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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상스 오컬트
르네상스 오컬트는 서구 담론사의 제도권으로 들어가지 못한 일종의 실패한 담론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오컬트는 소수의 담론으로서는 최초로 체계적.정면적으로 서구 담론의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르 네상스 시대에 오컬트가 특히 부각하게 된 배경중의 하나는 15세기 이탈리아의 부호 메디치 집안 보시모의 의뢰에 의한 피치노의 헤르메스 전집 번역과 태고신학 계열의 책 번역이다. 헤르메스는 연금술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태고신학이란 일종의 이교 신학이다.
보시모는 자신 집안의 물질적 부의 축적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키고 싶었으며 그것은 당연히 청빈, 금욕을 강조하는 카톨릭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카톨릭 전통과는 다른 또 다른 전통을 끌어들여야 했다. 보시모는 바로 물질 자체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위한 또 다른 철학 체계, 철학 전통이 필요했다. 그가 눈을 돌린 곳은 물질/자연/몸의 살아 있음을 믿고 존중 하는 신비주의나 그리스 전통이었고 이러한 새 전통과 기독교를 조화롭게 이어 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태고신학이었던 것이다.
태고 신학, 마술 전통, 오컬트등은 카톨릭이 인간이야말로 신의 이마고라 여기고 자연과 물질을 천시했던데 비해 오히려 물질과 자연에 더 관심이 많다. 이들은 물질과 자연의 힘을 더 높이 평가하며 '질료matter 의 힘'을 존중한다. 이는 서구 담론사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전통과도 다른 것이며 기독교 전통과는 대립되는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질료의 역할을 존중해 '개체성'과 '질료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이론이 르네상스 오컬트에 실 마리를 제공해준 것도 사실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 은 무엇보다도 '형상'이다.
연금술은 형상보다 질료를 우선시 하기 때문에 "태초에는 이미 질료가 있었다." 질료는 창조된 것이 아니다. 질료는 "내적 자기 갱신"을 통해 질료 스스로를 탈바꿈한다. 질료의 "내적 자기 갱신"의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은 분리와 승화이다. 마치 창세기의 천지창조와도 같이 '물'의 맑은 것은 '승화'되고 '물'의 탁한 것은 '분리' 되어 세상이 열렸다. 질료의 내적 자기 갱신의 중요한 메커니즘인 분리/승화는 연금술에서 창조의 순간/태초에도 있었으며 연금술사의 실험실에서도 있다. 창조라는 대우주와 실험실이라는 소우주는 같은 원리로서 일치한다. 연금술의 입장에서 사실 분리/승화는 자연적으로 늘 일어라는 것으로 이를테면 동물이 죽으면 몸은 분리되어 부패되고 영혼은 새 생명으로 승화하는 것이다. 연금술사의 역할은 이러한 자연과정을 가속화하는 것일 뿐이다. 세계 곧 하늘과 땅은 분리/승화라는 근본적인 하나의 원리로 엮어있다. 하늘과 땅의 일치라는 이러한 생각은 꼬리를 물고 물리는 뱀인 'ouroboros의 뱀'이나 "별이란 지상의 풀과 같다"라는 파라켈수스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질료의 내적 자기 갱신이라는 하나의 원리는 무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즉 복수적으로 현시된다. 이를테면 연금술의 언어사용에서는 낱말 하나 하나가 무수한 뜻을 가질 수 있으며 하나의 사물에 무수한 말을 붙일 수 있다. 여기서 언어의 다의성, 유비, 상징이 나오게 된다. 이렇듯 연금술에서는 하나의 원리가 다양하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현자의 돌은 어디에도 있다. 어디에나 있지만 아무도 알지 못한다.'
사실 "질료의 내적 자기 갱신"에 대한 생각은 희랍적 사고에서도 그 단초를 찾아볼 수 있다. 질료를 비하하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사고만이 그리스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Chaos가 "자가 생식"을 통해 Erebos(암흙), Nyx(밤), Eros, Gaia를 낳는다. Erobos는 "자가 생식"을 통해 Aether(공기), Charon(저승), Hemers a(낮)을 산출하며 Nyx도 또한 "자가 생식"을 통해 Thanatos(죽음), H ypnos(잠), ..을 산출한다. 자가 생식은 곧 내적 자기 갱신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무엇이 내적 자기 갱신을 통해 서로 반대 되는 대립물들-낮과 밤- 까지 산출한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아낙시 만드로스의 아페이론apeiron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바, 아페이론 즉 무# 한정자 구에는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 축축한 것과 건조한 것, 즉 대립물들이 구별불가능한 상태로 조화롭게 일치되어 있는데 영원한 자기 운동 즉 내적 자기갱신을 통해 뒤섞여 있던 대립 물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온다.
