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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를 보신분이시라면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시고 프롤로그를 읽지 않으신 분은 닥치고 프롤로그 필독데스네~^^ 흠흠. 기다리신분이 계시다면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조금씩 조금씩 정리를 하고는 있었지만(오직 머릿속으로;;;) 생각보다 글로 옮기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앞으로는 정말 전력투구하여 쭈~~욱 이속도로 올리겠습니다.;; ㅡ.ㅡ 이번편에서는 거기보전으로 변해가는 조선의 군사체제와 결정적 요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 임진왜란 종전 그리고 새로운 정세.
프롤로그에서 설명했듯이 칼질에 발리던 조선이 터지다 터지다 못해 중국의 척사마 옵하야의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펴낸‘병학지남’에 의해 살수대에 비중을 두는 편제로 바뀌게 되었다. 척계광당시 조총의 신뢰도가 떨어졌고 궁시와 조총만으로는 돌격해 들어오는 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이 임진왜란을 통해 입증된 결과라 하겠다.
<<개인적 사견을 몇 줄 주저리거리자면 왜 조선이란 나라는 쳐 맞기 전에는 이걸 생각도 안 해보다가 꼭 쳐 맞고 나서야 죽은 아들 불알 만지듯, 럴커 맵의 반을 채우도록 돌아다니는데 생마린인 짓거리를 해대느냐는 것이다. 아~~ 쩝. 말을 말자.>>
(이 쉬바쉐끼들아~~~!!!!!! 쳐 맞기 전에 알아서 정찰 좀 해란 말이다!! SCV는 뒀다가 국 끓여먹을래???)
(1) 동북아 국제정세의 변동.
조선에 절강병법이 전해진 것은 임란동안이고‘병학지남’이란 정말 <기효신서>의 캐요약 카피 판을 통해서다. 절강병들이 잘싸운다는 건 임란을 통해서도 증명됐기에 절강병법이 왜군을 상대로 하기에는 탁월한 전법임에는 확실하다. 조선은 이 절강병법을 그네들의 실정에 맞게 삼수병(三手兵)체제로 변형시켜 운영해 나간다. 뭐 괜찮았다. 썩어도 준치라고 원본이 워낙 Anti - Japanese 라서 쓸 만했다. 그러나 조선이 천년만년 일본하고만 전쟁 치르는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의 종전직후 조선의 주적은 곧바로 바뀌었다 할 수 있다. 조선이 이것을 인지했던 못했던지 간에 말이다. 그렇다. 말 타고 달려오신 누르하치 옵하와 아이들. 이들이 조선을 위협하는 ‘주적’의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임진왜란이라는 극동아시아의 최대 3국이 참여한 전쟁을 통해 후금은 기회는 이때다! 를 외치며 세력 확장에 나선다.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던 명, 조선, 일본이 모두 정신이 없는 사이를 노린 것이다. 그리고 이 전략은 성공했다. 명은 발린 것이다;; 조선은 금나라를 오랑캐라 치부했기에 명나라를 편들고 나서고 당연히 이것이 금에게 좋게 보일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이 닥치고 고야 말았다.
(2) 정묘호란
1616년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냈으나 광해군의 뒤를 이은 인조가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하고, 랴오둥[遼東]을 수복하려는 모문룡(毛文龍) 휘하의 명(明)나라 군대를 평북 철산(鐵山)의 가도(?島)에 주류시켜 이를 은연히 원조하므로, 명나라를치기 위해 중국 본토로 진입하려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또한 후금은 명나라와의 싸움으로 경제교류의 길이 끊겨 심한 물자부족에 허덕여 이를 조선과의 통교(通交)로써 타개해야 할 처지에 있었고,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의 잔당들이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여 후금 태종은 더욱 결전의 뜻을 굳히게 되었다
- 이하 네이버 백과사전
나름 잘하고 있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조선 또라이 임금 베스트에 드는 인조옵하가 조선의 정권을 잡았다. 이른바‘인조반정’이다. 그리고 위의 기술과 같이 당시의 정세를 무시한‘향명배금’정책을 시행하였고 후금과의 마찰은 커져만 간다. 그리고 결국 1627년 1월 후금의 병력은 압록강을 도하하고 만다. 정묘호란의 전개과정을 보자면 아래와 같다.
