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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서북지방 최대의 민중항쟁 - 홍경래의 난과 여러 민란들(2)
베스 추천 0 조회 46 13.10.02 09: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곡산민란


  부사를 들것에 실어 쫓아내다


  1811년 2월 23일 새벽 곡산의 북면 사람 수백 명이 각각 곤봉을 둘러매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관아에 돌입하였다. 농민들은 관아에 있던 사환, 노비들을 몽둥이로 때려눕히고 이어 관문을 부수고 정당 안에 난입하여 수령의 병부와 인신을 탈취하였다. 이어 곡산부사 박종신을 끌어내어 빈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담아 마주 들고서 읍에서 30리 떨어진 참막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백성들은 관청 안채로 들어가 부녀자들을 몰아내고 옥문을 부수고 갇혀 있던 창고의 책임자들을 모두 석방하여 내보냈다. 이 와중에서 농민들은 박종신의 부정
과 비리를 8조로 열거하여 폭로한 다음 다짐을 받아냈다.  곡산 사람들은 부사 박종신의 직
인을 탈취하여 이웃 수안군으로 가지고 가서 바쳤다. 수안군수 오준상은 이를 황해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 홍희신은 이를 다시 중앙에 급보하였다.
  수령을 축출하고 죄수를 풀어주어 목적을 달성한 농민들은 이후에도 흩어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들은 곤봉을 들고 고함을 치면서 좀처럼  해산하지 않고 투쟁을 계속하였
다. 관리들은 농민이 기세에 눌려 이들을 적극적으로 진압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이에 대
하여 수안군수 오준상은 난민들이 변란을 일으킨  뒤 두려움 때문에 해산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이는 농민들을 즉시 해산시키지 못한 데  대한 문책을 피하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읍내에 모였던 농민들은 수령이 잡아들인 사람들에 대해 조사하는 것을 보기 위해
해산하지 않고 수령의 활동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관은  농민들의 위세에 눌려 진압은
커녕 잡아들인 사람들에 대한 조사조차 착수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봉기군에 의해 곡산부
의 통치질서가 사실상 마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곡산 농민들의 이와 같은 행동은 당시의 지배층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중앙정부는 난
민들이 관아에 쳐들어가 수령의 직인과 지휘관의 병부를 탈취한 것을 매우 중대한 사건으로
보았다. 이는 관장을 살해하거나 아전들을 쫓아낸 것보다 죄가 큰 것으로 보았으며,  무리를
동원하여 고을을 함락한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까지 생각하였다. 당시 지방관들은 이들 농민
봉기를 매우 두려워하여 옛날 임꺽정이 관군에 저항하던 것을 연상하기까지 하면서  반란군
과 같은 것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보고를 들은 왕은  주모자와 가담자를 막론하고 엄단하
도록 명령하였다.


