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파동과 김대중의 교통사고
대통령 선거가 끝났지만 5월 25일 실시될 총선거로 정치권은 여전히 분주했다. 신민당에서 심각한 내분이 발생했다.
1971년 5월 6일 오후 4시 50분 경 서울 종로 4가에 있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긴장감에 싸여 있었다. 10여 분이 지나면 총선거에 입후보할 전국구 후보등록 마감시간인 오후 5시였다. 1백여 명의 보도진이 붐비는 가운데 전국구 인선과 관련해 떠도는 소문에 흥분한 비주류계 신민당원 1백여 명이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요청하여 기동경찰이 정문에 도열, 삼엄하게 경계를 했다.
오후 4시 55분에 도착한 유진산 신민당 총재는 마감시간에 겨우 맞춰 전국구 후보등록을 마쳤다. 곧 이어 후보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이 후보 등록에서 쟁점이 된 것은 유진산 총재가 영등포 갑구인 지역구를 버리고 전국구 후보가 된 것이었다. 신민당원들의 난동으로 유진산 총재는 1시간 이상 선관위를 떠나지 못했다. 이들은 “진산 개새끼 나오라, 가만 안두겠다”고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렸다.
6시 20분 겨우 선관위를 빠져 나온 유진산은 7시 10분쯤 상도동 자택에 도착했다. 3백여 명의 비주류계 청년당원들이 “당을 팔아먹은 자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고함치며 달려들었다. 이중에는 김대중의 경호 책임자였던 이윤수도 있었다. 이들은 제지하는 유진산계 청년당원들과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난투극을 벌여 화분이 날아가고 유리창과 문이 부서지는 등 진산의 자택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른바「5․6파동」또는「제2 진산 파동」의 시작이었다. 유진산 총재가 영등포 갑구의 공화당 후보인 장덕진(張德鎭)에게 거액의 뇌물을 받고 지역구를 피했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유진산 총재는 양일동 부총재를 비롯하여, 김영삼 고흥문 정일형 김대중 이철승 홍익표 신도환 등 당 중진들에게 긴급히 연락을 취했다. 밤 11시 40분 경 신도환 이철승 양일동 홍익표 김의택 등 중진들이 달려왔다. 김대중과는 전화 연결이 안 되었고, 고흥문 김영삼 정일형은 연락을 받고도 오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 시각 송원영, 김상현 등과 함께 필동에 있는 자신의 처가에서 다음날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 난동을 부린 비주류계 청년당원들은 송원영(동대문구)과 김상현(서대문 을구)의 지구당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음날인 5월 7일 아침부터 관훈동에 있는 신민당 중앙당사는 비주류계 청년 당원들의 난동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서울 중구(위원장 정일형) 동대문 갑구(위원장 宋元英) 서대문 을구(위원장 金相賢) 용산구(위원장 金元萬)의 당원들이었다.
김원만(金元萬)의 선동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진산이 지역구와 전국구를 판 돈으로 수억원을 챙겨 외국으로 도망치려 합니다. 누군가 공항에 나가 이를 막아야 합니다.
흥분한 당원들은 당사 2층에 걸려 있던 유진산 총재의 사진을 떼어 불사르고 2층의 총무국 책상 의자 등을 부수었다. 본부장실로 몰려드는 청년 당원들 때문에 나무벽이 무너졌다.
양일동 부총재가 10시 조금 넘어 당사에 나오자 이들은 멱살을 잡고 탈당계를 쓰라고 강요했다. 양일동이 거부하자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담뱃불까지 얼굴에 대려 했다. 약 2시간 가량 시달린 양일동 부총재는 탈당계를 써 주었다. 10시가 되기 조금 전 정일형(鄭一炯) 선거대책 본부장은 기자들에게 사태수습을 위해 3개 방안을 제시했다.
1) 柳당수가 정계를 은퇴하고 2) 전국구 헌금을 당에 반납하며 3) 전국구 공천자 대회와 운영위를 소집, 선거포기여부를 결정 할 것.
10시 50분 경 고흥문 김영삼 이철승 정일형 윤제술 서범석 김원만 정운갑 송원영 홍영기 김준섭 방일홍 등 당 중진들이 총재실에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이들은 1) 유진산 총재는 총재직과 전국구 후보직을 사퇴하고 2) 총선참여 문제는 운영위와 공천자 대회를 소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대책회의가 열리는 동안 김대중의 참모인 김상현은 기자실에 나타나 “김대중 후보는 너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좀 더 생각한 뒤 수습문제에 대해 태도를 밝힐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오후 3시에는 동교동 김대중 집에서 김대중의 주도로 당 6인위가 열렸다. 이날 6인위는 유진산 총재는「有故」로, 양일동 부총재는「탈당」으로 불참한 가운데 김대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4인만이 모였다. 이들은 유진산 총재를 제명하고 김대중을 총재권한대행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결정의 적법성이 논란이 되면서 유진산과 김대중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진산 파동의 본질이 당권 다툼이라는 것이 드러난 셈이다.
오후 5시에는 유진산 제명 결정과 김대중 당수권한대행 추대 결정을 공식토론하기 위해 이철승 이중재 김대중 고흥문 김홍일 김형일 조영규 등이 참가한 운영위원회가 소집되었다. 고흥문이 운영회의의 사회를 보았는데, 그는 유진산을 제명하고 김대중을 총재권한대행으로 추대한 동교동 회의 결과를 보고했다. 이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오갔다.
▲金弘壹 = 수습책에 대해 한 사람씩 논의해 보자. ▲金炯一 = 유당수가 전국구 1번으로 들어간 경위를 듣자. ▲김대중 = 나는 처음에 반대했으며 자세한 내용을 몰랐다. ▲曺泳珪 = 전국구 문제는 유당수와 김 후보가 합의해서 결정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김대중 = 합의해서 결정하지 못했다.
이때 이철승 이중재 김형일 등이 동교동 회의 결정의 법적 근거를 따지려는 순간 양일동 부총재의 강제 탈당 문제로 흥분한 성동 갑구(위원장 양일동) 당원들 약 80명이 회의실로 난입, 회의는 중단되었다. 이들은 김대중에게 탈당계를 내라고 소리 질렀다. 이들은 1층에서 4층까지 당사를 점거하고 철야 농성을 했다.
이날 밤 양일동은 김대중에게 전화를 걸어 고함을 쳤다. “그래 당신의 선거(대통령 선거)만 치르고 나면 당이 부서지고 남의 선거를 망쳐도 좋은 것이오. 이제는 내가 당신을 제명할거요.”
유진산은 6일 밤새 시달린 끝에 피곤해서 7일에는 한남동에 있는 아들의 아파트에서 쉬고 있었다. 언론은 진산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기사를 실었다.
8일 아침 양일동의 연고지인 군산과 옥구에서 상경한 2백여 지지자들이 농성에 합세했다. 이들은 “김대중은 당 질서를 문란케 했으니 사과하고 당을 떠나라”는 유인물을 돌리기도 했다.
이날 유진산은 경위를 해명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김대중에게 당권을 넘겨준 이른바「4인위」결정에 대해 비판했다.
그들이 무슨 권한이 있길래 나를 제명하는가. 그 사람들은 6인위도 아니고 네 사람이 한 짓이다. 나도 참석 않고 양일동 부의장에게 강제로 탈당계를 쓰게 하다니, 그런 야만적인 일을 해놓고 무슨 6인위요. 하도 피로해서 자식 집에 쉬러간 것이 어째서 당수 유고냐 말야. 내가 지방에 가려면 양부의장에게 그동안 당무를 맡긴다고 분명히 밝혔어. 나는 정당다운 정당을 만들어 놓겠다고 젊은 사람들을 앞세우고 모든 불만을 억누르고 다녔는데, 김대중 의원이 6인위를 소집할 자격이 어디 있는가. 이러한 중대한 시기에 남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당권도전 장난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은 선거전에서 싸우고 있는 동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일로 용납될 수 없어. 끝까지 규명해야겠소.
김대중은 같은 날 기자회견에서 동교동「4인위」결정을 합법적이라 주장하면서 유진산의 정계은퇴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유의할 점이 있다. 사건의 발단은 유진산이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로 간 것을 여당에 매수된 것이라고 김대중이 규정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전부터 유진산에게 전국구로 갈 것을 건의했으며 전국구 인선과정에서도 스스로 유진산을 전국구 2번에 올려놓았었다(전국구 인선은 양일동과 김대중이 하다가 의견일치를 보지 못한 가운데 등록 마감 날 아침에 당 총재인 유진산에 떠맡겼다). 나중에 신민당 내부의 진상조사위에서 김대중은 가소로운 변명을 하였다.
다음은 이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이다.
新民「波動」 收拾에 混線 “六人委決定은 不法” 柳珍山씨 “權限代行 受諾할터” 金大中씨 국회의원 全國區공천후유증에 휩싸여 진통을 겪고 있는 新民黨은 그 수습책을 싸고 혼미를 거듭하고 있다. 七日 격심한 파도속에 金大中전후보집에서 六人委(金大中 高興門 洪翼杓 鄭一亨씨만 참석)는 柳珍山당수의 除名과 金大中전후보의 黨首權限代行을 결정했으나 그동안 行方이 묘연했던 柳당수는 八日『六人委결정을 不法』이라고 맞섬으로써 新民黨의 全國區波動은 새로운 양상으로 접어들었다.
