사가 되어 활동을 추진했다. 그 결과 텐진에는 100개가 넘는 평민학교가 세워졌다고 한다. 덩잉차오는 아직 스무 살 이었다. 그러나 이미 교육자로서 명성이 높았다. 그러는 동안 저우언라이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저우언라이는 유럽으로 가는 도중에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모멸을 당했다. 프랑스에서는 저임금을 받고 일해야 하는 중국인 유학생의 현실을 보았다. 저우언라이는 영국의 대학에 진학할 생각으로 에든버러대학교에서 입학을 허가 받는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지 못해 대학진학을 단념하고 프랑스로 돌아온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소비에트연방이 탄생한다. 저우언라이도 강한 영향을 받고 공산당원이 된다. 그리고 조국을 개혁하는 방법으로 공산주의를 선택한다.
자신의 진로를 공산주의에서 찾은 저우언라이는 자기생각을 덩잉차오에게 편지로 알렸다. 덩잉차오도 중국을 개혁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신의 생각과 사상에 전적으로 찬동합니다. 나는 당신들과 같은 길을 함께 나아가고 싶습니다.”하고 전했다. 1923년 봄, 저우언라이는 엽서로 덩잉차오에게 완곡하게 청혼한다. “자유로운 봄을 향해 뛰어나가자! 모든 속박을 깨부수고! 용감히 날아오르자, 뛰어나가자!” 저우언라이는 전부터 독신주의라고 밝혔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개혁을 최우선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덩잉차오는 답장에 그 생각이 바뀌었냐고 물었다. 저우언라이는 솔직히 독신주의를 접었다고 전했다. 연애와 혁명은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은 “평생 함께 걸을 수 있는 혁명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의지가 강한 여성입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함께 혁명의 길에 매진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하고 썼다.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의 마음에 감동한다. 서로 마음이 통했다. 개혁의 동지가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다. 덩잉차오는 ‘진정한 연애’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여성’에 이렇게 썼다. “순결한 우애, 미적 감정의 고양과 심화, 개성의 접근, 상호이해, 사상의 융합, 인생관의 일치가 전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로 공통된 학습과 사업을 가져 늘 애정이 유지되고 깊어져야 합니다.” 두 사람에게는 중국의 개혁 그리고 인민의 번영과 행복이라는 공통의 숭고한 목적이 있었다. 확고한 신념의 대지에 뿌리내린 사랑이었다. 일시적인 감정에 휩쓸리는 부평초 같은 사랑으로는 눈바람 부는 세월을 견뎌 인생에서 아름다운 승리의 꽃을 피우기 어렵다.
[혁심 44] 덩잉차오는 중국의 개혁에 생애를 바치고자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한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힘을 합쳐 군벌과 싸우기 위해 국공합작을 단행한다. 덩잉차오는 텐진에서 공산당과 국민당의 젊은 여성리더가 되었다. 1925년 3월, 중국통일에 힘쓴 ‘국민혁명’의 지도자 쑨원이 서거하지만, 덩잉차오는 자신이 정한 신념의 길을 묵묵히 나아갔다. 인민 속으로‥‥‥. 덩잉차오는 공장과 농촌을 찾아 다녔다. 무시당하고 학대 받으며 노예처럼 일하는 여성들에게 사회개혁을 외쳤다. 또 쑨원의 부인인 쑹칭링을 비롯한 지도층 부인들과 교류를 다져 그들이 전면에 나서 활동할 수 있도록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썼다. 영일(英日)제국주의 타도와 조계(租界)철폐도 외쳤다. 열강의 입김이 닿은 군벌은 덩잉차오를 ‘위험분자’로 보았다. 어머니와 헤어져 텐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머리 모양을 바꾸고 바지를 입고 눈에 띄지 않는 복장으로 텐진을 탈출했다.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국민정부가 있고 저우언라이가 있는 광저우로 갔다. 저우언라이는 1년 전에 귀국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 개혁을 위해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바로 임무에 착수했다. 저우언라이는 광저우에서 국민당 혁명군 리더를 육성하는 황푸군관학교 정치부 주임과 공산당 광둥구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바쁘게 일했다. 덩잉차오가 항구에 도착했을 때도 마중조차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저우언라이의 검소한 방에는 덩잉차오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놓여 있었다. 이날 저우언라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했다. 이튿날이 되어서야 두 사람은 5년 만에 재회한다. 양식집에서 식사를 했다. 두 사람의 가슴은 감격에 벅찼을 것이다. 그리나 서로 쳐다보기만 할 뿐 별로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이 두 사람의 결혼식이 되었다. 저우언라이는 스물일곱, 덩잉차오는 스물 하나였다. 건설은 사투다. 인민을 위해 사생활도 아니 목숨까지도 바친 수많은 사람이 있었기에 신중국은 건설되었다.