  아전들과 상인들이 유착된 환곡 포탈


  곡산부는 황해도 동북쪽에 깊숙이 위치한 작은 고을로, 수안,  신계, 토산 등과 함께 황주
에서 개성으로 가는 직로의 동쪽에 위치한다. 이들 지방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험한 오
지이며, 민심이 사납고 도적의 출몰이 잦으며 전통적으로 토착  양반들의 기반이 취약한 지
역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18세기 말에도 군역문제를 둘러싸고 불만이  폭발한 적이 있었다. 수령이
군포를 함부로 징발하자, 분노한 곡산민 천여 명이 관청에 몰려가 일제히 호소한 뒤 성토하
고 관장을 축출함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 수령의 착취나  온갖 부패는 전국적인 현상이었지
만,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지방은 그 지방 토착 양반들의 기반이 미약하여 수형의 횡포를
견제할 수 없었으므로 그 폐단은 더욱 심한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봉기의 원인은 오랫동안
누적되어왔던 것이다.
  1809년 11월에 박종신이 곡산부사로 부임하자, 그는 1년도  안되어 고질적인 병폐였던 환
곡의 운영상황을 조사하여 아전들이 떼어먹은 환곡이나 가마니에 불순물을 넣어 수량을  ?
풀리던 폐단인 이른바 분석을 조사하였다. 곡산부에는 북쪽 사화방에는 세곡을 보관하는 서
하창이라는 창고가 있고, 서북쪽의 화촌방에는 서상창이라는 창고가 있었다. 박종신은  조사
에 의하여 창고의 곡식이 크게 결손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서하창의 경우,  환곡을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일 때 창고 감독과 실무담당자 색리가 좁쌀을 훔쳐내어 각 마을의 부유
층들 집에 쌓아두었다가, 해빙기가 되면 그것을 배로 평안도에  운반하여 팔아 이익을 착복
하는 것을 밝혀내었다. 그 이유로 박종신은 창고의 담당자들을 모두 옥에 가두어버렸다.
  지방의 환곡을 관리하는 것은 전적으로 창감색(창고지기)들과  아전들에게 맡겨져 있었는
데, 곡산읍의 창고들은 관아에서부터 100여 리나 떨어져 있어서 통제가 미약하였던  것이다.
이들 창고지기와 아전들은 수상운수의 요충지대인 곡산부 화촌 일대의 부유층들과 결탁하여 곡식을 빼돌렸던 것이다. 이때 그들이 거래했던 곡물의 총량은 약 2천 석에 달하였다. 이들의 환곡을 둘러싼 농간에는 그 지역 부유층들과 상인들이 구조적으로 결탁되어 있었다. 부
유층들은 아전들이 훔쳐낸 곡식을 몰래 보관해주고, 상인들은 봄이 되면 이 곡식을 인근 평
안도 지방으로 내다 팔아 이익을 나누었던 것이다.
  당시 평안도는 상업이 발달한 지역이었으며 강상들에 의해서 지역간의 곡물거래가 성행하
여, 이를 틈타 지방 아전들이 환곡을 훔쳐내어 이익을 도모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1810년 박종신은 아전들이 훔쳐먹은 곡식을 천여 석이나 독촉하여 받아내었다. 뿐만 아니
라 환곡에 불순물을 넣어 부풀리는 관행마저 금지시킴으로써 아전들과 부유층들에게 큰  타
격을 주었던 것이다. 당시 향리들에 의해 자행되는 환곡 포탈의 부담은 결국 가난한 농민들
에게 전가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황해감사 홍희신은  곡산사건의 보고에서 박종신의 치적
을 옹호하였고, 포흠 환곡을 강제로  거둬들여서 빈민들이 은혜를 입었다고 두둔하였다.  즉
환곡 포탈로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계층은 일반 소농민과 빈민들이었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포흠 환곡을 받아내었다는 것은 결국 다시 향리 아전들이 그 부담을 가난한 농민에
게로 돌리게 마련이어서 그 후유증은 빈민의  몫이었고 이는 농민의 불만을 야기하게  되었
다.
  부사 박종신의 과감한 조치로 모리 행위에 실패한 곡산의 향리들과 장평리의  부유층들은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하여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장평리 부유층들은 곡산의
아전인 한극일 등을 사주하여, 폭동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주겠다
고 약속하여 보수금을 지출할 부유한 자의  명단과 그 액수를 기록한 수전기를  작성해주었
다. 이에 고무된 한극일 등은 각 부락에 통지문을 보내 농민들을 곡산읍에 집결시켰다. 농민
들은 통지문을 보고 격분하여 각기 몽둥이를 들고 모여들어 폭동을 일으켰다.
  이렇게 교활한 향리들과 부유층들에 의해  은밀히 사주된 1811년의 곡산  농민항쟁에서는
향리들과 농민들의 갈등이 묘하게 잠복되어버리고, 오히려  그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수령의
관권에 대해 저항을 꾀하였다. 조세부담 계층이었던  농민층은 읍리의 부유층이었던 향리들
과 창고 담당자들 및 상인세력들과  연대하여 수령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 때 농민들을 앞장서서 이끈 사람은 한명홍, 장진, 박대성, 심낙화 등이었다.