「柳黨首除名․金大中씨權限代行」어제六人委決定 柳당수는 이날『정계은퇴 당수사퇴 전국구 사퇴 등 자신의 거취에 대한 결심은 서 있으나 사태를 왜곡시키고 당수에게 누명을 씌워 선거를 치르는 혼란속에 당권을 뺏으려는 일부 기도는 먼저 잡아놓고야 말겠다』고 주장, 金大中전대통령후보측의 黨首權限代行취임을 막을 뜻을 명백히 했으며 전대통령후보 金大中씨는 칠일에 있었던 六人委의 결의가 합법이라고 선언,『柳당수가 의혹에 찬 지역구 포기로 黨을 死地로 몰아 넣고 그것이 黨內파쟁의 소산인양 돌리려함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라고 주장, 柳당수의 퇴진을 요구하면서 黨首權限代行을 八日 오후에 수락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당초에 보여준 柳당수의 책임문제로 집약된 新民黨 파동이 黨權競爭의 양상으로 변모돼가고 있는 인상을 짙게 풍겨주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金大中 高興門 洪翼杓 鄭一亨씨 등은 七日 오후 三時 金大中씨 댁에서 회합, (一) 柳珍山당수를 제명하고(二)선거기간중 金大中씨로 하여금 당수권한을 대행케 하며(三)梁一東씨도 자진탈당케 하되 그렇지 않은 경우엔 제명키로 했으나 뒤이어 六時께 열린 운영위에선 金大中씨 權限代行에 반대하는 운영위원이 있었을 뿐 아니라 梁一東씨계당원들이 난입, 아무 결론없이 헤어졌다.
현파동을 수습하는 방안에 있어선 柳당수 金大中전후보측의 상반된 주장외에 金永三 李哲承 金在光 金炯一씨등은 六人내지 七人非常對策委를 구성하자고 주장하고 있으며 일부에선 당헌 규정대로 高興門운영위차석부의장을 당수권한대리로 하자는 案도 있다.
新民黨은 八日 오후 운영위를 열어 이같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논의할 예정인데, 이에 앞서 七日밤과 八日오전 각파 有力人士들은 개별접촉을 갖고 의견을 교환했다.
七日밤 柳당수는 그의 자택에서 梁一東씨와 만났고 高興門 金永三 李哲承씨는 李씨댁에서, 金大中씨측에서도 金元萬씨등이 모임을 가졌으며 八日오전에도 鄭一亨 尹濟述 徐範錫씨 등이 모임을 가졌다.
한편 七日 오후의 金大中씨댁 회합에 대해 高興門씨는『건의키로 한 것이고 金大中씨는 운영위의 의견을 듣고 당수權限代行 수락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으며『결의사항은 아니다』고 말했다. 또 柳당수는 그의 탈당계를 梁一東씨에게 써주었으며 梁씨는 七日아침 중앙당사에 이를 갖고 나갔으나『일부 당원들이 나를 협박하는 상황아래서는 내놓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金永三李哲承씨등六人 權限代行金弘壹씨결의
金永三 李哲承 金在光 金炯一 李重載 朴永祿씨등 六人의 운영위원들은 八日낮 조선호텔에서 회합, (一)柳당수는 일단 당수직을 사퇴한다 (二)운영위 세부의장(梁一東 高興門 洪翼杓)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 (三)그럴 경우 당헌규정상 金弘壹 전당대회 의장으로 하여금 당수權限을 대행케 한다는 등 三개항을 결의, 柳당수 金大中씨 및 운영위 세 부의장에게 이를 수락토록 제의했다. 이에 대해 柳당수 梁 高 두 부의장은 즉각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金大中씨와 洪翼杓씨는 이에 대해 즉각적인 회답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柳珍山당수의 主流측은 八日 아침 상도洞 柳당수댁에서 사태수습을 위한 간부회의를 열어 六人委멤버중 金大中 鄭一亨씨를 金永三 李哲承씨로 교체한 수습 六人委員會를 구성,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규명키로 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中央黨舍는 梁一東부의장계 당원들에 의해 사실상 점유된 가운데 「柳당수의 명에 의해」 黨舍정문 셔터를 닫고 출입을 규제하고 있다.
“柳黨首는 퇴진해야 한다 金大中씨會見 黨權派 責任전가 國民우롱”
新民黨 金大中전대통령후보는 八日『柳珍山당수가 의혹에 찬 지역구 포기로 黨을 死地로 몰아 넣고 그것이 黨內파쟁의 소산인양 돌리려함은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로 柳당수는 물러서야 하며 나는 국민과 黨을 위해 모든 투쟁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金전후보는 이날 서울 동교洞 자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운영위수권기구인 六人委의 결정은 운영위 보고로 그쳐 합법이며 다만 권한대행 수락여부는 오후에 밝히겠다』고 말했다.
金전후보는『六日밤까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태도를 바꿔 그것이 당권경쟁의 소산인양 말한 것은 국민을 우롱하고 당을 死地에 몰아넣는 것으로 柳당수 아래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으며 동지들이 완전파멸하는 것을 내다보면서 이 사태를 묵과할 수 없어 권한대행을 몇 당내인사와 상의해 수락하겠고 당이 약간 혼란하더라도 柳당수 아래 선거를 치르는 것보다는 낮다』고 말했다.
다음은 金전후보의 기자회견내용
(一)新民黨의 운영위규정으로 선거가 끝날때까지는 후보 당수가 영도해왔는데 七日 운영위 수권기구인 六人委를 소집하려했으나 당수는 행방이 묘연, 나머지 세분에게 연락해 高興門 洪翼杓 鄭一亨씨가 모였는데 그들의 의견이 촌각을 다투는 시간에 당을 살리는 길은 柳당수를 제명하고 나를 내세워 이미지를 쇄신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이래야만 기사회생으로 국민에 새의욕을 갖고 다시 四․二七 선거와 같은 호응을 기대할 수 있으므로 나에게 책임을 맡을 것을 요청했다. 네분 중 세분이 柳당수를 제명하고 내가 권한대행을 하도록 의결, 나에게 수락을 요청하면서 수권위 결의니까 합법으로 운영위에는 보고에 그친다고 말했는데 나는 중앙당에서 운영위간담회를 열더라도 비록 총선기간이나마 다수지지를 받는 상황에서 일하고 싶었다. 운영위에서 高부의장이 결의사항을 보고하고 나도 경위설명을 하려는데 소란이 벌어져 회의는 유회되고 말았다.
(二) 나는 개인적으로 柳당수 제명방침을 찬성않았고 梁一東부의장의 제명에는 반대했다. 梁씨는 내 의견대로 했는데 柳당수만은 그렇게 않고는 당의 이미지를 소생시킬 수 없다고 해서 결정된 것이다. 柳珍山씨가 六日밤까지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해놓고 이제와서 태도를 바꾼 것은 부당하다. 당권경쟁의 소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수로서 떳떳치 못한 행동이며 저지른 일로 당을 파국에 몰아놓고 그런 태도를 보임에 개탄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전국에서 동지들이 한쪽에선 官權에 몰리고 당의 란한으로 고초를 받고 있으니 가슴아픈 심정이며 동지들의 빗발치는 독촉과 애원을 당의 사정으로 결심을 보류해왔으나 숙고 끝에 적어도 柳당수 아래서는 선거를 치를 수 없으므로 柳당수는 물러나야한다.
국민을 모독하고 동지들의 완전파멸을 내다보면서 死地에 몰아넣는 것과 같아 권한대행을 단호히 수락할 결심인데 당의 중진과 협의해 최종결정을 짓겠다. 柳씨의 반성못한 태도에 대해 나의 국민에 대한 의무와 당의 책임을 위해 투쟁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三)전국구 후보공천은 내게 가까운 사람은 모두 제거됐고 珍山당수의 직계조차 제거됐다. 협의의 대상은 요식행위에 불과하고 珍山의 독단으로 했다. 협의한 것은 그날 오전에 七명으로 하기로 했으나 柳靑씨 단 한사람만 됐고 朴順天씨는 당수 자신이 당의 재정상 本人이 五百萬원 나에게 五百萬원씩 내자고까지 하고 탈락시켰다.
내가 전국구를 권한 것은 포기설도 있어 二개월전에 사적으로 얘기했는데 유세를 위해 지역구가 장해가 된다면 이 기회에 하면 국민도 납득할 것이고 뒷말도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柳당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四日 高부의장사무실에서 梁씨가 전국구를 제의했으나 高 洪양부의장과 鄭박사 그리고 나도 반대했다.
柳당수는 梁씨에게 화를 내며 전투에 나갈 사람 사기떨어지게 왜 그러느냐 영등포는 내가 나가야 떨어뜨린다고 말했다. 六日아침에도 이에는 언급이 없었고 그날 오후 二時 오지말라는 것도 몇 분 후보협의하느라 억지로 갔으나 책상위에 메모가 있고 오전에 柳黨首가 朴正勳씨와 지역구에 내보내기로 합의한 것인데 단 한마디 양해나 협의한 일이 없다.
문제는 전국구 인선내용이 아니라 柳당수 지역구 이탈이 문제다. 선거공보와 벽보대도 못낸 상황인데 柳당수가 정계에서 떠나야 당과 국가에 봉사하는 길이다.
