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55
11월28일[연중 제3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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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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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x0gs8AcQ2_o
[서울대교구 김시몬 시몬(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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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입니다!>
의술의 발달로 인해 임사 체험자, 근사 체험자, 죽음 유사 체험자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때가 되어 한 인간의 수명이 다해 맥박이 그치고 숨이 멎는 순간, 의료진들이 열심히 심폐소생술을 실시합니다. 이제 요르단강을 건너 꿈에 그리던 하느님 나라로 들어섰는데, 유능한 의료진으로 인해 심폐소생술이 성공해서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많은 임사 체험자들이 죽음 이후 공통적으로 겪은 체험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죽음과 동시에 체외 이탈을 해서 자신과 가족들을 보게 된답니다. 그리고 그토록 간절히 보고 싶었던 먼저 떠난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났답니다.
세상 강렬하고 환한 빛의 통로를 본답니다. 아마도 영원한 생명으로 건너가는 통로겠지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세상 따뜻하고 자상한 크신 분의 현존을 느낀답니다. 그분이 마중나와 계셨답니다. 그분을 뵙는 순간 그간 지니고 있었던 그 모든 상처와 두려움, 고통과 슬픔이 눈 녹듯이 사라진답니다.
그래서 임사 체험자들은 하나 같이 고백했습니다. 죽음은 사방이 꽉 막혀 있는 벽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이라고. 죽음은 절대로 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세계로 건너가는 사다리요 통로라고.
요즘 예수님께서는 계속 종말에 펼쳐질 광경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간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던 공포스런 분위기에 세상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까무러칠 것이겠지만, 평생토록 주님을 의지하고 살았던 신앙인들을 조금도 걱정할 것이 없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7-28)
보십시오. 평생 주님 안에 살아왔던 우리에게 그날은 공포스러운 날이 아니라 황공스럽게도 몸소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실 주님을 대면하는 날입니다. 그날 우리는 주님과 함께 손을 잡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는 찬란한 빛 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 각자 개인의 죽음은 개인 차원에서의 또 다른 종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두고 울며 슬퍼하겠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영원한 나라에 참여하는 순간이며, 그분 나라에서 다시 한번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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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eyvy0Ixsg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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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언은 모호하게 쓰였을까?>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 세계에서 프리 크라임이라는 혁신적인 범죄 예방 시스템을 채택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이 시스템은 살인이 일어나기 전에 예측할 수 있는 프리코그(Precogs)로 알려진 세 명의 심령술사의 능력에 의존합니다.
가끔 헤로인에 찌든 부모에게서 태어나는 아이들이 예지능력을 지닌다고 합니다. 그들의 비전을 통해 경찰은 범죄가 발생하기 전에 잠재적 범죄자를 체포하여 도시에서 살인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수 있습니다.
프리 크라임 경찰 반장인 앤더튼은 이 시스템을 확고히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예언에 따르면 그가 36시간 이내에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충격을 받고 자신이 왜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앤더튼은 도망자가 되어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로 결심합니다.