 

부사의 가렴주구


  곡산 폭동의 동기는 위와 같이 향리들과  결탁한 일부 모리배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사 박종신은 그것을 적발하여  시정하려고 노력한 공권력의 대표자였
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근원적인 문제는 부사 박종신 자신에게도 있었다. 그 역시 전형적
인 탐관오리였던 것이다. 그는 환곡을 거두어들인 후에도 현장감사라고 핑계하여 곡물의 품
질이 나쁘면 그것을 부유층들에게 나누어주고 다시 품질 좋은 곡식으로 납부케 한 후 기일
을 재촉하여 걷어들였다. 기한 내에 바치지 못하면 관속들을  풀어 집집마다 뒤져서 간직한
곡식을 찾아내기도 하였다. 간혹 나눠준  미곡이 남아있으면 창고 곡식을  훔쳤다는 구실로
모조리 몰수해 창고에 쌓아놓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마을에는 아무것도 남아나지 않았다.
  민란 직후 곡산민들의 참혹상을 목격한 사간원 헌납 유헌장의  보고서나, 곡산 폭동을 진
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이면승이 순조임금과 가졌던 대화에서는, 폭등의 직접적 동기를 곡
산부사의 가혹한 조치라고 지적하였다. 즉 이 사건이 직접적  원인은 부사가 곡식을 가혹하
게 징수하여 모은 데서 비롯한 것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박종신이 창고의 재고조사를 하고 현장감사를 행한 것은 사실 읍폐와 민폐를 바로잡기 위
해서라기보다는 이를 핑계로 부유층들의 곡식을 수탈할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환곡
의 운영을 바로잡는다는 미명하에 향리와 향임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방재정 운영권을  탈취
하고 이를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용하였다. 박종신은 부유층들로부터 곡물뿐 아
니라 돈도 탈취하였다. 그는 재화가 많은 부민과 상인들을  주로 침탈하였으나 가난한 양민
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하여 형벌까지도 남발하였다.


