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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대학과 도시 10. 나가사끼
나가사키 항구 (Nagasaki Prefecture Convention and Tourism Associatio) (출처: www.thenational.ae)
서울공대지 2019 Spring No. 112
한광야 동국대학교 건축공학부 도시설계전공 교수
가깝고도 먼 ‘가스테라와 돈가츠’의 도시 - 나가사키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은, 원자폭탄의 투하로 폐허가 된 그라운드-제로의 도시가 어떻게 재건되고, 또 어떻게 지식과 테크놀로지의 생산 도시로 진화해왔는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이기 때문이다.
나가사키는 옛 도심의 석교를 따라 빠르게 확산되는 캐톨릭 세력에 맞서기 위해, 일군의 불교 사찰과 신토 신사가 마을의 중심부인 타마조노 산으로부터 하천을 따라 가을축제(Nagasaki Okunchi)를 만들어온 저항의 도시이다. 또한 나가사키는 교토의 가무극을 에도의 드라마로 연결해주고, 근대 과도기에 조성된 차이나타운과 데지마를 배경으로 그 시대의 러브스토리(Madame Butterfly, 1898)를 트램전차와 함께 지켜온 감성의 항구이다.
바다로’길게 뻗어 나온 곶(cape 崎)’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가사키(Nagasaki 長崎)는 북-남 방향으로 형성된 우라카미 분지를 따라 흘러 내려온 상류천들의 합류지에 작은 어촌으로 형성되었다. 이후 나가사키는 우라카미 강의 중심 천인 나카시마 하천을 따라 성장하며 북쪽의 이와하라 하천과 남쪽의 도자 하천을 경계로 자리잡았다. 근대의 나가사키는 이 하천들을 넘어, 흥미롭게도 트램전차를 따라 역시 북-남 방향으로 길게 성장해 왔다.
나가사키는 일본의 지도보다 먼저 유럽의 지도에서 그려진 항구이다. 나가사키는 역사 속에서 일본 영토의 중심부로부터 떨어진 큐슈에 위치했고, 큐슈에서도 북쪽의 키타큐슈로부터 하카타/후쿠오카와 사가, 쿠마모토와 가고시마를 연결해온 오래된 중심길(National Route 3)로부터 멀리 벗어난 어촌이었다.
그러나 나가사키는 더 큰 해양의 지역권에서는 멀리 남쪽의 루첸 섬의 동부 해양으로부터 타이완 섬의 기룽을 지나 올라오는 검고 푸른 쿠로시오 해류의 갈림목이다. 이 해류를 따라 나가사키는 매년 태풍과 함께 낯선 방문자들을 맞아왔다. 물론 쿠로시오 해류의 종점인 스시마 섬, 이키 섬, 고토 섬은 14세기부터 이 해류를 타고 한반도부터 멀리 마닐라, 타이페이, 샤멘, 푸저우, 홍콩을 연결하며 교역과 약탈을 번갈아 해온 왜구의 거점이었다.
쿠로시오 해류가 도착하는 큐슈의 서해안 지역은 역사 속에서 히젠(Hizen Province 肥前國)으로 불리며, 쿠마모토를 중심으로 한 내륙의 히고와 구별되는 문화권을 구성해 왔다. 히젠의 오래된 거점은 3세기부터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연결해온 가라추, 포루투갈과 네델란드 세력의 초기 무역거점이었던 히라도, 히젠의 원도시라 할 수 있는 야마토와 사가, 그리고 국도34를 따라 오무라, 이사하야이다.
나가사키에 주거지가 조성된 시점은 약 6,000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작은 어촌이 나가사키의 북쪽으로 오무라 만에 면한 킨카이에 형성되었고, 이후 1200년을 전후로 나가사키 만의 입구인 후카호리와 그 주변의 이오지마 섬, 오키노시마 섬, 다카시마 섬을 중심으로 어촌들이 자리잡았다.
