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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애절한 사연들
송 백 헌(문학평론가)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때로는 괴롭고 조금은 짜증스럽고 더러는 슬플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아련한 추억이 밀려와 사무치는 그리움에 몸부림칠 때도 있다. 그럴 때 애송하는 시 한편이나 즐겨 부르는 노래 한 두 편에서 크게 위로를 받기 마련이다. 그것은 그 노래나 시 속에 담긴 정서와 사연이 자신의 처지에 와 닿아 공감대를 형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위로를 받는 그 시나 노래 속에 담겨진 사연은 그저 자신이 막연히 느끼는 낭만적인 정서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에서 빚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런 이면의 심각한 사연도 모르고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 흥얼거리기 일쑤이다.
이제 나는 여기에 꿈 많던 학창시절부터 애창하던 몇 편의 가곡과 시에 담긴 사연을 소개한다.
1. 박태준의 사우(思友: 동무생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마음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어 오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마음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서리 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의 연당에서 금어 뛸 적에
나는 깊이 물 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진 연당과 같은 내 마음에 금어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가로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마음에 가등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우리가 꿈 많은 학창시절부터 애창하여 오던 가곡…, 이은상(李殷相)이 작사를 하고 박태준(朴泰俊)이 작곡한 이 가곡의 처음 이름은 <동무생각>이었다. 그런데 광복 후 한 때 <사우(思友)>로 바뀌기도 하였었다. 왜냐하면 광복 이후 ‘동무’라는 용어는 북한과 남한에서 활개 치던 공산주의자들이 주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사우>라고 한자의 제목을 붙이기도 한 것이다. 이 노래에는 작곡가 박태준이 모교인 대구 계성학교 학창시절에 사귀었던 여인과 헤어지게 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박태준(1901-1986)은 대구의 전통 있는 밀양박씨 가문에서 태어나 1911년 계성학교(지금의 계성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숭실대학을 졸업한 뒤에 마산 청신학교에서 1923년까지 근무했다. 뒤에 미국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음대 및 동 대학원을 나온 뒤 숭실대학교를 거쳐 연세대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한 우리나라 대표적인 작곡가였다.
그가 청년시절에 다녔던 계성학교(啓聖學校)는 지금은 대구 서문시장, 그리고 계명대학교 동산병원과 이웃 하고 있는 동산(東山) 혹은 동산(銅山)이라 부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언덕에는 1908년 완공된 아담스관(Adams Hall)과 1913년에 완공된 맥퍼슨관(Mcpherson Hall)이라는 선교사의 관사가 있는데 그 집에는 푸른(靑) 담쟁이(蘿) 넝쿨이 감겨져 있어 청라언덕이라 하였다. 그 뒤 계성고등학교가 자리한 동산을 청라언덕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지금은 계성고등학교가 상리동으로 교사를 옮기고 그 자리는 계명대학교 동산병원 선교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다음 이야기는 내의 대학 선배이자 평생을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가깝게 지낸 전 효성여자대학(현 대구 카톨릭대학교) 대학원장 권영철(權寧徹) 박사가 들려준 것이다.
당시 고등학교이었던 박태준은 청라언덕에 자리한 계성학교에 오르내리며 등굣길에서 만난 얼굴이 예쁜 백합동산에 다니던 여학생과 사랑을 속삭이게 되었다. 백합동산의 백합은 경북여고를 상징하는 꽃이니, 백합동산은 곧 경북여고를 가리킨다.(일설에는 그가 다닌 계성학교와 이웃한 신명여고 속칭 SM 여고라는 설도 있다). 그러니까 박태준은 당시 백합동산에 다니는 서애리(가명)라는 빼어난 미인 아가씨를 사귄 것이다. 뒤 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박태준의 부모는 그들의 사랑을 절대로 허락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애리는 달성서씨(지금의 대구서씨) 명문 집안의 딸이긴 하지만 그 어머니가 소실이어서 서녀(庶女)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이야기지만 당시 전통 있는 집안에서는 그 혼인이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동무생각>은 1922년에 작곡되었다. 그가 계성학교를 거쳐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를 졸업한 직후부터 마산에 있는 창신학교(昌信學校)에서 음악과 영어를 가르치며 2년간 근무를 했다. 이 때 국어교사로 근무를 하던 이은상과 친하게 재냈고 마침내 그와는 처남과 매부의 남매 사이로까지 발전을 했다. 즉 이은상의 고모의 딸인 여동생 김봉열과 결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사실 창신학교는 이은상의 선친이 설립한 학교이자 노산의 모교이다. 그들은 창신학교에 재직하면서 각별한 교분을 맺으며 지냈다. 그들은 매일 어울려 인생과 문학과 음악에 대해 이야기 하며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은상은 고종사촌(내종사촌) 여동생을 소개하며 두 사람의 결혼을 성사시키기도 하였다고 한다. 뒤에 박태준은 연세대학교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명곡을 작곡하였다.