  정부의 진압과 처벌


  곡산의 폭동을 보고받은 비변사에서는 2월 29일에 우부승지 이면승을 안핵사로, 좌변포도
대장 오의상을 신임 곡산부사로 임명하여 내려보냈다.  안핵사를 파견하면서 왕은 난민들을
엄히 다스려 백성들이 저항심을 진압하라고 지시하였다.
  곡산의 농민들은 봉기 이후 줄곧 상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들이 수령을 축출한 이후 뚜
렷이 공세를 취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렇게 관망하며 시일을 허비하고 있는 사
이에 관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을 가함으로써 농민들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3월 6일 안핵사는 해주목에 도착하여 5진영 군대를 동원하였다. 그리고 약 한달 동안 5진
영군의 봉기군에 대한 대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마침내 윤 3월  9일 안핵사는 난민들의 토
벌을 끝내고 최종 조사 보고서를  올린 후 관군을 철수하였다.  농민들이 5진영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인 기간은 안핵사가 부임한 3월 6일부터 3월 중순경까지의 약 일주일간이었다. 대
부분의 농민이 체포 구금된 것은 3월 14일 이후이며,  5진영군대는 3월 중순 이후에 가서야
비로소 봉기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5진영의 군졸들은 패퇴
하는 농민들에 대한 잔혹한 살상과 토색질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관군의 공격에 맞서 농민  봉기군은 각지에 통문을 돌려  저항세력을 확충하였다.
이에 다른 지역의 농민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그들도 수령의  가혹한 침탈에 깊은 원
한을 품은 자들이었다. 패퇴한 농민들은 4월말까지 도처에서 무리지어 저항하였다. 잔류군의 항전은 필사적이었다.
  안핵사 이면승은 사태를 진압한 후에 보고서에서 사건의 주모자로 한극일과 심낙화 등 4
명, 공모자로 최성덕 등 6명과 그들을 추종한 이동백, 김영철,  그리고 지방의 장교 이속 관
노들을 열거하였다. 동시에 박종신의 죄도 함께 논죄하였다. 즉 그가 주민들에게 몹시  가혹
하게 하고 수탈을 너무 혹독하게 하였으므로 멀리 귀양보내게 하였던 것이다.
  곡산민들은 체포된 후 심문과정에서도 관찰사  홍희신과 안핵사 이면승이 수령의  비리를
묵인한 채 자신들만 일방적으로 치죄하는  처사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였다.  토착 향임이나
토호들도 박종신을 경미하게 처벌한 데 불만을  품고 도내에 통문을 발송하여 그를  암살할
세력을 규합하기로 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이속들이 여기에 서명하였다. 이 점에 대해  당시
일부 고위직들도 박종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봉기에 가담한 130여 명을
잡아 강경하게 처벌하여 주모자 37명은  효수, 42명은 정배시켰다. 이렇게 하여  곡산민란은
일단락되었다.
  안핵사의 최종 보고를 받은 비변사에서는 난을 일으키고 참여한 농민들은 죄의 경중을 가
리지 말고 모두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난의 원인은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데 있는 것으
로 보고 모든 책임을 봉기민에게 돌리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 한편 곡산부사 박종신을 백성
들의 폭동을 야기한 책임자로 지목하여 그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사후
처리책으로 곡산민들에 대한 위무와 삼정의 개선, 형벌 완화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
다.
  농민항쟁을 계기로 삼정의 폐단을 거론하면서 개선을 촉구한 응교 이지연과 같은  사람도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난민들이 처벌에 대해 강경론을 폈다가  곡산민의 동향을 접한 수에
는 태도를 바꾸었다. 직제학 홍석주도 정부가 봉기민을 지나치게  혹독히 처벌하는 데 비판
적 의견을 개진하였다.
  또한 전헌납 유현장은 우연히 곡산부를 방문한 후 곡산민의 참상을 확인하고 수령의 탐학
이 농민항쟁을 야기한 원인임을 입증키 위해  수령의 비리를 10개 조로 나누어  열거하면서
박종신을 사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는 곡산민이 절실한  요구를 비교적 정확히 반영
한 것이다.
  농민층을 옹호한 사람들은 항쟁의 원인을 수령의 침탈에서 찾았으며 박종신을 극형에  처
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 당시 예조판서 김이익, 좌의정 김재찬 등도  난의
원인이 박종신의 가렴주구에 있었음을 인정하고 그의 울산으로이 정배가 너무 미약한  처사
였음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왕은 김재찬, 김이익  등의 박종신 처벌론을 묵살하여다.
결국 곡산민들에게는 가혹한 처형이, 부사 박종신에게는 경미한 처벌이 내려졌던 것이다.
  정부의 강경진압 결과 곡산부의 형세는 극도로 피폐되었고, 곡산민의  유리 실업 또한 극
심하였다. 이에 정부는 곡산민들에 대한 위무책으로 중앙 각사에  상납하는 당해 연도 공물
을 이듬해까지 미뤄주었다. 그러나 곡산의 피해는 쉽게 복구되지  못하여 순조 12년에는 안
변 고원의 곡식 1500석을 옮겨 진휼하게 하였고, 순조14년에는 환곡 신포 전세에 대한 중지
탕감조치도 취해주었다. 순조 14년 8월에는 황주의 531호와  곡산의 204호에 대한 감세조치
가 내려지고 유배인을 전원 석방시켰다. 또한 밀려있던 환곡,  군역, 전세를 모두 탕감해 주
었다. 이는 곡산부이 타격이 극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홍경래의 난


  민중운동이 점차 잦아지는 19세기,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수많은 난들이 간헐적으로 이어
져오고 있었다. 그중 서북지방 최대의 난이 바로 홍경래의  난이었다. 1811년, 즉 순조가 즉
위한 지 11년이 되는 해 12월 18일 저녁, 평안도 가산 다복동에서 진사 김창시가 아래 격문
을 낭독함으로써 홍경래의 난은 시작되었다.
  "평서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니,  우리 관서지방의 원로들과  공사노비 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으시라. 무릇 관서는 기자의 옛터요, 단군시조의 옛 땅으로서 예의가 바르고 문
물이 뛰어난 곳이다.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왕위에 있으니,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치
성하여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권을 멋대로 하고 있다. 그래서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살별과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다. 이 때문에 큰 흉년이
거듭되고 굶어 부황든 무리가 길에 널려 있으며,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구렁에 빠져서 산 사
람이 거의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행이 세상을 구하는 성인이 청천강 이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위의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하셨다. 그분은 나면서 신통함이 있었
고, 다섯 살 때 승려를 따라 중국에 들어가셨다. 장성하여서는 강계와 여연에 5년간  머무르
면서 황명의 세신유족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철기 10만으로 부정부패를 숙청할 뜻을 가지셨
다. 그러나 관서 땅은 성인께서 나신 고향이므로 차마 밟아 무찌를 수가 없어, 먼저  관서의
호걸들로 기병하여 백성들을 구하도록 하였다.  의로운 기치가 이르는 곳이  어찌 참임금을
기다려 살아난 곳이 아니겠는가! 이제 격문을 띄워 먼저 여러 지역 군수들에게 알리노니 절
대로 요동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이 격문을 다 읽자 홍경래가 참여자들에게 격문의 내용을  설명하였다. 자기는 선천 월봉
산 아래 가야동에서 태어난 정진인의 지휘를 받아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강계의 폐사
군 지역에서 봉기하여 철기 수만을 이끌고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거사하고 있다는 것이
다. 그러니 모두들 공을 세우도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끝나자 횃불을 앞세운  봉기군
은 선천으로 진격하여다. 이제 그들은 10여 년의 오랜 준비 끝에 들고일어난 것이었다.