일본이 외국 세력과 교역을 시작하게 된 역사 속의 획기적인 계기는 은 광산의 발견이다. 히로시마의 북쪽으로 이와미에서 거대한 이와미 은 광산(Iwami Ginzan Silver Mine 石見銀山, 1526-1923)이 큐슈의 하카타 출신의 상인으로 금광을 찾아 다닌 카미야 주테이(Kamiya Jutei 神谷壽貞)에 의해 개발되었다. 카미야 주테이는 당시 한반도로부터 은 정재 기술을 도입하여 납을 산화시키는 정재방법을 개발했다. 일본의 은 생산량은 1600년대 초기에 38톤으로, 당시 세계 생산량의 1/3을 차지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였다. 이 시기에 일본의 중국 명조와의 교역 항구는 하카타였으며, 명조의 유일한 교역항구인 푸저우, 촨저우, 밀수 무역의 거점인 샤멘, 류쿠, 마닐라와 독점교역을 진행했다.
나가사키, 1846 (Yale University Beineke Library) (출처: https://wwwg.oogle.com)
나가사키의 봉행소 (출처: 한광야, 2019)
나가사키의 조용한 어촌들은 이 즈음 포르투갈 세력의 상인과 예수회 교파 선교사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1542년 가고시마의 남쪽 타네가시마에 도착했으며, 이후 선교사인 프란시스 자비에르(St. Francis Xavier, 1506–1552)가 1549년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일본의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나가사키는 이 즈음 센고쿠 시대의 정치적 혼란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큐슈의 다이묘 영주들은 이러한 외세의 선교활동에 큰 저항을 갖고 있지 않았으며, 밀수 교역의 단속에도 큰 의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오히려 영주들은 포루투갈 상인들에게 당시까지 오랫동안 단절되어온 광저우, 마카오, 말라카와의 교역로 복원과 중개무역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나가사키 나가시마 하천과 메가메 석교 (출처: 한광야, 2019)
나가사키 하마노마치의 테추바시 다리(Tetsubashi), 메이지 시대 (출처: www.mfa.org)
나가사키는 1550년을 전후로 하카타의 독점 항구의 기능을 넘어서기 시작했으며, 1571년 마카오, 아카풀코, 마닐라가 대중국과의 운송항구로 자리잡았다. 이제 일본의 은은 나가사키로부터 포루투갈 상선을 통해 마카오로 운송되었고, 이를 통해 중국의 생사와 직물, 포루투갈의 총기, 화약, 납, 담배, 카스테라, 뎀베로가 일본으로 유입되었다.
포루투갈 세력은 초기에 히라도와 나가사키의 북서쪽 20km 요코세우라에 교역거점을 운영했으며, 마침내 1570년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이들은 나가사키에서 고아와 미망인을 위한 의료와 복지시설(Santa Casa da Misericóridia de Nagasaki, 1584)을 운영했다. 이후 네델란드 세력이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나가사키는 1590년 인구 5,000명의 어촌에서 10년만인 1600년에 인구 15,000 명의 항구도시로 빠르게 성장했다.
나가사키, 1860 (British Columbia Library) (출처: https://www.googlec.om)
일본의 중앙 집권을 추진해온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큐슈 정벌(Kyūshū Campaign 九州の役, 1586–1587)’을 성공했고, 토구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의 혼란기인 센고쿠 시대를 종료하고 막부 시대를 시작했다. 이에 따라 나가사키는 지역 세력에 의한 행정이 아닌,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는 행정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나가사키에는 먼저 도쿠가와 막부의 ‘캐톨릭교 금지령(1614)’과 함께 캐톨릭교 활동이 금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30년대에 시행된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은 흥미롭게도 나가사키가 일본 최초의 유일한 무역항으로서 네델란드와 중국 세력과의 교역거점으로 성장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가사키는 이때부터 이후 19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해외 도시들과의 독점교역권을 갖고 성장했으며, 이를 통해, 엔진, 석탄, 제철, 선박의 대규모 생산체계를 구축하며 일본의 산업혁명을 추진해온 중심이었다. 이 시기의 나가사키는 박지원이 쓴 풍자 한자소설인 허생전에서 유럽과 청조와의 무역을 통해 쌀과 은을 대규모로 매매하는 민간 무역이 번성한 장기도(長崎島)로 소개되었다.