1627년 l월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軍)은 앞서 항복한 강홍립(姜弘立) 등 조선인을 길잡이로 삼아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공략하고 이어 용천(龍川) ·선천(宣川)을 거쳐 청천강(淸川江)을 넘었다. 그들은 ‘전왕 광해군을 위하여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걸고 진군하여 안주(安州) ·평산(平山) ·평양을 점령하고 황주(黃州)를 장악하였다.
조선에서는 장만(張晩)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싸웠으나 평산에서부터 후퇴를 거듭, 그 본진이 개성으로 후퇴하였고 인조 이하 조신(朝臣)들은 강화도로 피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全州)로 피란하였다. 황주에 이른 후금군은 2월 9일 부장 유해(劉海)를 강화도에 보내
① 명나라의 연호 ‘천계(天啓)’를 쓰지 말 것,
② 왕자를 인질로 할 것 등의 조건으로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이에 양측은 ① 화약 후 후금군은 즉시 철병할 것, ② 후금군은 철병 후 다시 압록강을 넘지 말 것,
③ 양국은 형제국으로 정할 것,
④ 조선은 후금과 화약을 맺되 명나라와 적대하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3월 3일 그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측은 왕자 대신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보내고 후금군도 철수하였다.
- 이하 네이버 백과사전
내용은 장황하지만 역시 개발린 것이다. 왜군과 후금의 기병은 전혀 달랐다. 기병을 상대로 절강병법이 한계를 들어낸 것이다. 이는 척사마옵하도 인정했다.
(3) 아~~놔! 상성이 안맞으믄 태크를 타라고!!
「조선에 입수된 기효신서는 다양한 판본이 존재하는데 가장 잘 알려진 판본은 1566년 왕세정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을 바탕으로 편찬된 "왕세정본"과 1588년 이승훈이 척계광 사후 출간한 "이승훈본"이 있으며, 후자는 척계광이 북방에 부임한 이후 북방기병에 대응하는 전법을 소개한 연병실기의 내용을 추가한 것이며, 조선에 입수된 기효신서는 후자인 이승훈본이다.」
- 레미엘님 글에서 발췌
척계광 자신도 절강병법을 왜구나 왜군을 상대로만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고 북방으로 배치받은 후에는 절강병법을 변형시킨다.
「척계광은 계주총병으로 부임하면서 북방의 오이라트부에 대한 방어체계를 혁신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연병실기"라는 저작과 같이 북방기병에 대응하기 위한 "거기보전"을 통해 전차를 중심으로 한 병력을 구성하게 된다. 이미 1447년 통병관 주면이 화차비전방안이라는 전차전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가정 43년인 1564년에는 중앙군인 경영에 전차영을 건립하여 4000량의 전차를 보유하고 1569년 척계광은 계주에 7개 전차영을 설치하고, 전차영은 포로 무장한 중차 156량, 경차 256량과 보병 4000, 기병 3000으로 구성되었다.」
-레미엘님 글에서 발췌
따라서 애초의 조선에 입수된 절강병법은 왜군을 상대로도 또, 북방기병을 상대로 어느 정도 먹혀들어가게 손보아진 패치 판이란 것이다. 근데 진짜 또 발린 이유는 무엇일까?