한편 서애리는 뒤에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뒤 일본에서 살다가 다시 귀국하여 법조인 홍모씨와 결혼을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경주에서 대구로 오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타계하고 말았다고 한다. 한편 그의 아들 홍모 교수는 대구 의료계에 저명한 인사로 알려져 있다.
이은상은 창신하교 재직시절인 1922년 박태준의 서애리와의 첫사랑 이야기를 듣고 즉시 작사를 하여 주었더니 박태준이 이를 작곡하여 발표한 것이 바로 <동무생각>이었다. 그는 재학시절부터 서양음악에 관심이 깊었다. 따라서 이 사연을 교양곡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 노래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와 ‘청라언덕의 나는 백합동산의 흰 나리 향내를 맡으며 너 서애리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는 사연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걸작이다.
2009년 6월에 대구광역시 중구문화원과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이 주관하여 계성고등학교의 옛 자리이자 현재 계명대 의료선교박물관 앞에다 <청라언덕 • 동무생각> 노래비를 세웠다.
2. 박목월의 <이별의 노래>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 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이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박목월(朴木月)이 작사하고 김성태(金聖泰)가 작곡한 이 <이별의 노래>는 <동무생각=사우>와 더불어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한번쯤 흥얼거려본 애창곡이다. 깊어가는 가을, 붉게 물든 단풍이 쓸쓸히 떨어지는 계절이 다가오면 우리가 불러보았던 이 <이별의 노래>, 그 노래 속에는 박목월이 중년에 남몰래 사랑했던 문학을 지망했던 여대생 M양과 헤어지는 아픈 사연이 담겨져 있다.
목월(木月)은 박영종(朴泳鍾)의 필명이다. 경주 교외 건천(乾川)에서 태어난 그는 작곡가 박태준과 마찬가지로 대구 계성학교 출신이다. 그는 계성중학교 3학년 때인 열여섯 살 나이로 잡지 <어린이>와 <신가정>에 동요 <통딱딱 통 딱딱>이 당선되어 동요시인으로 이름을 내기 시작했다. 경주에서 금융조합(金融組合) 서기(書記)로 일 하던 때 기차 여행에서 만난 유익순(劉益順)이 우연히 직장 동료의 처제여서 불국사에서 다시 만나는 기연(奇緣)으로 혼담이 싻 터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충남 공주시 유구면(忠南 公州市 維鳩面)에서 태어나 공주사범학교(公州師範學校)를 졸업하고 경주(慶州)에서 교편을 잡던 유익순은 이처럼 박목월과 경주에서 만나는 인연으로 부부가 된 것이다.
그는 1930년대 말 <문장(文章)>지에 추천을 받을 때 그가 평소에 좋아하는 시인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의 아호인 수(樹)자에서 나무 목(木)자를 따고 김정식의 소월(素月)에서 달 월(月)자를 따서 지은 것이 그의 호 목월(木月)이 된 것이라 한다. 이 <이별의 노래>가 탄생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목월은 6.25 전쟁 중인 1953년 자신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구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그 해 어느 봄날 목월은 교회에서 서울의 명문여대에 다니는 문학지망 여대생 M양을 만났다. 시인과 시를 좋아하는 M양의 만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다음 해 휴전이 된 직후 목월은 서울로 올라갔고 M양 역시 얼마 뒤에 서울로 올라가 복학을 한 뒤 두 사람 사이는 자연스럽게 사랑이 이어졌다. 목월은 그녀의 그에 대한 태도가 존경을 넘어 이성의 사랑으로 싻 트는 기미를 보자, 후배 시인에게 그녀를 잘 설득하도록 부탁도 하였다. 왜냐하면 목월은 자식 셋이나 거느리고, 나이 이미 40을 바라보는 처지이기에 자책감이 들어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명동 문예살롱에서 목월이 보낸 시인에게 M양은 “나는 사랑 이상의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무상의 사랑은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후배 시인의 설득을 거절하였다.
그 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올 무렵 목월은 어디론가 잠적했다. 그녀와 제주도(濟州道)에서 함께 살고 있다는 소문이 얼마 뒤에 알려지고 그 사랑의 도피생활이 넉 달째 들어섰을 때 부인 유익순 여사가 제주도를 찾아갔다. 새로 지은 목월과 그녀의 한복과 생활비로 쓸 동봉투를 들고…
“계절이 바뀌었으니 입성(옷)은 갈아입어야 하지 않아유? 그리고 객지에서 지내자면 돈도 필요할 테고유!”