도쿠가와 막부의 나가사키는 막부가 파견한 행정관(bugyō 奉行, governor)이 항구의 교역과 외국인 커뮤니티를 관리했다. 이에 나가사키 경관의 중심부인 타마조노 산의 입구에 그 행정거점인 나가사키 봉행소(長崎 奉行所立山役所, 1603, 현재 Nagasaki Museum of History and Culture)가 기능했고, 그 내부에 법정을 두었다. 한편 그 북쪽에는 수와 신사가 나가사키의 상징적 중심부를 완성했다. 또한 봉행소의 남쪽으로 마을(Uwa Mach 上町, Naka Machi 中町)이 조성되었고, 이후 사쿠라마치 공원을 중심으로 시청과 나가사키 경찰청이 근대 도시행정의 거점을 구성해왔다.
한편 나가시마 하천은 행정거점과 종교시설을 나누는 경계가 되었다. 나가시마 하천의 동쪽으로 카메 구릉을 따라서 불교사찰 구역(Tera Mach 寺町)이 조성되었고, 그 남서쪽으로 오래된 마을 (Higashi Furugawa Machi 東高川町, Ginza Machi 銀座町) 등이 주거지를 형성했다. 사찰구역에는 특히 캐톨릭교 금지령(1614)에 따라 당시 성당들이 해체되고, 중국 푸장성에서 방문한 오바쿠 첸(Obaku Zen) 종파의 승려들의 주도로 고푸쿠지 사찰(Kofuku-Ji 興福寺, 1620)을 시작으로 소푸쿠지(Sofuku Ji 崇福寺, 1629), 푸쿠사지(Fukusai Ji 福濟寺, 1628), 쇼푸쿠지(Shofuku Ji 聖福寺, 1677)의 나가사키의 ‘4대 푸장성 사찰(長崎 四福寺)’이 연달아 조성되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 1825 (출처: www.google.com)
나가시마 하천의 두 지천이 합류지에 위치한 이세노미아 신사주변에는 조선인 커뮤니티의 활동거점으로 추정되는 코라이 다리(Korai Bashi Bridge 高麗橋)가 입지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남쪽으로 나가시마 하천을 따라 일군의 석재 다리들이 하천 동쪽의 행정기능과 서쪽의 사찰과 주거지를 연결하며 나가사키의 오래된 도시경관을 완성해왔다. 나가시마 하천 서쪽의 옛 시청과 동쪽의 고푸쿠지 사찰을 연결해온 메가네 다리(Megane Bashi Bridge 眼鏡橋, 1634)는 일본의 초기 석조다리의 대표적인 예이다.
나가사키의 복원된 데지마 (출처: 한광야, 2019)
나가사키의 도진야시키(唐人屋敷) (출처: www.wikipedia.org)
또한 나가시마 하천의 니기와이 다리와 쿠로가네는 하마노 마치와 연결되어 나가사키의 오래된 상업중심부를 구성하며, 동쪽의 소푸쿠지 사찰로 연결된다. 이와 함께 나가사키의 동서 구역을 연결해주는 추오 다리는 트램전차선을 따라, 동쪽으로 면을 생산했던 하루사메와 뱃사람의 유흥지였던 시안바시와 멀리 쇼가쿠지 사찰로 이어진다.
한편 나카시마 하천과 도자 하천이 만나는 천변을 따라 어시장인 우오노 마치, 은을 생산했던 긴자 마치, 배가 정박했던 하마노 마치(Hamano Machi 浜町), 동을 생산했던 도자 마치, 조선공의 구역인 푸나다이쿠 마치 등이 나가사키의 오래된 생산과 소비 활동의 중심부를 완성했다.