쑨원이 서거하자 국민당에 균열이 생긴다. 공산당을 적대시 하는 우파가 국민당 좌파의 중심인물이자 쑨원의 유지를 이어 국공합작을 추진한 랴오중카이를 암살한다. 랴오중카이는 훗날 중일우호협회 회장이 된 랴오청즈의 아버지다. 덩잉차오는 랴오중카이의 부인인 허샹닝을 도와 부인이 추진하는 여성해방운동을 크게 발전시킨다. 그 시절 중국에는 남쪽 광저우에 국민정부가 있고 북쪽 베이징에 군벌정부가 있었다. 국민당혁명군은 북벌을 시작했다. 저우언라이는 열강의 침략 근거지인 상하이로 숨어 들어가 공산당 지하조직을 지휘하고 노동자를 봉기시킨다. 공산당이 제압한 상하이에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혁명군이 도착한다. 장제스를 중심으로 국민당 우파가 상하이에서 반공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리고 공산당원을 잇따라 체포해 살해한다. 또 북벌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국민당 좌파의 주도로 이전한 우한정부에 맞서 장제스는 난징에 정부를 수립하고 국공합작에 마침표를 찍는다. 공산당에 대한 탄압은 점점 더 심해지고 저우언라이에게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다. 광저우에 있던 덩잉차오의 신변도 위험했다. 덩잉차오는 어머니 양쩐더와 함께 변장하고 광저우를 탈출해 저우언라이가 은둔하는 상하이로 갔다. 부부는 상하이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저우언라이는 공산당 재건에 분주했기 때문에 거의 함께 지내지 못했다. 1927년 8월, 공산당은 저우언라이의 지휘로 난창에서 봉기한다. 그러나 힘이 몇 배나 큰 장제스 군의 세찬 추격으로 광둥으로 남하하고 만다. 저우언라이는 이때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며 사흘 동안이나 혼수상태에 빠진다. 겨우 목숨을 건져 상하이로 돌아오지만, 부부는 5년 동안 지하활동을 해야만 했다. 그 사이 수많은 동지가 목숨을 잃었다. 배신도 당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힘겨운 인내의 나날이더라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투혼을 불태우는 사람이 승리자이고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1931년, 중국 공산당은 중앙 근거지를 장시성의 루이진에 두고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임시중앙정부를 수립한다. 그러나 국민당 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 이 중앙근거지를 포위한다. 저우언라이도, 덩잉차오도 루이진에서 고투한다. 덩잉차오는 머리를 자르고 공산당혁명군인 홍군(紅軍)의 모자와 군복을 차려입었다. 식량도 부족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격려하며 꿋꿋이 일했다. 더욱이 유머를 잃지 않고 고생을 웃음으로 날려버리듯 늘 주위에 밝은 웃음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덩잉차오가 어떻게 저토록 밝은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덩잉차오는 저우언라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근본적으로 낙천적이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모든 이에게 전염되지 않겠어요. 지금은 괴롭지만, 우리가 추진하는 혁명은 앞으로 광명이 가득하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모두 승리를 확신했으면 좋겠어요.” 이상도 신념도 행동에 나타난다. 웃는 얼굴 하나에 그 사람의 사상과 철학이 빛난다. 국민당 군이 맹공격을 시작해 잇따라 거점을 점령했다. 덩잉차오는 포탄이 떨어지는 속에서 물자를 운반하고 부상병을 간호하는 등 바쁘게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격려했다. 덩잉차오도 그리고 그에게 격려 받은 여성들도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부상병을 덮어주고 배급받은 얼마 안 되는 식량을 전사한 병사의 아이들에게 주었다. 덩잉차오는 날이 갈수록 야위어 결국 많은 피를 토하고 쓰러져 고열로 의식을 헤맨다. 일어서지도 못했다. 폐결핵 이었다. 그 시절에는 ‘불치병’이었다. 당은 중앙 근거지인 루이진에서 철퇴하기로 결정한다. 어머니인 양쩐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부상병들을 간호하기 위해 남고 덩잉차오는 죽음을 각오하고 홍군의 철퇴작전에 참가한다. 어머니는 “끝까지 살아남아라. 혁명은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 “목숨이 있는 한 싸워라”하고 말했다. 딸은 몇 걸음 걷다가 쓰러지고 또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으로 ‘장정(長征)’에 나선다.
행로는 광시, 후란, 구이저우, 윈난, 쓰찬 등의 각성을 지나는 약 1만2500킬로미터에 달하는 길이었다. 더욱이 국민당 군과 전투를 벌이며 행군해야 했다. 마오쩌둥과 주더 그리고 저우언라이가 이끄는 제1방면군은 당 직원과 그 가족을 합하면 8만 6000여 명으로 여성과 노인, 부상자도 있었다. 덩잉차오는 병든 몸으로 장정에 참가했다. 들것에 실려 행군했다. 적의 공격을 피해 주로 밤에 이동했다. 덩잉차오의 결핵은 미열, 기침, 혈담 증세를 보이며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들것을 들어주는 청년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살아서 인민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덩잉차오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그렇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지지 않는 일이다. 용기를 내는 일이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단결을 굳건히 하는 일이다.’ 덩잉차오는 병과 싸우면서도 애써 밝게 행동했다. 여러 투쟁에서 얻은 경험을 말해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희망의 빛을 비추었다. 그리고 투쟁을 시작한 ‘초심’을 상기시켜 동지의 마음을 고무했다. 덩잉차오가 인생에서 승리한 원인은 자신에게 지지 않고 투쟁을 지속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병에 걸려 들것에 실리고 궁지에 몰려도 그 마음은 절대 굴하지 않았다. 덩잉차오에게는 투쟁을 잠시 미루었다가 ‘상황이 좋아지면 하겠다.’는 발상은 없었다. ‘지금’을 온 힘을 다해 싸웠다. 언젠가가 아니다. 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고 해야 할 일을 찾아 그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정하고 완수해야 한다. 여기에 인생에서 승리하는 핵심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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