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名色)은 불교에서 12인연(因緣) 중의 하나를 가리키며,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형체가 있는 물질,
즉 명(名)은 심적인 것,
색(色)은 물적인 것을 가리키므로,
명색은 심적인 것과 물적인 것의 모임이고
복합적인 것이다.
명색의 산스크리트어 ‘nāma-rūpa’에서, na-ma는 명(名),
ru-pa는 색(色)을 말한다.
인도 고전인 <우파니샤드>에서는
현상 세계의 명칭(nāma)과 형태(rūpa)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후에 불교에서는 명은
개인 존재의 정신적인 면을 말하는 것이고,
색은 물질적인, 육체적인 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하게 됐다.
따라서 ‘정신과 물질’로 번역되는 나마-루빠(nāma-rūpa)는
두 단어의 합성어로서 개인을 이루는 ‘정신과 물질’의 복합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나마-루빠라고 할 때에
중국에서는 이 둘을 합쳐
명색(名色)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오온(五蘊)에서 왜 정신과 물질은 불가분의 관계인가?
1) 몸만 있고 정신이 없으면
시체라고 한다.
2) 정신만 있고 몸이 없으면
귀신이라고 한다.
3) 몸과 정신이 모두 다 있으면
살아있다고 하듯이 명과 색은
별도로 구분될 수 없다.
나마(nama)의 일차적인 의미는 이름,
곧 명칭이다.
나마는 루빠(rūpa-물질)와 반대되는 형이상학의 용어로서 개인을 이루고 있는
네 가지 비(非)물질 ― 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의
무더기들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물질로 번역되는 루빠(rūpa)는
오온(五蘊)의 하나인 색온(色蘊)을 말한다.
이와 같이 명색의 발생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이 결합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경전엔 오온(五蘊)을
명색이라 하기도 한다.
그럴 경우, 색(色)은 물질적인 것이고,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은 정신적인 것 -
명(名)으로 본다. 그만큼 불교에서는
정신(마음)을 중요시하므로 종류도 다양하다.
이처럼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몸과 마음’이란
용어를 ‘물질과 정신’으로 표현하는 것은 이 용어가 법의 고유한 성질(自性, sabhāva)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오온(五蘊)에서 나마(nāma)는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의 네 가지 정신의 무더기
(名蘊, nāma-khandhā)를 말하고,
루빠(rūpa)는 물질의 무더기
(色蘊, rūpa-khandha)로서, 이러한 오온(五蘊)이
인간 존재(有, bhava)를 구성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2연기에서는 4번째에 해당하는 것이
명색인데, 무명(無明), 행(行) 다음에 식(識, vinnāṇa)이 있어서
명색(名色, nāma-rūpa)이 만들어지고,
또 그것을 조건으로 6가지 감각장소(六處, 六入, āyatana)가 일어난다.
즉, 12연기에서 명색은
식(識)을 조건으로 해서 일어난
정신과 물질을 말한다.
그런데 식(識)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있다는 것은 그릇된 식, 즉 그릇된 마음, 그릇된 6식이 있기 때문에 심신(心身)의 부조화 ― 정신[名]과 육체[色]의 그릇된 상태가 생겨나게 됨을 뜻한다.
그리하여 고(苦) 발생의 원인을 형성해간다.
명(名)은 형체는 없고 단지
이름만 있는 것이고,
색(色)은 형체는 있으나 아직 육근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단지
몸만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명색(名色)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뜻한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쓰는 ‘명색’은 대개
실제와 이름의 내용이 합치하지 않을 때
주로 쓴다.
“명색이 승용차라는 게 화물차보다 더 소음이 심하다.”라고 하든가,
“명색이 대학생이라는 게 중학생 영어실력보다 못하다.”고 하는 예와 같다.
명색은 이미 인도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Veda) 문헌에 나타나기도 해서
매우 오래된 개념으로,
육체와 정신의 유기적 혼합체를 말한다.
또한 ‘명색을 조건으로 인식이 발생한다.’는
내용도 초기경전에 등장하는데,
이는 인식과 명색은 서로 의존관계로서
매우 밀접한 친밀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리고 명(名)과 색(色)이 무엇인지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이 나와 있는 것이 <증일아함경>이다.
명(名)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느낌[痛;受]ㆍ생각[想]ㆍ기억[念]ㆍ접촉[更樂]ㆍ사유(思惟)이니, 이것을 명(名)이라 한다.
또 역시 <증일아함경>에서는 명을
수(受)ㆍ상(想)ㆍ사(思)ㆍ촉(觸)ㆍ작의(作意)로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명이라 한다.
그리고 어떤 것을 색(色)이라 하는가?
지ㆍ수ㆍ화ㆍ풍 사대(四大)로 만들어진 것이 색이니, 이것을 색(色)이라 한다.” 라고 해서
이름만 있고 형상이 없는 비물질적인 심식(心識)을 명(名)이라 하고,
물질적 존재인 육체는 색(色)을 가리킨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명색은 ‘정신과 물질(육체)이 하나로 결합된 혼합물’로서 정신과 육체가 한 덩어리인 상태이다.
오온도 한 덩어리로 결합돼 한 몸을 이루고 있음은 마찬가지이다.
헌데 부처님 당시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라고 의심했었다.
부처님은 이러한 물음에 침묵했다.
정신과 물질 또는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사유하는
잘못된 틀임을 직시하신 것이다.
본래 정신과 육체는 분리할 수가 없다.
우주 전체가 모두 서로 유기적으로 관련돼 있기 때문에
분리해서 사유하는 것은 인간의
분별심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부처님은 명과 색을 연기관계라고 봤다.