나가사키에 중국인 커뮤니티가 조성된 시점은 15세기이다. 이후 나가사키의 본격적인 차이나타운은 중국의 명조가 해체되고 청조가 건국된 17세기 초에, 큐슈의 중국인과 함께 푸저우, 촨저우, 샤멘으로부터 이주해온 본토 중국인에 의해 확장했다. 이들은 1670년 대에 나가사키 전체 인구 약 6만 명 중 약 1만 명을 차지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중국 선원과 상인은 도자 하천의 남쪽으로 푸장 도로와 도진야시키 도로를 따라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으로 평가되는 도진 야시키(Tôjin Yashiki 唐人屋敷, 1689)를 조성했고, 이후 서쪽의 신치 차이나타운(Shinchi Chūkagai 新地中華街)으로 확장했다.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인 도진 야시키는 토지신을 모신 도진 사당 (Dojin Do 土神堂, 1691), 관음신을 모신 간논 사당 (Kannon Do 觀音堂), 마조 여신을 모시는 덴코 사당 (Tenko Do Shrine 天后堂, 1737), 약초밭을 갖춘 마을시설인 푸장 회관 (Fukken Kaikan Hall 福建會館, 1868, 1897)을 중심으로 약 2,000명이 거주했다. 또한 도진 야시키에서 동남쪽으로 이시 교의 북쪽에는 청조기에 새롭게 조성된 공자 사당 (Koshibyo Confucius Shrine 孔子廟, 1893)이 나가사키의 데지마, 1825 (출처 : www.google.com) 현재까지 입지하고 있다.
나가사키의 도진야시키(唐人屋敷) (출처: 한광야, 2019)
또한 나가시마 하천의 우라카미 강 합류지에는 포루투갈과 네덜란드 세력들의 초기 교역거점인 데지마(Dejima 出島, 1634–1854)가 간척에 의한 인공섬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데지마는 포르투갈 세력의 상인과 선교사의 활동영역을 규제하기 위해 도쿠가와 막부가 1634년 발주하여 민간기업의 건설사업으로 조성된 흥미로운 사례이며, 해자로 둘러싸인 길이 120 m, 폭 70 m의 섬이 네델란드 동인도기업에게 장기 임대되었다.
나가사키 대학교 캠퍼스 (출처: 한광야, 2019)
나가사키는 미국과의 가나가와 협정이 체결된 이후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의 조약으로 1859년 일본의 자유무역항으로 기능했다. 이에 따라 1860년부터 데지마 남쪽으로 히가시 야마테와 미나미 야마테의 수변들이 매립되어 외국인 거주지인 오우라가 조성되었다. 당시 오우라에는 오우라 성당(大浦天主堂, 1865)을 중심으로 스코트랜드 상인인 토마스 글로버(Thomas Glover, 1838–1911)가 조성한 글로버 가든과 글로버 하우스를 포함해 일군의 서양식 건축구역이 자리잡았다. 헬렌 켈러와 펄벅이 나가사키 지역을 방문한 시점도 이 즈음이다.
데지마를 중심으로 한 네델란드 세력의 교역활동은 결국 나가사키를 서유럽의 과학지식과 선박 생산기술이 유입되는 일본의 유일한 도시로서 성장시켰다. 이러한 상황은 이미 1640년대부터 의학, 천문학, 해양학의 지식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시계, 지도, 망원경, 현미경, 지구본 등의 물품들로 확대되어 이 지역의 상류층에 보급되었다. 특히 일본에서 1720년을 전후로 서양서적의 열람금지가 해제되면서, 일본의 학자들이 나가사키로 이주해왔다. 나가사키의 북쪽에 조성된 나가사키 철도역(1897, 현재 우라카미 철도역)의 동쪽 구역은 의학교, 병원, 상업학교가 잇달아 조성되면서 ‘난학(Rangaku 蘭學)’의 중심부로서 자리잡았다.
이 시기에 독일 위르츠버그 태생으로 의사이며 식물학자로서 네델란드 군의관으로 활동했던 필립 지볼트 박사(Dr. 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는 1823년부터 데지마와 내륙의 구릉지 마을인 신나카가와의 자택(현재 Siebold Memorial Museum)에서 거주하며 서양의학을 전파했다. 또한 네델란드 부르게 태생으로 네델란드 해군 외과의사인 폼페 반 미르더보르트(Johannes Lijdius Catharinus Pompe van Meerdervoort, 1829–908)는 유럽의 생물학, 화학, 해부학, 병리학, 생리학을 소개하고 인체 해부를 통한 의학교육을 진행했다.