은퇴․黨首나 全國區辭退중 擇一 『黨權도전』장난은 끝까지 규명 柳 黨 首 會 見
자신의 지역구 포기와 전국구 공천문제로 黨內에 폭풍을 몰고 온 新民黨 柳珍山당수는 八日 아침『그들이 무슨 권한이 있길래 나를 제명했는가』고 반문, 六人委의 제명조치를 불법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이날 아침 시내 상도洞 자택에서 기자와 만나『이번 문제 수습방안으로 (一)政界은퇴 (二)당수직사퇴 (三)전국구 사퇴 등 문제를 당간부들에게 제시하고 협의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히고,『이런 중대한 시기에 남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 黨權도전 장난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이것은 선거전에서 싸우고 있는 동지들에게 찬물을 끼얹는 이로 용납될 수 없으며 끝까지 규명하겠다』고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七日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디 갔었는지…. 『六日밤에 전국구 등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난동을 겪고 나니 잠도 제대로 못자고 또 다음날 인사차 찾아올 사람도 많을 것 같아서 七日 아침 일찍 한남洞 아들집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오후 六時 집에 돌아왔을 뿐이다. 내가 돈을 가지고 日本으로 도망갔느니 하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의심스럽다.』
-日本으로 간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전부터 아들 결혼식 관계로 일본에 가려 했으나 그동안 선거 때문에 바빠서 못갔고 또 全國區 심사관계로 가지 못했는데 金大中의원도 하루 갔다 다음날 오면 되지 않느냐 해서 全國區 심사를 마치고 급히 다녀오려고 했지. 그러나 야당당수가 제나라에서 못살고 억만금을 가지고 남의 나라에 가다니… 이 柳珍山이가 지역구를 팔아 넘겼다는 생각을 고치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앞날은 암담한 것이야. 』
-영등포 甲區를 등록時間 임박해서 결정한 이유는. 『원래 나는 당수가 되면서부터 지역구를 포기할 생각을 했다. 다만 최근에 와서는 상대가 張德鎭씨이기 때문에 포기문제에 신중을 기했고 共和黨에서 유능하다고 하는 그 사람을 꺾기 위해서는 내가 나가야겠다고 올 봄부터 마음을 굳혔으며 그래서지 지역구 黨舍도 새로 얻었다. 그러나 그 후 全國의 지역구 간부들이 찾아와 百명이면 九十九명이 모두 날더러 지역구를 포기하고 유세지원 자금지원을 해달라고 애절하게 요청해왔기 때문에 결국 전국구로 나서게 된거다. 대통령선거 때 돈내겠다고 한 사람이 三분의 一도 못내 자금에 궁한 나머지 지난번 내가 금산 晉州유세를 떠나면서 우선 全國區 공천의 헌금을 받아쓰라고 했더니 六,七명에게 2億이나 받아썼더군. 정치적 상대방을 꺾기 위해 돈을 받아썼다 사꾸라다 팔아먹었다는 등 근거없는 소리를 해서야 이 나라가 되겠는가.』
그는 대통령선거 때 돈낸다는 사람이 三분의 一도 못 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갑자기 음성을 높이면서 왼손을 들어 탁자를 탁 쳤다.
-六人委의 제명결정에 대한 소감은. 『그 사람들은 六人委도 아니고 그 회의라는 것도 네 사람이 한 짓이다. 나도 참석않고 梁一東부의장에게 강제로 탈당계를 쓰게 하다니 그런 야만적인 일을 해놓고 무슨 六人委요. 내가 지방에 가려면 梁부의장에게 그동안 당무를 맡긴다고 분명히 밝혔어.』
-영등포 甲區에 하필 무명청년을 공천한 이유는. 『전에부터 朴世俓씨가 찾아와서 아들에게 영등포 丁區를 맡겨달라고 요청했고 또 全國區에 신청도 했고 당내외에서 젊은 사람들을 이용만한다는 불평들을 귀가 따갑도록 많이 들어오던 차에 朴正勳군은 젊어서 조직력도 있고 아버지가 정치자금도 댈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이 정도면 상대방을 꺾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해서 결정했다. 결정이 너무 늦어 선거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젊은이가 뛰면 張德鎭이 정도는 문제없어.』
-이번 全國區후보 人選은 혼자했다는데…. 『처음에는 金大中 梁一東씨에게 맡겨 그들은 四日과 五日밤까지 만나 인선을 했으나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헌금기준만 마련해왔어. 그래 五日밤 이들 두 사람과 앰배서더 호텔에서 만나 논의하다가 나만 먼저 十日時半에 나왔지. 그들이 철야, 六日아침에 마련한 案을 내놓으나 완전 合意된 것이 없었어.』
-全國區의 인선원칙은…. 『나는 한 가정에서 국회의원은 한분 나오면 된다고 생각해서 내외 부자간 형제들은 모두 뺐으며 六日 오후四時十五分경 鄭一亨씨가 찾아와 부인 李兌榮씨를 부탁한 것도 이런 원칙 때문에 안된다고 거절했다. 大邱의 申鎭旭 徐範錫 梁一東 鄭一亨씨의 경우가 모두 여기에 해당돼.』 〈呂永茂기자〉
責任지고 곧收拾 柳黨首代辯人통해聲明
新民黨 柳珍山당수는 八日 오전 金守漢 대변인을 통해 特別聲明을 발표,『黨에서 일어난 모든 잡음과 혼란을 자기책임하에서 사필귀정의 原則에 따라 오늘내일 사이에 수습하겠다』고 밝혔다.
柳당수는 또 이 聲明에서『우리 新民黨이 內部문제로 인해 다소의 혼란을 빚어냄으로써 四․二七 선거에서 보여준 바 있는 국민의 절대적인 기대와 지지에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준데 대해 黨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국민들에게 송구한 마음을 금할 수 없으며 全國一百五十三개 지역에서 어려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黨公薦者들에게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하고『全國黨員들은 추호도 동요없이 필승을 기하는데 전력을 다하기를 바라며 국민들의 지지가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梁一東씨辭退書는無效 柳黨首언명
新民黨 柳珍山당수는 八日 오전 梁一東운영위부의장이 쓴 脫黨書에 대해『梁부의장의 사퇴서는 법적으로 無效며 이러한 강압적인 사태에 대한 진상을 철저히 규명, 단호히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1971년 5월 8일자 동아일보)
9일 신민당의 여러 파벌은 독립운동가 출신인 김홍일(金弘壹) 전당대회의장을 총재권한대행으로 추대하는데 동의하여 잠정적으로 사태가 수습되었다.
유진산이 포기한 영등포 갑구에는 6․3세대인 박정훈(朴正勳)이 후보로 공천되었다. 1971년 2월 19일 박정훈 장충준(張忠準) 한광옥(韓光玉, 1999년 현재 국민회의 부총재) 김덕규(金德圭) 조홍규(趙洪奎, 1999년 현재 국민회의 의원) 등 6․3세대 20명이 신민당에 입당한 바 있다. 입당식에는 유진오 당수와 김대중 등 중진들이 환영했다. 김대중은 “젊은 세대들에게 기대가 크다”며 자신의 대통령 선거 유세를 도와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정훈은 국회의원 선거에 후보가 되자마자 진산파동으로 갖은 음해를 받았다.
5월 10일자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유진산을 혹독하게 인신공격하고 정계은퇴를 강권하였다. 동아일보는 진산 파동을 보도하는데 있어 일방적으로 김대중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비해 다른 신문들은 유진산-김대중의 당권 다툼에 중립적인 논조를 유지했다.
柳珍山씨의 去就
柳黨首의「背信的」全國區候補등록을 계기로 폭발한 新民黨내의 이른바「珍山波動」이 黨幹部들의 收拾案과 金大中 전大統領후보의 양보로 우선 破局을 모면케 된 것은 참으로 多幸한 일이다. 總選體制로 中道적인 黨內元老 金弘壹씨에 임시로 黨首權限을 代行케하고 柳珍山씨는 黨首職만을 물러서게 하는 것 등을 骨子로 일단 休戰을 成立시킨 것은 總選에 임해서 國民의 여망에 부응하려는 新民黨幹部들의 民主力量의 과시로서 마음 흐뭇하고 鼓舞的인 事態收拾이라 아니 볼 수 없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번 波動을 新民黨의 內紛으로 보려는 경향도 없지 않은 듯 하나 이번 波動은 오로지 柳珍山씨 개인의 背黨行爲가 빚은 것이므로 黨權투쟁과는 일단 分離해서 생각해야 할 문제며 이 事件이 新民黨 전체의 문제처럼 보인 것은 柳씨가 黨首職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基因한다. 이 事件을 계기로 黨內의 세칭 主流 非主流간에 약간의 不協和音이 있었던 것은 指導體制가 마비될 때 의례 있을 수 있는 일이며 强力한 求心역할을 할 수 있는 權力이 缺해있는 野黨으로서 短時日안에 이만큼 收拾이 可能했다는 것은 오히려 國民의 公黨으로서 體質이 改善돼가는 新民黨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 例라 할 것이다.
그러나 黨의 波動 收拾과는 상관없이 柳珍山씨는 차제에 自進해서 아주 新民黨을 脫黨, 政界를 隱退하는 것이 그에게 多少의 良識이 있다면 바람직한 態度일 것이다. 물론 個人 柳珍山에 대해서는 일면 同情이 있는 것도 아니나 柳珍山씨가 政界를 은퇴해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國民의 여론처럼 돼 있다. 혹자는 이번 事件을 단지 全國區候補登錄이 유발한 한낱 波動이라 볼는지도 모르나 全國區候補登錄은 그의 政治作風이 빚은 있을 수 있는 歸結이며 그가 영등포甲區를 버린 것은 하나의 독립된 行爲로서가 아니라 그의 政治作風의 한 部分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가는 곳, 그가 行하는 일에 일찍 雜音과 의혹이 뒤따르지 않은 例는 드물었다. 금산地域區를 내놓은 이래 이번 또다시 영등포甲區를 버리게 된 이면, 또 몇몇 서울과 地方地域區의 公薦過程에서 생긴 갖가지 의혹에 찬 항간의 話題들은 오늘날 婦女층 靑少年층에까지 널리 번지게 되었으며 이른바「珍山이미지」는 全國民간에 不信의 象徵, 權謀術數의 化身처럼 알려지고 있다. 柳珍山씨에 대한 不信은 당초 政界에서부터 싹텄으며 많은 同志들이 그와 黨을 같이할 수 없다고 몌별을 했고 그가 所屬하고 있는 黨을 사이비野黨 또는 僞裝野黨으로 몰아세우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所屬한 또 그가 領導하는 新民黨을 健全野黨으로 고무 격려했으며 成長을 聲援해 마지 않았다.
