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월을 되돌아 보면
낙동강변에서 개구장이로 살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같다.
어른이 되면 세상 모든 걸 마음대로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착각이었음을 안 것은 한 참 후였다.
매년 이맘 때면 시골 마을에 신나는 일이 하나 기다리고 있었다.
떡을 거의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날이 오늘이었다.
아직 계절이 일러 콩사리, 보리사리, 밀사리도 기다려야 하던 시기에,
왠 떡이냐?
바로 위 사진의 장소에 가면 떡을 거의 무한대로 먹을 수 있었다.
떡을 실컷 먹고 사진 뒷편으로 보이는 낙동강에서 목욕을 하고 나면 배가 꺼진다.
그러면 다시 기서 먹었다.
어느 해에는 너무 많이 먹어 배탈이 나기도 했다.
바로 저 위 사진의 장소가 떡을 나누어 주던 곳이었다.
그게 어디냐?
옥연정사다.
서애 유성룡이 벼슬에서 물러나 징비록을 쓰던 곳이다.
유성룡과 충무공은 참으로 인연이 질기다.
이런 경우를 심리학자 칼 융은 동시성 이론이라 불렀을 것이다.
임란의 징후가 가까워 오자 조정에서는 일본으로 사신 두 명을 파견했다.
역사에서 배운대로 황윤길과 김성일 두 사람이었다.
돌아와서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김성일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다.
결과적으로 황윤길의 예측이 맞았다.
후에 유성룡이 물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는다고 말을 한 이유가 뭐냐?'
이에 김성일이 대답했다.
'나마저 일본의 침략을 당연시 한다면 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김성일은 유성룡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두 사람 모두 어려서 퇴계 선생 밑에서 공부한 동문이었고 절친한 사이였다.
그러나,
후일 퇴계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두 집안은 원쑤기 되었다.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퇴계 선생의 위패를 모실 적에
걸출한 두 제자의 자리를 좌우 어디로 할 것이냐 하는 문제로 대립한 것이다.
안동 김씨 문중에서는 당연히 연장자인 김성일을 좌측에 앉혀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풍산 유씨 집안에서는 당연이 벼슬이 더 높았던 유성룡을 좌측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대립은 400년 이어지다가 10여 년 전에야 결말이 났다.
안동 김씨 측에서 양보를 한 것이다.
이순신을 천거한 것은 유성룡이었다.
임진왜란의 낌새를 알아차린 유성룡이 선조에게 적극 이순신을 천거하여 장군의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동인이었던 유성룡과 이순신을 모함하지 못해 안달하던 서인들이 온갖 음모를 꾸몄다.
마침내 정여립의 난이 터졌다.
정여립...
참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역사의 인물이다.
왜란의 징후가 보이자 정여립은 사방으로 대책을 호소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
그러자 정여립은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켰다.
그러나 조정의 눈에는 반란을 도모하는 것으로 비쳤다.
결국 선각자 정여립은 죽음을 면치 못했고 동인들도 많은 피해를 보았다.
임진왜란으로 충무공이 승승장구하자 겁많은 선조는 충무공을 죽이지 못해 안달했다.
조광조를 두려워했던 중종과 흡사했다.
마침내 충무공은 투옥되었다가 충무공의 뒤를 이은 원균이 참패하는 바람에
달리 방법이 없었던 조정에서는 충무공을 다시 전라죄수사로 복귀시켰다.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충무공은 왜적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참, 기가 막히게도 충무공이 숨을 거두던 날은 유성룡이 영의정에서 파직되던 날이었다.
이 기막힌 인연을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향,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온 유성룡은 징비록을 쓰기 시작했다.
저 위의 사진이 바로 유성룡이 징비록을 쓴 옥연정사이다.
어릴 적에 우리들의 놀이터였는데...
앞서 이야기로 돌아가,
이 즈음 왜 떡먹을 일이 그리 많았느냐...
오늘이 바로 유성룡 선생이 숨을 거둔 날이다.
제삿날인 것이다.
이날이면 각지에서 떡과 음식이 이곳으로 배달되어 풍성한 잔치가 열렸던 것이다.
아이들은 멋도 모르고 그저 먹을 것이 있어 좋았던 유년시절이다.
오늘 원고지 875매 출판사로 넘겼으니,
다음 책은 정여립의 예지와 억울함을 함 달래 볼까나...
노을~
첫댓글 1등으로 축하드려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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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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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이나 아님 르네상스 시대 원근법 화가들의 죽음을 함 쓸까 함다...
신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세상으로 보려 했던 르네상스 화가들의
의문의 죽음~~교황청 이단심문실의 비명소리, 뭐 그런~~ ㅎ~
탈고 축하드립니다.+^^+
시원하시겠습니다. ~
김일성의 고향이 안동이었군요.
감사~~ 김일성이 아니라, 김성일, ㅎ~~~
@노을이야기 ㅎㅎ
내래 왜 김일성으로 읽었갔시요?
@솔숲 앵김일성이라니
안동 김씨 문중에서 가만 있을라나
@산자락 글게요 . ^^
그 동네 그런 사람 없었는데
손가락이 왜 그리로 갔을까욤
요즘 징비록을 아주 관심 있게 기다리며 시청 하고 있는 중인데가와 하지 않는 왜곡된 잣대
충무공이 총탄에 쓰러지던 날 동시 류성용이 여의정에서 파직 되었다는 사실 처음 알게 되었네요
위기 의식의 선조는 제 한몸 가꾸기에만 급급 하는 처신에 분노와 울분을 느끼곤 합니다
류성용과 이순신을 탐탁치 않게 대하는 선조, 분조의 광해군이 왜적을 통쾌하게 무찌르는 공적을
드라마 전개를 계속 시청 할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배울수 있는 국사 인데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
잘 배우고 갑니다,
다 그렇지요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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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감사합니다...
와, 사진이 정말 멋지네요. 예술입니다. 분명 노을이야기 님 작품같습니다. ㅎ
그 많은 원고를 넘기셨다니 정말 수고많으셨습니다. 좋은 소식이 밀려들기를 소망합니다. 축하드립니다.^^*
순이님에게도 존 일 가득 하시기를요~~
유성룡 어르신 하고 김일성 하고 동문 이라는 사실 처음 알았습니다,
배우고 갑니다,
두 분 다 퇴계선생의 애제자들이지요, 감사!
@노을이야기 가을이 님께서도 김일성이라 쓰셨네요..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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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꾸벅~~
원고지 875매 대단하십니다.
담긴 뜻은 더 크겠지요.
과로하시지 않으시기를 빕니다.
건강하세요 ^^
감사합니다...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하지요.
오늘도 우리의 역사의식을
연결하셔서 정리를 잘 하고 갑니다.
875매의 작품을 남기면서, 여기서도 늦추지 않는
노을님이 대단해 보이네요.
이구나...대단은 무신요...'소단' 정도면 맞을 듯 하네요...ㅎ~
@노을이야기 그참, 노을님은 제 댓글에 삐딱하십니까?
저는 언제나 진심만을 내 놓는데....
겸손? 지나치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