당시 폼페 반 미르더보르트의 의학교육은 도쿠가와 막부의 후원을 받으며 의학연습소(Medical Training Institute 醫學傳習所, 1857)로 설립되어 현재 나가사키 대학교 사카모토 캠퍼스에서 운영되었다. 나가사키 의학연습소에는 이후 태평양 전쟁기에 동아시아 풍토병연구소가 설립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콜레라가 발생하면서 일본의 첫 번째 서양병원인 나가사키 요조소(Nagasaki Yojosho, 1861)가 역시 폼페 반 미르더보르트의 제안에 따라 개원했다. 이후 의학연습소와 요조소는 1945년 원폭으로 파괴되었으나 1950년에 재건되어 현재까지 나가사키 대학교의 의과대학과 병원으로 성장해왔다. 한편 나가사키 항구의 성장에 따라 항구관리와 교역세금을 관리하고 중국, 한국, 동남아시아와 교역사업을 운영하는 인력 양성을 목적으로 국립 나가사키 상업학교(Nagasaki Higher Commercial School 長崎高等商業學校, 1905)가 도코 상업학교(1887), 야마구치 상업학교(1905)에 이어 설립되었다. 이후 나가사키 상업학교는 나가사키 경제학교로 전환되었고, 현재 나가사키 대학교의 경제학부로 성장했다.
나가사키 의학교(현재 나가사키 의과대학) (출처: 한광야, 2019)
나가사키는 큰 배를 만들고자 했다. 나가사키는 1859년 일본 항구들의 개항과 네덜란드 무역거점의 폐쇄와 함께, 당시까지 해외교역의 독점항구 기능을 요코하마와 고베에 잃게 되었다. 흥미롭게도 나가사키는 이를 계기로 도시 전체가 선박과 무기를 생산하는 대규모 공장으로 변화했다. 당시 일본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함 생산 능력을 보유했던 미쓰비시 나가사키 조선소는 과거 해외교역 중심의 나가사키를 선박과 군수품을 생산하는 제조도시로 진화시켰다. 미쓰비시사의 선박 생산체계는 현재까지 나가사키의 중심 산업을 구성하고 있다.
먼저 우라카미 분지를 중심으로 우라카미 하천을 따라 남쪽의 나가사키 항구에는 미쓰비시 제철무기공장(Mitsubishi Steel and Arms Works)의 조선소와 북쪽의 나가사키 철도역 주변의 미쓰비시 우라카미 군수공장(Mitsubishi-Urakami Ordnance Works)에서는 전투함을 제조하며, 나가사키의 남쪽 15 km에 위치한 탄광 (Takashima Island 高島, Hashima Island 端島)에서는 석탄과 철을 생산했다. 한편 이 시기에 선박의 엔진은 역시 미쓰비시사를 통해 일본의 또 하나의 산업거점인 나고야에서 생산되었다.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 (현재 미쓰비시 박물관) (출처: 한광야, 2019
이러한 나가사키의 선박제조와 무기생산은 나가사키를 넘어 인접한 북쪽의 오무라 만의 거점들인 사세보의 해군구역과 조선소, 오무라 공군기지(현재 나가사키 공항)와 전투기 생산소가 멀리 이사하라까지 거대한 지역권의 제조생산 체계로 구축되어 기능했다. 그리고 나가사키의 이러한 지역산업 생산체계로의 변화는 도시의 경관과 구조를 변화시켰다.
그렇다면 나가사키의 선박과 제철생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나가사키의 이러한 제조거점으로서 변화는 무엇보다 네델란드 엔지니어가 관여한 나가사키의 해군학교와 조선소를 통한 지식과 테크놀로지의 이전으로 진행되었다.
나가사키에는 일본 항구의 개항과 함께 도쿠가와 막부의 주도로 나가사키 해군학교 (Nagasaki Naval School 長崎海軍傳習所, 1855-1859)와 제철소가 조성되었다.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해군의 교육과 제조 거점을 네델란드 세력이 주도하는 나가사키와 프랑스 세력이 주도하는 요코하마의 요코수카(Yokosuka Naval Yard)로 나누어 상호 경쟁을 유도했다.