  서북민들의 사정


  흔히 "평안감사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평안감사'라는 자리가 얼
마나 좋은 관직인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얼마나 많은 민중
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을까!
  평안도의 중심도시인 평양은 옛날부터 우리 나라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고조선의 수도도 평양이요, 고구려가 만주벌판을 차지한 후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정책적으로 도읍을 옮긴 곳도 이 지방이다. 한반도를 통일한 고려왕조는 개성을 수도로 하면서도 평양은 '서경'이라 하여 개경 다음 가는 중심도시로 삼았다.
  고려태조 왕건은 수도를 정하면서 그 당시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인기가 있었던  풍수지리
설을 믿고 서북민들을 관직에서 배제시켰다.  이러한 불만은 고려시대 중엽의  묘청의 난에
투영되었다. 묘청은 승려였지만, 그와 함께 난을 일으킨 정지상은 서북 출신으로 불만을  품
었던 인물이었다. 조선왕조에 들어와서도 전통적인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더욱이  세조대에 이징옥의 난, 이시애의 나을 거치면서 서북인들은 더욱더 관직에서 소외되었다. 조선후기 과거에서는 생원 진사, 또는 대과의 정원에서도 서북인은 삼남 지방에 비해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면 홍경래의 난은 과연 서북지방에 대한 편파적 정책에 대한 불만에서 일어난 것인가?
  홍경래의 난을 바로 이해하기 위하여는 평안도 지방의 지역적  특성에 유의해야 한다. 평
안도에는 일찍이 중앙정부의 차별로 인하여 사대부 즉 토착  양반층의 형성이 어려웠다. 따
라서 양반층보다는 향인층이 향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중국
과이 무역이나 수공업, 광산경영 등을 통해 부를 축적한 세력들이 나타나 새로운  향촌세력,
즉 신향층을 이루게 되었다. 이들 신향층이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옛 향촌 세력은 뒷
전에 밀리는 추세였다. 신향층은 경제적 상승을 전제로 하여  신분상승의 욕구를 이루려 하
였으나 수령의 부유층에 대한 수탈행위에 의해 좌절되게 되었다. 이는 결국 수령권 대 부유
층의 대립이라는 갈등을 낳게 되었다. 이런 형편에서 부유민을  중심으로 한 서북민들이 저
항은 필연적이었다.