자신이 속한 프리 크라임 팀의 체포를 피하면서 앤더튼은 시스템의 무오류성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그는 프리 크라임의 창시자인 이리스 박사로부터 시스템이 때때로 지배적인 예측과 다른 결과를 내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생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실 앤더튼도 그러한 오류를 발견함으로써 모함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권의 보호를 위해 더 많은 범죄자를 감옥에 집어넣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무고한 죄인이 벌을 받게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이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프리 크라임 팀은 이 오류를 깊이 숨기고 있었고 그 책임자인 버제스에 의해 그 사실을 알게 된 앤더튼이 제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앤더튼은 자유 의지로 예언되어 있던 살인을 하지 않습니다. 이는 마치 요나에 의해 한 달 뒤 멸망하기로 되어 있던 니네베가 멸망하지 않게 된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굳이 알려고 하지 말라고 하시며 그 정확한 시간은 아버지만이 아신다고 하십니다. 만약 예언이 명확하면 그것을 이용해 이득을 챙기는 이들이 생깁니다. 버제스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디나 시한부 종말론을 내세워 사람들의 재산 등을 가로챘던 사이비 교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왜 예언은 모호한가?’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멸망을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모든 예언이 이런 식입니다. 어떤 채널에 보니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적이 없다’라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한 지구 멸망의 이야기는 예언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에 이사야 7,14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인데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 합니다. 미카 예언서 5,1에서는 그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라 예언합니다. 이 예언은 분명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이전 수백 년 전에 쓰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예언은 모두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위기에 처한 남 유다에 새로운 희망을 주는 말씀 안에서 나온 예언들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는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언이 악한 이들에게 명확한 사실로 인지된다면 그들은 그것을 이용해 많은 이들을 미혹하게 될 것입니다. 악한 이들은 아무리 좋은 것도 악용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이 예언이 온전하게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착한 뜻을 가진 이들에게는 교회나 성령 충만한 이들의 해석에 의해 도움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악인들 가운데 보내며 이렇게 예언하라고 하십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이사 6,9-10)
악인들이 예언을 듣고 깨치면 큰일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헤로데를 방문했을 때 헤로데는 예언을 통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이렇게 도움을 받았지만, 헤로데는 그 지식으로 베들레헴의 아기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예언을 악인들에게 해석해 주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언제 세상이 멸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명확한 표징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이방인들의 시대가 있을 것이고 그 시대가 다 찰 때가 올 것이란 예언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같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를 알아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 신비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일부가 마음이 완고해진 상태는 다른 민족들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로마 11,25-26)
현재 이스라엘은 재건되고 있습니다. 아랍 민족들이 다 들고일어나도 지금의 이스라엘을 어찌할 힘이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대인들이 무엇이든 거의 휩쓸다시피 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현재 그들이 아직 그리스도께 완벽히 회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무서운 징조도 아직은 없습니다. 그때가 되면 정말 완벽한 마지막일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준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준비는 언제나 ‘회개’에 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여 살았습니다. 회개는 에덴동산에서처럼 십일조를 봉헌하고 선교로 하느님 백성을 탄생시키는 본래의 일로 회귀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 이들에겐 마지막이 마지막이 아닌 희망이 날이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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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정태현 신부님의 ‘성서 입문’을 읽고 있습니다. 주제는 ‘성서의 형성 과정과 각 권의 개요’입니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를 알려주듯이, 성서 입문을 통해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미술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고, 음악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듯이, 성서의 형성에도 시대에 따른 흐름이 있습니다. 오늘은 예언문학, 지혜문학, 묵시문학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과 교훈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언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고, 경고와 위로를 통해 신앙 공동체를 회복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언문학은 하느님의 정의, 자비, 공의가 이 세상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며, 특히 불의와 억압에 반대합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해 당시의 사회적, 정치적 부조리를 지적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공의를 외칩니다. 예언자들은 종종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고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예언문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는 회개와 회복이며,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을 변화시키기를 바랍니다. 하느님께서 정의롭게 심판하실 것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심판을 경고하면서도, 심판의 목적은 파괴가 아니라 교정과 회복임을 강조합니다. 장차 올 구원자를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합니다. 이러한 메시아적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궁극적인 희망을 제공하고, 나아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중요한 메시지로 작용합니다. 예언문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백성들이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키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촉구합니다.