당시 나가사키 해군학교는 네델란드의 테크놀로지 수혜를 최대한 받기 위해 데지마 주변, 현재 여객터미널이 위치한 오하토 서쪽으로 모토푸나 마치에 네델란드 군사전문가와 엔지니어를 고용하여 해군훈련, 해양공학, 증기 엔진 전투함 제작 기술을 교육했다. 나가사키 해군학교는 다수의 해군병과 엔지니어를 배출하며, 일본의 해군의 기초를 만들고 일본의 조선기술 성장을 도왔으며, 이후 그 기능이 도쿄 만의 추키지 해군학교로 이전되었다.
나가사키 해군학교는 네델란드 왕이 선물한 일본의 첫 번째 증기선(KankōMaru 觀光丸)을 소유했다. 이에 당시 도쿠가와 막부는 데지마 옆에 선박 보수시설을 조성하고 일본의 첫 번째 서양식 조선소인 ‘나가사키 용철소(Nagasaki Yotetsusho 長崎鎔鐵所)’를 운영했다. 나가사키 용철소는 곧 우라카미 강의 서쪽 수변을 매립한 아쿤오우라 마치로 이전되어 부두(dry dock)가 건설되며 나가사키 제철소(Nagasaki Seitetsusho 長崎製鐵所, 1861)로 새롭게 조성되었다.
한편 나가사키 제철소는 1884년 신고쿠 태생의 야타로 이와사키 (Yataro Iwasaki 岩崎 彌太郞, 1835–885)에게 잠시 임대된 후 1887년 매각되었다. 이후 나가사키 제철소는 1896년과 1905년에 추가로 부두를 조성하며 미쓰비시사(Mitsubishi Heavy Industries, 1917)가 운영하는 나가사키 조선소(Nagasaki Shipyard & Machinery Works)로 성장했다. 이 즈음 일본의 대표적인 초기 전투선인 키리시마(1915)와 무사시(1942)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한편 미쓰비시사 무기공장(Mitsubishi-Urakami Ordnance Works)과 미쓰비시 무기터널이 나가사키 철도역을 중심으로 우라카미 하천변에 조성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나가사키의 제조생산 거점들은 우라카미 분지에서 트램전차를 통해 연결되어 도시중심부와 항구 간의 하나의 통근 교통체계로 운영되었다.
미쓰비시사는 현재 아쿤 오우라 마치의 본 공장을 중심으로 우라카미 강 하구의 코야기, 사이와이, 이사하야에 걸처 총 네 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2009년 아쿤 오우라 마치의 미쓰비시 도로(Mitsubish Street)를 따라 그 동쪽에 입지한 제3 부두, 자이언트 캔틸레버 크레인, 남쪽의 코스게 오사무 부두 등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주도했던 산업자산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편 미쓰비시사의 우라카미 일대의 무기공장들은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원자폭탄의 투하(1945)로 파괴되었다 (사망자 73,884명, 사상자 74,909명). 이후 나가사키-오하시 구간의 철도선이 1947년 복원되면서 도시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먼저 원폭 중심부의 폭 심지공원과 함께 희생자의 추모를 위한 평화공원(1955)이 조성되었고, 피해가 컸던 우라카미 성당은 1959년 현재 위치로 이전되어 재건되었다. 흥미롭게도 당시 파괴된 미쓰비시 오하시 무기공장은 나가사키 의학교를 중심으로 주변 학교들이 통합되어 설립된 나가사키 대학교(Nagasaki University 長崎大學, 1949)의 메인 캠퍼스로 재건되었다.
나가사키 우라카미 강변의 미쓰비시 조선소 (출처: https://www.mhi.com) 나가사키
※ 나가사키(Nagasaki City 長崎市)의 인구는 426,000명(2017)이며, 국립 나가사키 대학교(Nagasaki University 長崎大學)의 대학인구는 12,180명(학부 7,481명; 대학원, 1,540명; 교수 1,263명; 교직원 1,893명,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