(4) 패치는 됐으나 불법 크랙판은 패치 후 실행이 안 된다?;
패치 후 크랙까지 업데이트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의 절강병법 패치판은 실행이 안되었다. 척계광은 기병을 상대로 할 때 살수대의 비중을 줄이고 화차를 비롯한 화력의 증강을 중요시 한다. 허나 조선은 여전히 임진왜란의 상흔 때문인지 정말 패치의 미스인지 주어진 자본은 패치판 절강병볍대로 화기운용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실제 운용은 살수대 중심으로 돌아가게 된다. 화차 및 화포 졸라게 끌고 다녀야할 전략토대를 가지고 살수대 위주의 단병접전기 위주로 실제 전술운용을 하게 됐던 것이다.
시즈모드 업글 해놓고 시즈모드 사용안하는 아니 시즈모드가 뭔지도 모르며 어디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개념이 잡히지 않은 캐안습의 상황인 것이다.;;정말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정묘호란은 그렇다 쳐도 병자호란은 또 왜 발린 것인가?
물론 조선도 정묘호란의 패배로(조선이 그래도 소 잃고 외양간은 고치기라도 한다.) 전략, 전술의 대대적인 변화가 있어야 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병자호란 직전에 정온이란 개념지대로 박힌 옵하야가 나름 패치를 시행한다.
(5) 삼첩진(三疊陳)
「정온이 말한 삼첩진의 대형은 기본적으로 변형된 학익진에 가까운데, 전체적인 포진 형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병종별 배치와 운용방식입니다.
방포대 1000 방포대 1000 방포대 1000
방포대 1000
사대 3000
살수 1000
편군 1000
기사 3000
대략 이런 모양이 됩니다.
* 방포대는 화약무기, 특히 조총부대를 의미하고 사대는 보병 궁수입니다. 살수는 칼이나 창 등 단병기를 운용하는 보병입니다. 편군은 편곤을 든 기병, 기사는 활을 든 기병이 됩니다.
* 방포대 전면에는 능철이나 거마책 등 대기병 장애물을 설치합니다.
* 방포대는 모두 중행(重行), 다시말해 두줄로 서는데 앞에 사람이 앉아서 쏘고 나서 뒤로 가서 재장전할 동안 뒷 사람이 쏘는 방식입니다.
* 방포대의 사격이 끝나면 사대가 활을 쏘게 되어 있습니다. 활을 쏘는 거리는 적이 45보까지 접근했을 때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적의 공격이 저지되면 편군과 기사가 출동해서 적과 합전(合戰)하거나 적의 핵심부대(중견)에 돌격(치돌)하거나 혹은 매복해서 적의 후퇴로(귀로)를 차단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신재호님 글에서 발췌
보이듯이 화력에 중점을 두어야 후금이하 북방기병을 상대하기에 효용성이 있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고 조선초기의 오위진법의 기병운용도 어느 정도 더 복원되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이 나온 이상 병자호란 때는 나름 만만의 준비(인조 생각 하에)를 해놓고 전쟁에 대비한다. 인조가 아무리 또라이 기질이 있다지만 뭔가 개길때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다. 이번에는 안 발린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또 발린다. 이번엔 정말.... 조선이 못 났다기 보다는 후금. 즉 청나라 아훼들이 좀 시대를 앞서갔다.;
(6) 병자호란..아 설명하기도 귀찮다.
물론 인조가 개긴것이 무언가 민족적 자긍심에 의해서거나 조선을 위한다기 보다는 결국 지꼴린 맛에 한 것이다. 청은 점점 그 국력이 막대해져 가는데 조선은 정말 생뚱맞게 명에 대한 사대의 자세를 굽히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도와준 건 정말 고맙다. 근데 그게 어쨌단 말이냐? 특히나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에 말이다.
병자호란의 유발과정은 정말 조선의 캐삽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이다. 대강 알아보자.
「조선의 함경도와 평안도 주민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후금 영내로 잠입하여 산삼을 캐는 일이 많았다. 이는 중대한 강화조약 위반으로 후금과 조선 사이에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막기 어렵다고 변명하였으나 실제는 조선의 부정부패 때문에 비롯된 일이었다.