지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인생과 신앙, 도덕적 가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으며, 인간이 지혜를 통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칩니다. 지혜문학의 시작과 중심은 하느님을 경외함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하느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가르칩니다. 올바르고 정직한 삶, 즉 의롭고 도덕적인 삶을 강조합니다. 지혜는 올바른 선택을 하고 다른 사람을 공정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겸손히 하느님 앞에 서야 함을 가르칩니다. 인간은 모든 걸 이해할 수 없고, 하느님의 계획은 때로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물질적 성공과 쾌락의 무상함을 강조하고, 진정한 행복과 의미를 추구하도록 이끕니다. 인생에서 겪는 고난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며, 이를 극복하는 지혜로서 인내와 신뢰를 가르칩니다. 고난 속에서 믿음을 유지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진정한 지혜의 한 부분임을 강조합니다. 삶의 작은 부분들 속에서도 지혜를 실천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는 가정과 사회생활, 인간관계 속에서 도덕적이고 올바른 태도를 보이는 것을 포함합니다. 지혜문학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경외하고, 정직과 의로움으로 삶을 살아가며, 삶의 일시적 본질을 깨닫고 진정한 의미를 찾는 것을 통해 충만한 인생을 누리도록 이끕니다.
묵시문학의 핵심 메시지는 시련 속에서 희망을 전하고, 최후의 승리와 하느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약속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합니다.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일시적이며, 끝까지 인내하면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구원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합니다. 역사의 모든 흐름이 하느님의 섭리 속에 있으며, 모든 사건이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하느님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현재 상황이 불확실하거나 고통스러워도 궁극적인 목적이 있음을 신뢰하도록 돕습니다. 종말에 하느님께서 완전한 새 창조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을 전합니다. 이는 단순한 회복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창조를 의미하며, 신앙인들에게 영원한 희망과 소망을 줍니다. 강력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독자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촉구합니다. 비유적인 언어와 환상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앙을 경계할 필요성을 일깨웁니다. 세상의 악과 싸우는 영적 전투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신앙인들이 이 싸움에서 영적 무장을 통해 승리하라고 요구합니다. 믿음을 지키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이 있어도 하느님이 함께하시며 그분의 계획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겁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거룩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종말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희망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탑을 쌓으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청빈과 정결 그리고 순명의 삶을 산다면 이곳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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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20-28: 이 땅에는 무서운 재난이 닥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예언을 더 분명히 하고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때를 더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20절) 그런 다음 다시 세상 종말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너희가 달아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그때 큰 환난이 닥칠 터인데, 그러한 환난은 세상 시초부터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것이다.”(마태 24,19-21) 우리가 이런 환난에서 이겨나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종말이 우리에게 어떤 모양으로 온다고 하여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일은 예언의 참된 결말이요 새로운 신비가 일어나는 계기이다. 해와 달과 별들에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요엘 2,10; 3,3-4; 4,15). 많은 사람이 신앙에서 멀어질 때, 불신의 구름이 밝은 신앙을 가릴 것이다. 우리의 악덕이 거룩한 빛을 가로막으면, 거룩한 교회 또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빛의 밝음을 빌려 쓸 수 없다. 박해 때는 이 세상 삶에 대한 애착이 하느님의 빛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을 깨어서 지켜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당신의 거룩한 이들을 모두 데리고 오시면 온 세상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분을 볼”(즈카 14,5; 마태 24,30)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밀리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신성에 어울리는 영광을 떨치며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만물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드실 것이다. 창조계를 새롭게 하시고 사람의 본성을 본래 상태로 돌려놓으실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8절) 그분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당신처럼 영광스런 몸으로 변하도록 해 주실 것이다.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1요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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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묵시 문학은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아무리 해도 바꿀 수 없으며 어떻게 벗어날 도리가 없는 억압의 굴레와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신다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거슬렀던 이들에게 이 상황은 두려움이며, 하느님 말씀을 충실히 따랐던 이들에게는 위로와 희망입니다. 믿음 안에서 마지막 날을 잘 준비한 이들은 이 마지막 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하며 기다립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드러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의 날을 전혀 다른 두 가지 말로 표현하십니다. ‘징벌의 날’과 ‘속량의 날’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이들은 심판과 벌을 받을 것이고, 주님을 믿고 회개한 이들은 구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의 요한 묵시록도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에 다다랐을 때, 악을 상징하는 바빌론은 파괴될 것이고, 하늘에 있는 무리들은 승리에 기뻐하며 하느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 마지막 날은 주님을 믿고 따르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완성과 구원의 날, 그러지 않았던 이들에게는 파괴와 징벌의 날이 됩니다.