르네상스 연금술에서도 질료의 "내적 자기 갱신"은 곧 "대립의 일치" "대립물의 산출"이라는 개념과 함께 한다. 대립의 일치란 어떤 모순이라기 보다는 생산적 측면을 갖는 것으로 그것은 "신은 대립의 일치"라고 했던 쿠자누스의 말에서도 드러난다. 신에게는 대립 상대 규정이 함께 조화롭게 접혀있으며(접힘complicatio) 이러한 신이 펼쳐지면(펼침e xplicatio) 그것은 곧 '우주'인 것이다. 질료의 내적 자기 갱신 원리는 물론 개별 사물에도 들어있기때문에 자연/사물/몸은 스스로 살아있으며 스스로 육화된다. 이를테면 '돌'은 내적 자기 갱신을 통해 언젠가는 금으로 변하게 되어 있으며 연금술사는 단지 그 과정을 촉진하고 가속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 뿐이다.
2. 바슐라르와 르네상스 오컬트의 유사성
바슐라르는 과학철학과 시학(자연철학)에 관련된 많은 저서를 남겼다. 특히 그의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연금술에 가깝고, 형상보다 질료를 우선시하는 물활론 전통에 가깝다. 즉 그의 시학에서는 질료의 힘이 형상/형식을 낳는다. 그는 [꿈꿀 권리]에서 마블링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이는 곧 물질(재료)이 스스로 모양을 만들어 내는 물질의 자발성 을 강조한 것이다.
바슐라르와 르네상스 오컬트의 유사성은 우선 그의 '뿌리 은유'에서 찾아 볼 수있다.
바슐라르가 보기에 개념과 은유의 우선 순위를 정한다면 은유로부터 추상개념이 나온다. 즉 은유체계가 구조화하는 방식으로 개념체계가 성립되는데, 은유가 문화를 만들어 내고 문화가 은유를 규정 한다. 은유에 의한 해석과 해석에 의한 은유가 서로 순환 한다. 그런데 뿌리 은유란 은유들 중 뿌리가 되는 것, 추상개념들이 나오게 된 최초의 은유를 말한다. 즉 바슐라르의 물, 불,공기, 흙의 4원소 이미지는 인간을 구성하는, 인간을 낳은 뿌리은유이다. 바슐라르는 이 물,불, 공기, 흙의 뿌리은유를 통해 인간-자연을 이해하고자 한다.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 즉 바탕물질의 힘과 운동은 내적 자기 갱신(육화)를 거쳐 구체적인 물질의 형태(형상)을 산출한다. 형상의 단계에서 우리는 상상을 통해 다시 바탕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여기서 '상상'이란 바로 형상을 넘어 질 료의 힘을 느끼는 단계인 것이다.
바슐라르와 르네상스 오컬트의 두 번째 유사점은 대립물의 일치를 통한 인간경험의 투영이다.
연금술에서는 '대립의 일치'를 중요시 할 뿐더러 물질과 의식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실천과 사변이 하나로 추구되며 인간 경험의 용어로 물질의 변성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도 '현자의 돌'을 만드는 것 자체가 남성원리인 '유황'과 여성원리인 '수은'의 결합을 통해서이다. 바슐라르 또한 그의 시학에서 '물'의 이미지 분석을 '대립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시도하는데 '물'은 고요/움직임의 일치, 죽음/생동의 일치, 솟아오르는/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이미지의 일치이다.
'불'의 이미지 분석에서도 집중/ 상승의 일치, 생명을 주거나/뺏는 이미지의 일치등을 말하고 있다. 바슐라르의 '대립물의 일치'라는 측면은 그의 '나르시시즘'인 '우주적 자기애'의 발현에서도 알 수 있는바, 르네상스 연금술이 복수 현시의 원리에 따라 소우주와 대우주를 일치시쳤던 처럼, 바슐라르는 자기애를 통한 소우주와 대우주의 일치를 말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객체화, 몰입, 물아일체로서 범미주의라 불릴수 있다.
바슐라르와 르네상스 오컬트의 세 번째 유사점은 오컬트의 '아담의 언어'로의 상승에서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 오컬트는 일종의 자연주의 언어관을 가지고 자연사물의 본성과 일치하는 언어를 만들고자 하였다 즉 기표/기의 사이의 자의적 관계가 아닌 자연적.필연적 관계를 설정해 자연어 혹은 상형어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개개의 사물에는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는 근본 원리의 '서명'이 새겨져 있는데 바로 그것을 찾아내서 그대로 부르면 필연적인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금술은 그 만큼 말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문자/음성 자체에도 의미를 두었고 발음/ 철자 자체에 큰 비중을 두었다.
