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54
11월27일[연중 제3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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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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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RegMODGCq0
[서울대교구 김종욱 바오로(성산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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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력한 경고의 배경에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같은 연배의 형제들이 모여 앉을 때마다 참 재미있습니다. 순식간에 세월이 흐르고, 너무도 많이 변해버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세월의 폭탄을 제대로 맞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낄낄대며 웃기도 합니다.
한번은 탈모가 급격히 진행된 한 형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왜? 무슨 일인데?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을 안 지키셨다고.
그러나 시편 한 구절을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았다고. 또 무슨 일인데? “제 죄악 머리카락보다 많사오며...” 나는 머리숱이 많이 사라졌으니 죄도 별로 없는게 아니냐고?
주님의 날, 종말, 재림 때의 최후의 심판...이런 단어들을 떠올릴 때마다 다가오는 느낌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공포, 두려움, 걱정, 안절부절...
자비의 하느님, 사랑의 예수님께서 지니신 두드러지게 우세한 특징 편안함, 따뜻함, 친절함, 포근함과는 전혀 거리가 머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래서 종말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보다 긍정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어찌됐던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잘 되기만 바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멸망하기보다 구원되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인내의 주님이십니다.
진정으로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아버지, 자녀를 극진히 사랑하는 아버지라면 자녀에게 어떻게 대합니까? 물론 자녀가 지닌 장점, 성공, 성취에 대해 크게 칭찬도 할 것입니다. 자녀의 부족함을 큰마음으로 감싸 안으며 격려와 위로도 보낼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로 나아갈 때,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바보같이 처신할 때, 몹쓸 짓을 할 때는 당연히 강하게 혼도 내고, 불같이 화도 내고, 빨리 돌아오라는 마음에서 경고도 하고 질책도 할 것입니다.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느님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때로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 안으시기도 하고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 주시기도, 때로 우리가 좀 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라고, 좀 더 크게 성장하라고, 그래서 더 확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라고 경고도 하시고 채찍질도 하시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예수님의 여러 가지 경고성 발언 앞에 두려워하기보다 그분 말씀 뒤에 감추어진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의 등 뒤에 서셔서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뒤에서 든든한 지지가 되어주시며, 따뜻한 격려와 위로의 말씀을 건네시는 분이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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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F1FlRLN1_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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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가 아니라 박해 받지 못함을 두려워해야!>
저는 전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신부들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 있던 대부분 신부들이 저를 안 좋게 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자살이 아니라 ‘순교’라고 어떤 분은 저를 야단치듯 말했습니다. 저는 어쨌거나 ‘자살은 자살 아닌가?’라는 생각은 하면서도 더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미국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낙태를 찬성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성체를 거부한 사제가 있었습니다. 그 사제는 분명 바이든 대통령의 정당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비난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도 저도 아닌 입장으로 박해를 피한 태도가 부끄럽게 여겨졌습니다.
이런 일이 점점 많아질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진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박해를 두려워해야 할까요, 아니면 박해를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당신의 제자들이 박해당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 진정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 만약 마지막 때 원숭이들이 믿음이 생겨서 성당에 모여 성체조배를 한다면 박해할까요? 신기해서 구경하기 위해 많이 몰려들 것입니다.
박해받는 이유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주장함으로써 말입니다.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2017)는 이런 세상 말기 상황을 잘 보여줍니다. 이때가 되면 사람들은 세속-육신-마귀를 거의 신적으로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되는 사랑의 계명을 말하고 실천하는 이는 박해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에게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말을 못 하는 장애를 가진 비밀 정부 시설의 청소부입니다. 이때 그 정부 시설에서는 아마존의 수륙양용 인간형 생물을 포획합니다. 이 생물은 지역 주민들에게 신으로 숭배되지만, 가학적인 리차드 스트릭랜드 대령이 대표하는 미국 정부에 의해 잔혹한 실험을 당합니다.
엘리사는 그 생물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그녀는 수화, 음악, 음식을 통해 그것과 소통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그들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비인간적으로 대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생물의 지능과 감정을 드러냅니다.