즉 조선 정부가 과도한 산삼 공납을 부과한데다가 지방관의 횡령으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할당량을 채우려 국경을 넘었던 것이다. 공납을 제대로 못할 경우 사형까지 당했으므로 주민들은 사형 죄에 해당하는 월경을 해야 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형편이었다. 조선의 불성실한 자세를 청 태종은 여러 차례 지적했다. 다음은 인조 11년(1633) 3월 조선에 전해진 국서이다.
‘내가 누차 글을 보내 바른 말을 하면서도 뜻을 너그럽게 한 것은 대개 왕이 스스로 깨달아 고쳤으면 해서인데, 도리어 나를 보고 변심하였다고 할 줄 누가 생각이나 하였겠소. 맹약한 이래 그대가 마음을 변하였지, 내 뜻은 변한 적이 없소이다. … ‘」
그렇다 첨에는 말을 좋게 했다. 그러나 역시 애들은 잘해주면 기어오르는 법이다. 이에 따라 국서의 내용도 점점 까칠해져 간다. 급기야는 이렇게 된다. (요약하여 양념을 조금 뿌리자면)
‘그러니까 그쪽이 툭하믄 이랫다 저랬다 하니까 내가 폐물(幣物)을 증가하자고 말한 거잖니?. 말이다. 내생각은 그렇다? 니네가 폐물의 양을 증가시키고 싶지 않으면 사리를 들어 말해야지 어째 니덜의 구린 것은 쌩가고 남한테만 잘못했다고 둘러씌워 우리의 무역길을 블럭킹하면서 하늘을 부르짖으며 함부로 입을 놀리니?. .......이하 중략(끝에서 급흥분)
.......그니까...아~~놔 쉬바 생각하믄 할수록 짱나네. 계속 한말 또 하고 또 하려면 니 꼴릴 대로 하세요. (그렇게 되면) 나도 내 방식대로 할 라니까.‘
이렇게 변한다. 참 사람 약 올리는 데는 타고난 인조와 조선 조정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모자라는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서 조선과의 ’교역‘으로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허나, 조선은 매~~우 비협조적인 자세로 나왔고 뭔가 좀 빽이라도 있는 놈이 그러면 이해라도 하고 미움이라도 덜 받을 텐데 이건 뭐 막말로 거지 깽깽이 같은 자식들이 목에 힘만 주고 있으니 화가난다기 보다도 어이가 없었던 청 황실이었다.
오죽하였으면,
「척화여론에 밀려 조선 정부가 교역단절을 통고하자 홍타이지는 격분하여 10개 항에 걸쳐 조선의 과오를 질책하는 국서를 보냈다. 이 국서는 말미에 “그대는 (조선) 백성의 부모인데 백성으로 하여금 병화에 시달리게 하고 오직 명나라만 믿어 우리의 원수가 되려고 하는가. 그렇게 되면 우리와 더불어 싸우는 수밖에 없다”고 하여 조선이 명에 대한 사대에서 벗어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얼마나 갑갑하였으면 이랬을까? 솔직히 명이던 조선이던 쌍으로 덤벼들어도 해볼만한 게 당시 청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절대 아니다. 허나 조선은 이렇게 청나라애들이 격분을 하건 갑갑해서 울화통이 터지던 전혀 신경쓰지 않는 투로 대응한다. 막말로 삥뜯기면서 실실 쪼개면서 뜯기고 있는 것이다. 뜯는 입장에서 정말 기분 더럽지 않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이놈의 인조자식이 개 또라이 짓을 감행한다.
「해가 바뀌어 병자년(인조 14년, 1636)이 되었다. 2월 16일에 융알다이(英俄爾岱 : 조선의 각종 기록에는 용골대로 표기)와 마푸다(馬福塔, 瑪福培 : 조선의 각종 기록에는 마부대로 표기)를 대표로 하는 후금의 대규모 사절단이 의주에 왔다. 이 사절단에는 내몽고 장수 77명도 들어 있었다. 사절단은 후금의 쿠사왕 8인과 몽고 왕자의 서신을 전달했는데 내용은 후금 태종에게 황제의 존호를 올리는 일에 조선 국왕이 찬동해 줄 것과 형제의 예 대신 군신의 예를 취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였다.
