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귀현 NH농협 전남 진도군지부 농정지원단장이 지산면 간척지 일대의 논에서 백수 피해 벼를 예찰하고 있다.
‘신통찮은 벼 작황’ 전국 쌀 주산지 가보니
긴 장마·연이은 태풍으로 일조량 부족·수차례 침수
방제 시기 놓쳐 병해충도↑
수확 앞두고 피해 ‘눈덩이’ 생산량 급감 우려 ‘현실로’
벼 작황이 심상찮다. 50여일 이어진 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으로 인한 농가들의 걱정이 현실이 된 것이다. 등숙기에 일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여러 차례 침수된 영향이 컸다. 실제 전국의 논에선 조생종·만생종 가릴 것 없이 쭉정이가 많고, 해안과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백수·흑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병해충 발생도 크게 늘었다. 본지가 전국 쌀 주산지 상황을 긴급 점검했다.
박병건 경기 이천 율면농협 조합장(왼쪽)과 벼농가 이진우씨가 긴 장마와 연이은 태풍 피해로 이삭이 패다 만 ‘추청’벼를 살펴보고 있다.
◆논엔 쭉정이가 가득=“쌀 수확량이 절반 이상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우려했던 일이 결국….”
경기 이천시 율면에서 4만6280㎡(약 1만4000평) 규모로 벼농사를 짓는 이진우씨(56·월포리)는 최근 논을 살펴보다 충격에 빠졌다. 누렇게 익어가는 <추청> 벼논 군데군데에서 새파랗거나 아예 이삭이 없는 벼가 눈에 띄어서다. 이씨는 “한창 등숙할 시기인데 이삭이 새파란 것은 쭉정이가 되거나 결실할 수 없다”며 “심한 논은 전체의 80%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인근 논도 상황은 비슷했다. 모두 만생종 <추청> 논이었다.
율면 월포리 일대는 8월 초순 집중호우 때 2∼3차례 침수됐던 곳이다. 침수 후 바로 퇴수됐지만, 만생종 <추청>이 이삭 팰 시기와 맞물려 직격탄을 맞은 것으로 농가와 율면농협(조합장 박병건)에선 추측하고 있다.
박병건 조합장은 “이삭이 패지 않거나 멈춰버린 현상은 논별로 차이는 있지만 40%에서 많게는 50%에 이를 정도”라면서 “시간이 더 지나봐야겠지만 수확량이 절반 이상 줄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조생종 벼도 예외는 아니다. 김경수 충남 예산군농협통합미곡종합처리장(RPC) 대표는 “조생종 벼를 수확해보니 평년보다 10∼15% 이상 감소했다”며 “긴 장마에 햇볕을 충분히 못 쬔 벼가 웃자라고 탄소동화작용도 제대로 안돼 쭉정이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본격적인 수확이 이뤄질 때까지의 날씨가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며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 결실률이 올라갈 수 있는 반면 비가 자주 내리면 낟알 충실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바다와 인접한 곳은 백수·흑수 피해 확산=25일 찾은 전남 진도군 지산면 간척지 일대의 논은 수확철임을 실감하기 어려웠다. 대부분 벼가 백수·흑수 피해를 봐 하얗거나 검게 변색돼서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상황은 더 심각했다. 쭉정이가 많은 데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알곡들도 안이 검게 말라 있어 손이 닿자 바스러지기 일쑤였다.
벼농가 민승기씨(71)는 “출수기에 염분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여러 차례 때리면서 결국 이 사달이 났다”면서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에서 피해 벼를 어찌 처리할지 빨리 결정해줬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진도군에 따르면 제8호 태풍 ‘바비’와 제9호 태풍 ‘마이삭’이 연이어 강타하며 3000㏊에 이르는 백수·흑수 피해가 났다. 진도 이외에도 신안·영광 등 해안과 인접한 지자체를 중심으로 피해가 늘고 있다. 전남도 집계를 살펴보면 25일 기준으로 흑수 피해 1만8387㏊, 백수 피해 2080㏊ 등 지역 전체 피해면적만도 2만㏊가 훌쩍 넘는다.
전북도 사정은 매한가지다. 부안군 상서면에서 15㏊ 규모로 벼를 재배하는 김형섭씨(61)는 “연이은 태풍으로 80% 이상의 벼가 넘어졌고 수발아는 물론 백수 피해가 갈수록 확산하고 있다”고 속상해했다.
최승운 김제 금만농협 조합장은 “태풍 이후 이삭이 막 패기 시작한 이모작 벼의 50% 이상이 백수 피해를 본 것 같다”며 “도복 상태에서는 잘 파악이 안됐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가 드러나고 있어 피해면적은 더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정수율 낮고 급증한 병해충도 문제=부족한 일조량과 늘어난 병해충도 작황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이상태 대구 달성 다사농협 조합장은 “30여년 벼농사를 지으면서 올해 같은 흉년은 처음”이라며 “특히 조생종은 일조량 부족으로 쭉정이가 많아 도정수율이 크게 떨어졌고, 중만생종 역시 일조량이 부족해 겉은 멀쩡해 보여도 완전히 여물지 않은 상태에서 익어 도정수율이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고 걱정했다.
최덕병 경북 경주 안강농협 조합장(대구·경북농협RPC운영협의회장)도 “경북은 동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벼 쓰러짐 피해가 커 단수가 많이 줄 것”이라며 “긴 장마와 계속된 태풍에 방제 시기를 놓쳐 벼멸구 피해까지 급증, 단수 감소는 예상보다 클 것 같다”고 말했다.
강원 철원의 벼농가 김재성씨(65·동송읍)는 “1일 첫 벼 베기 당시 3.3㎡(1평)당 2㎏을 수확했는데, 이는 평년보다 25% 정도 줄어든 수치”라면서 “올여름 긴 장마로 인한 농경지 침수와 함께 도열병 등 병해충 발생이 급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남지역은 남해·고성 등 해안가를 중심으로 벼멸구·혹명나방·벼도열병 피해가 크게 발생했다. 이광이 남해군농협RPC 장장은 “남해지역 전체 벼 재배면적의 40%를 차지하는 조생종 벼가 벼멸구 등의 피해로 생산량이 15∼20% 줄어들 것 같다”면서 “대다수 농민이 660㎡(200평)당 보통 480∼520㎏의 벼를 생산하는데, 올해는 380∼400㎏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천=유건연, 예산=이승인, 진도=이문수, 부안·김제=황의성, 대구·경주=오현식, 철원=김윤호, 남해=노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