미국은 그 생물을 죽여 해부하여 군사력을 증가시키려 하고 러시아는 몰래 스파이를 시켜 그 생물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 상황에서 엘리사는 청수부에 불과하지만, 그 생명체를 몰래 빼내는 작전을 수행합니다. 이렇게 되면서 미국과 러시아의 적이 됩니다. 결국 리차드 대령의 총에 맞아 그 생물도 죽고 엘리사도 죽습니다.
조선시대 때 가톨릭교회를 믿는 이들이 왜 박해받았습니까? 그들이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하느님 뜻 때문이었습니다. 평등은 사랑입니다. 믿음은 곧 그 믿는 대상의 뜻을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기득권들이 그들을 가만히 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박해가 심해질수록 더 종말이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수많은 박해가 일어납니다. 20세기에 순교한 이들이 19세기 동안 순교한 이들을 다 합친 수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은근슬쩍 진리를 말하지 않고 그들 편에 서서 박해를 피해야 할까요, 아니면 박해 때 성령께서 말씀하시도록 우리를 맡기는 연습을 해야 할까요? 이때 주님 편이 안 되면 적들 편에 서게 됩니다.
이 시험의 때가 가깝습니다. 요즘 교회의 모습도 참 진리보다는 내가 믿는 정당에 더 큰 표를 주는 듯하기도 합니다. 박해가 아니라 박해를 두려워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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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아마존에 수건을 주문했습니다. 꼼꼼히 따지지 않고, 덜컥 주문했습니다. 3장이 왔는데 꺼내 보니 너무 컸습니다. 수건이 제 키만 했습니다. 반품할 수 있지만, 잘 모르고 귀찮기도 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수건을 반으로 잘랐습니다. 제가 원하지 않았던 수건 3장이 제가 원하던 수건 6장이 되었습니다. 수건에 골이 있어서 잘라도 별 표시가 나지 않았습니다. 슬픔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나누어 주셨는데 5,000명이 먹고도 남았다고 했습니다. 교회 전례력으로 2024년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지나온 자리가 나눔과 사랑의 실천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나온 자리가 욕심과 원망으로 채워졌다면 남은 시간이라도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며 보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자비를 청하던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싸움의 기술’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왕따를 당하는 학생이 싸움의 고수에게 싸움의 기술을 배워서 괴롭히는 나쁜 친구에게 더 이상 괴롭힘당하지 않고 싸움에서 이기게 됩니다. 싸움의 고수는 학생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많이 맞아봐서 눈썰미가 좋다.” 권투든, 격투기든 한 번도 맞지 않고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맞는 요령도 있어야 하고, 맞고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맷집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몸에는 나쁜 세균과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길 수 있는 면역체계가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면역체계가 잘 작동하기에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들어와도 이겨냅니다. 약한 사람은 면역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아서 세균이나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쉽게 병에 걸리게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감기에 걸렸어도 금세 회복되는데 약한 사람은 감기에 걸리면 오래가고, 합병증으로 고생하기도 합니다.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균형 잡힌 식사가 중요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이 좋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면역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의 세력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싸움의 기술’을 알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 기술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은 따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도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이야기하였습니다. 물은 유연하기에 그릇의 상태에 담기지, 그릇을 거스르는 경우가 없습니다. 물은 반드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갑니다. 물은 내면에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이 급류를 만나면 큰 바위도 밀쳐낼 수 있습니다. 물의 유연함, 물의 겸허함, 물의 강인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기술은 ‘겸손’입니다.
두 번째 기술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고, 하혈하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은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우리가 미사 때 고백하는 ‘신경’은 믿어야 할 교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킨 원동력도 ‘믿음’입니다. 현대사회의 시스템은 ‘믿음’이라는 토대 위에서 세워졌습니다. 세 번째 기술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율법 학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마음과 오 힘과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같은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입니다.
우리가 겸손, 믿음, 사랑으로 면역체계를 구축한다면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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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12-19: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이 모든 일에 앞서 박해를 겪는다고 하신다. 제자들은 박해를 당했고, 감옥에 갇히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을 겪었다. 사람들은 제자들을 재판관에게 넘기고 임금들에게로 끌고 갔다. 교회사 안에서 교회는 계속 박해를 당해 왔다. 박해는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박해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당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대에 만연되어있는 죽음의 문화 또한 박해의 일종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온전하게 건져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그래도 육신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갖게 마련이다. 주님께서는 순교자들을 안심시키신다.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으리라고 보장해 주셨으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18절).
