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의 반대 외 5편
최백규
나는 횡단보도를 보면 자꾸만 연주하고 싶어진다
#1이 신호등을 기다리면 반대의 횡단보도는 피아니시모
누구 하나 다 건넌 길의 뒤를 돌아보지 않아
솟아오르는 표지판의 뒷면이 항상 궁금했다
하얀 건반만 밟아나갈 때
초록 머리의 소녀가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질 때
뒷면이 흘리고 간 무지개를 먹고
그녀의 얼룩무늬 원피스를 연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 태양의 14시는 발기된 혓바닥으로 중앙선을 핥고 간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돌기에 닿았을까
새의 심장을 관통하는 무수한 2차원들
나의 등뼈 위로 질질 흘리는 은근한 체크무늬
처음으로 알게 된 폐부의 간지러운 감각
새의 목을 잡아 비틀면
쏟아지는 내핵
자기장을 잃은 지구는 참 울퉁불퉁하구나
네가 마모되는 동안 나는 멀리 떨어져 앉아 구경을 했지
너 참 재미있는 아이구나
푸른색을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10층에서 1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뛰어내려야 해
푸른색도없다니쓸모없는새끼죽어버려!죽어버려!죽어버려!
손목이 비틀어지고 새의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해바라기의 고개가 꺾이는 장면을
어느 영화에선가 본 적 있지
무언가 시작되기도 전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아무도 없나 봐, 저기 새가 날고 있잖아
어디? 스크린 뒷면 오른쪽 위에 보이잖아! 눈을 감아야지 이 바보……
너의 눈알이 해체되는 사이─ 그 속에서 태양계 너머의 영화를 볼 텐데
멋지지 않니?
횡단보도 밑 아스팔트가 카펫처럼 일어나 둘둘 말리기 시작하고
늘 바닥의 반대편이 궁금했었는데 얼룩말*의 등껍질이다
* 얼룩말의 가족단위는 1마리의 수컷과 여러 마리의 암컷, 새끼들로 구성된다.
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
나는 숨을 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빗나간 입술
비어있는 공간을 굳이 채워 넣을 필요는 없다
거리의 밀도가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뒤돌아서는 그때의 너를 오후의 크기에 더했다
너와 처음 여행을 다녀오던 날에도 나는 쓰레기였다
그저 네 고양이의 단면이 얼마나 흘러내리는 모양인지 알려주고 싶은 것
떠나간 자리에서 남아 있는 날개의 흔적에 글자를 그렸다
니야옹, 니야옹
우리가 아직도 한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최소 유통기한은 4년
너는 달의 공전 주기를 뒤적이고 나는 지구의 나이를 달력에 표시했다
4월의 꽃잎들을 잘게 찢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구부러진 햇살 ㄷ자로 웅크린 거실의 오후 4시
공중을 떠다니던 먼지들도 소파의 안으로 점점 파고들 것이다
이곳은 내가 없어져야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매일 거울 앞에서 이빨을 하나씩 뽑아 선반에 얹었다
면도를 할 때마다 창가의 꽃병들은 어째서 죽어가야만 하는지 궁금했다
의사가 먼지보다 많은 이곳인데!
아직 마르지 않은 세면대의 상처에 물기로 뒤덮인 심장을 가만히 맞춰본다
핏줄을 타는 붉은 것 너무 뜨거워 나의 마음은 언제나 4도 화상
너는 숨 쉬는 대신에 휘파람 부는 법을 마지막 가르쳐 주었고
내가 노래를 완성했을 때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세상이 되었다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갈 때
여름의 한복판을 거니는 고양이의 소리로 실컷 울었던 것도 같다
막다른 골목의 담벼락에 천천히 ‘굿바이, 로맨스’라고 긁는다.
아담이 뱀의 혀를 물었대
마른 표정은 언제나 흠뻑 젖은 혀를 감추고 있어
아담이 벗어놓은 옷가지를
몰래 가져와 보는 건 어떨까?
아담은 당연히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누구나 깊은 곳에 무언가를 숨겨놓기 마련이니까
축축한 침대 같은 거!
(느낌표로써 비밀은 비밀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판타지 속에 숨어 살던 아담은
젖은 혀들이 바싹 마를 때까지
버티고 버티다, 쓰러지겠지
누가 아담에게 뱀을 선물한 거야?
뱀의 혀보다는 지극히 평범한 것들이 넘쳐날 텐데
너도 나를 믿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어
봄은 노랑을 가장 먼저 뱉어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던
그 날도 너는 나를 의심했었지
피노키오가 이브를 먹은 사실은 알고 있니?