동지들을 규합하다


  홍경래 난의 전후 사정을  비교적 잘 기록한 (진중일기)(홍경래  난의 진압과정을 기록한
책. 2권 2책. 필사본이다. 1811년 12월 18일부터 이듬해  6월 20일까지의 농민군 토벌과정을
기록하였다. 이는 당시 의병으로 자원하여 나갔던 정주군 남면  하월리의 현인복의 후손 현
은우 소장본으로 그 원본은 규장각에 있다)에 의하면, 진압군 쪽에서 파악한 봉기군의 주동
층은 다음과 같았다.
  "홍경래는 괴수요, 우군칙은 참모였으며,  이희저는 와주요, 김창시는 선봉이었다.  그리고
김사용과 홍총각은 손발의 역할을 하였다. 그 졸개로는 의주에서  개성에 이르는 지역 거의
대부분의 부호와 대상들이 망라되어  있었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파락  난당이 모두 부하가
되어 횡행하고, 떠돌이 굶주린 백성들이 또한 많이 투속하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봉기군의 지도층으로는 홍경래, 우군칙, 이희저, 김창시 등이 그 중심
이 되었고, 호응 세력으로는 의주에서 개성까지의 부호와 대상들이 포함되었고, 말단 군사력
으로는 황해 평안도이 떠돌이 파락호와 난당 그리고 떠돌이 기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도층은 평서대원수에 홍경래, 부원수에 김사용, 군사 또는  모사에 우군칙과 김창시, 도
총에 이희저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제초와  홍총각은 모의 단계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으나,
선봉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도층은 향촌  사회의 유력가들을 수령급의 유진장으
로 임명하였고, 장사들은 군사지도자로서 장수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향촌사회의 지식인들은 종사관으로서 주로 북진군의 참모로 활동하게 하였다. 각 관아의 하급  관속들로서 내응한 자들은 감관 집사 등 행정실무자로 활동하였다.
  홍경래의 본관은 남양이며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의 가계는
알 수 없으며, 4형제 중 셋째로 알려져 있다. 1811년(순조 11)에 일으킨 난이 실패로 돌아갔
을 때 그의 나이가 42, 3세라고 하였으므로, 그는 1770년(영조 46)생으로 추정되고 있다.  홍
경래는 일반적으로 몰락한 양반으로 알려져 있지만, 상민이라는 설도 있다. 하층 양반이었든 상민이었든 전답이 없는 빈곤한 처지이기는 마찬가지였다. 홍경래는 4척 5촌의 단구로서, 얼굴이 희며 윤택하고 턱이 짧고 뾰죽하며 수염은 길었다. 그의  바른쪽 눈 위에는 작은 사마귀가 있었다.
  홍경래는 젊었을 때 과거에 뜻을 두어 외숙 유학권에게서 유교 경전을 배웠고, 1798년(정
조 22) 28세 때 소과인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이 실패를 평안도민에 대
한 차별 때문으로 생각하였고, 여기에 대한 반감과 선동이 이 난이 중요한 동기라고도 알려
져 있다. 과거에 실패한 후 그는 집을 나와 풍수 곧 지관이 되어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생활
을 하였다. 홍경래는 과거를 볼 만큼  유교 경서에 대한 교양을 쌓았고, 병서나  풍수지리서
기타 여러 가지 술서 등을 익혔다. 특히 당시에 유행하던 (정감록)에 통달하였다. 그러한 교
양을 바탕으로 홍경래는 상당한 경륜을 지닌 지도자로서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홍경래는 상당한 용력과 무술 실력도 갖추고 있었다. 홍경래를 포함함 주동자들은 개인적
무술 실력뿐만 아니라 상당한 군사 지식도 갖추고 있었다. 관군이 각종 장비를 동원하여 공
격하는 것을 막아낼 뿐만 아니라, 화공과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관군에 큰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홍경래는 당시의 전형적인 저항 지식인으로 군사지식과 지도력을 가지고 항
쟁을 이끌어나갈 수 있었다.
  당시 조선사회는 정치에서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심각하게 부패해있고, 서울의 양반
가는 주지육림의 생활을 하였지만 삼정의 문란으로 일반 백성들의 처지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홍경래는 풍수를 업으로 삼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이러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가지고 그것을 개혁하려는  포부를 가지게 되었다. 그
는 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당시 서북인들이 벼슬 진출에 제한을 받고 있어서 식자층의 불
만과 불평이 팽배해 잇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이를  이용하였다. 그는 진인설을 자기
행동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이 사상을 대외적으로 선전하였는데,  이는 기존의 폐악을 타
파하고 새로운 사회로 변혁시킬 존재로서 진인 또는 정진인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우고
그를 따르자는 것이다.
  그러던 중 그는 가산에서 역시 풍수로 부호의 집에  드나들던 우군칙을 만났다. 홍경래가
우군칙을 처음 만나 친교를 맺은 것은 1800년(정조 24)이었다. 우군칙은 봉기 당시의 나이가
36세로서 태천 출생 양반의 서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아주 미천한 신분이었던 것 같