우리의 육신이 세상 끝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가톨릭의 신앙이요 사도들의 신앙이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가벼이 보시지 않는 주님께서 우리를 가벼이 보시지 않는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돌아가심으로써 그 육신을 잠깐 내려놓으셨다가 다시 일으켜 세우신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가 그분에게서 부활 신앙을 갖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 수효가 얼마인지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무슨 말을 할까 까지도 일러주신다. 그러한 믿음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고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굳은 신앙을 주시기를 청하면서 매일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의지를 굳게 해 주시도록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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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나중에 실제로 행하게 될 일을 예언하십니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2-13)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도행전에서 글자 그대로 이루어집니다(5,32; 26,22 참조). 사도들은 임금이나 총독 앞에 잡혀가지만, 그것을 기회 삼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며 복음을 선포합니다. 박해는 복음 선포의 위기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하여 복음은 더 분명하고 더 멀리 선포됩니다. 이처럼 사도행전은 위기를 ‘통하여’ 실현되는 주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위기에 ‘그럼에도’ 주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가 기회가 되어 주님의 말씀이 실현됩니다.
오늘날에도 교회를 위협하는 박해가 있습니다. 낙태, 안락사, 배아 복제 등 생명권에 대한 교회 입장에 대한 경멸과, 정결, 순명, 포기와 같은 그리스도교적 가치에 대한 냉소, 그리고 인간 존엄성에 대한 물신주의적 비웃음 등 교회가 부딪치게 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진리를 증언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루카의 신학대로라면, 이러한 위기에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위기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이 퍼져 나갑니다. 이러한 박해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체험하고, 믿음을 증명하며, 세상에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됩니다. 세상의 반대에 낙담하고 좌절하기보다 이 반대가 복음을 선포할 기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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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9)
1) 여기서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굴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여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신앙을 증언할 기회를 만들어 주려고 일부러 박해를 일으키시는 것은 아닙니다. 종교 박해는 분명히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복음 선포를 방해하고, 신앙의 증언을 막으려고 하는 범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는 곧 기회다.” 같은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데, 예수님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니라, 박해와 고난과 시련을 겪더라도 굴복하지 말고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위기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됩니다.>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가 일어났을 때 당시 신자들의 모습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1ㄴㄷ.4)
박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루살렘을 떠나서 흩어졌지만, 신자들은 숨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계속했습니다. <그 일은, “박해 덕분에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된 일”이 아니라,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복음을 더 널리 전파한 일”입니다.>
2)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는,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입니다. <우리는 말재주가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해야 합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라는 말씀은, 어떤 특별한 말재주를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노력할 때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도와주시겠다는 뜻입니다.(마르 13,11)
따라서 이 말씀은, “너희가 ‘삶’으로 신앙을 증언한다면, 어떠한 적대자도 인간적인 언변이나 인간적인 지혜로는 너희의 증언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말’을 잘한다고 신앙을 더 잘 증언하는 것은 아니고, 복음 선포를 더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답게 잘 사는 것, 그것이 곧 신앙을 증언하는 것이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삶’이 안 되면 ‘말’에 힘이 없습니다. 또 만일에 신앙인의 ‘삶’과 ‘말’이 다르면, 그것은 ‘위선’이고, 그 경우에는 복음 선포도, 신앙의 증언도 모두 ‘빈말’이 되어버립니다.