개인적 차원에서 본다면, 개인 역사의 끝은 죽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존재입니다. 죽음이 누구에게는 조금 이르게 올 수도, 누구에게는 조금 늦게 올 수도 있지만, 모든 이가 받아들여야 할 순간입니다. 죽음으로 맞는 마지막 날이 나에게 두려움이 아닌 희망이 되도록 잘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산다면 그날은 기쁨과 구원의 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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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종말이 어떤 날이 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20-28)
1)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라는 말씀은, 죄인들에게 멸망이 내릴 때 그 멸망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죄인들과 함께 있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때 천사들이 롯에게 한 말이 연상됩니다.
“자, 이 성읍에 벌이 내릴 때 함께 휩쓸리지 않으려거든, 그대의 아내와 여기에 있는 두 딸을 데리고 어서 가시오. 달아나 목숨을 구하시오. 뒤를 돌아다보아서는 안 되오. 이 들판 어디에서도 멈추어 서지 마시오. 휩쓸려가지 않으려거든 산으로 달아나시오."(창세 19,15.17)
‘죄인이 아니어도 죄인들과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함께 멸망을 당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세 18,25)
의인과 죄인이 함께 있다면, 그 의인 덕분에 죄인이 멸망을 피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아브라함의 생각이었는데,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은 죄인들과 함께 있다면 의인이라도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이 하는 말은 사실상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끈질기게 간청해서, 소돔에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소돔을 파멸시키지 않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얻어냈습니다.(창세 18,32) 그런데 우리는 소돔에 ‘롯’ 외에는 의인이 한 명도 없어서 멸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요나서에 나오는, ‘니네베’ 라는 도시의 이야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에 멸망이 내릴 것이라고 선포했는데도 하느님께서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보시고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자 화를 냈습니다.(요나 3,10-4,1) 자기가 거짓 예언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타이르셨습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이 말씀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어린이들이 어른들의 죄로 멸망에 휩쓸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니네베의 멸망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고, 하느님의 뜻은 니네베의 회개와 구원이었습니다. 따라서 요나 예언자를 시켜서 멸망을 선포하게 하신 것은, 회개하도록 인도하신 일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는 예수님 말씀도, 또 종말의 재앙들에 관한 말씀도,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휩쓸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도, 끝까지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있을 때, 죄인들을 감화시키고 회개시켜서 함께 구원받을 수도 있고, 반대로 의인들이 죄인들의 죄에 오염되어서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어떤 의인이 죄인들과 함께 있다가 죄인들이 멸망을 당할 때 함께 휩쓸리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죄인이 아닌데도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아니라, 죄에 오염되어서 의인의 자격을 잃었기 때문에 당하는 일입니다.
반대로, 의인들과 함께 있다가 구원받는 죄인들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인데도 의인들 덕분에 운 좋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의인들의 인도로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날이 나에게 ‘징벌의 날’이 될 것인지 ‘속량의(구원의) 날’이 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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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루카 복음서에서 예루살렘 멸망 예고는 세 차례 등장하는데(19,43-44; 21,20-24; 23,28-31 참조),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예고입니다.
마태오복음(24,15-21 참조)과 마르코복음(13,14-19 참조)의 병행 구절에서는 묵시 문학적 문체를 사용하며 종말의 대환난을 집중적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 파괴를 역사적 사건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루카 복음사가의 신학에 따르면, 이는 메시아 임금,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최종 심판의 예고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루살렘에만 한정되어 있던 구원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시작점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뻗어 나간다는 ‘보편적 구원’의 주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라는 내용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이제 유다인에게만 머물지 않고 만백성에게 선포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복음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집중합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이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는 해석입니다.