조선의 여론은 절대 불가였다. 우의정 이성구(李聖求 ;『지봉유설(芝峰類說)』의 저자 이수광의 아들), 이조판서 최명길 등은 이 문제로 말미암아 전란이 야기될 수 있으니 후금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의견을 제시했으나 척화론에 묻혔다. 홍익한, 윤집, 오달제를 비롯한 유생들은 ‘즉각 후금 사신의 목을 베고, 후금과 단교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줄지어 올렸다.
척화여론이 비등하자 이종은 태종이 보낸 국서의 접수를 보류하고 서울에 온 융알다이와 마푸다를 객관에서 연금 상태에 놓고 감시했다. 척화론 자들은 연일 객관에 몰려가 규탄 시위를 벌이고 참수할 것을 주장했다(이들은 병자호란이 났을 때 달아나기 바빴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융알다이와 마푸다, 그리고 같이 온 일행은 숙소를 빠져 나와 민가로 들어가 말을 빼앗아 타고 귀환하였다. 그제야 조정에서는 겁이나 잇달아 재상을 보내 만류했으나 이들이 돌아올 리 없었다.」
필자가 전부터 생각해본 건데 아마 인조는 헤어스탈일이 뽀글이 머리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딴 깡이 나올 수가 없다. 장담한다.
(6-1) 먼~~산~ 언저리 마다 청기병~~지나가고.
인조가 저딴 소리 하기 전에 이미 대사간 윤황(尹煌)이 관서 지방을 순찰하고 올린 상소문을 보면 임진왜란 직전 조선과 흡사하다 못해 더하다. 한마디로 전쟁이고 나발이고 한번만 살려줍쇼 하고 빌어도 모자랄 판이었던 것이다. 국가 간의 존폐가 달린 마당에 무슨 놈의 왕실의 존심 따위나 내세우고 있다니...하~~ 그리고 병자호란이 시작되고 단 1주일 만에 아름답게 수도가 함락된다. .....흠.. 뭐 이건 조선이 못났기도 했지만 청나라의 전략이 잘 짜인 영향도 있다. ... .............그렇게 생각하자.
「12월 2일 마푸다가 이끄는 기병 6천명이 선두에 서고 좌익군과 우익군 전부가 뒤따라 출발했다. 이날 조선이 보내기로 결정한 사신 박노와 박난영(朴蘭英)이 심양을 향해 출발했다(원님 행차 뒤에 나팔을 불어도 분수가 있어야 한다).
12월 3일(양력으로는 1637년 1월에 해당한다) 청 태종은 예친왕(禮親王) 다이산(代善)과 함께 중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하여 의주로 향했다.
12월 8일 가장 먼저 출발한 마부대의 기병 6,000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청의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침공이 모두 겨울에 있었던 이유는 강을 건널 배가 충분하지 않아 압록강이 얼기를 기다린 때문이다. 마부대가 이끄는 청군은 지나는 성읍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질풍같이 서울로 직진했다. 유사 이래 보기 힘든 속도의 진군이었다. (멍멍~~ 조선군의 표정들이 상상이 간다.)