3)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는, “미움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과 초대교회 공동체가 처음부터 미움을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만일에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상황이라면, 숨어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겠지만, 선교활동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또 만일에 실제로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신앙인을 미워하고, 박해자들에게 넘기려고 한다면, 아예 신앙생활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은 종말이 다가올수록, 믿는 사람들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사이가 더욱더 멀어지면서 박해와 탄압이 심해질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미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모든 사람’이 미워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4)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는, “끝까지 신앙을 지킨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모든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어떤 고난과 박해를 겪더라도 참고 견뎌라.”입니다. <신앙생활이 언제나 항상 고통만 있는 생활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인내해야 할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만일에 힘들 때에는 신앙생활을 중단하고, 편안할 때에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 때에나 편안할 때에나 변함없이, 꾸준히, 끝까지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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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박해 상황을 예고하십니다. 신앙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박해는 예수님께서 메시아 임금으로서 영광에 들어가시기 전 고난을 겪으셨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종말이 닥치기 전 박해를 겪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라는 구절에서 “증언”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낱말은 인상적입니다. 여기에는 증언의 최고 단계이며 완성인 ‘순교’라는 뜻까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소 증인들에게 힘이 되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증언의 순간에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예수님께서 친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이에게 그분께서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을 증언하는 삶이 ‘장밋빛 인생’일 수만은 없겠지만, 그분께서 늘 지켜 주실 것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오늘날 외적 물리적 박해를 경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 파묻혀 살다 보니 내적 영적 박해에 노출되어 있음을 직감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되는 율법 정신과 당신 자신의 목숨마저 아끼지 않고 내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의 증인이 되는 길입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이 사랑의 실천을 일상에서 내 것으로 내면화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랑의 증인이 되도록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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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라치오 신부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요한 묵시록 저자는 세상 징벌에 대해 일곱 천사들이 차례로 나팔을 불어 알려줍니다. 얼핏 보면 탈출기에서 열 가지 재앙들을 상기시키게 해줍니다. 물론 그 내용이 다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탈출기의 재앙과 비슷한 것도 있습니다. 묵시록 저자는 일곱 번째 천사가 마지막 재앙을 알려주는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난 사실을 설명을 합니다.
이제는 유리 바다 위에는 신앙의 시련을 견디어 낸 이들이 서서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민족들의 임금님,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십니다.”(묵시록 15,3) 모든 민족들이 와서 주님 앞에 경배할 것이고 주님의 의로우신 처사가 드러나게 됩니다.
시련과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또한 박해와 미움을 겪지 않는 신앙이 또한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당신 때문에 사람들의 손에 넘어갈 뿐 아니라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총독들 앞에 끌려 갈 것이라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심지어는 부모와 형제와 친척들, 친구들까지도 자신을 넘겨서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비록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고통스러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이 세상이 말하는 대로 살 수는 없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이 세상 논리에 맞지 않을 때가많겠지요.
세상은 어떻게 보면 재물 중심으로 아니면 기회 중심으로 살아야 잘 산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해관계를 따지고 손해를 보거나 해를 입으면 내 권리를 침해 당하는 것이니까요. 그런 논리에서 보면 신앙인들은 어리석거나 약삭 빠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들로 보이는 아니겠어요?
거기다가 ‘자기 희생’은 말도 되지 않는 논리가 되겠지요. 신앙들은 미움보다는 업신여기는 것을 당하거나 바보 숙맥 취급을 당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생명을 바친 수 많은 성인 성녀들, 서양학문으로 연구하다가 신앙으로 옮겨 붙은 삶을 살았던 한국의 신앙의 선조들, 순교자들을 보면 주님께서 오늘 말씀대로 ‘나를 위해 미움을 받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 예언이든, 종말론적인 무서운 징표, 형틀과 칼날의 두려움에서도 신앙인이 희망과 위로를 받는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약속 때문입니다.
오늘 문득, 어린 시절부터 친숙하게 들었던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스피노자의 말이 떠오릅니다. 신앙인은 비록 세상에서 어지러움, 두려움과 고통을 살더라도 흔들림 없이 성실한 오늘의 삶을사는 사람들이지요.
