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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묵상글 (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4:15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7:16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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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매년 2~3차례 이상의 피정을 신학생 때부터 했으니, 이제까지 참 많은 피정에 참여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피정이 이를테면 고상한 피정이었습니다. 신학생 대상의 피정, 신부 대상의 피정은 수준이 높았습니다. 피정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나 있는 분들이었고, 그 내용도 어른에게 알맞은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부끄럽게도 이 피정 지도자들의 강의에 크게 와닿은 적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문제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나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너무 모르는 것이 아닐까?’ 등등…. 피정 갈 때마다 늘 이런 고민이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커다란 울림을 얻었던 피정도 많았습니다.
가장 큰 도움이 된 피정은 한 달 동안 이루어진 이냐시오 영신수련이었고, 또 다른 피정은 찬양 속에서 이루어진 특히 자기 체험 안에서 주님을 느끼게 해주는 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피정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기의 위신, 자존심, 체면, 권위, 품위 따위를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때 피정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피정 지도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낮추지 않으면 피정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 주님께서 강조하신 겸손 속에서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 가십니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잔뜩 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을 통해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주님의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고 불쾌해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에 예수님의 반응이 인상적입니다. 보통 누군가가 화를 내면, 그 화를 삭이기 위해 그 사람 편에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전혀 얽매이지 않으십니다.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겸손하지 않은 사람, 자기를 낮추지 않는 사람과 함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안에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만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과연 주님께서 함께하실까요? 그냥 우리 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실 것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겸손 가득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며, 주님과 함께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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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여라. 그러나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마라(장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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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4 03:56
- 믿음의 착각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오늘 사순 3주 월요일은 주인공이 나아만과 하느님 둘입니다.
곧 치유 받는 나아만과 치유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엘리사 예언자가 있습니다.
먼저 나아만을 주인공으로 오늘 우리 신앙을 반성하면 좋을 것입니다.
나아만은 우리와 비슷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다 차츰 진정한 신앙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하느님께서
자기를 치유해주시는 거라는 믿음이 부족했습니다.
설사 하느님이 치유해주시는 거라고 믿을지라도
인간 정성이 지극해야지만 치유해주신다고 믿습니다.
곧 나아만 자기의 정성과 엘리사의 정성 말입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치유 받으려고 엘리사에게 올 때
뇌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고 군사들도 많이 대동하고 왔습니다.
하찮은 사람은 무시하더라도 자기처럼 대단한 사람은 치유해주고,
자기처럼 지극정성을 다하는 사람은 꼭 치유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러는 만큼 엘리사도 지극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런 나아만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고 가라며 시큰둥한 모습만 보입니다.
자기가 치유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치유해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엘시사가 나와 직접 치유해주지 않으면서
요르단강물에 치유 받으라는 줄 또 착각하고 자기네 강물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이에 나아만의 부하들이 한번 믿어보라고 설득하여 씻었더니 병이 낫고,
그때 그는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라고 말하며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지난주 수녀원 연피정 중에 한 수녀님이 당신의 주치의는 하느님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당신 주치의가 있지만 하느님이 주치의시라는 믿음을 고백한 것인데 우리도
병원과 의사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들을 통해 고쳐 주시는 거라고 믿어야겠지요.
다음은 복음의 주님을 주인공으로 보겠습니다.
주님은 하느님께서 유대인이 아니라 나아만만 고쳐 주셨음을 얘기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착각하지 말라고,
하느님께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부터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자기들만 하느님 자녀라고 착각하고,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잘못을 자주 범합니다.
물론 나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기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 문제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처럼 자기만 하느님 자녀이고
하느님이 나만 사랑하신다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착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고
가르치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들이 이방인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똑같이
고쳐 주신다고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비위 상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비위 상하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착각을 바로잡아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입은 비뚤어져도 말은 바르게 하라는 말처럼
주님께서 그들의 비위를 상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의 착각과 사랑 독점 욕심 때문에 비위 상한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도 나아만이나 유대인들처럼 믿음의 착각이 있음을 알고,
교정도 받고 성장도 하라는 도전을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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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왜 관상 안에 머물러야 하는가?
하느님의 숨
2025.03.23. 21:2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3일 일요일 (호명환 번역) 열세 번째 주간: 향심(centering)과 침묵(silence), 고요(stillness)
관상은 우리로 하여금 존재들의 진리를 온전하게 바라보게 해 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관상의 수양이 지니는 중요성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관상은 보는 것이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는 바라봄입니다. 왜냐하면 이 바라봄은 인식하는 것과 그 가치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감사함)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관상적 정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말해 주지 않고 우리가 주시하는 것을 제대로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줍니다.
