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고는
다시 나왔죠.
오전부터 어색한(?) 치마차림이었으므로 상당히 편한
복장이 필요했어요.
입었다하면 어디든지 굴러다닐 수 있는.
훗... 그래도 무릎의 시원한 찢어짐을 조금 감안해
끄트머리를 약간 꼬맸다구요.
오후. 날씨도 좋고 선들거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천천히 돌아다니는 것도 좋고... 일단은
집을 나섰죠. 그 찢어진 청바지와 함께 말입니다.
사실 그 청바지를 그다지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다소곳한 치마의 불편함은 더욱 싫어하는 편이죠.
여름이라면 더위 때문에 모를까..
문제의 발단이랄까.
집을 나서면 골목이 세 갈래가 나옵니다.
그 중 늘 다니는 골목은 가운데 골목인데요. 오늘은
세 갈래의 길 중에서 제일 아래쪽을 택했습니다.
차량도 드물고 인적도 두 길보다는 드문 편이었죠.
후미진 뒷골목을 상상케 하는 요소는 당연 없습니다.
오해는 마시고.
늘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선택에 대한 통과의례랄까요.
그 아랫길을 택한데는 순전히 '인적이 드물다'는 이유가
적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게 있어 새로운
시도나 다를바 없었죠.
따뜻한 햇살을 음미하며 느긋한 걸음으로 골목을 진입했죠.
중간에 이르렀을즈음 ㅇㅇ 아파트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시더군요. 물론 연세가 상당히 지긋하신 분이었구요.
여기서 저는 잠시 머뭇거려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자세를 돌려 찢어진 부분으로 보여지는 무릎이나
허벅지를 조심했어야 했겠죠.
그러나 어쩝니까. 이미 집을 나서는 동안 까마득 잊어버릴
필요도 없이 '내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라는 사실을
생각지도 않았으니까요.
할머니와 수초간 눈이 마주쳤고 여느때와 다를바없이
그냥 눈웃음만 넌지시 보내드리고는 계속 가던길을 가려고 했지요.
순간
"야 이노무 가시나야!"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 '가시나야'라는 말을 들을 만큼
어려보이지는 않았거든요. 당연히 다른 사람인 줄 알았기 때문이죠.
그냥 가던 길을 갔습니다.
"이노무 가시나가 이 할매가 뭐라카는데 그냥 갈라카노
니 요 안오나"
그제서야 성난 목소리와 매서운 할머니의 말의 타겟이 저라는 걸
알았죠 뒤를 돌아보니 할머니는 어느새 바로 제 뒤에 서 계시더군요.
"이 가시나야 니 그거 뭐꼬"
"예? 어떤거요?"
"니 그 옷 꼬락서니가 뭐꼬 말이다."
난처하게 웃고 서 있는 저를 향해 또 한번 윽박지르시더군요.
"웃어? 니 지금 이 할매가 뭐라칸다고 비웃는기가? 으이?"
"할머니 그게 아니구요..."
"그기 아이믄 뭐꼬 나이처문 가스나가 옷이 그기뭐꼬
다릿살 허옇게 내놓고 다이믄서 옷도 다 찢어져가.
집에가 꼬매 입든가 안그라믄 멀쩡한거 입고 댕겨얄거 아이가
벌건 낮에 시상에... 느그 어무이 뭐라 안카드나"
이런 얘기는 자주 들어봤는데 정작 당하고 있으니(?) 상당히
당황스러웠죠. 아파트에서 몇 몇 사람들이 지나다가 쳐다보고
골목 상가 사람들이 하나둘씩 얼굴을 내밀길래 죄송하다고
얼른 가서 갈아입고 다시 나오겠다고 하고는 냅다 꽁무니를 뺐죠.
두번째 골목으로 다시 접어들면서 피식 웃음이 나오더군요.
하나는 노골적으로 옷차림에 대해 나무라시는 할머니를 보니
시골 외할머니가 생각나서고 또 하나는 이제는 이상하다고 할 것도
없는 옷차림에 대해 누군가는 말없는 질타를 보낼수도 있겠다는
거죠.
뭐... 지금도 앉아서 무릎부분의 실밥을 손가락으로 돌려대고는
있습니다만...
하하... 재미있는 오후였어요.
꽁무니를 빼는 골목 어느 상가 아주머니 혹은 아저씨가
그 장면을 보고 빙그레 웃으셨죠. 저도 빙그레 웃으며 그 골목을
벗어났구요.
다음에 정숙한 차림을 하고 그 골목을 다시 가봐야겠어요.
흐흐... 할머니 한 번 더 뵙고 싶으네요.
설마 다음번엔 오늘처럼 손가락으로 쿡쿡 찔리지는 않을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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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아꼬군.
목록 보내놨어요.
확인하셔.
첫댓글 하하. 그 할머니, 못입고 못먹던 옛날 생각이 나셨나봐요... 그런 분들, 옷 찢어다니고 남긴 밥 버리는 거 못보시죠... 그리고 보니 님도 참 성격이 좋으시군요. ^^
자신의 처녀적때는 지금처럼 못하고 다녀서 조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지 않으려나..음.. 너무 이쁘게 하고 다니지 마여.._-;
음.. 저도 심히 걸레가 되어가는(-_-;;) 심각한 수준의 청바지가 하나있는데.. 공원 입구로 가기가 귀찮아 철조망을 넘다가 북 찢어졌었다는..;; 그래도 꿋꿋이 입고 다닙니다.ㅎㅎ
벚꽃놀이를 보러 갔었는데요.. 상점의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이야길 하다가 동생과 제가 지나가니까 그러시더군요.. "이게 뭐고??" "저게 옷이가??" 등등..ㅎ... 뭐.. 사람들 시선을 즐기는 터라 별 신경은 쓰지 않았습니다.ㅎ... 따스한 봄날이군요. 어딘가로 훌쩍 떠났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젊게 사는군요 엘님은...아 메일 보냈습니다. 보유 목록까지. 소유한 책의 성격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 나오는 것일까 라는 생각중....
으흐흐.. 저는 얼마 전에 총알 바지(다 아시죠?)라는걸 샀지요. 할머니가 그것도 제 값 주고 샀냐며 호통을 치시더니 꼬메준다고 어서 들고오라고 하시더군요. 지금 농 안 깊숙히 감췄습니다. 언제 들켜서 꼬메질지 심히 불안합니다. ㅜ.ㅜ
할머니의 정이 느껴지는데요? 그 옛날 구수했던 입담말이에요. 너무 좋네요...
^-^재미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