우리 각자의 죽음 세상의 종말의 새기며 위령성월의 멋진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순간 하는 일,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얼마나 행복한지를 헤아리는 깨우침이 있으면 얼마나 좋고 아름다울까요!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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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21,12.13)
잘 알려진 것처럼 열심한 힌두교 신자인 마하트마 간디는 그리스도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특히 신약성경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간디는 “예수께서 설한 산상수훈은 종교 중의 종교다. 모든 종교의 다이아몬드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나아가는 길이며, 이 땅에서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취해야 할 삶의 자세와 태도를 여덟 가지 말씀으로 집약했었습니다. 그런데 여덟 가지 참 복을 말씀하시면서 ‘의로움(=히브리어로 ‘체다카’로 ‘어떠한 기준에 부합하다’란 뜻)을 두 번 반복해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서는, 이렇게 강조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면,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마태5, 10~11) 하고 부언하셨습니다. 결국 박해와 의로움은 분리될 수 없으며 서로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의로움은 서로 꼭 들어맞기 때문인데 그 근저는 바로 사랑에서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박해의 고통이 우리를 순교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에서 기인한 사랑이 박해로 인한 순교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신비이고, 하느님의 힘이며 지혜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의로움 때문에 모욕당하고 박해받으면 행복한 까닭을 십자가의 복음으로 선포하고 증거했습니다. 이 역설적인 행복의 신비를 이미 욥을 통해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욥은 인간적인 측면에서나 현실적인 관점에서도 분명 불행했지만, 신앙적으로나 영적으로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를 전제하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도를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전이나 현재도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삶과 신앙의 여정에선 필연적으로 시련과 박해를 만나게 됩니다. 다만 ‘이미’와 ‘아직’의 시차가 있을 뿐, 우리 모두에게는 여러 가지 박해를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박해의 때는 지나가게 마련이고, 그 박해의 때가 바로 진정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신앙을 증거할 때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21,12.13) 그 시련의 때가 생명을 위한 인내의 때이기에,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21,19) 하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누구도 박해의 때가 아니면 자기 신앙의 깊이와 높이를 알 수가 없으며, 이런 환난을 맞아 비로소 신앙인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앙에 의거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 박해는 누구에게나 주어진 은총도 아니며, 더욱 순교란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받은 은총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위기危機는 글자 그대로 위험과 기회의 합성어이며, 위기는 칼의 양날처럼 위험의 순간이지만 동시에 기회의 순간입니다.
그러기에 위험의 순간,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0,28) 하고 위로하시는 하느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받고”(21,15) 주님을 증거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자신들의 순교를 통해 주님을 증거하신 분들이 바로 우리의 자랑스런 순교 선열들이십니다. 순교는 애덕의 절정이며 신앙고백의 정점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이 겪은 박해와 순교의 때를 맞아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때론 회유를 거부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느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로5,3~4)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에서는 “여러분은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12,7.10) 시련과 환난의 때를 맞아 주어진 모든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견디어 이겨내면 언제가 시련의 때는 마치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사라지고 마침내 생명의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어나는 영광의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해와 시련의 때일수록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바른길 달려 나갑시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히12,12~13)라는 권고에 힘입어 굳건히 신앙을 간직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언제 어디서든지 우리 앞에 닥친 모든 시련과 환난을 믿음으로 이겨내게 하여 주십시오. 아멘.”
**광주수도원으로 귀원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습니다. 잘 적응하고 있으며, 오늘은 형제들과 함께 김장김치를 담갔습니다. 조금 피곤했지만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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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몇 차례의 면접을 치루게 됩니다. 수능과 내신이 평가되고 심리 검사와 건강검진까지 보는데, 이에 필수적인 것이 바로 면접입니다.
만약 수능점수가 아무리 높고 모든 것이 정상이라 할지라도, 면접에서 불합격이 나온다면 신학교의 입학은 불가능합니다. 면접 때에 가장 먼저 받게 되는 기본적인 질문은, “너는 왜 사제가 되려고 하느냐?”입니다. 보통 이에 대한 기본적인 고3학생들의 답은, “소외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혹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교수님들의 반박은 다음과 같습니다.
“소외된 이들을 돕는 일, 타인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는 일은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으로써도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굳이 어려운 사제직을 하려고 하느냐?”
