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비가 내려..
무얼 적시려고..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지나간 과거의 헐거운 기억들 불러낸다.
사랑했던 것들의 얼룩이 유리창에 비치는 듯..
그 언제든가...
3월의 대학 신입생,
교정엔 개나리보다 더 무성하게 518 그날의 참상을 알리는 대자보의 꽃자락,
노찾사의 젊고 들뜬 목소리,
그 와중에도 최루탄 속에 노랗게 피던 매운 첫사랑,
또는 망우공원 푸른 그늘 아래 빈 벤치엔 허기진 영혼을 쓰다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과 흩어지는 담배 연기,
폐 안에 가득한 불만과 허무와 아나키스트의 온기.
그때도 삶은 허황되었고 늘 허덕였다.
늘 뭔가를 얻은 듯하면 그만큼 소중한 뭔가를 잃어버리듯..
창 밖엔 한껏 물들인 단풍의 붉은 색을 씻기는 비는 내리고..
생각해보면..
그래서 좀 더 거슬러가보면..
1979년 10월 26일, 내가 아직 독재자의 개념을 깨닫기도 전에 이미 완벽한 독재자였던 박통이 살해당하던 날.
그날은 중학시절의 마지막 가을 소풍날이었다.
그러나 등교길의 길거리는 묘한 침묵과 숨죽인 흐느낌이 안개처럼 스물거리고 있었다.
아무도 소풍의 경쾌한 햇살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교문은 철책처럼 닫혔고 우리는 수근거리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덮어쓰고 라면을 끓이고 야외전축에서 CCR의 Who'll stop the rain을 들으며 태어나 처음으로 사발그릇에 금복주를 부어 마셨다.
행복한 금복주 두꺼비의 품에 안겨 아나키스트의 허접한 체취를 처음 알고 처음으로 절망의 불온한 징후를 느꼈다.
그리고 박통은 역사로 사라지고 살벌한 전두환의 천하가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고요한 불안은 학교건물 뿐아니라 작은 도시 전체를 휩싸안고 내성천 강물을 따라 흐느적거리며 흐르고 있었다.
허름한 자취방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야외전축엔 Led zepline의 stairway to heaven이 고음으로 달리고, 방바닥엔 양은 냄비에 말라붙은 라면이 말없이 굳어가고..
이미 죽음의 실체와 허구의 흔들거리는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긴장에 쩔어본 경험으로 우리는 어쩌면 외부의 전쟁이 아닌 욕망과 권력의 힘에 대해 복종하기를 학습받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덕에 반항의 본능을 더 급히 찾아냈는지도 모르겠고..
나로부터 기인하지 않는 것들로 내 삶을 경험하고 인정해야 하는 슬픈 자유의 세대..
앞선 세대의 신고의 세월을 무릎꿇고 들어야 하고 뒷세대의 거리낌없고 발랄한 목소리를 부럽게 바라만 봐야하는 ...
그 피해의식으로 늘 말을 버벅거리는 낀 세대라 하던가.
그로 386세대..
누구도 그렇게 불리길 원하지 않았겠지만 이미 표정에 걸맞는 낙인은 얻어 새겨졌고..
문득,
기성세대라는 굴레에서 서글픈 책임감과 삶에 대한 긴 생각이 잊고 있던 감성을 흔든다.
서글프게 비는 오는데..
모든 건 저렇게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 같다는 생각..
저렇게 사람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아무 표정없이 건네는 저 여인네들..
저들도 머지않아 시간이 흉물스런 몰골을 씻겨가겠지만, 부녀가 대를 이어 어찌 이토록 큰 화두를 던지는고..
사람을 죽이는 게 어찌 피를 묻혀야만 살인일까.
내 속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게 더 큰 살인은 아닐까.
슬픈 민족의 서글픈 역사가 휘갈겨지는 종이 위를 걸어가는 이 느낌은 뭘까.
비는 내리고.. 긴 밤의 한 가운데에 비는 생각을 부르고..
말은 두서가 없고, 잠은 또 오지 않고..
첫댓글 그냥..해보는 소리가 아니신데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