관상은 존재들의 진리를 온전한 상태로 바라보게 해 줍니다. 이것은 정신의 훈련이며 우리의 습관적인 생각의 중독에서, 그리고 통제하려는 생각을 좋아하는 정신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선물입니다. 이 훈련은 심지어 우리의 신경 계통에도 영향을 주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훈련을 통해 우리의 자그만 이분법적 정신을 믿지 않게 되고(이 정신은 우리로 하여금 두 가지 선택으로 좁혀 그 중 하나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사고임), 현실을 보는 그 제한된 방식의 부적절함을 인식하게 됩니다. 사실상, 이분법적 정신은 어리석게 느껴지지는 않더라도 피상적인 사고를 불러 일으키는 요인이 됩니다. 오직 관상적인 정신 혹은 깊이 직관하는 정신만이 훨씬 더 넓고 더 멀리 펼쳐지는 지평으로 우리를 이끌고 모험을 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이렇게 말했나 봅니다. "상상은 지식보다 더 중요합니다. 지식은 한계가 있지만, 상상은 세상을 넓혀 줍니다." [1]
그러나 우리는 이런 관상적 정신, 즉 더 깊고 신비롭게 현실을 바라봄으로써 생명을 선물로 받게 해 주는 이 존재 방식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그런 정신이 우리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실제로 그런 정신은 위대한 사랑과 커다란 고통 속에서 순간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긴 하지만, 그렇게 넓은 시야를 갖는 순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정신은 곧바로 다시 이원론적 분석에 빠지게 되고 통제력을 다시 쥐기 위해 우리의 판단력을 사용하게 됩니다. 기도의 수행 - 관상의 수양 - 은 위대한 사랑과 커다란 고통의 열매를 장시간에 걸쳐 다양한 상황 속에서 유지하는 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많은 수양이 필요할 뿐 아니라, 이런 수양은 우리 삶 전체에 걸쳐 계속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매 순간을 직면하는 습관적인 방식을 잘 지켜보아야 합니다. 대개 우리는 우리의 이런 습관적인 방식을 관찰하면서 굴욕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우리가 주로 몇 가지 예상 가능한 반응으로 모든 것에 대응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반응들 중 아주 소수만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순수하고 선천적이며 신선하게 바라보며 자연스러운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경향을 지닙니다. 새로운 순간에 대해 우리 인간이 하는 반응들 대부분은 불신과 냉소주의, 두려움, 조건 반사, 무시, 그리고 과도한 판단이 주를 이룹니다. 이런 반응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통제하는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이 순간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뭔가를 가르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에고가 이런 순간들을 거부하고 주어진 정보를 통제하게 하는 일반적인 방식이라는 사실을 보려는 용기를 우리가 가질 수 있을 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아주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이런 순간들이 우리에게는 반드시 존재해 합니다! 이때 우리는 참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간이 우리를 가르치도록 우리 마음을 열기 위해 우리는 조금이라도 그 순간에 놀라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그 순간이 우리를 경이로움의 미묘한 경험을 향해 내면 깊이 그리고 우리를 넘어서서 더 높이 올라서게 할 때까지는 말입니다. 새로 시작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거저 주어지는 이 경이로움의 순간이 하나라도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은 모든 종교적 직감과 그 여정을 위한 견고하고도 유일한 토대가 됩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눈물을 끌어안기(embracing tears)라는 주제는 저로 하여금 제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들어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건강 문제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제 젊은 두 아들이 저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 함께 있게 되면서 저의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 둘이 자기들 직장과 가정에서 떨어져 저를 보살피기 위해 보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생각하면서 저는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 느낌인지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저는 전에 없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우리 나라가 다 함께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Leanne H.
[1] “What Life Means to Einstein: An Interview by George Sylvester Viereck,” The Saturday Evening Post, October 26, 1929, 117.
Adapted from Richard Rohr, Just This (CAC Publishing, 2017), 7–9.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xisbati,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침묵은 풀밭 위에 뻗져진 저 손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갗을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를 단순하고 깊이 의식하듯이 현재의 순간에 깊이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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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오늘은 귀신새 소리가 '내' 생각의 틀에서 빠져 나오라는 예수님의 초대로 들리네요....
하느님의 숨
2025.03.24. 05:46
영국의 저명한 학자요, 위대한 지성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헤아리며 자신의 온 삶을 논리와 지성에 기초하여 굳건히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낡아빠진 미신보다 더 못한 것이라고 치부했습니다. 누가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면 그는 언제나 그 사람을 조롱했고 그 사람의 믿음을 반박하기 위한 주장을 끊임없이 펼쳤습니다. 그는 확신했습니다. 그리스도교라는 것은 연약한 정신을 지닌 이들을 위해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진리, 즉 수그러들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계속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주변의 위대한 정신을 지닌 저술가들, 철학자들, 교수들 중 다수가 하느님 존재에 대해 깊은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저런 지성인들이 내가 그토록 무시하고 멸시해 온 것을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요....
그러고는 예수라는 한 인물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님의 인격인 복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 말씀이 지닌 부인할 수 없는 무게감. 그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이라는 실제 역사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벌거벗겨진 진리를 그는 부정하고 거부해 왔던 겁니다. 결국 그는 그 진리를 부정했다기보다 자기 자신을 부정했고 자기 자신과 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자신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의 온 존재로 완전히 인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를 두렵게 했고,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그 앞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어느 밤, 그는 자기 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 부인할 수 없고 도망칠 수 없는 그 진리가 자기 앞에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의 마음을 부수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이심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영국의 모든 사람 가운데서 실의에 빠져 주저하던 최악의 회개자였을 거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이 진리를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때까지 신앙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C.S. 루이스(Lewis)입니다. 루이스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하나였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였고 논리의 대가였으며 호교론자로서 수백만의 사람에게 지대한 영감을 준 글들을 썼고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루이스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견고하다 하더라도 인간의 부드러움보다 더 다정하며, 그분은 우리가 우리의 딱딱한 생각의 틀에서 해방될 때까지 우리에게 그 틀에서 나오라고 강요하시는 분이십니다."
예, 맞습니다. 진리는 우리 자존심이나 자만심에 맞추어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만심은 진리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하고 또 결국은 그렇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무리 거부하고 부인한다고 해도 그분을 참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영원에서 영원까지 "있는 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편안해하는 곳에서 나오라고 초대할 때 우리는 이를 거부하고 싶어 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배척당하시는 상황을 전합니다. 자만심과 오만함, 거만함으로 가득찬 사람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을 자극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게 하였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하였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루카 복음 저자는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아주 강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런데 어떤 번역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마음을 분노로 가득 찼다."라고요....
우리의 자존심이 상처받으면 대개 우리는 화가 납니다. 우리가 편안해 하는 곳에서 나와야 하는 상황에 맞부닥뜨리면 우리는 초조해지고 불안해집니다.