이 질문의 핵심은 사제가 되려는 것이 과연 누구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느냐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제 역시 인간이기에 타인에게 온전히 자신을 투신하는 일이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제직을 위한 결심이 가난한 이들, 혹은 소외된 이들에게 맞추어져서는 안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은 타인이 아닌 하느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을 할 때 그 사제는 비로소 온전히 타인을 위해서 투신할 수 있고 소외된 이들에게 시선을 돌릴 수 있습니다. 만약 하느님이 배제 되어 있는 상태로 타인을 위해 살아간다면 얼마가지 않아서 자신의 힘은 소진되고 금방 지쳐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신앙 생활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종 우리는 나 자신을 위해서 신앙 생활을 영위합니다. 나 자신과 가족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을 따르고 사랑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러한 신앙이 아주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보다 건강한 신앙 생활을 위해서는 나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전적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을 할 때, 우리는 인간관계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고 그로 인한 상처 역시 치유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러할 때에, 하느님께 투신하고자 하는 우리의 의지는 소외된 이웃을 위한 투신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며 그것은 사랑의 결실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이런저런 오해도 사게 되고 미움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하느님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상처를 상기한다면 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이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며 또한 심하게는 부모와 형제와 친구와 친척들까지도 원수지간이 되어 잡아 넘기고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듣는 우리는 당황스럽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른다면 자연스럽게 응당 행복이 따라와야 할 텐데, 이로 인해 오히려 고통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의 삶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병자들과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시고자 하셨지만 이 이면에는 전적인 인간의 구원, 즉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의지가 뒷받침 되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라는 예수님의 인간적 의지는,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는 구세주의 청원으로 치환됩니다. 물론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후 다가올 박해의 시간을 예고하시는 말씀이지만 이것은 현대의 여러 가지 유혹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해당 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인 재산 문제, 자녀와의 감정 문제 그 외에 여러 가지 사건들과 오해들로 우리는 부모와 형제와 친척 혹은 자녀들, 이웃들과 여러 가지 갈등을 겪게 됩니다.
사소한 오해가 쌓이고 쌓여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인간관계 안에서의 갈등들이 우리를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들 앞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나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결심과 의지가 확고하다면 아무런 걱정 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주님께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이들의 머리카락이 얼마인지도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일러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신념은 시련과 갈등 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가지고 참고 견딜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복음 환호송은 어제의 복음 환호송과 같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 내가 생명의 화관을 너에게 주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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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교 6학년 때입니다. 한 친구가 쉬는 시간에 지우개를 가지고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습니다. 칼로 지우개를 깎아내면서 도장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지우개 도장에 사인펜으로 까맣게 칠한 뒤, 자기 공책에 힘껏 누르니 자기 이름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친구들 모두 감탄했습니다. 사실 초등학생인 우리 중에 자기 도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도장이 있으면 마치 어른이 될 것 같았습니다. 친구에게 도장 만드는 법을 배운 뒤, 반 친구 거의 모두가 지우개 도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이름이 새겨진 도장이 생겼지만 처음 만들어 보는 것이라 아주 허접했습니다. 더군다나 실패를 반복해서, 큼지막했던 지우개는 조그마한 지우개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쓸데없는 행동을 했다고 말이지요.
도장 파는 곳에 가면 더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비용이야 지우개 도장이 훨씬 싸겠지만, 질적인 면에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의 도장을 직접 만들었다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과 제가 하는 일을 비교해 보았으면 합니다. 일의 결과는 당연히 주님께서 직접 하시는 일이 뛰어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가 직접 하길 원하십니다. 일의 결과보다는 그 과정 안에서의 기쁨과 그 부족한 결과도 큰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것이 아닐까요? 따라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우리의 적극적인 삶임을 깨닫습니다. 미루는 삶, 포기하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임금들과 총독들을 포함한 적대자들뿐이 아닙니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박해자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스스로 당신의 일을 하시면 어떨까요? 적대자들도 그 힘에 눌려서 꼼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역할을 강조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일은 세상의 일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바라보는 바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랑만을 바라보고 있고, 세상의 일은 욕심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지만, 그 세상을 우리가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떤가요? 세상의 일과 충돌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느님의 일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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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렇지 않으니>
루카 21,12-19 (재난의 시작)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그렇지 않으니>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3)
어둠에
덮이지 않으니
빛이다
배신에
물들지 않으니
믿음이다
절망에
시들지 않으니
희망이다
탐욕에
먹히지 않으니
사랑이다
허위에
묻히지 않으니
진리이다
압제에
굴하지 않으니
자유이다
저주에
맞서지 않으니
축복이다
군림에
밟히지 않으니
섬김이다
폭력에
겁내지 않으니
평화다
죽임에
죽지 않으니
