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 한적한 실버타운
내 책상 앞 유리창 밖은 한 폭의 풍경화다.
오전 열 한시의 태양이 강한 빛을 바다에 뿌리고 있다.
수평선 위로 바다가 하얗게 들끓고 있다.
중간에 산자락에 옹기종기 있는 집들이 보인다.
나의 눈에 근경인 실버타운 마당이 나타난다.
택시가 한 대가 대기하고 있다.
누군가가 외출하기 위해 부른 모양이다.
잠시후 빨간쟈켓을 입은 작달막한 노인이 느릿느릿 바퀴달린 가방을 잡고 택시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팔십대 노인의 하얀 백발이 햇빛에 더욱 하얗게 반사되고 있다.
몇 발자국 뒤에서 외출복을 입은 칠십대의 부인이 종종걸음으로 따라가고 있다.
실버타운 삼백사호에 사는 노부부다.
젊은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오십년을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부부였다.
노인은 약대를 나와 미국에서 유학을 한 후 평생 대학에서 교수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고 했다.
부인 역시 미국에서 간호학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의 조용한 주에서 그 안에서도 평화로운 대학 안에서 살아서 그런지 부부는 어린아이같이 순순해 보였다.
험한 풍파 속에서 닳고 닳은 그런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았다.
어제저녁 식당에서 노부부는 일주일 정도 서울로 놀러 간다고 했다.
한국의 봄을 구경하려는 노부부의 경쾌한 발걸음 같았다.
몇 달 전 그부부를 처음 봤을때 물었다.
“어떻게 한국으로 돌아오시게 됐어요?”
내가 그 노인에게 물었다.
인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산 그들이었다.
“죽으러 왔어요.”
노인의 간단한 대답이었다.
인제의 내린천에서 시작하는 연어의 일생의 여행도 태평양을 건너갔다 동해로 돌아오는 코스다.
인간도 연어의 속성을 가졌나 보다.
실버타운이라는 장소도 들어와 보니까 망각과 완만한 죽음이 잠재하는 장소 같기도 했다.
“떠나실 때 한국과 오십년 만에 돌아온 한국이 어떻게 달라요?”
그 노인의 뇌리속에 한국은 오십년 전의 한국이었다.
나한테 무교동의 음악감상실인 ‘르네상스’를 얘기했다.
그가 노년에 새로 마주친 한국이 어떤지 알고 싶었다.
“내가 떠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예요.”
그는 모든 게 낯선 것 같았다.
어제저녁 서서히 어두움이 서리기 시작하는 황혼무렵이었다.
그 부부와 함께 해변 까페에서 차를 마시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스마트 폰의 벨이 울렸다.
동해의 개인 의원 의사였다.
나는 전날 혈압이 올라가 그 의원에 가서 피검사를 했었다.
그 의사가 결과를 알려주려고 내게 전화를 한 것이다.
의사는 혈당부터 콜레스테롤수치까지 알려주며 처방하는 약까지 자상하게 내게 설명하고 있었다.
“어머 감동이야”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간호사 출신 부인이 감탄하고 있었다.
예전의 권위적이고 무뚝뚝한 의사만을 생각했던 것 같다.
바닷가 도시에 와 보니까 주민이 되면 의원에서 진료비까지 무료로 해 주는 것 같았다.
그 부인은 한국이 미국보다 훨씬 살기 좋은 나라 같다고 하며 놀라고 있었다.
“어떻게 하루를 보내고 계세요?”
그 노부부의 일상이 궁금해서 물었다.
남편이 대답했다.
“우리 부부가 각자 자기 방에서 공부해요.
나는 글을 쓰고 있어요.
며칠 전 시를 써서 신문사에 보냈는데 떨어졌네.
아직 한국어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가 봐요.
지금은 한국 속담을 영어로 소개하는 글을 쓰고 있어요.
전부터 해왔는데 내가 쓴 책을 선물로 줄께요.
미국에서 평생 톱니바퀴같이 짜여진 생활을 했는데 여기서 릴랙스 하면서 사니까 좋아요.”
“앞으로 남은 시간의 계획이 어떠세요?”
내가 물었다.
남편이 이런 말을 했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없어요.
물려줄 사람이 없는 거죠.
가지고 있는 돈을 마지막까지 모두 잘 쓰고 가려고 해요.
그런데 내가 아내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먼저 죽으면 아내가 내 죽음을 처리해 줄 텐데 아내가 죽으면 그 뒤에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네. 그런 걸 처리해 주는 회사가 있으면 알려주세요.”
모범생의 냄새가 나는 그 부부는 죽음의 준비도 미리 착실히 해가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실버타운의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였다.
나보다 몇 살 위인 교수 출신 또다른 노인이 나를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말레이지아에서 온 분이 엄 변호사의 글을 읽고 이 실버타운에 체험하러 왔대요.”
우연히 몇 개의 글을 썼는데 여러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것 같다.
미국에서 와서 실버타운에 있기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또 다른 분이 나에게 직접 그런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조심스럽다.
바닷가의 서재로 삼은 실버타운은 글을 쓰고 물을 좋아하는 내게는 낙원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는 귀양살이고 무료한 지옥일 수도 있다.
내게 찾아온 장관을 지낸 친구는 경치는 좋아도 자기는 못살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실버타운을 안내하는 방송을 보면 여러 분야에 걸쳐 참 세세하게 비교하고 분석한다.
그런데 나는 판단기준이 전혀 달랐다.
나는 생활에는 둔감한 편이다.
혀도 둔하다.
맛이 있는지 없는지 별로 관심이 없다.
젊은 시절 고시원이나 암자생활때부터 그냥 주면 주는 대로 먹어왔다.
다른 실버타운과 시설이나 비용을 비교해 본 적도 없다.
돈에 대해서도 계획을 하고 써 본 적이 없다.
있으면 쓰고 없으면 못 쓰는 것이다.
나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나는 툭 터져나간 시퍼런 바다의 자유가 좋아 이곳으로 왔다.
실버타운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온 게 아니다.
게으른 나는 공동식당에서 밥을 주니까 편했다.
도심의 아파트같이 개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 되어 있는 게 마음에 든다.
자기가 스스로 참여하지 않으면 어떤 단체성도 없다.
매일 실버타운 안의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글 수 있다는 건 보너스였다.
단점도 있다.
노인들의 나라여서 그런지 회색의 침체가 안개처럼 퍼져있다.
공동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보면 내가 늙은 것은 보이지 않고 온통 하얗게 늙은 다른 노인들만 보인다.
그러나 그게 장점이기도 하다.
노인들이 우연히 한 두마디씩 툭 툭 내뱉는 속에서 나는 철학을 발견한다.
진리는 학문적으로 설명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뱉어져 튀어 나왔다.
바닷가 아파트의 은자로 살면서 깨달음을 추구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할까.
여기서 여생을 보내려고 한다.
[출처] 바닷가 한적한 실버타운|작성자 엄상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