그런데 C.S. 루이스가 고백한 대로 이 순간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현실과 대면하는 때라는 사실을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괜히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일까요?! 그런데 사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 아니라 자기들만으로 가득 찬 오만하고 거만한 마음에서 벗어나게끔 그들을 초대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겸손해져야 할 필요성을 피력하셨던 것이고, '모든 것을 끌어안으시는'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초대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결국 그들이 안주하던 곳, 즉 꽉 막혀 있는 생각의 틀에서 빠져 나와 하느님 나라로 들어오라는 "한없는 자비"의 초대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가 지금까지 늘 갖고 있었던 생각의 고정된 틀에서 빠져 나와야 할 때, 우리도 대개 아마 같은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도전은 우리 생각의 틀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자비하시고 동정심 가득한 마음을 받아들이라는 초대이고, 또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가라는 초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 이 초대를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하느님의 초대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의 방식에, 우리 생각의 틀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우리 인간의 이런 경향을 대표적으로 잘 드러내 줍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조언에 그런 것은 자기 나라의 더 좋은 물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화를 내며 엘리사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주하던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라는 초대에 우리도 아마 나아만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끊임없이 똑같은 초대를 해 주시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너희가 (참된)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하느님의 진리는 언제나 변함 없이 '내' 생각의 틀에서 빠져 나와 참된 해방을 얻으라는 하느님의 초대입니다! C.S. 루이스의 말처럼 말입니다....
오늘 오랜만에 이곳 장성 클라라수도원에 와서 새벽에 일어나 귀신새(호랑지빠귀) 소리를 들었습니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들리는 이 소리가 참 반가웠고, 행복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시끄럽고 혼란하다 해도 여전히 봄은 오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전에는 이 귀신새 소리가 그저 스산한 느낌만 들었던 소리입니다만, 이제는 이 소리가 참 반가고 정겹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이 소리가 '내'가 안주하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을 향해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초대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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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 줍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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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이라고 합니다. 그중에 생명의 탄생은 38억 년 전이라고 합니다. 처음에 나타난 생명은 죽음이 없었다고 합니다. 생명이 단성생식, 다시 말하면 자기복제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환경이 변화면서 단성생식으로는 적응할 수 없었던 생명은 유성 생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성 생식을 하면서 생명은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성 생식을 통해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었고, 다양한 형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유성 생식은 서로 다른 유전자를 가진 부모가 만나 새로운 생명을 창조하는 과정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는 수많은 다양한 생명 형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유성 생식에서는 같은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쌍둥이도 서로 다른 생명이 됩니다. 예를 들어, 같은 식물종이라도 유성 생식을 통해 다양한 꽃의 색깔과 형태가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한 생명체의 다양성을 넘어, 각기 다른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더 강력한 생태계를 만들고, 각 생명체가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처럼 생명의 다양성은 우연의 산물만이 아니라, 하느님이 창조하는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조화입니다.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이방인 여인의 이야기와 고향 사람들의 편견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말, 라합, 룻, 바세바와 같은 이방인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각각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소중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제외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가 구원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인류에게 미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향 나자렛에 돌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에게 권위와 힘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냥 나무를 손질하던 목수의 아들”로 여겼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스스로 제한해 버렸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그들이 하느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도 편견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병환자였던 나아만은 엘리사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 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았습니다. 시리아에도 요르단강보다 좋은 강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만은 편견을 버리고 자신의 교만함을 내려놓았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었던 나아만은 요르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갔고, 그의 나병은 깨끗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지 않았고 자신들의 판단을 먼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기보다는 예수님의 가족과 친지를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은 그 색안경의 색깔대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나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나아만은 그 길이 너무 쉽다는 이유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아만은 결국 그 길로 갔기 때문에 나병이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편견과 시기심은 우리가 서로의 가능성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는 주어진 기회를 통해 서로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모두가 구원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이방인 여인들의 이야기는 환영과 포용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희생, 순명, 사랑, 헌신, 봉사’의 길입니다. 사람들은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을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길은 목적이 아닙니다. 길은 목적지를 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날아다닐 수 있는 사람에게는 ‘길’은 굳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아직 날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 길이 필요합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정표, 지도, 내비게이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의 소중한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나가는 가운데, 우리는 하느님이 보여 주시는 구원의 계획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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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저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이 그곳이니 부평을 제 고향이라고 이야기해야겠지요. 그러나 지금 그곳에 가면 반겨줄 사람도, 알아볼 사람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고향이라 해도 따스함이나 설렘은 없습니다. 이런 마음인데 부평이 진짜 제 고향일까요?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부르지 않고 추억과 기억이 있는 곳, 아득한 기억 속 즐거움이 있는 곳을 고향이라고 부른다면 제 고향은 여러 곳입니다.
우선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이 제 고향입니다.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 이지만 기억의 토막들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다음은 부평5동 성당입니다. 지금은 부개동성당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곳 역시 저의 학창 시절과 신학생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도와준 곳이기에, 그리고 많은 친구들이 기억에 남아있는 곳이기에 저의 고향입니다.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고향은 바로 이런 곳이었습니다. 즉 고향은 따스한 추억과 즐거움이 남아있는 곳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인가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태어난 곳이 고향인가요? 아니면 좋은 추억과 기억이 있고 그 안에 즐거움이 있었던 곳인가요?
더듬어보세요. 하느님께서 선물해 주신 고향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따스함과 위로와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어쩌면 지금도 그곳에서 지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영적인 고향…. 하늘나라와 하느님 계신 곳입니다. 그곳에서 우리가 늘 따스함과 위로를 얻으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등심보다….
안심보다….
등심보다
안심보다
진심입니다.
한우를 소개하는 광고입니다.
광고를 제작하는 분들의 번쩍이는 아이디어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맞습니다.
무엇보다 진심입니다.
진심이 없을 때 그 마음은 가벼운 무게로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 위로, 격려, 칭찬 그리고 배려….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 같은 것이 바로 ’진심‘일 것입니다.
무엇보다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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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여정
“믿음의 힘,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
역시 믿음의 선택, 믿음의 훈련, 믿음의 습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정성을 다한 공동전례기도 수행을 통해 믿음을 훈련하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정주와 순명서원 역시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 역시 보고 배웁니다. 주님께서 감동, 감탄하신 것도 믿음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은 함께 갑니다. 어제와 그제 양일간 다양한 연령층의 네 부부가 면담성사를 봤고 따로 물었습니다.