우리는 ‘보편적 구원’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이며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은 널리 선포되고 모든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복음화의 탁월한 도구가 되기를 희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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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를 포위하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루카 21,20)
예루살렘의 파괴는 구원과 멸망이 갈리는 전조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21,20-21)
서기 70년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하여 성전이 파괴되고 무려 110만 명이 죽었으며 9만 7천명이 로마군 총사령관 티투스의 포로가 되어 여러 지방에 끌려갔습니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지배가 끝날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혀 굶어 죽어가고 슬프게 우는 소리조차 내지 못할 만큼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21,24)
성전 파괴는 서기 66-70년 사이에 일어난 로마와의 독립 전쟁에서 인간의 힘에만 의존함으로써 유다인들 스스로 부른 참혹한 결말이었습니다. 그들의 파멸은 외부 적에 의한 포위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욕망과 교만의 두꺼운 껍데기로 자신들을 철저히 포장해버린 결과였던 것이지요.
우리네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닮아야 하고 하느님의 선과 사랑을 심장에 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선한 지향과 말씀의 진리에 따른 행동, 자신을 벗어난 이타적인 몸짓, 온화한 미소, 애정 어린 배려, 관대한 헤아림으로 채워져야겠지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콜로 3,2)
오늘 우리를 파멸의 늪으로 내몰려는 구조적인 악과 불의, 물신주의와 쾌락주의의 거센 힘이 끊임없이 도전해옵니다. 잠깐만 한눈팔아도 금세 젖어들어 방향을 잃고 혼란에 빠질 것 같은 현상들이 넘칩니다. 그럼에도 외모와 겉치레, 눈에 보이는 가치들에 포위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겠지요.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종말의 조짐과 같은 내 마음의 허울들을 과감히 벗어버려야겠습니다. 자신이 재판관이 되어 내리는 조급한 판단, 성령의 이끄심과 무관한 습관과 창조성을 잃어버린 고정관념, 좁디좁은 경험의 틀에 박혀 되풀이 하는 비합리적 사고, 지극히 인간적인 인연들을 하느님의 뜻보다 더 중요시하는 태도 등을 버려야겠지요.
강력한 육의 경향과 하느님을 거스르는 물질과 세상 권력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루카 21,28) 사람의 아들의 오심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끝이 아니며”(21,9),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입니다.”(21,28) 지금이 바로 성전을 파괴하기 위해 둘러싼 적군과 같은 거짓과 교만의 탈을 벗어버려야 할 때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육신을 지니고 살아가는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육과 영, 선과 악, 실제의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늘 갈등하며 주님께 등을 돌리라는 유혹과 도전을 받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의지하며 파멸이 아닌 창조의 길로 나아가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악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하느님과 말씀에 대한 망각의 잠도 깨워야겠지요.
오늘도 잠에서 깨어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차려, 탐욕과 교만과 무관심으로 가득찬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파멸이 아닌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갔으면 합니다.(21,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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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1,28)
역사의 반복처럼, 매년 연중행사처럼 분쟁 그리고 천재지변, 기상이변과 각종 질병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어쩌면 이런 인재人災와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 등은 이젠 지구라는 행성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이에게 일상화되어 버린 듯 무감각하기도 합니다. ‘금년도 예외 없이!’ 예수님 시대 이후 세상은 세기말世紀末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일상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보면 종말終末을 앞둔 시간을 살아간다고 해도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봅니다. 더욱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침 시기와 또한 새로운 시작,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 시기를 앞둔 지금은 공교롭게도 계속해서 비슷한 복음의 메시지를 듣다 보면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이 시기만이 아니라 주님의 재림 때까지 우리네 삶도, 역사의 시간은 바로 ‘어제는 금요일, 그러나 부활 주일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두 날을 온전히 살았던 사도들은 결코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아니 계신 것처럼(=不在) 보일 때가 예수님이 가장 강하게 現存하신 때이며, 예수님이 죽은 것처럼 보일 때가 다시 살아 돌아오실 때라는 것을 철저하게 배웠고 체험했었습니다. 