우리도 이른바「珍山作風」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한派閥의 頭目이 아니요 이미 한나라 第一野黨의 당당한 黨首가 된 마당에 종래와 같은 權謀術數나「장난」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고 믿어 疑心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고난 人間性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이번 公薦過程에서 또다시 例의 術數를 부려 黨員들은 물론 國民들의 激憤을 야기시키고 말았다. 그에게 두터운 信賴를 걸어온 사람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한데도 그는 거의 自責의 氣色을 보이지 않고 먼저 黨權에 挑戰하는 者를 黙過할 수 없다느니 억울한 누명을 쓸 수 없다느니 하며 한때 어디론가 潛跡한 듯 하다가 主流派를 업고 서서히 反擊態勢로 나온 품이 舊態依然한「珍山手法」을 그대로 보여주어 國民을 더욱 失望시키고 말았다. 그는 이번 波動을 영등포甲區를 버린 事實에만 애써 局限시키려 하고 있으나 문제는 그의 政治作風에 國民이 싫증과 不信을 表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重要하다.
만약 이번 波動을 계기로 柳珍山씨가 모든 事態에 責任을 느끼고 스스로 政界를 은퇴한다면 그에게도 權謀術數만이 아닌 自省과 自責을 할 줄 아는 솔직한 人間性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機會가 될 것이다. 이 時點에서 그가 全國區 一번을 계속 固執한다는 것은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는 그의 例의 特有한 術數의 일면이라는 의혹을 면치 못할 것이며 이는 그로 하여금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不幸의 씨앗이 될는지도 모른다. 個人으로서 柳珍山씨가 老後를 平安히 보내고 新民黨이 體質改善을 이루어 再生의 계기를 마련하고 政治의 近代化를 이루어 이 나라 議會民主主義를 育成하기 위해서는 이 時點에서 柳珍山씨가 黨의 收拾과는 상관없이 자진 脫黨 政界를 은퇴하는 길 외에는 다른 方途가 없다고 본다.
그에 대한 不信과 의혹이 얼마나 일반大衆사이에 깊숙이 번지고 있는가는 스스로 여론을 조사해보면 알 일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重言復言할 必要性을 느끼지 않는다. 하여간「珍山時代」와 그가 象徵하는「珍山作風」時代는 이미 지났다고 보아야 한다.
柳珍山씨는 解放以後 오늘까지 줄곧 이 나라의 議會民主主義의 發展만을 念願해 왔고 이를 위해서만 노력했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 見解가 만약 옳다고 한다면 柳珍山씨는 政界에서 文字그대로 은퇴하는 것이 그의 宿願을 實現할 수 있는 가장 賢明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時點에 서 있는 것이다. 柳珍山씨의 賢察을 促求해 마지 않는다. (1971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선거대책위원이 된 김대중은 야당 대통령 후보의 지명도를 십분 활용, 지역구 입후보자들의 지원 유세에 올랐다. 5월 11일 김대중은 유진산의 정계은퇴는 기필코 이루어져야 한다고 다시 한번 말했다. 여기에다 박정희 씨가 야당 당수를 매수한 양 말했다.
“柳珍山씨 꼭물러나야” 金大中씨 오늘 서울遊說앞서 주장
新民黨 金大中전대통령후보는 十一日오후 서울 성북乙區를 비롯한 七개지역 국회의원후보 지원유세에 앞서 『新民黨의 이번 珍山파동은 큰 안목에서 볼 때 新民黨이 선명 건전 野黨으로 새출발하는 대전기를 마련, 전화위복의 길이 되었다』고 말하고『柳珍山씨의 정계은퇴는 기필코 이뤄져야 하며 黨과 나라를 위한 유일 최후의 길은 자진은퇴하는 길뿐』이라고 말했다.
金전후보는 四․二七대통령선거후 처음 나가는 유세에 앞서 이같이 말하고『新民黨 문제에 있어서 국민들이 경각해야 할 점은 共和黨의 정보정치 마수』라고 지적,『朴대통령은 건전野黨을 육성한다 해놓고 이같이 정당을 망치는 일을 서슴치 않고 그들은 밑으로는 말단참관인과 선관위원의 매수로부터 위로는 당수까지 망치고 있으니 마땅히 국민의 규탄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1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
김대중은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경남 진주 남강에 진을 치고 있던 4만 5천여 명의청중들은 김대중이 광주에서 진주에 이르는 동안 예정에 없던 지원 연설로 4시간 이상 늦게 도착했는데도 대부분 자리를 지키고 앉아 김대중을 열렬히 환영했다. 부산 강원 충청도의 유권자들도 김대중을 환영하고 연설에 귀를 기울였다. 이들 지역 주민은 미래의 비전을 여는 야당 지도자로서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5월 24일 아침 김대중은 영등포 지역 지원유세(오후 3시 예정)를 위해 목포에서 대한항공편 여객기로 출발하려 했다. 그러나 악천후로 결항하자 승용차로 오전 9시경 출발했다. 김대중의 서울 자 1-8797호 승용차를 선두로 경호원 등이 탄 대절 택시가 오전 9시 반경 무안군 삼향면 대양리 앞 국도를 달릴 때였다. 맞은 편에서 오던 경기 영 7-4755 대형트럭과 김대중이 탄 차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김대중과 비서 권노갑, 주치의 이경호, 경호원 이명우가 부상을 입었다. 연이어 트럭과 전남 영1-2160호 택시가 정면충돌하여 택시 운전사 등 3명이 즉사하고 3명이 부상당했다.
김대중은 이 사고를 자동차사고를 위장한 박 정권의 살해음모라고 말한다.
우리는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이 사고로 한동안 어이없어 했지만 우선 인근 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았다. 사고는 누가 보더라도 고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또 기묘한 것은 트럭 운전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조수에게 물었으나 전혀 말도 안되는 변명만을 횡설수설 늘어놓는 것이었다.
한국민은 이 사고에 대해 비상한 의혹을 품고 권력층이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왜냐 하면 대형트럭의 소유자는 공교롭게도 공화당의 국회의원이었고, 이 사고가 발생했을 때 공화당과 정부는 이 사고가 보도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제지시켰다는 점이 무엇보다도 의심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뒤 검사가 문제의 운전사를 살인 혐의로 조사하자 그 담당 검사는 다른 자리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런 후 즉시 다른 검사가 조사했지만 그 검사는 이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처리해 버렸다. (김대중,『행동하는 양심으로』금문당, 1985, P153)
이 사고가 정권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다. 그렇지 않으면 김대중은 박 정권을 모략한 셈이 된다.
1985년 5월 김대중은 월간조선 기자에게 사고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당시 나는 국회의원 선거 때 전라도 지방의 지원유세를 끝내고 목포에서 비행기로 상경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약이 취소돼 버렸어요. 날씨 때문에 비행기가 못뜬다는 거예요. 이것도 뒤에 알아보니 정부의 음모였어요. 그런데 광주에선 뜬다는 거예요. 광주로 비행기를 타러 가는데, 무안입구의 1차선 도로를 지날 때였어요. 마주 오던 14t 트럭이 거의 90도 각도로 확 꺾으며 중앙선을 넘어 내 차를 덮치는 거예요. 마침 그때 운전사가 살려고 속도를 확 냈어요. 그래서 트럭은 내 차의 뒷 트렁크를 살짝 받았는데, 워낙 큰 차가 받아놓으니까 내 차는 붕 떠서 길 옆 논에 처박혔어요. 1백m 앞에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거기에 빠졌으면 죽는 거지요. 나는 뒷자리 오른쪽에 타고 있었습니다. 차에는 앞에 둘, 뒤에 둘, 모두 네명이 타고 있었지요.
그런데 내 차 뒤에는 결혼식에 다녀오는 손님을 태운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 손님들이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려고 택시를 경호차 앞으로 몰았어요. 내 차를 받은 트럭이 잇따라 이 택시를 정면으로 받았어요. 앞에 탔던 3명이 즉사, 뒤의 3명이 중경상을 당했습니다.
나는 피를 흘리면서 현장에서 응급처치를 받았는데 택시에서 부상당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金大中선생은 죽지 않았느냐」고 묻더군요. 그런데 트럭 운전사가 없어져 버렸어요. 조수만 있었는데「난 모른다」는 거예요. 우리는 무안읍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광주 송정리에서 기차를 타고 올라왔습니다. 서울에 밤늦게 올라와서는 팔걸이를 하고서도 영등포에 가서 박경원씨와 싸웠던 윤길중씨의 지원유세를 했는데, 이것이 승리의 결정타가 됐지요. 지금은 내가 다 알아요. 누가 시켰다는 걸』
-누가 시켰습니까. 『당시 대통령 측근들이에요. 그 트럭의 소유자가 그 당시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등록된 모 변호사예요. 그 사람들은 우리가 서울에 입원하고 있는 데 한번도 문병 온 적이 없어요. 오히려 큰 소리를 쳤어요. 그 운전사 사건을 처음 담당한 검사는 갈려버리고 운전사는 교통사고를 냈다고 1년 징역을 받았는데 다 살지 않고 나왔고 나중에 의문의 죽음을 했어요. 저는 다섯 번의 죽을 위기에서 다 살아 나왔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의 도구로써, 당신의 목적에 쓰시려고 그렇게 구해 주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문제의 트럭은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등록된 변호사의 차가 아니었다. 이 트럭은 주식회사 범한화물 소속이었다. 이 회사의 사장은 홍국태(洪國泰)씨인데, 그의 부친이 당시 변호사 협회 회장이었으며 1971년 총선에서 공화당 전국구 후보가 된 홍승만(洪承萬)씨였다.