“남편의 삶을 100점 만점에 몇점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내의 삶을 100점 만점에 몇점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진지하게 그러나 미소지으며, 똑같은 질문을 남편과 아내되는 분에게도 했습니다. 네분의 자매가 남편 점수를 90점을 줬고, 네분 형제중 두분은 아내에게 90점, 95점, 99점, 100점을 줬고, 즉시 함께 불러 점수를 공개하니 얼마나 기뻐하는지 신뢰와 사랑이 가득한 눈빛을 교환하는 것을 보면서 배우는 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의 성장 역시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성장임을 깨달으니 서로 감사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는 ‘말씀의 성모영보 수녀회’ 창립자인 선종완 사제의 <선종완, 깊은 숲, 영란처럼 향기롭게>란 평전을 틈틈이 보면서 믿음을 배웠습니다. 제자였던 박찬용 신부의 선종완 스승 사제에 대한 회고담을 인용합니다.
“박학한 지식도 지혜도 모두 성화시키신 은사님, 시험답안지에 쓰라는 답을 못쓰고 엉터리 설교 답안을 써내면, ‘허허, 요즈음 신학생들은 교수한테 정답 대신 설교를 한단 말이야’하시면서도 좋은 점수를 주신 까닭에 사제가 지식으로가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살기를 더 원하신 까닭이었으리라 여겨 집니다. 여름에 선풍기 하나 없이 대야에 냉수를 떠놓고 발을 담그고 성서연구를 계속하시던 그분의 모습이, 또 언제나 변함없이 무릎을 꿇고 연구나 강의전 기도를 바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제자들 역시 학식과 더불어 보고 배운 스승의 믿음과 사랑이었음을 봅니다. 우리는 공동체 형제들로부터도 믿음과 사랑을 보고 배우지만 오늘 말씀에서도 복음의 예수님, 2열왕기 독서중 엘리사, 나아만으로부터 믿음을 배웁니다. 반면 편견과 질투에 눈이 먼 예수님 고향사람들은 역설적으로 믿음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 질투 역시 믿음 부재를 반영합니다. 믿음이 부족할 때 숱한 오해와 착각이 따릅니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보게 하는 믿음의 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선입견과 편견의 무지에 눈이 먼 고향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좌절감을 엿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어 믿음의 모범으로서 이방인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를, 또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예로 들면서 독자들의 믿음에 신선한 자극을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잔뜩 난 고향인들은 예수님을 고을밖으로 내몰고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유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시니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님의 믿음을 보고 배웁니다. 두려움을 몰아내어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믿음의 힘, 믿음의 빛입니다. 새삼 무지에 대한 답 역시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임을 봅니다. 우리를 참으로 내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두려움을 몰아내는 믿음입니다.
제1독서 열왕기 하권에서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예언자 역시, 시리아의 장수 나아만의 방문에도 추호도 위축되거나 주눅된 모습없이 참 의연하고 당당하니 이 또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엘리사는 품위를 지킴과 동시에 나아만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심부름꾼을 시켜 처방을 전달합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한 나아만은 화를 내어 돌아가려 하자 현명한 부하들의 충언에 나아만이 엘리사의 말에 그대로 순종하니 쾌유의 기적입니다. 이에 감격한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 앞에 서서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나아만을 낫게 한 것은 요르단강물이 아니라 나아만의 믿음이었습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하느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탓할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부족임을 깨닫습니다. 부족한 믿음을 더해 주십사 기도할 것이며 평소 믿음의 훈련에 충실해야 함을 배웁니다.
여기서 생각하는바 나아만의 나병입니다. 천형이라 칭하는 나병이 믿음으로 치유되었으니 천형天刑은 천복天福으로 변했고 그야말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믿음입니다. 나병이 없었다면 나아만의 믿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시련과 고통을 믿음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는다면 탄력좋은 믿음에 전화위복이 은혜가 뒤따를 것입니다.
믿음의 여정중 디테일에 강해야 함도 배웁니다. 나아만의 치유에 이스라엘에서 잡혀온 보잘 것 없이 작은 소녀가 제공한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으니 이를 받아들인 나아만 아내의 겸손하고 지혜로운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기 책임을 충실히 다함도 믿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의 인물들이 다 좋은 본보기입니다. 오늘 옛 현자들의 지혜도 이와 일치합니다.
“높은 지위에 매달리며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하지 말라. 그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일도 빛나고 사람도 빛난다.”<다산>
“맡은 일을 부지런히 행했을 뿐, 그밖의 일은 삼가지 않음이 없었다. 이것이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동몽훈>
부지런히 주어진 책임을 다하며 지족知足의 삶을 사는 이들을 통해 빛나는 믿음입니다. 눈만 열리면 우리 가까이에서도 이런 믿음의 모범을 보고 배웁니다. 정말 보고 배워야 할 것은 신망애信望愛, 믿음, 희망, 사랑의 삶이요, 이런 삶의 모범이 될 때, 이보다 이웃에게 더 좋은 선물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들의 신망애 삶을 보고 배우라고 공동체 생활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날마다 주님의 미사은총이 우리 부족한 믿음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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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움켜쥐지 않으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ㄴ)
믿음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믿음이
나만의 믿음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믿음이라면
나는 더욱 굳게 믿겠나이다
희망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희망이
나만의 희망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희망이라면
나는 더욱 밝게 희망하겠나이다
사랑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사랑이
나만의 사랑이 아니요
벗님들에게도 사랑이라면
나는 더욱 뜨겁게 사랑하겠나이다
기쁨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기쁨이
나만의 기쁨이 아니요
벗님들에게도 기쁨이라면
나는 더욱 마음껏 기뻐하겠나이다
자유는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자유가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자유라면
나는 더욱 드높이 자유롭겠나이다
정의는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정의가
나만의 정의가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정의라면
나는 더욱 깨끗이 정의롭겠나이다
진실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진실이
나만의 진실이 아니라
벗님들에게 진실이라면
나는 더욱 맑게 진실하겠나이다
평화는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평화가
나만의 평화가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평화라면
나는 더욱 널리 평화롭겠나이다
길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길이
나만의 길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길이라면
나는 더욱 힘차게 길을 걷겠나이다
삶은
움켜쥘 수 없고
움켜쥐어서도 아니 되니
나의 삶이
나만의 삶이 아니라
벗님들에게도 삶이라면
나는 더욱 오롯이 살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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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질투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한 나자렛
구원자께서는 당신께서 왜 고향에서 기적을 일으키지 않으셨는지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이는 사람들이 고향에 대한 사랑을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 분께서 고향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셨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고향을 시샘하는 자들은 스스로 사랑을 멀리하지요.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1코린 13,4). 하지만 주님의 고향은 거룩한 축복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태어나신 사실이야말로 기적 아닙니까? 그런즉 우리는 질투가 얼마나 큰 악을 불러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분께서 어린 시절을 보내신 곳, 하느님의 아들께서 태어나시기에 합당하다 여겨졌던 그곳이 질투로 말미암 아수치를 당합니다.
