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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밥 / 송수권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紫抉?� 詩로 여는 주말]송수권 ‘까치밥’ 소년의 고향에서는 시골집 안뜰뒤뜰은 물론이고 동네 어디서든 오래된 감나무를 볼 수 있었다. 너나없이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들일 나간 부모님 대신 돈과 바꿀 수 있는 감을 수확하는 일거리는 아이들 차지였다. 빨갛게 물든 감잎이 땅을 덮으면 감나무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전날 저녁에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이튿날 동트기 전부터 “일어나라” 재촉하는 어머니의 성화는 더 심해졌다.
형제들 가운데 제일 부지런하고 착실했던 소년은 그때마다 팬티 차림으로 뛰어나갔다. 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감나무부터 찾아 행여 생채기라도 날까 노심초사하면서 따고 주운 감들이 소쿠리에 쌓여갔다. 그렇게 모아온 감을 어머니는 옹� 항아리에 담고 끓인 소금물을 부은 뒤 이불로 둘둘 말아 절절 끓는 아랫목에 밤새 잠을 재웠다. 마법처럼 땡감이 단감으로 변신하면 모자는 새벽 첫차에 몸을 싣고 시장에 갔다. “감 사세요”라고 크게 외치는 엄마를 따라 아들도 입을 벌렸으나 정작 그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감 따던 소년은 자라서 화가가 됐다. 붓 대신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오치균 씨다. 그는 “멀리멀리 고향땅을 벗어나 다른 일로 돈벌이 투쟁할 때 그 지겨운 고향땅이 그리움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유년 시절의 감나무가 지긋지긋한 노동의 대상이었다면 지금은 감을 ‘사치스럽게’ 화폭에 담는 처지가 됐다. 캔버스에 알차게 영근 감마다 ‘몸으로 비벼낸 자취’와 애틋한 추억이 배어 있다. 그제 서울 보광동을 지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어느 집 마당에 서 있는 감나무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꽃보다 화사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감나무는 주홍빛 알전구로 장식한 때 이른 트리인 양 멀리서도 눈부셨다. 가을은 빠르게 물러가고 어느새 자투리 시간만 남았다. 시인의 눈길이 감 수확을 다 끝낸 시점을 향하고 있다. 아무리 살림살이가 넉넉지 않아도 감 몇 개는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겨둔 사람들. 그 넉넉한 마음자리를 나누던 시절이 그립다.
[작가 오치균의 글 중에서]
오치균의 감을 사유하다
정영목(서울대 교수)
오치균이 감(나무)을 그리기 시작한 때도 이제는 꽤 오래 되었다. 1998년경으로 오랜 미국생활을 마치고, 한국의 시골 풍경을 접하면서부터였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골의 풍광이 자신의 본능적 감성의 원천이 되었다는 깨달음”을 피부로 느끼면서, 가을의 감이 달린 감나무의 풍경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물론, 화가가 제일 먼저 떠올린 기억의 단상은 어릴 적 그가 겪었던 감과의 투쟁(?)이었다. 배고픔의 어린 시절을 경험한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감과의 추억 같은 투쟁들--하나, 둘쯤은 누구나 간직하고 있으리라. 오치균의 감과의 투쟁은 적어도 필자보다는 더욱 심했던 듯싶다. “그렇게 지겨웠던 감나무와의 투쟁이 아직도 계속됐다면, 난 감을 먹지도 않았을 테고 감히 사치스럽게 그것을 화폭에 담을 수도 없었을” 정도로 그에게 감은 어린 시절의 가난을 떠올리는 아이콘(icon) 같은 것이었다.
그러더라도, 가난과 동시에 “청명한 가을하늘을 이고 있는 단풍든 가을 감나무”의 정겨움은 화가의 뇌리에 깊이 박혀 한국의 시골 풍경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혀져 있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하지 않겠지만, 감(나무)은 한국인의 가을 마음과 같다. 감(나무)의 서정성의 백미는 늦가을인데, 그것도 잎새가 다 떨어진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진홍빛 감. 물론, 그것의 배경은 파란 가을 하늘이 제 격이다. 가을내내 울쿼 먹고 홍시는 따먹다가, 남으면 독에 쟁여놓고, 겨울내내 얼려서 퍼먹던 유일한 우리네 겨울의 과일--그것이 감이었다. 그것은 요즈음의 젊은 세대들이 갖지 못한, 아니 가질래야 가질 수도 없는 정서였다. 외래종의 과일이 판을 치면서 누가 감을 먹어? 바나나나 먹지. 계절과 과일이 일치하지 않는 요즈음의 세상에 ‘가을과 감’?--이제, 감은 우리의 정서와 기억에서 밀려나간 대표적인 과일이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오치균의 최근 감 그림을 사유해보자. 2003년 9월, 화가는 ‘감 그림’만 모아 개인전을 한 번 열었다. 그 때의 작품들은 대부분 ‘감이 있는 풍경’들이었다. 예를 들어, 집 앞(뒤)의 감나무, 골목에서 바라본 시골 담장과 감나무, 곶감을 만들려고 처마에 매달아 놓은 풍경 등, 감이 주제였지만 그것은 풍경의 한 부속품 같은 느낌이었다. 당연히, 풍경을 위한 원근의 공간이 깊이감도 가졌었고, 풍경을 바라보는 시점도 갖추었다. 여전히, 오치균 특유의 두터운 임파스토의 물감층들이 화면의 밀도감을 높여 주었다.
이번 전시의 감(나무) 작품은 그동안의 오치균의 작품에서 볼 수 없었던 사뭇 다른 느낌이 있다. 이것은 분명 ‘감을 그리는’ 스타일이 변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과거의 감이 ‘풍경의 감’이었다면 그래서 더욱 ‘서정적’이었던 반면에, 지금의 감은 오히려 ‘관념의 감’에 가깝다. 유화이지만 물씬 동양화의 느낌도 든다. 오치균 답지 않은 웬 동도서기(東道西器)? 아니면 서도동기(西道東器)?
의아스럽지만 그렇게 의아할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오치균의 대학시절, 그의 미술대학 회화과는 지금처럼 동, 서양화의 구분이 교육적으로 그렇게 심화되지 않았었다. 회화과 학생이면 누구나 동, 서양화의 기본은 갖추고 졸업했다. 때문에, 지금의 화가의 작품에서 동양화의 ‘아우라’가 있다 해도 새삼스러울 일이 아니며, 매우 자연스러운 변화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작품을 들여다보자. 무엇이 동양화의 분위기를 자아내는지.
물론 서양의 전통에도 두 폭, 세 폭의 제단화, 또는 그것들이 변형된 조합들도 있지만, 단아한 청색의 배경에 제멋대로 뻗은 감나무의 가지와 진홍빛의 감들이 보다 장식적인 ‘병풍그림’의 느낌을 준다.
2011.08.
오치균 (서양화가)
오치균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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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해는 감농사가 아마도 풍년인가 합니다
선생님 아렇게 훌륭한 작품을 감상할때마다
늘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오늘도 열심히 감상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