다. 외모는 5척 단구에 깡마른 몸매이고, 얼굴이 철색이며 빰은 좁고 길며 강팔랐다. 수염은
갓났으나 누르며, 하관이 빠르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시국을 논하면서 깊이 공감하는 바가 있었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다음 해에 이
미 병란을 함께 논의할 정도로 의기투합하였다. 이때부터 그들은  시국에 불평과 불만을 품
은 자들을 규합하여 동지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10년 동안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특
히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중간 지휘층을 널리 포섭하였다.  봉기군의 중심 인물로 홍
경래가 정주목사에 임명하였던 최이륜도 봉기 7, 8년 전에 이미 포섭되었다. 홍경래는  지식
층의 포섭을 위해 한때 홍삼장사를 한 일이 있으며, 상인층과 관계가 많았던 우군칙은 중간
층 및 상인층의 포섭에 나서서 활약하였다. 우군칙은 우선  가산의 부호로서 자금원이 되어
준 이희저를 끌어들였다. 그는 이희저의  부친 묘터를 잡아줌으로써 그를 포섭하게  되었다.
이희저는 봉기하기 수년 전부터 다복동에 큰 기와집을 짓고 우군칙과 어울리면서  준비사업
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들은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몰래 광산을  채굴하고 잠상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희저의 자금이 바탕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들은 또 벼슬이 막혀 현실에 불만을  품은 진사 김창시, 정주서이 거부 이침과  김속하,
안주의 상인 나대곤, 개성 상인 박광유와  홍용서 등도 끌어들였다. 또 힘센 장수의  발굴에
주력하여 홍총각, 가난한 평민 이제초 등을 끌어들였고, 지략과 무용을 겸비한 우군칙의  제
자 김사용 등을 포섭하였다.
  김사용의 본명은 김종각이고 사용은 자이다. 그는 태천 서면 송우리에서 살았고, 거사  당
시의 나이는 38, 9세였다. 그는 태천에서 명망 있는 향임 가문 출신이었으나 매우  가난하였
다. 그는 봉기군을 잡아가던 장교를 급습하여 구출하는 등 봉기 초기부터 활약하였다.  김사
용은 짧은 기간에 부원수로서 관산, 정주, 선천, 철산, 용천 등의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관할
함으로써 봉기군 지도자 중에서 가장 폭넓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임무는 봉기군이 장악한
각 지역의 책임자나 행정담당자들을 임명하고 군사와 군량을 동원하는 일이었다.
  김창시는 곽산의 양반 출신으로 봉기 당시 나이가 36세였다.  그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에
종사하였으며, 봉기 전해인 순조 10년 10월에 소과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봉기
군 지휘자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고  학식이 있었다. 봉기군의 격문은 그가 작성한  것이다.
그는 내응자를 모집하고 봉기의 명분을 선전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는 의주 및 곽산의 상인
들과 일정한 연계를 가지고 그들을 포섭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임신년에 병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었고, 봉기 이후에는 모사로 활약하였다.
  이희저는 일명 이태번으로 가산에 살던 부호였다. 그의 친척들 역시 대부분 여러 읍의 실
권을 잡고 있던 향리이거나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그는 평안도  여러 지역의 실력자들과 널
리 교분을 맺고 있어서 봉기를 조직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본래 역졸의 신분이었으
나 재산이 많아 무과에 합격하였고, 돈으로 향임직을 사려고  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
다고 한다. 그는 다복동에 봉기군 기지를  마련하는 데 경제적으로 가장 큰 기여를  하였고,
봉기 후에는 도총을 맡았다.
  홍총각은 홍이팔이라고도 하고 본명은 홍봉의라고 한다. 당시의 나이는 당시 24세로 곽산
남면의 평민 출신이었다. 그는 생업에  종사하였지만 빈곤한 처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완력이 강한 장사로서 봉기의 핵심인물이었다. 남진군의 선봉장이 되어 혼자 가산을 점령하
였고, 정주성 농성에서는 홍경래와 숙식을 같이하면서 군사를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였다. 봉
기군의 지휘관으로 홍경래와 더불어 가장 많이 활약한 인물이었다.
  이제초는 개천군 군내면 사람으로서 봉기 당시에 35세였다. 그는 몰락한 양반이거나 향임
층 신분으로서 역시 매우 빈한하였지만, 완력 있는 역사로서 북진군의 선봉장을 맡았다.
  이처럼 홍경래난의 주동 인물들은 몰락 양반, 토호지주, 향임층, 상인, 관예, 읍속 농민 등
여러 부류의 신분 출신들이 섞여 있었다. 파락 난당은 곧 관예와 읍속을 말하는 것으로,  난
의 봉기 과정에서 즉시 내응하여 반란군이 청북지역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주요한 동력
이었다. 또 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던 부호와 상인들은 상업적 기반을 갖는 토호지주층과
큰 상인층들이었다.
준비 과정