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는 실제로 영적으로 전례력에서 별로 의미 없는 날, 바로 토요일을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역사는 어떤 면에서 약속과 성취 사이의 시간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지구는 현재 토요일인데 과연 부활 주일, 곧 재림은 올 것인가? 영성적 의미에서 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에 살고 있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재림은 오리라는 기다림으로 살아야 하는 우주적 시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당신께서 몇 번이나 예루살렘을 모으려고 하였으나 마다하였다.”(루13,34)하고 한탄하시면서도, 품으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을 향한 애틋한 심정으로 눈물을(19,41) 흘리시면서까지 회개하도록 촉구하셨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역사적으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루살렘은 자신의 속량(=구원)을 스스로 잃게 되었던 겁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 결과로 닥친 환난을 피하기 위해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성경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이며, 하느님께 피신하라는 의미)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악의 구렁에서 나오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죄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마라.)”(21,21)고 권고합니다. 이런 권고는 마치 6. 25전쟁을 겪으신 분들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온몸으로 겪으셨기에 실감하셨으리라 보며, 그러니 전쟁 중에 누가 그 전쟁의 중심 지역으로 들어갈 것이며, 빠져나와 피난을 떠나다 보면 거동이 불편한 임산부나 젖먹이가 딸린 여성들이(21,23) 가장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야 의심할 수 없이 자명한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전쟁이 이 땅에 다시 일어나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말씀, 곧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구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21,28)라는 말씀을 통해서 종말의 시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그 시간은 속량(=구원)과 심판의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종말의 시간을 앞두고 우리는 역사와 신앙의 교훈을 통해 누구 앞에 어떻게 서 있을 것인지 지금부터 선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불안과 걱정으로 허리를 굽히지 말고, 머리를 들어 세상의 표징을 읽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되새기면서 힘차고 충실하게, 밝고 아름답게 살아간다면 마지막 그 날, 그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날이며 시간이 되어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존재”(묵18,9)의 행복을 만끽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께 귀의하여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빛의 편에 선다면 그날은, 그 시간은 결코 두렵고 무서운 심판의 날과 시간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 순간이, 그날과 그 시간이 계속될 뿐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이 있으려니 지금 주어진 시간을 헛된 것에 탕진하고 소진하고 산다면 이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며, 그 사람에게는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이 곧 심판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 ‘때는 늦으리라!’ 그러기에 오늘 바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21,28)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마지막 날은 고통과 절망으로 끝나는 날이 아닌 기쁨과 희망으로 벅찬 새로운 날이 되리라 믿습니다. 속량의 날이 가까웠으니 주님의 은총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위기의 시간에 두려워하지 않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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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많은 사람이 메밀을 좋아합니다. 메밀에는 다양한 영양소와 생리활성 물질이 들어 있어 건강에 이로운 음식이라고 하지요. 고혈압 예방, 성인병 예방, 혈관 건강, 혈당 조절, 변비 해소, 이뇨작용 등 장점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메밀국수, 막국수, 메밀묵, 메밀전병, 메밀전 등의 음식이 유명합니다. 또 예쁜 메밀꽃도 좋아합니다.