홍국태씨는 1987년 10월 11일 이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알 만한 사람들은 그게 단순한 교통사고, 그것도 피해차량이 교통법규를 어겨서 일어난 사고임을 다 알고 있기에 구태여 해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김대중씨한테 사과를 하지도 문병도 하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다. 사고운전사는 서울 근교의 셋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사고 다음날 신민당원들이 그 집에 몰려가 부인과 아이들을 반죽음이 될 정도로 괴롭히고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걸 보고 저도 흥분하여, 찾아온 당원들에게, 오히려 내가 김대중씨의 사과를 받아야겠다고 버티고 말았습니다. 그런 분위기였던 만큼 목포에서 있었던 수사와 재판은 공정했습니다. 그 사고가 계기가 되어 운수회사 문을 닫아버렸죠』
사고를 낸 트럭 운전사는 권중억(權重億)씨였다. 권씨는 1987년 가을, 기자에게 사고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 비가 좀 내리고 있었습니다. 경기 영 7-4755호 트럭을 몰고 목포로 가는데 무안군에서 마주 오던 차량행렬을 보았습니다. 택시가 맨 앞에 있었고, 그 뒤를 따라 오던 세단차-여기에 김대중씨가 타고 있었다는 것을 사고 뒤에 알았습니다-가 중앙선을 넘어 택시를 앞지르려고 하는 것을 제가 보고 당황했습니다. 급브레이크를 밟았는데, 비탈길에 비가 내려 그런지 왼쪽으로 미끌어지면서 세단을 약간 스치고 뒤따라오던 택시를 정면으로 들이받아 그 안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죽었습니다. 저는 뛰어내려 택시 승객부터 끌어냈고, 지나가는 차들 한테도 구원을 청했습니다. 세단차는 길 아래로 처박혔는데 그 차에 탔던 사람들이 어떻게 나왔는지는 모르겠어요』
-현장에서 달아났습니까. 『아뇨. 거기에 경찰차가 조사하러 와서 경찰로 끌려가 구속되었지요. 금고 10개월의 형을 받았습니다. 형을 다 살고 나와 보니 살림이 엉망이 되고, 결국 아내와 헤어진 뒤 두 딸을 키우며 이렇게 살고 있읍니다』
-세단차에도 사고의 책임이 있다는 말씀 같은데. 『법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사고를 유발시킨 것은 세단차의 중앙선 침범이었어요. 그래도 저의 잘못이 크지요』
-경찰에서 조사받을 때 고의성 있는 사고라는 쪽으로 추궁을 받지 않으셨읍니까. 『없었습니다. 지금 선생님한테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의 경찰수사기록에는 김대중이 타고 있던 서울 자3-8797호 크라운 승용차 운전사 양승남(당시 26세)씨가 제 1피의자, 권중억씨는 제 2피의자로 나와 있다. 쌍방과실로 본 것이다. 당시 이 사건을 취재한 기자들도 권중억씨와 같은 견해이다. 권중억씨는 교통사고로 모두 5번의 업무상 과실치상 전과가 있다. 1971년 사고는 2번째 교통사고였다. 김대중이 무슨 근거로 권중억씨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김대중은 또 “그 뒤 검사가 문제의 운전사를 살인 혐의로 조사하자 그 담당 검사는 다른 자리로 쫓겨나게 되었다. 그런 후 즉시 다른 검사가 조사했지만 그 검사는 이를 단순한 교통사고로 처리해 버렸다.”라고 했다.
김대중 말대로 이 교통사고를 조사하던 검사가 뒤바뀐 적이 있는가. 김대중 주장이 맞는지 거짓인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한 검사는 허경만(許京萬)이다. 김대중은 이 사건을 담당한 검사 허경만이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자 명백한 살인음모라고 떠들었다. 허경만은 1980년에 김대중 변호인단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정치에 입문하여 여러 차례 야당 국회의원이 되었고 노태우 집권 시절에는 국회부의장이 되기도 했다. 1999년 현재 전남지사이다. 김대중은 왜 ‘살인음모’를 단순 교통사고로 처리한 허경만을 여러 차례 국회의원 선거에 공천했고 전남지사 자리에 공천했을까. 김대중에게 그 교통사고가 ‘살인음모’였다고 고해성사해서 그런가. 허경만은 단 한 번도 언론에 이 사건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김대중의 경호실장이었던 함윤식은 이 교통사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지방유세 기간 중에는 에피소드가 수 없이 많았으나 한 가지 꼭 밝혀 두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김대중씨에 대한「자동차 사고를 빙자한 암살음모사건」에 관한 진상이다. 이 사건은 김대중씨 자신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고 그 사건의 진위에 대해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미스테리 같은 사건이므로 교통사고 현장에서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그 사건을 체험한 나로서 그 진상을 밝히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해서이다.
김대중씨는 투표일 이틀 전까지 지방유세를 모두 마쳤다. 서울에서 마지막 열두 군데의 유세를 남겨놓고 지방에서 상경길에 오르게 되었다. 5월 24일 아침 첫 비행기로 서울에 오기 위해 나는 김대중씨와 함께 목포비행장으로 갔다. 하늘은 비가 내릴 듯 잔뜩 찌뿌려 있었다. 목포공항 당국자들은 기상 악화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으니, 레이더 장치가 잘 되어 있는 광주로 가면 비행기가 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항공편으로 상경할 예정으로 있었기 때문에 타고 다니던 자가용 승용차는 모두 서울로 먼저 올려 보냈었다. 우리는 렌트카를 빌려 타고 광주비행장으로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차량의 순서는 맨 선두의 1호차에는 김대중씨, 2호차에는 나를 비롯한 경호원이 탑승했고 3호차에는 주치의로 수행하고 있던 김대중씨의 둘째 처남 이경호씨가 타고 일렬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량 행렬이 청계를 지나 무안에는 채 미치지 못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였다. 뒤쫓아 온 택시 한 대가 내가 타고 있는 경호차 뒤에서 라이트를 켰다 껐다하면서 급한 듯 추월하겠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이 도로는 총 2차선으로, 추월선이 없는 편도이기 때문에 앞에서 마주 달려오는 차량이 없을 때라야 앞차를 추월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때 내가 탄 차의 운전사가「어떻게 할까요?」라고 나에게 물었다. 택시가 내 차를 추월할 수 있게 비켜 줄 것인가를 운전사가 물은 것이다. 그 택시는 몹시 급한 용무가 있어 보였기 때문에 나는 운전사에게 택시를 우리 차 앞으로 보내주라고 일렀다. 추월할 때 보니 택시에는 앞좌석에 여자 2명, 뒷좌석에는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타고 있었다. 택시는 내가 탄 2호차를 추월하여 1호차와 2호차 사이에 끼어 달리게 되었다. 한참 달리던 택시는 또 김대중씨가 타고 있는 1호차를 추월하려고 비상라이트를 켰다 껐다하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1호차를 추월하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차선에서 마주 달려오는 차가 없어야 한다. 택시는 마주 달려오는 차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해 볼 생각으로 두 세 번 가량 1호차 왼편으로 따라 붙어 전방을 살피는 것이었다. 택시는 내가 탄 차 바로 앞에서 1호차 추월을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 광경을 잘 살펴 볼 수 있었다. 택시는 전방에서 마주 오는 차가 없거나 멀리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마침내 1호차를 추월하기로 마음먹은 듯 속력을 높이며 왼편으로 비켜 나갈 자세를 취하는 순간이었다.
막상 추월을 단행하려고 왼편으로 핸들을 돌리다가 전방에서 14톤 짜리 대형트럭이 마주 달려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트럭편에서도 추월하려는 택시를 보고 당황했다.
1호차의 운전수도 트럭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속력을 높이며 핸들을 트럭의 진행방향과 반대방향으로 꺾었다. 맹렬한 속력으로 달려오던 트럭은 결국 1호차와 엇비키기는 했으나 1호차의 뒷꽁무니 약 5분의 1 정도를 스치면서 추월하려는 택시와는 정면충돌하게된 것이다. 택시에 타고 있던 승객 3명은 사망, 3명은 부상을 당했다.
트럭을 스친 1호차는 오른쪽 길로 튕겨 비틀거렸다. 내가 2호차에서 뛰어내려 앞으로 달려가 보니 1호차는 1미터 아래 논두렁에 약 15도 가량 기울어진 채 처박혀 있었다. 김대중씨는 기울어진 차안에서 쓰러진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힘껏 차체를 밀어 조금 바로 서게 한 뒤에 문을 열려고 했으나 잘 열려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어 차창의 유리를 깨뜨리고 김대중씨를 차밖으로 구조해 냈다. 이때 김대중씨는 다리를 다쳤다. 그리고 나는 다른 경호원을 시켜 트럭운전사를 붙잡아 놓으라고 일러 두었다.
나는 김대중씨를 부축하고 인근150미터 가량 떨어진 민가로 가서 응급치료를 받도록 했다. 그 집은 공교롭게도 경호원 이동신씨의 인척되는 집이었다. 내가 다시 사고 지점으로 되돌아와 보니 내가 이른 대로 경호원들은 트럭운전사를 붙잡아 놓고 있었는데, 약 30분 후에 도착한 경찰이 그를 연행해 갔다. 그때 들은 바로는 사고 택시는 신혼여행자들이 타고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내가 체험한「자동차 사고를 빙자한 암살음모사건」의 전모이다. 김대중씨가 대중 연설을 할 때마다 자신은 다섯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왔다고 주장하는 사건 중의 하나가 이 사고이다.