이날 오후에는 예친왕 도도가 이끄는 좌익군 3만 명도 압록강 북안에 도착하였다. 조선이 의주의 진을 비워 둔 상태라 이들은 도강하여 의주에 무혈입성했다. 서이도와 니칸이 지휘하는 부대가 백마산성으로 진출하여 공격하자 백마산성 수비군은 포격을 개시했다. 도도는 시간을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남진을 계속하였다. (머~~~~~~~~~~엉. 조선병사曰 : 저..째네들 걍 가는뎁쇼? 조선장수曰 : 뉘미 짱개 시키들 그릇은 가져 가야제? 다먹었당게!!!) 물론 진정한 의미의 짱개들은 아니다;;
12월 10일 청태종이 이끄는 중군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영내에 진입했다. 청 태종은 의주?용천?곽산?선천?정주 등 여러 지역에 소수의 병력만을 잔류시켜 조선군의 동태를 감시하게 하고 계속 남진하였다.
12월 12일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의 장계로 조선 조정은 청군의 침입 소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내용은 “9일 압록강 건너편에 적병이 가득 차더니 이날 저녁에 길을 나눠서 강을 건너고는 속도를 갑절로 하여 급히 나간다” 는 것이었다.
12월 13일 도원수 김자점이 장계를 보내와 청군이 안주(安州)에 이른 것을 알게 되었고, 날이 저물 무렵에는 김자점의 장계가 또 도착하여 청군이 이미 평양에 이르렀다고 전했다.
이날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니네들 끄떡 하믄 강화도 관광패키지 사용하더라?)
12월 14일 개성유수(開城留守)의 장계로 청군이 개성을 통과한 것을 알게 되자 귀양보낸 사람 등 모든 죄인을 사면시키라는 명이 내려졌고, 새로 임명한 수령들은 서경(署經)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임하게 하였다. 또 급히 한성 판윤 김경징(金慶徵 ; 영의정 김류의 아들)을 도검찰사로 삼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명하고 강화유수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임하게 하여 강화도를 지키도록 했다. 한편 상중에 있는 심기원(沈器遠)을 서울을 지킬 유도대장(留都大將)에 임명했으나 그에게는 수하 병력이 600에 불과했다. (제대로 하는게 무엇이냔 말이다;;)
세자빈과 원손(元孫), 봉림대군?인평대군은 강화도로 피신했다. 오후에 이종은 소현세자와 더불어 도성을 빠져 나와 강화도로 가려했다. 그러나 청군의 선봉부대가 양천(陽川)에서 길을 차단하는 바람에 남대문으로 돌아왔다. (튈라믄 발업을 좀 하던가~~)
최명길이 자청하여 청군 진영을 찾아갔고 마부대와 회담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에 이종은 세자와 백관을 이끌고 동현로(銅峴路 ; 지금의 을지로)를 지나 수구문으로 도성을 빠져나갔다. 이종 일행은 살곶이 다리를 건너고 마장리(馬場里)를 거쳐 얼어붙은 신천과 송파 나루를 건넜다. 남한산성에 들어간 것은 이경(二更 ; 밤 10시 전후) 무렵이었다.
이때 왕을 호위하던 군사는 중도에 달아나 겨우 5, 6명만이 산성에 따라 들어갔으며 소현세자를 수행하던 군사들도 모두 도주해 세자가 손수 말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산성으로 들어가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쩔 수 없는 당시 국민성이다.)
12월 15일 새벽 이종은 남한산성을 나와 강화도로 피신하려 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데다 큰 눈이 온 후 길이 얼어붙어 이종이 탄 말이 미끄러져 넘어졌다. 이종이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으나 수없이 자빠지고 엎어져 발을 다쳐 다시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뭐병)
성안에 있는 군사는 1만 2천여 명이었고 문무관과 산관(散官)이 2백여 명, 종실과 삼의사(三醫司 : 의료기관인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에 속한 의원, 관리가 2백여 명, 下吏가 1백여 명이었다. 왕을 뒤따라 입성한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훈련도감 군을 합하여 가까스로 13,800명의 군사를 확보했다.」
(선조가 40일 동안 짱 박히신 남한산성이다. 물론 당시 조선도 나름 잘 싸우긴 했다.)