연금술의 '주문'이란 바로 이러한 이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는 도사물=도기호로 이루어져 있는 총체이며 이러한 우주는 그 자체 하나의 거대한 Text가 된다. 이러한 생각을 '서적 신비주의'라 하며 그들이 보기에 우주는 성경/자연 이라는 두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있다. (이러한 생각은 18세기까지 과학자와 마 법사가 공유했다.) 그리하여 그 Text는 '근본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금술에서는 그 '근본 알파벳'을 찾으려 했다. 그렇다면 '근본 알파벳'은 다시 새롭게 조합될 수 있는 것이며 그 조합 방식에 따라 다양한 세계들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라이프니츠의 '가능 세계'에 대한 생각은 바로 이러한 오컬트 전통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연금술은 단순히 '근본 알파벳'만을 찾아내는 자연어/상형어의 단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Text의 저술 의도(의미)를 알아내는 단계까지 가려한다. 그것 은 곧 일상적인 수준에서의 말=사물이 아닌 보편적 의미 차원에서의 정신=자연(우주)의 수준으로 상승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제일 처음 사물에 직접 이름을 붙였던 아담의 수준에까지 상승하는 것으로 정신과 자연이 일치하는 그 수준에서는 오히려 말이 사라지게 된다. 즉 표현차원의 일치에서 정신차원의 일치로, 말=사물의 수준에서 정신=자연의 수준으로 지상계에서 지성계로 말의 양이 많은 단계에서 말이 소멸하는 단계로 상승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직상승의 과정에서 Image(그림)은 일종의 중간단계로서 지상계와 지성계를 매개하는 천체계인 것이다.
아담의 언어'로의 상승은 르네상스시대의 상징체계와 관련된다. 중세 상징체계의 경우 무차별적 드러내기-대리 관계라 할 수 있는바, 그것은 표상/드러냄/대리물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은유에 의한 해석과 해석에 의한 은유가 뒤섞여 있는 체계를 말하며 그것은 모든 기호의 상호 대리 (번역) 관계를 받쳐주는 '신'이라는 '중심기호'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신'이라는 '중심기호'는 마치 목걸이를 꿰듯이 중세의 상징체계를 꿰어주고 있는 것이다. 괴델이 말하는 수학체계처럼 모든 구조체계의 시작/근본전제/기본중심은 비어있으며 그것은 반드시-마치 중세의 '신'처럼- 바깥에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는 '신'을 중심기호에서 배제시키고자 했다. 칸트의 선험적 자아는 모든 감각자료를 내'가 정리함으로써 예전에 '신'이 하던 일을 대신 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근대의 표상과 드러냄 사이에는 구별이 생기고 기표와 기의 사이가 자의적이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분리'에서 '일치'로 가기 위해 근대인들은 명석판명한 표상을 통해 '일치'를 추구한다.
이에 비해 르네상스시대에는 표상과 드러냄을 완전히 분리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완전히 혼동하지도 않았다. 다만 '사물=표상=드러냄'이 라는 완전등호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오컬트는 자연주의 언어관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일상언어의 많은 한계를 깨닫기 시작했으며 '개연적 상징의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드러난 상징'과 '숨은 의미' 사이의 이중적 전략을 쓰는 것으로 '드러난 상징'은 그 자체로서 1차의미이지만 그것의 진정한 의미는 상승해서 숨은 뜻으로 들어가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연금술은 '드러난 상징' 즉, 복수은유를 써서 '비어 있는 원형' 그 '빈 곳' 바로 '숨은 의미'를 지 시한다. 그리하여 오컬트는 드러난 상징을 할 수 없이 쓰지만 그것을 믿지 말라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시하는 '숨은 의미'를 아는 것이고 그것은 정신적 차원에서의 수직적 상승을 필요로 한다. 오컬트는 상징과 은유를 반드시 통하지만, 그러나 상징과 은유를 넘어서 '아담의 언어'로 상승한다. 이는 자연어/상형어를 통해 자연과의 비언어적 일치로 올라하는 것이며 그 중간에는 이미지/도상이라는 매개자가 있다.
바슐라르의 경우 상징체계의 '중심 기호'를 물, 불, 공기, 흙이라는 '4원 소 이미지'로 생각한다. 그는 그 뿌리은유로서 지상의 존재하는 모든 은유를 꿰뚤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바슐라르의 '이미지'란 형태를 그린 그림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적인 것이다. 4원소 이미지란 현상차원 에서의 물, 불, 공기, 흙이라는 반영은 재현 모사하는 차원이 아니라 원형을 포착하는 '근원 언어'인 것이다. [물의 꿈] 에서 이야기했듯이 '물의 목소리'라는 표현은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직접적인 시적 현실'이다. 직접적인 시적 현실이란 근원의 차원 즉 뿌리 은유의 차원에서는 표상과 드러냄(상징)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물, 불, 공기, 흙의 원형이 있다면, 그 자체가 원형이라면, 그 것은 은유가 아닌 것이다.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뿐,
미칠 수 없는 것, 여기서 실현되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 여기서 이루어진다. [파우스트] ,신비의 합창
바슐라르에게 있어 '여기'란 바로 표상과 드러남이 일치하는 차원이며 그것은 바로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이다. 그는 현상차원에서 현실을 반영하는 이미지를 넘어서서 근원 언어에 도달하는 수준인 '이미지의 이미지'를 추구했다. 르네상스 오컬트가 현상을 넘어선, 상징과 은유를 넘어선 '아담의 언어'로 상승하고자 하였다면 바슐라르는 현상차원의 이미지를 넘어선, 은유를 넘어선 '직접적인 시적 현실'인 원형을 포착하는 근원 언어'로 상승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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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신 분께 죄송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