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승천 대축일 강론>(2024. 5. 12.)
(사도 1,1-11; 에페 1,17-23; 마르 16,15-20ㄴ)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6-11)”
1)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승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을 사도들이
직접 보았다는 증언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셔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음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승천이라는 사건을 증언한 것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신앙을 고백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부활 후에 사십 일 동안,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러 번 만났고(사도 1,3), 그 예수님이 ‘하느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일을 ‘승천’으로 이해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는 말은(마르 16,19),
그렇게 믿는다는 믿음을 고백한 말인데,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별’이 아니라, ‘존재 방식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기뻐했습니다(루카 24,52).>
2)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아주 낮은 곳 곧
땅으로 내려와 계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려오셨던 그분이 바로 만물을 충만케 하시려고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신 분이십니다(에페 4,9-10).”
우리는 예수님의 ‘올라가심’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의 ‘내려오심’을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내려오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여기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은,
뜻으로는 “하느님이셨지만”입니다.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는, 뜻으로는 “종이 되시고”입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땅으로(사람들 속으로) 내려오셔서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 사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냥 높은 하늘에 계시면서 사람들에게 “여기로 올라오너라.”
라고 명령하시는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오는 방식을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서, 우리는 “사랑은 같아지는 일”,
또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쪽으로 내려가 주는 일”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3)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가 되시어,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히브 6,20).” 라고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선구자로” 라는 말은, 우리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당신이 먼저 그곳으로 가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요한 10,3ㄴ-4ㄱ).”
‘승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로 ‘앞장서 가신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앞장서 가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콜로 3,1).”
<‘위에 있는 것’은 하느님 나라, 구원, 영원한 생명입니다.>
4) 사도행전의 승천 이야기에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라는 천사들의 말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요한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늘만’ 쳐다보지 말고, 땅도 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땅만’ 보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시선은 하늘을 향하지만
발은 땅을 딛고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지만,
또는 승천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만,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인류의 복음화와 구원, 그리고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 등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 17,13-17).”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https://syj1212ad.tistory.com/521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티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