구전에 따르면 메밀은 고려 말 중국 원나라의 지배를 받을 때, 제주도에 들어왔습니다. 당시만 해도 메밀은 소화도 안 되고 독성이 있는 작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실제로 살리실아민이라는 독성 물질이 있습니다. 원나라는 제주도 남자들의 씨를 말리기 위해서 제주 전역에 메밀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조의 지혜는 이를 오히려 약으로 바꾸었습니다. 무와 함께 먹으면 간단히 중화된다는 것을 알고, 무를 메밀밭 옆에 심었고 또 메밀을 무와 함께 먹었습니다. 독을 이 나라에 뿌렸지만, 반대로 고마운 약이 된 것입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 또 독성이 있는 메밀이 산천에 심었을 때, 가장 안 좋은 상황처럼 느꼈을 것입니다. 이때 만약에 그냥 좌절해서 포기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이겨내려는 마음에서 최악의 상황을 최선의 상황으로 만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삶 안에서도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으로 가득 찬 이 세상이라면서 그냥 절망하면서 포기해야 할까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변화도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이 또 다른 기회라고 여기면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면,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기쁨과 행복의 순간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 마지막 때를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될 때라고 하시면서 이때가 바로 징벌의 날이라고 하시지요.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가고, 짓밟힐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순간 예수님 말씀처럼 ‘불행하여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절망의 순간만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언제나 오늘이 마지막인 날인 것처럼 주님께서 오심을 꾸준한 기도 그리고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삶으로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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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이 사람에게>
루카 21,20-28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시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람이 사람에게 기쁨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슬픔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믿음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반역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희망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절망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증오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축복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저주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방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억압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살림이요
사람이 사람에게 죽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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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첫눈치곤 많이 내렸습니다. 겨울은 겨울입니다. 건강 관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봄에 씨 뿌리고 여름에 녹음을 즐기고 가을에 풍성함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유난히 더웠던 여름이었고 가을인가 싶었는데 겨울입니다. 추위를 견디며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입니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때가 되면 지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하느님의 심판 앞에 서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온 사람과 세상에 매여 산 사람이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재앙이 닥칠 때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에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루카21,21).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는 화려함과 편리함 속에 누릴 수 있는 온갖 것들이 넘쳐나는 곳입니다. 사람의 욕심과 계획이 지배하는 곳이요, 그것에 맛 들이면 빠져 나기가 어려운 곳입니다. 결국은 도시는 하느님의 다스림 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곳으로부터 빠져나가라고 호소하십니다. 그러나 발을 빼기가 왜 그리 어려운지요? 내일 망할 것을 알면서도 예나 지금이나 온갖 죄악이 거기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산과 시골은 순수함과 깨끗함이 거기에 있습니다. 오염 되지 않은 맑고 소박한 정겨움이 있습니다. 인위적인 조작이 아니라 자연의 순리와 법칙이 살아있습니다. 흐르는 시냇물에 목을 적시고 발을 담글 수 있어 좋고, 메뚜기가 뛰어놀고 다람쥐가 활개를 치며, 까치밥을 남겨 놓은 감나무가 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빙판길에 모래를 뿌리시는 할아버지가 계십니다. 그러니 그곳을 두고 성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입니다. 순리가 살아있는 곳에 생명도 있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마구 파헤치면 결국은 죽고 맙니다.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죽게 만듭니다. 공동의 집인 지구가 아파합니다.
예수님께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하시니 이제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야 하겠습니다. 화려하고 편리한 인간적인 생각에 머물러 재앙을 자초하거나 세상 것, 이상하고 신비한 일에 현혹되지 말고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지혜,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머리를 들어야 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바로 그때가 구원의 때임을 잊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가톨릭 성가 445번 ‘예수님 따르기로’함께 부르겠습니다. “내 한평생을 예수님 안에, 내 온전하게 그 말씀 안에 내 결코 뒤를 바라봄 없이 그분만을 따릅니다.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모두가 나를 외면하여도 내 결코 뒤를 바람 봄 그분만을 따릅니다. 이 땅 위에서 산다하여도 이 띵 위에서 산다하여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따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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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희망의 순례 여정>
-희망의 빛, 희망의 힘, 희망의 훈련-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여라.“(묵시19,9ㄴ)
오늘 화답송 후렴은 그대로 어린양의 미사잔치에 초대받은 우리를 두고 하는 말씀같습니다. 이런저런 유익한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지난 10월4일 제가 주례한 혼인미사 후 신부의 어머니가 했다는, 그의 남편이 전해준 고백글을 잊지 못합니다. 나이 40을 훌쩍 넘어 늦게 결혼한 외동딸입니다.