아담에게 집중하자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이제 하루 끝에 서서히 아담의 치마가 흘러내리면
쌓아가던 모래성은 젖어가고, 무너질 테니까
바싹 마른 혀들은 늘 그렇듯 젖은 표정으로 사그라지고,
비의 바깥
멋대로 하늘의 심장을
가르고 찢긴 틈 사이에 물감을
휘갈기는 것은 정말이지 짜릿한 일이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귀에 찌른 채 도로를 달렸다
벚꽃의 수동성
비행운은 소리의 탄생
꽃피는 못과 끊어진 오케스트라의 차이
혀의 작은 움직임으로 만들어내는 긴 약속들
거스름돈 받으며 손끝 스치는 순간의 어린 감정
고장 난 라디오의 반복 재생
어제의 내가 바라보던 길 너머를
지나가고 있다 귓속으로 내일이 터뜨려졌다
거리의 사람들도 음을 따라 흔들렸다
펼친 우산은 계속해서 하늘로 오르고 싶어한다
나는 뒤집히지 않는 우산을 갖고 싶다
떨어지는 빗방울들을 깨문 다음 나누어 삼키고
너와 함께 비가 오지 않는 곳들로 떠나고 싶었다
너는 멀리서 비의 바깥으로만 손을 내저었다
빗방울의 색깔을 씹은 것 같아 혓바닥이 자꾸만 따끔거렸다
흐트러지는 시야에 우산을 접는 너의 익숙한 손짓
귀에 얹은 이어폰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냥 하늘에서 내리는 물감처럼 웃었다
레드 파라다이스*
커튼을 치고 음악 소리는 나머지 틈 정도만 키워줘
너의 손톱은 왜 그렇게 파란 걸까
모든 것이 저물어갈 즈음 우리는 서로 다른 노을 앞에 서 있어
일기예보에서 비가 올 거라 했었지만 모두 다 거짓말이야
시계 초침은 태양이 각도를 뒤집을 동안 겨우 제자리를 움찔거렸지
고장 난 시간만 바라보다 둥근 어제를 떠올렸어
네가 나의 반대편으로 허리를 구부릴 때
피어나는 동그라미의 안쪽
손목 위를 맴돌던 햇볕의 흔적이 지워지면 너의 따뜻함도 잊혀질 까
얼어붙은 구름 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을 모양인가 봐
우리는 그저 내일 아침이 올 때까지 우리만의 모닥불을 간직하자
시든 봄마저 꽃을 틔우기 시작했으니까
계절들이 조도를 낮출 때마다 방 안 온도를 체크해야 할 것만 같아
따뜻한 노랑과 뜨거운 빨강의 차이를 알고 있니?
문득, 오후가 너무도 커다랗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순간
길 건너 차들도 하루의 끝으로 이어진 주파수를 맞추고 있잖아
오늘의 라디오 기상캐스터는 날짜변경선 근처 어딘가에 영원히 머무르지
이제 머지않아 천장에서 비가 쏟아져 내릴 거야
타오르는 계절이 창틈으로 새어나가는 걸 바라보면서
나는 너의 옆자리에 나란히 누워 붉은 달로 떠올랐어.
* 부산 시내의 한 모텔 객실에서 여대생 2명이 동반자살을 기도했다. 발견 당시, 방안에는 수면제와 타다 남은 착화탄과 활성탄 등이 발견되었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주의사항!
내 몸을 마신 벽의 혈관은 너무 축축해서 발이 빠지기 쉽다.
우선 이 방 안에서 가장 어두운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너머에 사는 도트 벽지까지 절대 숨이 닿을 수 없다는 것.
흘러내리는 잠도 고개를 끄덕이고,
딱딱한 시선이 살갗에 닿았을 때 뒤쪽 벽에 부딪히면서 귀를 때리는 뇌파.
목으로 앵무새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손으로 피스톤 하는 것이 낫겠다.
온종일 콘크리트에 귀를 비비면 선명해지는 핏덩어리의 펌프질과 아이들의 비명.
뒤집어진 손톱이 덜덜 떨린다.
커피로 알약을 마신다.
생쥐, 기생충, 벌레, 개새끼,
바닥을 기어 다니며 타자를 친다.
<s> ㅅㅏㄹㄹㅕㅈㅜㅓ</s>.
오른쪽 스피커 안에서 온종일 소리만 지르는 외국인 아가씨.
‘백색소음’이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들어본 적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왼손이 필요하고 너는 12월 달력만을 넘기길 바랐으니까.
테이블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도구일 뿐.
어쩐지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관없지.
말 못할 생각들을 곱게 접어서 입속에 구겨 넣었다.
벽은 손목을 긋는다.
분수가 쏟아지면서 연주를 멈추는 바람과 어색한 숲.
카페의 천장에서는 이상한 수채화가 무반주로 춤을 추고,
외팔이 화가도 남은 한쪽 팔을 마저 테이블에 못질한다.
2014년 제67회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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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규 시인
1992년 대구에서 출생, 2014년 월간《문학사상》으로 등단.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 예술인력 육성사업(AYAF) 문학분야'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