-암브로시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나다. “오 주여, 우리가 만물을 여의고 광야와 같이 안팎으로 고독해지고, 우리의 능력과 그 업적들을 버려야 한다면,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버리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신다면, 참으로 힘겨운 상황이 될 것입니다. 예언자는 말했습니다, ‘아 슬퍼라! 나는 비참에 빠졌다’(시편 119 참조)라고. 신부님이 말씀하시듯이, 하느님께서 나를 비추던 빛을 거두어 가시고, 내게 말도 걸지 않으시고, 내 안에서 전혀 활동하지도 않으시고, 오랫동안 나를 버리신다면, 그것은 안 될 일입니다"
이처럼 순수한 무에서 자신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어둠과 포기를 몰아내려고 무언가를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차라리 기도를 하거나, 독서를 하거나, 설교를 듣거나, 아니면 덕스러운 일들을 하면서 자신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가급적 오랫동안 입을 다물고 잠잠히 있는 것만이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어떠한 일에 정신을 팔면서 해를 입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356)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사도 1,6-14
예수님의 승천
사도들이 함께 모여 있을 때에 예수님께 물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르신 다음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는데, 구름에 감싸여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시는 동안 그들이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
기도하는 사도들
그 뒤에 사도들은 올리브 산이라고 하는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 산은 안식일에도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예루살렘에 가까이 있었다.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안드레아, 필립보와 토마스, 바르톨로메오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열혈당원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였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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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우리도 업신여기는 이 없는지 냉철한 성찰을 /
박윤식 [big-llight] 250323. 19:55 ㅣNo.180970
믿는다는 게 과연 쉬울까, 아니면 어려울까? 쉽다면 한없이 쉽고, 어렵다면 어려운 게 믿음일 게다. 믿음을 논리적으로 증명할거라면, 연구도 고민도 해야 하리라. 그래서 그 명백함을 보면 흔들림 없이 믿을 수도. 그러나 믿음은 단순한 받아들임을 요구한다. 신앙을 아무리 설명해도, 최종적으로 마지막은 결국 개인 몫이다. 이미 믿음을 받아들인 이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믿음은 자연과학의 이론처럼 증명되는 게 결코 아니리라. 나자렛 사람들도 그 결단은 정녕 어려웠으리라. 그것은 그들만의 믿지 않을 것들이 눈에 보였기에.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예수님께서도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는 건, 기적이 믿음을 주는 게 아닌, 믿음만이 기적을 가져다주기에. 그래서 우리도 기적 보여 달라 청할 게 아닌, 단지 믿음 더해 주기를 청해야만 할 게다.
그러기에 나자렛 고향 분들이 예수님 배척하는 게 어쩜 당연했으리라. 그들은 오로지 출신, 성장배경 등에만 매어있었기에. 사실 예수님은 비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라는 게 그들 눈에 담긴 고정관념이었다. 자신들도 소외되고 하찮은 이었기에, 예수님역시 특별한 게 없는 분이시라는 게 그들 생각이었으리라. 예수님은 엄히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받지 못한다.” 이에 다 화만 잔뜩 났을 게다. 과거를 폄하하려는 그들이니까. 지금 우리네 교회도 마찬가지다. 열등감과 왜곡된 가치관 가진 이일수록 외적만 따진다. 이러니 천박한 만남만 있을 뿐, 바른 가치관 지닌 ‘멋진 만남’은 다소 거리감 있다.
그러기에 우리네 실상도 떨어져 있는 이보다 가까운 분들께 존경받는 게 훨씬 어렵다. 안고 있는 그 약점이 속속들이 노출되었기에. 그래서 가장 가깝다는 부부마저 존경하기가 매우 어렵단다. 많은 여성이 다시 태어나도, 지금 배우자와는 만나지 않다할 정도니. 그런데 어느 모임에서 정말 남편 존경한다는 이 있었다. 그녀 말로는 자기남편은 하는 사업마다 제대로 되는 것 없는, 사회적으로 보면 참 무능한 이란다. 그런데도 남편 존경하는 이유는 남을 배려하고 욕심 없으며 순수하다나. 이러다보니 가치관과 시선에 따라 상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나보다.