또 당시 조선의 교전 기록을 보자면 조선 기병이 청나라 기병에게 상대적으로 밀리는 감이 없지 않다. 조선기병도 당연히 당시 세계 어디다 내놓아도 밀리지 않는 정예였다. 허나 전략, 전술 그리고 그로인해 사용되는 무기는 왜군이나 북방의 야인들 즉, 경무장 기병이나 보병들을 위주로 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편곤이 거론 되는데 아머드기병에겐 편곤이 상대적으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의 금군(禁軍)이 고양(高陽)에서 청기병을 상대로 편곤을 들고 싸웠는데, 조선의 편곤이 약하고 쉽게 부러져 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인해 편곤은 착근편곤이나 능인창편곤 등으로 개량되기에 이른다.
병자호란의 설명이 너무 길어진다. 쓰기도 귀찮고 읽다가 또 전편 임진왜란 보다 혈압이 더올라가는 상황이 발생하니 그만 줄이고 바로 삼전도로 넘어가자. 기본적인 것은 다 알 테니 역시 약술한다.
「삼배구고 (三拜九叩)
인조는 삼전도에서 평민의 옷을 입고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세 번 절하면서 그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것]를 하며 항복해야했다. 그런데 청 태종의 트집으로, 인조는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몇 십번 머리를 땅에 부딪쳐야했다.」
이때 도열한 청나라 장수들은 조소를 보내거나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고 조선의 대신들은 모두 대성통곡했다. 상상해보라. 아무리 못 낫거늘 조선의 우리조상의 국왕이 외세에 굴복해 머리가 피떡이 되도록 조아리고 모든 대신들은 통곡을 한다. 그날은 날씨도 엿 같았다. 그야말로 치욕이요, 통한의 날이었다.
이정도 맞았으면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역시 우리 조선님하들은 엉뚱한 발상을 하기 시작한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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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부터 이제 변화된 거기보전으로 들어갑네다;; 하 그리고 드뎌 내일부터 훈련드갑니다 ㅠ.ㅠ 우헤헤헤 편지 써주시고 싶으신분은 손! 바로 주소 들어갑니다!! 장난아님. ㅋㅋ
출처 : 네이버 블로그 및 yslee1789 님 글
신재호님 글
레미엘님 글
조선의 무기와 갑옷
무예도보통지 등 참조.
첫댓글 인조님 짱이심...ㄱ-
참으로 나무랄데 없는 훌륭한 캐삽질 잘보고 갑니다.-_-b
예전에 어디서 본바론 청군의 진군을 사신행렬로 잘못 판단한것도 초기대처가 늦은 이유라고 하더군요.;;;;
흠...사신행령이 3만이군요. 흠. 역시. 흠. 역시. 흠 역시. 흠. 역시. ........ 이말박엔;;
아...그게요. 야전군에선 보고가 들어갔는데... 중앙 조정에서 돌아온 답신은 '그럴리가 없다. 사신 행렬을 잘못 본것일 것이다. 다시 파악해서 보고하라....' 였다고합니다. 그바람에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는 후문도............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전시체제를 발동하고 전국의 군대가 집결하긴 하지만 이미 늦었죠. 인조는 사로잡혀 삼정도에서 머리박고 있었고..... 인조가 사로잡히는 과정 자체가 거의 코미디 수준이라서....;;
김정일은 그래도 핵이라도 가지고 개기지요. 그건 그렇고 요즘 공명의 갈림길이란 일본 시대극을 보는데 임진왜란은 명백히 조선과의 전쟁인데 곧 죽어도 명나라한테 진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런소리까지 들어도 할말은 없는 상황이 된것은 사실입니다. 애초에 선조가 원했던 시나리오는 명군이 보란듯이(?) 일본군을 패퇴시키고 조선을 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선조가 조선군의 명장들(대표적으로 이순신장군 같은분......) 을 눈의 가시 처럼 여긴 이유도 그런거고..... 그것 때문에 반격할 시간을 놓치고 협상으로 시간을 허비했고 그사이에 일본군은 왜성을 쌓고 남해안 일대를 요세화 해서 아군의 공격을 더 어렵게 만들었고 덩달아 조선군은 정치적 목적으로 인한 홀대로 쪼그라 들었고(이순신 장군은 참 대단한 분입니다. 그럼에도 병력과 병참을 유지한걸 보면.)..