즉, 명과 색은 독립적이고 절대적 요소가 아니라 한 가지 현상 가운데서 인식하는 활동[名]과 인식되어지는 대상[色]이라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육체[色]와 정신[名] 또한 어느 것이 먼저 있거나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말미암아 비로소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잡아함경>과 <니까야>에서
명색을 설명하는 것에는 약간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전반에서 명색(名色)의 명(naama)은 수ㆍ상ㆍ행ㆍ식의 4온을 뜻하고, 색(ruupa)는 색온을 뜻한다. 그러나 12연기의 네 번째 각지인 명색은
오온 가운데 식(識)을 제외한 색ㆍ수ㆍ상ㆍ행의 4온만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식은 이미 세 번째 각지로 언급이 됐기 때문이다.
<청정도론> 등 주석서 문헌들에서도 한결같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잡아함>에서 명이
수ㆍ상ㆍ행ㆍ식이라고 한 것은 일반적인 명의 설명이고,
<니까야>에서 명을 설명하면서 식을 제외한 것은 12연기에서의 명의 설명이다.
『우리는 사물을 이름과 형태로 인식한다.
이름이 없는 것은 인식할 수 없고,
형태가 없는 것은 비록 이름이 있어
인식한다 해도 무의미한 인식이 된다.
예를 들어, 책상이나 의자라는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를 책상이나 의자로 인식하지 못하고 나무라고 인식할 것이다.
나무라는 이름이 없다면 나무가 속하는 다른 이름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이 없으면 그 이름이 지시하는 사물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이름만 있고 형태가 없어도 인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은 이름은 있지만 형태가 없으므로
우리는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고대 인도 브라만교의 베다ㆍ우파니샤드의 철학자들은 모든 사물이 이름과 형태를 통해 인식된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이름과 형태를 지닌 사물 속에 그 사물의 본질로서 '아트만(atman)'이 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브라만 철학자들의 생각은 사물이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상식과 상통한다.
부처님은 이러한 우리의 상식적인 생각에 기초한 사물의 이름과 형태를 명색(名色)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과연 모든 사물은 본래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외부에 실재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름, 즉 언어나 개념이 객관적인 사물을 지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의 근저에는 모든 사물이 본래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은 본래부터 산이고, 강은 본래부터 강이기 때문에 우리는 산을 산이라고 부르고 강을 강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객관적인 사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 욕구의 반영이다.
아프리카의 부시맨에게는 책상이 없다.
그들에게는 책상이라는 개념, 즉 ‘책상’이라는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책상을 인식하지 못한다. 부시맨에게 나무로 된 책상을 보여주며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나무나라고 대답할 것이다. 만약 사물이 본래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있고, 우리가 그것을 인식한다면 부시맨이든 미국인이든 책상을 보면 책상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시맨은 나무라고 인식하고 미국인은 책상이라고 인식한다면 책상은 본래부터 있는, 객관적인 사물의 고유한 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동일한 사물을 동일한 사람이 본다고 해서 동일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놓고 보려는 의도로 보면
책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밥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로 보면
식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은 인식의 대상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사람의
의도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말은
"이것은 내가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가 있을 때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이름은 이렇게 욕구를 지닌
의식에 의해서 형성된다.
12연기에서
“무명을 연해 행이 있고, 행을 연해 식이 있으며, 식을 연해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에 실체성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자아와 세계가 공간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 무명이다.
이 어리석은 생각에서 욕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행(行)이다.
이러한 삶의 결과 형성된 욕구를 지닌 마음이 식(識)이며,
이 식이 형성됐을 때
명색(名色)이 식의 대상으로 분별된다.
즉, 우리들처럼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책상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형성돼 있을 때, 책상은 이름과 형태를 지닌 존재로 인식되지만, 부시맨처럼 책상을 분별할 수 있는 의식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책상이라는 이름과 형태를 가진 사물은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식을 연해 명색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물을 인식하는 식이 본래 우리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사물은 이름과 형태를 가지고 외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살펴보았듯이 식은 12입처라는 중생의 망념에서 연기한 것이고,
명색은 이러한 식에서 연기한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은 식이 명색을 공간 속에서 접촉한다고 생각하지만,
식과 명색의 접촉은 공간 속에서의 접촉이 아니라 중생의 망념인 18계,
즉 육근, 육경, 육식의 화합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잡아함 306경>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셨다.
두 가지 법(二法)이 있다. 어떤 것이 둘인가? 안(眼)과 색(色)이 둘이다.… 중략 안과 색을 연해 안식(眼識)이 발생한다. 삼사화합(三事和合-안, 색, 안식의 화합)이 촉(觸)이다.
보는 나(주관)와 보이는 세계(객관)가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에서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이 발생하고,
이 의식이 보는 나와 보이는 세계가 있다는 생각과 화합할 때 외부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촉(觸)은 중생들이 볼 때는 공간 속에서 자아와 세계가 접촉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실상은 무명에서 연기한 망념의 접촉이며 화합이다.
이런 착각은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무명이 사라지면 사라진다.
그러나 자아와 세계가 공간 속에서 접촉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중생들의 입장에서 보면
촉은 엄연한 현실이다.
세계와 자아가 상존(常存)하는가 유한한가 하는 등의 사견(邪見)은 식(자아)과 명색(세계)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촉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현실로 인식함으로써 나타난 것이다.
부처님이 앞에서 인용한 <장아함 청정경>에서 외도들의 모든 사견은 촉을 인연으로 해서 생긴 것이라고 한 말씀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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