약점가진 이는 허영이나 교만에 빠지기 쉬워, 어떤 대가 치르더라도 다른 이를 압도하려 든다. 때로는 자기가 높아지려는 것보다 다른 이 추락하는 것에 즐거워한다. 이런 이는 남 불편하게 할뿐더러, 자신 삶마저 기쁨을 못 누려 어둡게만 산다. 우리는 멀리 있는 이보다 오히려 가까이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소홀하거나 상처 주고받는다. 우리의 행복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 말씀을 실천한다면, 여기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이룰 수 있을 것이기에. 우리가 예수님 믿는 이유는 사신 모습이 매우 좋아 보여, 닮고 싶은 마음 들었기에. 예수님 모시는 곳만 참 기쁨이 스민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하신 그 경고는 지금 우리를 향한 것일 수도. 우리가 그분 잘 안다할 그때, 우리마저 위험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마음가짐은 무엇일까? 겸손과 배려의 마음일 게다. 축복은 하느님 자비로 선사하지, 법의 준수로 얻는 보상은 아니다.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체험하고, 그분께서 돌보시는 이웃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삶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부, 지위, 학벌, 능력 등으로 타인에 대한 우월감을 조장한다. 함께하는 서로의 부족함을 나누기보다는 경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님 말씀은 바로 우리를 향하는 것일 게다. 지금 이 시각 우리도 업신여기는 이가 없는지를 냉철히 성찰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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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인 나자렛의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당신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하셨던 일을 고향에서도 해 보라고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언자 시대의 일을 이야기하시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화가 잔뜩 나서 당장 그분을 고을 밖 벼랑으로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분노하게 하였을까요?
제1독서에서 나아만은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으면 나병이 나을 것이라는 엘리사 예언자의 말대로 하여 병이 나았습니다.
이와는 다르게 예수님을 믿고 카파르나움으로 찾아갔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도 이 엄청난 소식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의 눈앞에서 표징을 보여 줄 것을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언자 시대의 일을 본보기로 말씀하셨는데,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믿음이 이방인들보다도 못하다는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분노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아만과 비교하신 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는 가혹하고 냉정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아파서 피하고 싶은 이야기겠지만, 그 안에는 그들의 회개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정말 힘들겠지만, 예수님께서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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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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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엘리야와 엘리사를 예로 들어주십니다.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어느날 보니 유명해진 그의 명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을 같이 보냈다는 것은
그의 약점과 허물을 다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부족한 사람인데,
지금의 유명세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안에 있는 마음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질투입니다.
예수님을 질투한 나머지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당신의 일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변화가 있다면
당신의 몸과 마음이 향하는 방향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방인들에게 기적을 베푼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결국 이방인들에게,
즉 이스라엘 밖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십니다.
거부가 실패처럼 보이지만
이방인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기회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거부한 사람들만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질투에서
마음을 닫기 쉽습니다.
그에게는 있고 나에게는 없는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낍니다.
그 박탈감은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이 많이 있어도
눈은 계속해서 자기에게 없는 것에만 향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심지어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없는 것을
나누어주겠다는 손길을 거부합니다.
그것은 나눔이 아니라
나에게 그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하고
그렇게 암묵적으로 나를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다 갖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나에게 없는 것은 너에게서 받으면 됩니다.
나에게 무엇인가가 없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그것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오히려 우리는 더 잘 받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굳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잘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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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 27)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옳으셨습니다.
최선을
다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십니다.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결코
알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야 할
하느님의 뜻입니다.
깨지지 않는
우리의 뜻을
깨끗이
씻겨주시는
분 또한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고집을
비워야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모르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세운
믿음과
하느님께서
세우신 믿음은
다릅니다.
기대감은
믿음이
아닙니다.
기대감으로
기진맥진해지는
우리의 부실한
내면입니다.
욕심 하나하나에
갇혀있는 우리들
삶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우리의 욕심만
앞설 뿐입니다.
사랑이 치유이고
사랑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은총이
너무 많아
헤아릴 수 없기에
무릎을 꿇습니다.
믿음과 치유
사이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는 우리들
신앙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구원과 치유의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음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역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있었고
아직도 깨닫지
못한 은총과
치유가 있었습니다.
욕심을 비워내야
가득해지고
깨끗하여지는
구원입니다.
구원을 가로막는
선입견과 편견의
가장 아픈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순 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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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길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뇌리 속에 강력히 각인된 생각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이라는 의식이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서 그런 자부심을 지닌다는 것 결코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선택받지 못한 이민족들은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이민족들을 상종하지 말아야 할 존재들, 동물 중에서도 개로 취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도 특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순혈주의, 율법과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위세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평소 입고 다니던 복장부터 남달랐습니다.
화려하고 요란스러웠으며 치렁치렁했습니다.
뿐만아니라 옷 여기저기 성구갑이라고 성경 말씀을 넣은 작은 상자를 달고 다녔는데, 그것을 마치 큰 자랑거리, 훈장처럼 여겼습니다.
성구갑은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성경 말씀에 정통한 사람인지 알아? 라고 외치는 표시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갑작스레 공식 석상에 섰던 한 장교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관이었습니다.
그냥 편안한 복장으로 출연해도 별문제가 없을 텐데, 그가 입고 나온 군복 전면이 가관이었습니다.
그간 받은 훈장이란 훈장은 다 달고 나왔습니다.
그 무게가 상당한 것 같았습니다.
참으로 꼴불견이었습니다.
그 옛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꼭 그랬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그토록 자부심 가득한 유다인들을 절대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그들의 위선, 그들의 이중 플레이 앞에 참지 않으십니다.
거침없이 당신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가감 없이 쏟아놓으십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7)
이 말씀 끝에 잔뜩 화가 난 사람들은 순식간에 들고 일어났습니다.
동물도 아닌데, 예수님을 슬슬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벼랑 끝까지 몰고 갔습니다.
그리고 합세해서 그분을 벼랑 아래로 떨어트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슬아슬하게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옮겨가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일종의 살인미수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살상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속으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실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용기가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참하고 야만적인 시국 앞에서, 거대한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창궐하는 이 순간, 또 다른 예언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제들과 수도자들은 무엇을 외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합니다.
이토록 비상식적이고, 이토록 비인간적인 시대가 조속히 마무리되고,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처절한 기 싸움이 하루빨리 종식되는, 그래서 화해와 일치, 기쁨과 평화의 날이 빨리 다가오길 큰 목소리로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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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24-30: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은 나자렛을 방문하신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를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은 큰 신앙을 보여주었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는 것과 같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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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화가 날 때는 언제나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이다
사람이 진실 앞에서 보이는 가장 솔직한 반응은 ‘분노’일지도 모릅니다.