김대중씨는 사고 후 「기묘하게도 트럭운전사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지적하면서 「정부가 자동차 사고를 빙자해서 나를 살해하려고 한 충돌 사건」이라고 주장,「이 사고는 누가 보아도 고의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운전사는 경호원들이 붙잡고 있다가 분명히 경찰에 인계되었다. 사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본 내 경험과 상식으로 그 사건은 어느 누구에 의해 저질러진「고의적」인 것이 아니며, 비가 오는 날 일어난 우발적 교통사고에 지나지 않았다. (함윤식,『동교동 24시』서울: 우성출판사, 1987, P118~121)
김대중은 박 정권이 자신을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즐겨 말했고 1971년의 교통사고와 1973년 납치 사건도 정권의 살해 음모라고 줄기차게 떠들었다. 이를 일축하는 사람들 중에는 ‘김대중은 비오고 천둥치는 날 들판에서 벼락을 맞아도 정권의 음모로 벼락 맞았다고 떠들 것’ 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김대중은 1967년 총선 유세에서도 박 정권이 교통사고를 위장해서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떠들었다. 김대중은 교통사고를 당하기만 하면 ‘정권의 음모’라고 떠들 준비가 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5월 25일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화당이 113석(48.7%), 신민당이 89석(44.3%)을 얻어 야당세가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특히 대도시인 서울, 부산, 대구에서 신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서울에서는 19개 지역구에서 18명이 당선되었고(공화당의 유일한 당선자는 장덕진), 부산에서는 8개 지역구에서 6명이 당선되었다. 대구에서도 5개 지역구 가운데 4명이 당선되었다. 김대중은 신민당 전국구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신민당은 진산 파동에도 불구하고 89석이라는 당시로서는 초유의 야당의석을 확보했다. 이에 대해 진산 파동이 없었으면 신민당이 더 많은 의석을 얻었을 것이라는 견해와 진산 파동으로 야당이 수세에 몰리자 유권자들의 견제심리가 발동하여 덕을 본 것이라는 엇갈린 분석이 있었다.
6월 8일 총선 이후 처음으로 열린 정무회의에 유진산은 출석하여 진산 파동의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유진산은 자신이 여당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소문을 비롯한 모든 사건 진행이 폭력으로 당권을 탈취하려는 김대중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간 선거 도중이라 근신하고 있었지만 선거가 끝났으므로 전국구 파동에 대한 진상규명이 있어야 합니다. 폭력으로 당권을 잡으려는 정치풍토를 시정해야 하며 당원들간에 당수가 당을 팔아먹었다는 불평과 의문이 가시지 않는 한 전당대회는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분명히 말하거니와 전국구 공천을 계기로 당을 팔거나 해당행위를 한 일이 없습니다.
이에 따라 김형일을 위원장으로 하는 7인의 선거사후처리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특별조사위원회는 6월 9일부터 조사에 착수, 자료수집에 나섰고 14일에는 전국구공천에 관한 첫「당내의 정치재판」이 열렸다.
총재실은 임시로 재판석으로 바뀌었다. 심문하는 7인 위원석과 마주하여 증언석에는 유진산 양일동 홍익표 김대중 고흥문 정일형 순서로 앉아 심문을 받았다. 특별조사위원회는 유진산 김대중의 두 차례에 걸친 대질증언을 포함, 관계자의 증언을 얻고 조사했다.
6월 24일 특별조사위원회는 6개항의 처리 내용을 발표했다.
1) 유진산의 지역구 포기에 따른 금전수수설은 근거가 없고 다만 유진산이 단독으로 지역구를 포기해서 당원과 국민의 공분을 산 데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 2) 김대중은 이날(5월 6일) 오후 1시쯤 이 같은 사실을 진산으로부터 미리 통고받고도 만류하지 않은 책임을 져야 한다. 3) 전국구의 무원칙한 공천은 유진산이 단독으로 처리했지만 김대중도 공천심사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 4) 5월 7일 김대중 집에서 6인위 멤버 중 김대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4명이 모여 유진산을 제명하고 김대중을 당수 권한 대행으로 결의한 것은 불법적인 처사로 유감된 일이다. 5) 중앙당사의 난동 및 폭행사태에 대하여는 서울 중구(정일형) 동대문구(송원영) 서대문 을구(김상현) 성동 갑구(양일동) 등 관계지구당 간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유진산은 이 같은 특별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채택한 정무회의의 결정에 만족하지 않았다. 유진산 계보가 다수인 중앙상무위원회에서 반격을 시도했다.
6월 30일 중앙상무위원회가 열리자 김대중의 공개사과를 요구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격론을 벌였고 회의는 3일을 끌었다. 7월 3일 자정에 이르러 양측은 다음과 같은 3개항의 결의안에 동의했다.
決 議 文(1971년 6월 30일, 7월 2일, 7월 3일에 걸친 제7차 중앙상무위원회에서 최 용근 의원동의로 가결한 것임)
主 文
5․6파동을 처리하고 다음 전당대회를 단합된 모습으로 치르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1) 5월 6일 하오 9시경 유진산 당수 宅에서 야기된 지역구 포기에 대하여 항의하는 지구당원에게 사실무근한 금전수수설을 고의로 유포시켜 난동을 확대시키고 전국민을 공분케한 주모자는 즉각 제명할 것을 요구한다. 2) 김대중 전대통령후보는 5․6파동으로부터 국회의원 선거기간 중을 통하여 이 파동의 확대를 막고 수습할 지도적 책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습과정에서 여러 가지 점에서 확대시켰고 유 당수에 대하여 너무도 과도한 정치적 비난을 함으로써 이와 같은 혼란을 초래한 그 진의를 국민과 당수에 밝히고 유 당수와 전 당원에 대하여는 공개 사과할 것을 요구한다. 3) 이 동의는 정기 전당대회 이전에 완전히 처리되어야 한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은 다음과 같이 공개 사과했다
나의 수양이 부족한 탓으로 유진산 前당수의 명예를 훼손한 데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김대중은 앞자리에 앉은 유진산에게 악수를 청했다. 유진산은 김대중의 선봉장으로 유진산의 정계은퇴를 강력 주장했던 김상현에게 웃음을 띠며 말했다. “자네는 종아리를 좀 맞아야 해.” 김상현도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선생님,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유진산은 이 날의 중앙상무위원회의가 폐회되기 직전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음해와 모략과 중상으로 상대방을 꺾고 자기만의 영광과 발전을 꾀하려는 5백년 정치사의 누습(累習)이 아직도 이 땅에서 정치사회를 판치고 있음은 통탄할 일이다. 나는 지난 수삭동안 나 자신이 겪은 고통과 슬픔은 오늘 이 시간부터 깨끗이 씻어 버릴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민족과 조국은 영원해야 할 것이고 따라서 보다 나은 내일을 쌓아 올리기 위하여 우리들의 간단없는 투쟁이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투쟁의 대상 중에서도 남을 음해와 중상으로 꺾어 눕히려는 망국적인 폐습을 제일 먼저 교정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사는 앞으로도 영원히 밝게 빛나지 못하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인생의 석양길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나는 이제부터 10년 아니 20년 더 젊어질 것이고 더 억세게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나는 어려운 우리 조국과 겨레의 陳頭에서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핏자욱이 가시덤불 길의 앞뒤를 얼룩지게 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을 내 스스로 헤치고 전진함으로써, 민족 활로의 개척에 나의 희생을 아낌없이 지불하겠다.
여러분의 더욱 끊임없는 건투를 빌어 마지않는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년 뒤 신민당은 2개의 전당대회를 치러 결국 분당의 길을 걷게 된다(1995년 지방자치선거를 앞두고 공천문제로 야당인 민주당은 이기택계와 김대중계의 격심한 내분에 휩싸였다. 선거에서 민주당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김대중이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분당하였다. 이 과정은 1971년 5월 야당인 신민당이 진산 파동으로 내분에 휩싸였으면서도 대승하였고 그 후 분당한 것과 거의 같다).
김대중은 자서전에서 진산 파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거기에 갑자기 당치도 않은 일이 또 발생했다. 5월 6일 국회의원 후보자 등록 마감일에 유진산 총재가 자기 선거구인 서울 영등포구에서 빠져 나온 것이다. 그 대신 유총재는 비례대표제의 신민당 전국구 당선 순위 1위로 등록했다. 그리고 영등포구에는 자기대신 무명의 청년을 입후보시켰다. 이 선거구는 육영수 여사 언니의 사위(장덕진)가 입후보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주목을 끌었던 선거구였다.
유진산씨가 이 영등포 선거구에서 입후보하면 틀림없는 당선이었다. 그래서 이 갑작스런 사퇴는 여러 의혹을 낳았고, 여당과 유총재간에 뒷거래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
사실 이날 5월 6일 오전, 나는 비례대표제에 대해서 유총재와 막 의논을 끝냈었다. 유 총재는 그 자리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오후에 자기 대신 청년을 영등포에 입후보시키고, 자신은 접수가 거의 끝나가는 오후 5시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서 전국구로 등록을 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총재가 이와 같이 행동한다면 우리 당은 선거전을 앞두고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진산씨 자택에는 그날 영등포구의 신민당원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몰려와서 총재의 배신을 거세게 규탄했다. 다음날 모든 신문이 유진산씨를 일제히 비난하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지금까지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선거였다. 야당에서 입후보한 내가 정면 대결에서 패하고 박 대통령이 뽑힌 이상, 야당이 개헌을 저지할 69의석 이상을 확보하는 일이 당시의 절실한 과제였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여당은 맘대로 국정을 움직여서 헌법을 고치고 4선, 5선, 결국은 총통제나 종신 대통령제를 도입할 것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은 영원히 독재 체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 중요한 선거를 앞둔 당총재의 행동은 앞날을 캄캄하게 했다. 다음날 5월 7일 우리 집에 당의 원로와 간사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서 당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총재대행이 되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나는 수락을 보류했다. 반대가 예상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총재대행으로 한다는 제안은 당내의 지도자 몇 명의 반대로 성립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상했던대로였다.
나도 이 사태를 보고 총재대행 얘기는 없던 것으로 했다. 결국 당 원로인 전당대회의장 김홍일씨를 총재대행으로 정하고, 신민당은 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김대중 자서전, 도서 출판 인동, 1999 제 1권 P263~265)
이 자서전은 일본에서 먼저 출판된 것이다.