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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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사람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야말로 그 사람의 크기를 볼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처리하는 과정 안에서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되고 하느님의 사람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28절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선을 이룰 수 있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 선을 지향하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의 눈에 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신부인 저도 일상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사람이 아닌 상태로 지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마 누군가 제 속을 알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때문에 박해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미리 당신의 제자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박해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되고…. 그때야말로 너희가 나의 복음을 증언할 기회이다……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12-15) 박해는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라고 했지만 어디 그것이 말 같이 쉬운 일입니까? 일상 안에서도 변명과 합리화시키려고 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은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2)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합니다. 감옥에 갇혀서도 소신을 지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믿음을 지닌 제자들은 인간적인 말재주와 인간적인 지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능력과 지혜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13절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최고 의회에서 증언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의회 의원들은“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함을 보고 또 이들이 무식하고 평범한 사람임을 알아차리고 놀라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10절에도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는데 “그의 말에서 드러나는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고 의회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사도행전 6,1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를 체험하려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서 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혹 지금 힘들더라도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6),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위안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 속에서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 1,12) 우리가 지닌 삶의 십자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 안에서 삶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모든 수고와 땀을 그분은 아십니다. 그러니 삶의 여정에서 오는 시련과 고통을 은총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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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제자다운 행복 오기>
오늘 주님께서는 박해의 때에 제자들에게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려갈 것이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라면 박해를 피할 수 없다는 말씀이고, 제자라면 이런 일들을 피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오히려 각오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뒤집으면 박해 때 내가 박해를 피하거나 박해받는 일이 내게 없다면 나는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아닌 셈입니다.
그러므로 꼭 박해 때가 아니더라도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우리도 주님 때문에 임금들이나 사람들 앞에 끌려갈 각오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오히려 주님을 증거 할 기회로 그 상황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상황 반전, 제자의 상황 반전입니다.
제자라면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역경을 기회로 바꾸는 것, 이것이 진정 주님의 제자답게 상황을 반전시키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상황이 이래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하는 것은 참 제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핑계이고 무기력한 자세이며, 어떤 상황에도 자기의 행복과 구원을 일구어가는 적극적인 자세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주님의 제자다운 오기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라면 주님의 가르침대로 ‘행복 오기’와 ‘구원 오기’가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나는 무조건 행복하다.’라고 하는 오기 말입니다. 가난해도 행복하고 부유해도 행복합니다. 울지라도 행복하고 웃을지라도 행복합니다. 박해받아도 행복하고 평화로워도 행복합니다.
나의 행복과 구원에 조건이 없다는 것이 무조건 행복의 오기이고, 이렇게 반전시키는 것이 제자다운 상황 반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어제 많은 분이 저의 축일을 축하애주셨는데 제가 일일이 감사의 답장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며, 이렇게 감사 드림을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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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21,12.19)
<성령의 열매인 인내!>
오늘 복음(루카21,12-19)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으로 '재난의 시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박해와 인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루카 21,12-13)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7-19)
예수님의 이 말씀대로 열두 사도들은 박해를 받았고, 박해와 죽음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세상에 증언했습니다. 이어 교회의 첫 순교자이신 스테파노와 이방인의 사도인 바오로와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 길을 따라갔습니다.
오늘 복음은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힘듦과 고통 앞에서 쉽게 믿음과 신앙이 흔들리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작은 불편함 앞에서' 나의 믿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듣기 싫은 말 한마디에서, 잘못된 것에 대한 지적 앞에서, 그리고 크고 작은 고통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박해와 인내의 원조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카 22,42 참조)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의 힘으로', 우리도 박해의 상황 속에서 인내하고, 그 너머에 있는 '참생명'을 얻도록 합시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르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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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9)
가장
절망적일 때
가장 간절한
인내의 희망이
솟아납니다.
어려움을
이기시는
인내의
본보기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인내입니다.
꼭 필요한
인내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인내를
잃어버리면
삶의 진정한
안목도
잃어버립니다.
인내의 결과가
생명을 얻는
복음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참고
인내하는
십자가의 여정이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됩니다.
십자가의 향기는
인내로 빚어집니다.
시련이 거셀수록
우리가 받는
은총도
풍성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신앙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인내는
기도하는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인내는 생명을
치유합니다.
하느님의 때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새로운 날
되십시오.
인내는
원망이 아니라
끊임없이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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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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