진실은 칼날처럼 예리해서,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감춰진 상처나 수치를 찌릅니다.
루카 복음 4장 24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그들의 종교심과 신앙 안에 감춰진 교만을 정확히 찔러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 말씀이 도대체 무슨 큰 죄가 되었길래, 사람들은 예수님을 끌어내어 벼랑으로 밀쳐 죽이려 하였을까요? 예수님은 단지 엘리야 시대에 이스라엘의 과부가 아닌, 사렙타에 있는 이방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났고, 엘리사 시대에도 이스라엘의 나병환자가 아닌 시리아 사람 나아만이 치유받았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그들의 민족적 자부심과 신앙적 특권의식을 건드렸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왜 나는 그 말에 화가 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안의 죄를 드러내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저 구약의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한 것뿐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개인적 모욕처럼 받아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죄와 직결된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속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 곧,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낀 사람이 오히려 더 격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잘못이 드러날 것 같을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화를 내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허물을 가리려 합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주인공 신애의 깊은 상실과 용서, 그리고 분노의 여정을 그립니다.
아들이 유괴되어 사망한 깊은 슬픔 속에서 신애는 지역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을 통해 위로를 찾으려 합니다.
그녀는 아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로 그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범인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며 평온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저는 이미 하느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신애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와 혼란에 휩싸입니다.
자신이 용서하려 했던 사람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에,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있던
분노와 상처가 드러납니다.
이는 그녀가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음을,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하느님과 세상에 자기 분노의 탓을 돌리며 화를 내고 죄를 이어갑니다.
아담과 하와, 카인과 아벨부터 분노는 자기 죄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다른 일을 하시지 않고 그저 진리를 말씀하시며 사람들의 분노를
유발하십니다.
비난받는 표적이 되면서 사람들이 자기 죄를 볼 기회를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를 보고 자기를 고칠 것인지, 그냥 화만 낼 것인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것입니다.
다만 죄에서 돌아설 사람들은 분노가 날 때 자기 죄를 보는 이들입니다.
정확한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나온 엔도 슈사쿠의 이야기를 보겠습니다.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톨릭 신앙을 접했지만,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소수 종교였기에 종종 내적인 갈등을 겪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의 삶과 기독교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일본은 그에게 매우 세속적이고 불교와 신도 중심의 문화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엔도는 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게 되며, 그곳에서 신앙에 대한 회의와 무신론적인 사상을
더욱 강화시켰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무신론적인 사상을 깊이 탐구하며,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신의 침묵이 고통을 부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왜 신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고통스러운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중반, 엔도 슈사쿠는 일본에서 심각한 폐결핵에 걸리게 되어, 일본 도쿄의 와세다 대학 병원(Waseda University Hospital)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폐결핵은 당시에도 치명적인 질병으로, 입원한 시기인 1956년부터 약 1년간 그는 병상에서
고통을 겪으며 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병원에서의 시간이 엔도에게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입원 후, 엔도는 신에 대한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고통을 느끼며, "왜 신은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도 침묵하시는가?"
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졌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 속에서 그는 신의 침묵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과 죄를 직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고통 속에서 점차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엔도 슈사쿠는 그 고통 속에서 점차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신은 나와 함께 고통받고 계셨다”라는 깨달음은 그에게 깊은 영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분노와 상처가 사실 신을 떠나기 위한 방어기제였음을
깨닫고, 그분의 침묵은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를 드러내기 위한 신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엔도는 회심 후, 자신의 작품『침묵(Silence)』에서 그가 겪은 내적 갈등과 신앙의 회복을
풀어냅니다.
이 소설은 일본에서 가톨릭 신앙을 지키려 했던 선교사들의 고난을 다룬 작품으로, "침묵"이라는 주제 속에 신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이 어떻게 맞물리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는 회심 후, "내가 신을 믿지 않으려 할 때, 그 신을 향한 분노가 더 크게 느껴졌고, 그 분노가 결국 내 죄를 드러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의 회심은 신을 거부하려 했던 자신을, 오히려 신의 뜻을 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분노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직시하고 회개할 수 있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이는 많은 이들에게 신앙에 대한 깊은 성찰을 주었고, 엔도는 그 이후로도 그의 작품을 통해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며,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처음엔 분노가 일었지만, 그 말이 나를 위한 진리였음을 깨달았을 때, 삶은 변한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하십니다.
그 말이 불편하더라도, 분노를 넘어 성찰로 나아갈 때, 우리는 구원의 길에 서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히브 4,12)
그 칼날은 우리를 베기 위한 것이 아니라, 썩은 것을 도려내어 새 생명을 위한 수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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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한 시민이고,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4-30).”
1)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화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구원받은 일’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은,
구원은 이스라엘 민족만 받게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인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면, 유대교로 개종해야 하고, 이스라엘로 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시자, 유대인들은
“너희는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는다.” 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은 죽여야 한다는 것이
유대교의 법입니다(마르 14,64).
2)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지만, 유대인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인들만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알아들은 것은 제대로 알아들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라는 말씀으로 그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3)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셨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인류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시메온 예언자의 찬미가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29-32).”
따라서 이스라엘만 구원받고 다른 민족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완전히 ‘틀린 생각’입니다.
모든 민족을 구원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고(마태 28,19),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애쓰는 것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4.16-19).”
이제는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는 무의미한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고, 한 가족입니다.
5) 26절의 엘리야 예언자가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는 말씀은,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맞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또 27절의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말씀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엘리사
예언자에게 가서 치유의 은총을 간청했다는 뜻입니다.
‘은총’은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특별히 더 편애하시는 분도 아니고, 누구를 차별대우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라고 권고합니다(야고 4,8).