그와중에 정유재란을 맞은 거죠. 그당시 조명연합군의 편제를 보면 명군이 총 9만 정도 조선군이 3만여 정도 병력으로 보면 조금 그런 소리 나올만 하기는 합니다.
조선군은 딱히 3만이라고 못박을 수는 없었죠. 각도에서 일시적으로 징집한 군대가 지역당 많을 때는 1,2만 씩이니...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해서 그렇지. 그리고 임란 때 대부분의 전투를 조선 관군과 의병들이 치뤘고 이순신 제독이 제해권을 쥐고 있어서 육상의 의병들과 함께 보급을 차단한 것이 임란에서 일본군이 패한 주요원인이기 때문에 조선에게 진 것이 맞다고 봅니다. 단순히 병력 숫자로 볼일은 아니죠.
임진왜란 관련 기록을 보니 조선 정부에서 집계한 군대 수가 관군 의병 포함 무려 17만명이라는 군요. 일본군은 14만명 정도였는데
제가 말한건 정유제란때를 말한 것입니다. 17만은 임란발발이듬해인가 집계한 거고 문제는 애초부터 선조는 조선군에게 맞길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지요. 임란 초에 활약했던 의병들도 나중에 가면 거의 찾아볼수 업습니다. 앞에도 언급했듯이 협상한다고 쓸대없이 시간 낭비하고 조선군은 조선군대로 선조의 꼬장 때문에 병력은 줄어가고......
인조 역시 선조와 더불어 삽질의 제왕입니다. 선조와 같이 현대로 살아돌아 온다면 일주일 내에 전 국토에 참호를 팔수 있겠네요. 그야말로 북한이 꿈꾸는 전 국토의 요새화의 실현?(응?)
인조가 삽질한 것은 맞지만 몇몇 이탈자가 생긴 경우로 국민성을 이야기하긴 좀 뭐하죠. 대게 다른 나라의 경우 정규군이 패배하면 곧 나라 전체가 접수되기 마련인데 우리민족 만큼은 백성들이 끝까지 완강하게 저항하는 전통이 있어왔으니
정규군이 패한게 아니라.. "전진 고향 앞으로!"라서... ㅡㅡ;
전투 자체는 그렇게 못 싸운건 아닙니다. 쌍령전투처럼 다소 황당하게 깨진 전투도 있지만 주요 4대전투의 승률은 2승2패로 동률입니다.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을 청군이 포위하는 동안,각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청군과 크고 작은 전투를 전개하고 있었습니다.그런데 그 중에서 완연히 이긴 전투는 2차례 뿐이고,상당수는 초반에 잘 싸우다가 나중에 청군의 계략에 낚이거나 지휘관의 만용으로 인해 반격을 받고 패퇴 하였습니다.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을 대파 했던 김준룡 장군도 결국은 군량 부족에,청군의 위협 멘트로 인해 철수하였습니다.(그것때문에 김준룡 장군은 파직 당했죠.)
야전군 지휘관들만 불쌍하죠. 정작 책임지고 물러나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는데...;;;; 정말 지금 생각같아선 청군에게 사로잡힌 인조나 신료들은 포기하고 왕을 새로 옹립하고 내각을 새로 구성하는 것도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충무공도 그렇고 조선의 군인들이나 선비들은 왕에대한 충성이 너무 강한듯.... 이것도 지나치게 임금에 대한 충,효를 강조한 유교의 폐혜인지.....
17만 병력은 임진년 다음해인 계사년에 확인되는 병력입니다 동원가능한 병력은 그보다 더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