김대중은 이 글에서 스스로 유진산 당수에게 전국구를 권유했으며, 전국구 인선에서도 김대중 자신을 1순위로, 유진산을 2순위로 결정하고 그 명단을 유진산에게 넘긴 사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 또한 유진산의 사퇴를 강력히 주장하고 스스로 당수대행에 오르려 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김대중은 당수대행이 되기를 보류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의 집에서 열린 4인 회의에서 유진산 총재를 제명하고 자신이 총재대행이 되기로 결정했고 이를 공식 발표했다. 단순한 제안이었다면 당내 중진들이 그토록 성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선거 후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 활동한 사실도, 유진산에게 공개사과한 사실도 일절 언급하고 있지 않다.
김대중이 쓴 여러 글을 읽어보면 指鹿爲馬의 뜻을 저절로 알게 된다.
유진산 씨는 1년 후인 1972년 4월에 출간된 회고록『해뜨는 지평선』에서 이 사건에 대해 서술했다.
다음날 5월 5일이었다.
이튿날로 당의 공천후보등록 마감이 다가오므로 전국구 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밤 여덟 시에 양일동․김대중 양씨와 함께 나는 시내 앰버서더 호텔로 갔다. 전국구 공천문제를 조정하면서 순위에 대한 대체적인 원칙에도 합의를 보았다.
전국구 후보들의 헌금(獻金)문제에 있어서는 2개월여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느 정도 윤곽을 세워 놓았다. 1번부터 17번까지는 3천만원의 헌금을 당에 내게 하되 신축성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양의원은 18번부터 2천만원의 헌금을 받자고 했으나 나는 여기에 반대해서 당직자는 물론 정치분야에서 중요하게 취급해야 할 사회계층의 대표들에겐 돈을 받지 않고 공천하자는 주장을 했다. 예컨대 4․19세대나 6․3세대, 그리고 재일 교포 70만을 대표하는 인사 등을 흡수하자는 제의였다.
(중략)
그러던 차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5월 1일이 되자 전격적으로 국회의원 선거가 공고되었다. 더욱이 선거운동 기간은 앞으로 고작 20여 일을 넘지 못했다. 그런 사정으로 전국구를 공천하는 일에 있어서 당의 법규에 따라 대통령후보였던 김대중 의원과 정무위원회 부의장인 양일동 의원 양인에게 내가 그 권한을 위임했던 터였다.
나는 5일 밤 양․김 양씨에게 전국구 공천 후보 결정을 맡기고 밤 열한 시 경에야 집으로 향했다. 그 때 나는 앰버서더 호텔을 떠나면서 「두 분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내일로 박두한 등록 마감에 지장이 없도록 수고들을 해주시오. 밤샘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국구 문제에 일단 매듭을 짓고 내일 아침 일찍까지 내게 그 명단을 넘겨주시오. 그러면 그 자리에서 당수가 사인만 하고 곧 수속을 밟게 하겠소. 내일 오후 두 시 비행기로 나는 동경엘 다녀올 일이 있으니 그리들 아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1971년 5월 6일. 날이 밝았다. 나는 7시반 경에 앰버서더 호텔로 전화를 했으나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8시 반경에 다시 했으나 종업원은 똑 같은 내용의 대답을 하였다. 9시에 다시 전화를 하니 양일동 의원이 받았다. 두 사람은 전국구 문제로 밤샘을 하고 늦잠을 잤다고 말하면서 곧 상도동으로 오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납득할 만한 선에서 이 문제를 정리해 오면 나로서는 사인만 하고 일본으로 간다고 말해 둔 바 있었다.
그 날로 아침 일찍부터 내용은 쉴 새 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세 차례의 재촉에 10시 경이 되어서야 양․김 양씨가 찾아왔다. 全國區 1번 김대중, 2번 류진산으로 된 명단을 보니 모두 54명이 막연한 순서로 적혀 있었고 당 원로인 박순천 여사는 35번째 기록되어 있었다. 실로 아찔했다.
5월 6일은 마감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 암담한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무질서한 명단을 보고「이것이 어떻게 된 거요?」한즉 양일동씨는 「우리로선 이 이상 합의를 볼 수 없으니 이제는 당수가 알아서 하는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하는 대답이 아닌가.
마감 시간은 임박해 오고 나는 그만 눈앞이 캄캄했다. 그럴 때 김대중 의원이 나를 단독으로 만나자고 말하자 양일동 의원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 때 김대중 씨는 나에게 모 사업부서에서 국장을 지낸 퇴직관리인 김모씨를 꼭 전국구 당선권에 넣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하필이면 그런 사람을 청탁하는 김의원의 요청에 難色을 표했다. 약 30분이 지나자 김의원은 가고 양의원이 다시 들어왔다. 나는 양의원에게 「이 시간까지 전국구 후보가 정리되지 않았으니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걱정스럽소.」라고 한탄을 했다.
(중략)
이러한 신념에서 박군을 영등포 갑구로 나가게 하고 나는 전국구로 나설 것을 결심했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지마는 梁․金 양씨는 당수인 나를 2번으로 기록해 왔었다. 이 2번 문제는 당의 조사위원회와 중앙상위에서 김대중씨는 당수를 전국구로 공천하자는 뜻이 아니고 당수가 추천한 사람의 뜻이라고 해명하여 사람들의 실소를 받은 일이 있었다. 그런 구차한 얘기는 길게 되풀이 하지 않겠다.
과거 윤보선씨의 경우도 당수가 전국구 1번이었고 또한 내가 전국구로 나서는 한 당수가 1번으로 등록하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 아닌가.
나는 당 조직국장 정규헌 군과 전국구 순위작업을 하면서 제일 먼저〈전국구 1번 유진산 , 2번 김대중〉으로 수정하였다. 1시 20분 경이 되니 김대중씨가 찾아왔다. 그는 내 책상머리에 앉아 내가 정리해 놓은 명단순위를 보았다.
(중략)
일곱 시 반경에 집에 도착해보니 대문 앞에서 2, 3십명의 청년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나는 대문을 열라고 말하며 집안에 들어섰다. 그때 지구당 부위원장 중의 1人인 김여산과 당 간부들이 와 있었고 술 냄새를 풍기는 청년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 때 나에게 이상한 느낌을 준 것은 김대중 의원의 수행원인 이윤수군이 그 속에 끼여 있는 점이었다. 김여산 이하 청년들의 동정을 볼 때 나는 직각적으로 난동과 파괴 행위를 계획하고 나타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안은 순식간에 소란의 도가니로 化하고 어떻게 연락이 되었는지 약 3백명이 몰려들어 돌멩이를 던져 유리창을 깨고 가구 일부를 부수고 한 사람이 의도적인 陰害가 담긴 소리를 질러대고 나면「와! 옳소!」의 박수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난동 와중에 나는 영등포 갑구의 부위원장들만 내 방에 들어오라고 했다. 그 중엔 김여산 부위원장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내가 만일 전국구로 출마할 경우 갑구에 출마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그런 희망은 다른 부위원장 및 간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방에 들어온 김여산은 무턱대고 장모라는 사람(편집자 주 : 공화당 영등포갑 의원후보 장덕진을 말함)으로부터 받은 3억원을 내놓고 탈당계를 내라고 폭언하였다.
(중략)
내 방에서 물러난 김여산 등은 내 집 마당에서 다른 청년들과 계속 소란을 피웠고 20여명씩이 교대로 집을 나가 소주 등을 마시고 들어와서는 다시「와아! 와아!」하며 폭언과 난설을 되풀이하였다.
그 날 저녁의 풍경은 소위 인민재판을 방불케 하였다. 나는 그 때 비통한 충격 속에서 〈5․25총선은 이제 망했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것을 수습하자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 순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서 난동이 전해지면 상대방인 공화당은 좋아 날뛸 것이고 내 손으로 공천한 153개 지구의 동지들 등에 대고 기관총 소사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비통한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사태의 비상함에 비추어 양일동․김의택․이철승․홍익표․김대중․신도환씨 등에게 전화 연락을 취한즉 다른 분들은 순식간에 달려왔는데 이철승․김대중 양인은 무소식이었다. 특히 김대중씨는 세 차례나 연락을 취했으나 끝내 소식이 없었다.
세 번째의 전화에서 나는 내 전화를 받는 비서가 누구냐고 물은즉 김옥두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와 김대중 씨는 평소 같으면 10분 이내로 연락이 되었다. 그 날 밤 내 집의 난동 사태는 밤 12시가 되어 겨우 진정되었고 내 집 주변에 파견되었던 세 대의 백차와 백 여명의 경찰은 난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5․6사태 직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김여산은 바로 그 날 오후 세시에 상도동 어느 다방에서 모씨(편집자 주 : 김대중을 말함)의 동생과 만나 밀담을 했다는 것이다.
그 뒤 김여산은 갑구 당사에 젊은 당원들을 모이게 하고 장모․박모(편집자 주 : 장덕진과 박정훈, 박정훈은 6․3세대의 대표주자로 신민당 영등포 갑구 후보로 선정되었다) 등으로부터 내가 돈을 받았다는 등으로 모함하고 선동하여 흥분케 하고 그 여세를 몰아 우리 집까지 진격해 온 참이었다. 나는 5월 6일 아침․점심․저녁을 먹지 않았고 자정이 지나서야 소란이 진정되었으나 달려온 당 중진들과 맥주를 마셨을 뿐 빈속이었고 낮에 입고 있던 옷으로 밤을 새웠다.
5월 7일 아침이 밝아 왔다. 가족들은 기자, 당원 등 來客들이 많이 찾아 올 것이므로 어디 가서 좀 쉬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였다. 사실상 나는 극도의 피로를 느끼고 있었다. 나는 어제 입고 밤을 새운 옷 그대로 집을 나가려고 하는데 새벽 다섯 시쯤 이세규씨가 인사차 찾아 왔다.