  난의 주동자들이 봉기를 구체적으로 추진한 것은 1810년(순조 10) 11월 무렵이었다. 홍경
래는 이때 우군칙을 만나 정진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봉기를  준비하게 하였고, 이를 들은
우군칙은 이희저와 함께 영변 묘향산 아래의 백령촌에 가서 은신할 것을 찾았다. 이들은 구
체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봉기군의 새로운 기지를 물색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정월부터는 우군칙과 곽산의 진사 김창시가 나서서 청천강 이북 지역의  유력가와
부유층들에 대한 포섭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군칙은 4월에 이르러 다복동에 30칸
의 기와집을 마련하였고, 이희저의 사촌  이명운도 새로 집을 구하여 중수하였다.  이리하여
가산 대정강 가의 요지인 다복동에  봉기의 본부가 되는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다. 다복동은
대정강 하류에 위치하여 청천강 이북 여러 지역으로 통하는  요충지였고, 평양과 의주로 가
느 길목에 위치하면서도 산으로 둘러싸여 쉽사리 발견되지 않는 곳이다.
  홍경래는 그해 7월 평소 포섭해 두었던 각지의 장사들과 함께 다복동 우군칙의 집에 머물
렀다. 홍경래가 모은 인물들은 다복동 외에도 넓은 지역에  끼리끼리 모여서 지내면서 봉기
에 대비하였다. 다복동 이외의 비밀기지 중의 하나는 신도였다. 그것은 용천의 바닷가에  있
는 섬으로서, 홍총각, 김창시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서 봉기를 논의하였다.
그들은 또 선천의 검산성에서 회합하기도 하였다.
  순조 11년 9월에는 이미 거사 준비가 구체화되었던 것  같다. 이때 주동자 김창시가 곽산
의 김대훈에게 와서 봉기의 준비상황을 선전하고 12월에 기병한다는 사실을 통지하였기  때
문이다. 10년 전부터 집을 떠나 유랑하던 홍경래는 9월에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와 형제 조
카 등 친척 14명을 이끌고 박천 진두로 들어갔다. 10월에는 주요 참여자들이 모두 다복동에
모여 준비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편 부원수 김사용이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었다.
  11월 이후에는 진두 대정강이 추도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강수홍 부자를 중심으로  비밀리
에 주전작업을 벌여 자금을 마련하였다. 이희전느 호피, 연철 등의 군수품을 사들였고, 선천
의 유문제 최봉관이나 정주의 정진교, 철산의 정복일도 무기와  군수품 등을 다복동에 수송
하였다. 한편 김창시는 다음해인 임신년에 기병이 있을 것이라는  요언을 퍼뜨려 민심을 교
란시키기도 하였다. 용력 있는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자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11월 중에 봉기의 주동자들은 거사의 맹약을 하고 서명식을  하였다. 그 숫자는 정부측이
압수한 (도록)이라는 문서에는 79명으로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 참여한 혐의가 없거나 정도
가 미미하여 처벌을 받지 않은 인물은 12명이었다. (진중일기)에는 59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봉기과정에서 중요한 활동을 했던 사람은 60여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봉
기는 처음부터 대단히 조직적이고 치밀한 계획하에서  이루어졌다. 11월에 들어서자 시장에
출입하는 일반인들 사이에도 병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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