이 말은, 하느님께서 멀리 떨어져 계시다가
가까이 오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고, 늘 그 자리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항상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그리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은, 우리 쪽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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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과정’이라는 뜻입니다. 한국말은 자초지종을 찬찬히 살피며 끝까지 들어봐야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지요. 영어는 주어 다음에 바로 동사가 나오기 때문에 초반부만 들어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지만 한국말은 동사가 맨 나중에 나오기 때문 끝까지 들어야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제대로 헤아릴 수 있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나아만’은 처음에 자초지종을 제대로 헤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인 시리아에 요르단 강보다 더 크고 맑은 강이 많다는 이유로 엘리사의 말을 따르려고 하지 않은 것이지요. 그러나 치유의 은총을 받기 위해 중요한 것은 강물의 깊이나 수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나아만은 부하들로부터 자초지종을 듣고 자신의 편견과 고집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말대로 요르단 강에 몸을 일곱번 담그자 그의 나병이 씻은 듯 나았습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알려준 ‘치유의 길’로 나아간 결과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 고을 사람들은 끝까지 자초지종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신들의 섣부른 판단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과 표징을 보기보다 그분의 배경과 조건을 먼저 보았습니다. 색안경을 쓰면 세상이 그 안경의 색에 물들어 보이듯, 고정관념과 편견, 고집과 질투의 안경을 쓴 나자렛 고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같잖아 보였고 고깝게 보였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로 가는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음에도 그 길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부와 명예를 얻어 성공하는 길, 쉽고 편한 길만을 찾으며 엉뚱한 길, 잘못된 길을 고집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와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이야기를 언급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고통과 시련을 겪고 있던 암울한 시기에 그 이방인 두 명만 하느님의 은총을 입은 것은 유다인들이 스스로가 하느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우월감과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정작 구원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하느님의 은총은 특별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당연한 듯 누리는 게 아니라, 그분의 은총을 얻기를 간절히 바라며 노력하는 이에게 선물처럼 주어지는 것임을 상기시키신 겁니다.
그런데 나자렛 고을 사람들에게는 그런 예수님 말씀이 불쾌하고 듣기 불편했습니다. 그로 인해 큰 분노에 사로잡혀서는 예수님을 벼랑 끝에서 떠밀어 죽이려고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지나가십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배척, 핍박에도 절대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가신 겁니다. 그분은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계속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중요한 소명을 받고 파견되신 그분은 예루살렘에서 그 소명을 완성하시기 전까지 결코 죽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끝까지 당당하게 당신께 주어진 길을 걸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도 따라야 합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속담은 주님 앞에서는 절대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걷는 이 길이 곧 우리가 다다르고 영원히 살아가야 할 목적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구원과 참된 행복으로 이끄시는 주님 말씀을 헛되게 만들지 않도록 순명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으로 따라야겠습니다. 그래야 그 말씀이 우리에게 참된 ‘복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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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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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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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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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4. 사순 제 3주간 월요일.
쓸모 있는 제자로 살아가는 삶
<2025.3.24>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4:25~35절)
❝쓸모 있는 제자로 살아가는 삶❞
❚ 주님의 제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의 희생을 각오하는 삶입니다.
✔ 주님의 제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 희생을 피해가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25~27절).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 스스로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은 함께 가던 무리를 향해 ‘...돌이키사...’ 쓴소리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는 삶은 가족과 친지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의 목숨까지도 미워하는 삶(26절)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제자의 삶이란 단순히 예수님이 좋아서, 그리고 존경스러워서 따르는 추종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자의 삶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27절)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자꾸만 진리가 아닌 것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제자의 삶이란 진리가 아닌 것과 타협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세상은 나를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아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 보다는 훨씬 낳습니다. 가족이나 친지나 심지어는 내 자신 조차도 삶의 우선순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에 내 삶의 최고의 가치에 둘 때,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힘들고, 견디기 힘든 고난의 길을 가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제자의 삶을 살고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에 불과합니다. 현재 내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길이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길이라면 딴 생각 하지 말고 이 길을 걸어가는 쓸모 있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무작정 결단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28~32절).
망대를 세울 때에 거기에 사용될 비용을 생각하고, 계획하지 않으면 중도에 중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는 곧 이 일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제자의 삶은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중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으로 도중에 하차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전쟁에 임하는 왕 역시 무작정 전쟁터로 나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 일만의 군사로 이만의 대적과 어떻게 전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다가 승산이 없다 생각되어지면 화친 조약이라도 맺어야 합니다(31~32절).
개척교회 사역을 할 때에 전도는 되지 않고, 교회 빈자리가 너무 많은 것에 대한 답답함에 둘째 딸에게 하소연 비슷하게 털어놓았더니 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빠, 좀 더 참아, 다 때가 있겠지...’ 뒤 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성급하다고 해서 해결 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좀 더 신중하게 참고 인내하며, 사역을 감당해 나아갈 때 그에 합당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의 삶에는 언제나 수많은 위험과 유혹에 노출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부터 오는 용기와 믿음과 지혜를 사모하지 않으면 결코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싸울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은 함께 하시고,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무장되어 쓸모 있는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신분을 망각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33~35절).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 청년은 제자가 될 만한 여러 자격을 갖추었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물질 앞에서 넘어졌습니다. 물질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가족이나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진정으로 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이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33절). 소금은 분명 일상에서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꼭 필요한 존재라 할지라도 소금이 그 맛을 잃어버리면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가 없어 밖에 내버려집니다(34~35절).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서도 내 자신의 포기와 헌신과 희생이 없다면 이는 맛을 잃어버린 소금과 같습니다.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건물을 짓는 사람과 같고, 전후좌우도 살피지 않은 채 전쟁에 임하는 어리석은 왕과 같은 사람입니다. 철저한 자기 포기로 삶의 자리에서 희생과 섬김의 삶을 통해 세상에 소금이 되는 본을 보이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내 자신의 정체성 즉, 내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는 쓸모없는 인생이 아니라 세상 속 공동체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주님의 참 제자입니다.
오늘도 부활의 주님의 능력을 바라보며 희생을 각오하는 제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일상의 삶에 나타내며 살아갈 뿐 아니라 이 길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임을 인정하여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므로 소금이 짠맛을 내는 것처럼 쓸모있는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눅 14:25~35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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