나는 이씨에게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유)한렬의 아파트로 갔다. 사실은 진술한 바와 같이 나는 5월 6일 한렬과 그의 약혼녀를 데리고 일본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전국구 순위가 미정인 채로 나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부득이 먼저 떠나게 해서 한렬의 아파트가 비어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좀 쉬다가 양일동씨에게 연락하여 아홉 시경에 내 거처로 찾아온 그를 만나 당수직 사퇴서를 맡긴 다음 뜬 눈으로 지새운 터라 잠을 좀 청하였다.
그런데 오후 두 시의 방송 뉴우스를 들으니 어이없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즉 내가 공천을 팔아서 막대한 돈을 가지고 해외 도피를 위해 공항으로 나갔다는 내용이 아닌가. 그 순간 이 나라의 사회 풍토 가운데서 상식이라는 것은 모조리 무너지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얼마나 돈을 모으고 내가 무슨 큰 대역죄를 저질렀기에 해외로 도피한단 말인가? 나는 이때만치 정치인들의 인심과 인성에 대해 갈등과 회의와 서글픔을 절실히 느껴 본 일이 일찍이 없었다.
해외도피를 위해서 공항으로 나갔다는 그 뉴우스를 듣고 나는 決然한 생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네 시가 되었다. 집으로 출발하기 전에 고흥문씨에게 연락을 취하니 출타중이었다. 그 시간에 김대중씨 집에서는 이른바 앞뒤의 법적 근거도 없이 조리도 닿지 않는 방법으로 6인 위원 중 김대중․고흥문․홍익표․정일형 등 4인위라는 것을 열어 나에 대한 제명을 결의하는 동시에 김대중 의원을 당수 권한대행으로 결의한다고 했다.
그 때 우리 집에는 기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들은 나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하였다. 나는 기자들에게 김대중 씨 집에서 있은 일련의 행위들은 불법일 뿐 아니라 전후의 사리를 알아보지도 않고 김대중 의원 자신이 이른바 4인위 멤버이면서 당수 권한 대행이 되는 것을 결의한 연극적 처사에 대해 어이없는 감회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이 일은 계획과 각본에 따른 조작이라는 심증을 나는 더욱 굳혔다. 5월 7일 당사의 나의 집무실은 모모씨 등의 친위청년들에 의하여 박살이 나고 양일동씨가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진행 중인 국회의원선거는 안중에 없었다. 따라서 4․27선거 때 지지해 준 국민들이 어떻게 볼 것이며 긴 안목에서 당과 나라를 어디로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김대중씨 자택에서 소위 4인위(고흥문․정일형․홍익표․김대중)가 열리고 있을 때는 김대중씨계의 친위청년들로 군중이 운집하여 노호와 함성이 엇갈리는 흥분된 분위기였다. 그런데 당수인 내가 有故時에는 양일동씨가 대행을 할 수 있고 양씨가 유고시에는 홍익표씨가 대행을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양씨가 모두 당수권한대행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일을 몰고 간 결과가 되었다.
양일동씨에게는 폭행, 폭언을 가하여 공포 분위기 속에서 당무위원회 부의장 사퇴서와 탈당계를 강제로 받아 내고 고씨는 이른바 4인위 멤버로서 김대중 당수권한대행 추대의 회합에 참석하게 되었다.
(중략)
이제 선거도 끝났다. 돌풍을 불러 일으켜 온갖 소란한 틈을 타서 나의 수십 년 정치생활을 하루아침에 생매장하려 했던 그 악의에 찬 계획과 음모의 정체를 밝혀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5․25 총선 이후 첫 정무회의가 소집되었다. 나는 그 자리에 참석하고 발언을 신청하여 양해를 얻고 당과 국민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아울러 소위 5․6 파동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 우리 당이 이 시점에서 해야 할 첫 번째 과업이라고 강조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을 요망하였다.
이러한 나의 요청과 당의 동의에 의하여 特調委가 구성되었다. 나와 김대중씨를 포함한 많은 증인들이 출두하였고, 김대중씨가 대중집회에서 연설한 녹음 테이프까지 등장하였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5월 6일 그 날 내가 세 차례나 연락을 취하고 있을 때도 자기는 5․6사태를 몰랐다고 했다. 특조위에서 김대중씨는 5월 6일 한 시경에 내가 전국구로 나가는 것을 알고 이제는 당이 망했다는 울적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어 수원 등으로 몇 시간 드라이브를 하고 필동 처가집으로 돌아와 외부와 연락을 끊고 잤을 뿐 5․6사태는 5월 7일 아침에 뉴우스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는 증언을 하였다.
그러나 찌는 듯이 더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3주야에 걸쳐 중앙상위에 참석한 3백 명의 중견 당원들은 비록 계보나 파벌의식이 의식 또는 무의식으로 작용하는 경향이 다소 있었으나 당의 운명을 이렇게 험한 지경에까지 몰고 간 진상에 대하여 사실을 밝혀야 한다는 진지한 태도들을 보여주었다.
특히 모 상무위원의 발언에서는 김대중씨가 5월 6일 당일에 당수가 전국구로 나오기 때문에 당이 망한다는 생각을 달랠 길이 없어 드라이브를 하고 처가에서 외부연락을 끊고 지내다가 5월 7일 아침에 뉴우스를 통해서 난동사태를 알았다고 말했으나, 5월 6일 밤 늦게까지 필동의 처가에서 송원영․김상현․조기철씨 등과 같이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이 지적되었을 때 많은 상무위원들은 김대중씨의 증언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상위에서는 5․6파동 특조위의 조사 내용이 보고되었다.
(중략)
나는 여기에서 분명히 밝혀둔다. 나는 나에게 가해진 5․6사태에 대하여 집념을 갖지 않는다. 다만 이런 憤辱스러운 사태를 다른 정치인은 겪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어떤 특정인이 자신에 대한 過剩 자신이나 망상 때문에 변칙적인 난동을 일삼아 큰 것을 잃어버리고 작은 것을 찾는 愚를 범하는 역사가 다시는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해 가고 있던 도덕적 윤리적 타락 현상이 국민의 저변을 병들게 한 점에 대해 자못 개탄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도덕적 윤리적 타락상에서 빚은 하나의 현상이 신민당을 휩쓸고 국민 앞에 당의 체신을 실추시킨 사실에 대해 침통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다.
우리가 집권층을 비판하고 국민의 동의를 얻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집권층을 공격하고 궁지에 몰아넣기 이전에 신민당이 겪은 자체 내의 5․6파동은 무엇으로 말해야 하는가.
연로한 당수는 일찍이 대통령 후보가 될 것을 포기하고 젊은 후보를 따라 전국을 누비며 국민이 주시하는 가운데「김대중 선생을 밀어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자.」고 역설했다. 당수와 후보는 단상에서「아버지 같은 당수님」「아들 같은 후보」로 서로 추켜세우면서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던 만족할 만한 광경들이 국민의 눈언저리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또한「아버지 같은 신민당 당수, 유진산 선생」이라고 말하던 바로 그 입술이 마르기도 전에 난동과 욕설과 모함과 서명, 당수 대행 등 쿠데타적 수법으로 모습을 변했다는 사실을 놓고 우리 국민에게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말을 해야 이해가 되겠는가. 이런 사태를 지켜본 국민은 분명히 인생의 허무와 정치의 무상, 그리고 인간성의 추악상이 지닌 표본을 5․6사태의 신민당에서 찾았을는지도 모른다. 정당이 아무리 국민을 위해서 존립한다고 말하고 정치인이 아무리 소진(蘇秦)․장의(張儀)와 같은 변설을 구사하더라도 이런 정당, 이런 정치인을 국민이 믿어 주겠는가.
우리 당은 大悟 猛省해야 한다. 하나 하나의 정치인은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수공업적인 플레이를 연출하기 이전에 국가의 기본, 민족의 장래, 그리고 민주주의의 실천자로서의 신념과 철학의 형성에 고민하고 노력하며 분발할 줄 알아야 하겠다.
유진산 씨가 지금 살아 있으면 이른바 ‘총풍사건’을 어떻게 해석할까. 김대중 집권시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사건이라고 평할까. 각자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김대중 집권 이전에도 김대중에게 중상모략과 사기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정계인사는 여야를 막론하고 셀 수 없이 많다. 김대중이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는 심지어 모든 역대정권이 모략과 사기를 당했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특히 전두환 정권의 피해의식이 유달리 컸다. 전두환은 1982년 김대중을 석방한 다음에는 김대중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히스테리를 일으킬 정도였다. 역대 정권들이 피해망상증에 걸린 것일까. 모든 경우에 대한 진상을 밝히려 한다면 대한민국의 모든 수사기관을 총동원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 지 알 수 없다.
김대중은 정적을 모략으로 누명을 씌워 제거하는 것에 대해 규탄한 바 있다.
우리가 이 시대의 엄청난 시련을 극복하고 공산주의의 도전으로부터 우리의 생존을 성공적으로 지켜내려면 인물을 발굴하고 인물을 아껴야 할 것입니다. 이조 사색당쟁과 같이 반대파는 모두 수치스러운 누명을 씌워 제거하는 불행한 풍토를 단호히 탈피하는 민족적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이 조선 왕조의 멸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될 것입니다. (김대중,『김대중 옥중서신』서울: 청사출판사, 1984, 1982년 7월 27일자 서신)
김대중은 2차 진산 파동이 일어나기 불과 18일 전인 1971년 4월 18일 장충단 유세에서는 유진산 총재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생을 조국에 바친 유진산 당수, 나 개인적으로는 친부모 같은 분이 자기가 나를 처음엔 후보로 안 밀었지만 당에서 결정하니까 국민의 선두에 서서, 민주주의 원칙에 복종해서 오늘날 동으로 서로 갖은 고생을 하면서 여러분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투쟁을 하고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