아내 유익순 여사의 티 없이 청순한 마음씨에 감복한 목월은 마침내 그녀와 헤어지면서 이 이별의 시를 그녀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돌아왔다.
김성태곡으로 널리 애송되는 이 <이별>의 노래는 이처럼 문학을 지망하는 그 연인을 두고 지은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목월은 바로 아내와 아들, 딸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곧장 가지 못하고 효자동(孝子洞)에서 두어 달 동안 하숙생활을 하다가 귀가했다.
그 목월은 평생토록 그 사랑을 시 속에 심다가 마침내 붓을 놓고 저세상으로 갔다. 그가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때 연주되는 장송곡 역시 <이별의 노래>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행복하셨겠지만, 상여 뒤를 따르는 우리 어머니 유익순 여사의 속은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장남이자 내 친구인 박동규 교수는 조용히 나에게 귀뜸을 했다.
3. 김소월의 초혼(招魂)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가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들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시 <초혼(招魂)>은 김소월이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낸 처절한 슬픔을 표현한 그의 대표적인 시 중 하나다. 내가 이 시를 처음 접한 건 6, 25 전쟁 직전인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제목이 특이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이 초혼(招魂)인데 혼을 부르는 행위도 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에서 이 시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 한참 뒤인 대학시절에 이시 속에 담겨진 사연을 선배 권영철 교수로부터 듣고 감명을 받아 그의 대표작 <진달래꽃> 보다 더 애송하게 된 것이다.
이 시는 얼마 뒤 이봉조가 작곡하고 이은하가 노래를 불러 널리 퍼졌고 뒤에 장윤정이 노래를 불러 이제는 국민 애창곡으로 되었다.
본명이 김정식(金廷湜)인 소월(素月)은 1902년 평안북도 구성군(平安北道 龜城郡)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나 났다. 소월이 3살 때 그의 아버지 김성도(金性燾)는 일본인들에게 폭행을 당해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소월은 정주군 곽산면(定州郡 郭山面)에 있는 본가로 돌아와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아픈 상처를 가진 채 성장했다.
이후 오산(五山學校)학교에 진학한 그는 3살 많은 이웃에 사는 누나 ‘오순’을 알게 된다. 그는 자주 ‘오순’과 마을 폭포수에서 따로 만나며 마음을 의지했다. 소월이 14살이 될 때까지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정을 나누다가 마침내 연인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그들 이 행복은 잠시뿐이었다. 왜냐하면 소월이 14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친구의 손녀 홍단실(洪丹實)과 강제로 혼인을 맺도록 한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는 처지에 있던 소월은 할아버지의 명령대로 그녀와 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결혼을 한 뒤 사랑하던 ‘오순’과 연락이 끊겼지만, 자신의 마음을 보듬어주던 ‘오순’ 누나를 잊지 못하고 지내던 중 ‘오순’이 19살 나던 해에 시집을 갔다고 들었다. 그 얼마 뒤인 소월이 22살 때 ‘오순’은 의처증이 심하고 폭행을 일삼는 남편에게 맞아 죽었다는 가슴 아픈 소식이 들려왔다. 소월은 그 아픈 가슴을 안고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을 했다. 이 때 사랑했던 ‘오순’을 기리며 읊은 시가 바로 <초혼>이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오순’이 죽기 전에 대꼬챙이처럼 말랐었다고 하는데 이는 소월에 대한 상사(相思)의 아픔 때문이었다고 한다.
1925년 12월에 펴낸 시집 <진달래꽃>에 이 <초혼>이 발표되었다.
임이 죽음으로 말미암은 슬픔과 그리움을 담고 있는 이 시가 국민들에게 애송되고 애창되는 것은 그 내용이 애상적일 성격을 띠고 있을 뿐 아니라 7.5조의 3음보가 이 슬프고 그리운 정서를 격정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나 작가가 남다르게 가슴쓰린 상처를 지니고 읊조린 작품일수록 그 작품의 진폭은 강렬하여 이를 수용하는 독자는 더욱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위의 작품들에서 보듯이 그 작가들은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낸 임에 대한 애달픔과 그리움으로 몸부림치면서 읊조린 작품들인데, 그러나 이를 수용하는 독자들은 그 절규가 심각하면 할수록 감미롭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송백헌: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현대문학」에 평론으로 등단.
평론집 『진실과 허구』(민음사), 『우리문학과 그 현장』(국학자료원), 『대전, 문인, 문학』(종려나무), 『대전, 예술 예인』(종려나무)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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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송선생님의 풍부한 식견과 세심한 관찰, 거기에다 강한 응집력등 굴하지 않는 기개가 엿보이는 평론 . 감사
계룡산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