-결혼식을 마치자, 아내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사위가 ‘장모님’하고 부를 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몰라.”-
끝까지 희망을 내려놓지 않고 하느님의 때를 기다린 신자 부부입니다. 결혼은 부부가 서로를 구원할뿐 아니라 부모들까지 구원함을 봅니다.
어제 일간지에서 읽은 주목할 기사도 소개합니다. “검찰권의 정치 무기화, ‘바나나 공화국 전락한다”제하의 내용이었고 공감했습니다. 바나나 공화국은 ’부패한 권력자가 지배하는 불안정한 후진국’이라 하는데 결코 이런 일이 있어선 안되겠습니다. 또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을 앞둔 미국과 중국에 관한 기사내용이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문화전통에서 나오는 중국 정치지도자들의 깊은 지혜와 전략, 희망에 공감했습니다.
“이 불확실성이 중국을 불안하게 하지만, 트럼프의 거칠고 혼란스러운 정책이 미국의 분열과 쇠퇴를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는 중국의 기대도 높다. 트럼프가 중국에 단기적으로 나쁘지만, 장기적으로는 좋다는 판단을 많은 중국전문가들이 내놓고 있다. 지금 중국은 미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내란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외적의 침입보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내적 분열의 내란이요, 사람이든 나라든 아무리 작아도 내적으로 일관성이 있고 견고한 일치를 이루면 안전합니다. 개인이든 나라든 “희망찬 미래”가 내외적 일치를 보장함을 깨닫습니다. 더불어 지도자들의 비전과 신뢰는 필수적 덕목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이 지혜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바탕에 무엇을 쌓는지에 따라 사람의 격이 결정된다. 이러한 바탕과 단계를 아울러 성품이라고 한다."<다산>
“군자는 위로 통달하고 소인은 아래로 통달한다.”<논어>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들은 부정적 비관적 성품에 아래로 통달한 소인이될 가능성이 다분하나, 반면 감사, 감동, 감탄의 삼감에 희망의 사람들은 긍정적 낙관적 성품에 위로 통달한 군자가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희망이 답입니다. 이제 곧 희망과 기쁨의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진선미(眞善美)의 성품 형성에 가톨릭의 깊고 아름다운 전례영성이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12월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지향도 ‘희망의 순례자들’로 오늘 강론 제목, "희망의 순례 여정"과 일치합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너나할 것 없이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다가올 이번 희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일상의 삶 안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도와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하며, 우리를 희망의 순례자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켜주도록 기도합시다.”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호는 <희망의 원리>라는 책에서 넷을 말합니다.
1.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2.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3.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삶을 쉽게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버텨 이겨낸다.
4.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5.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한다.
베네딕도 규칙서 <4장 착한 일의 도구들에 대하여> 중 두 대목이 생생합니다.
1.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성규4,41)
2.그리고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 절대로 실망하지 마라.
희망은 힘이자 빛입니다. 희망을 잃어 실망하거나 절망하거나 원망하기 시작할 때 마음도 정신도 영혼도 병들기 마련입니다. 정신건강, 마음건강, 영혼건강에 희망보다 더 좋은 명약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희망을 둠이 최고의 처방입니다.
피정지도시 참 많이 다룬 주제가 “희망의 여정”이고, 아침 산책때 마다 부르는 “바다”라는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 전 피정 자매들이 거의 못 부르기에 알아보니 40-50대 자매들이었습니다. 60대 후반 이후는 대부분 열창합니다.
“아침바다 갈매기는 금빛을 싣고,
고기잡이 배들은 노래를 싣고,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희망에 찬 아침바다 노저어 가요.”
오늘 성서가 말하는 궁극의 결론도 희망입니다. 예언자들은 물론이요 종말을 이야기하는 묵시록도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구원을,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두렵고 불안하게 하는 종말 이야기들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구원의 희망을 북돋아 주기 위한 종말 이야기들입니다.
역시 값싼 희망은, 값싼 영적승리는 없습니다. 희망과 영적승리만 아니라 모든 덕목이 즉 믿음이, 사랑이, 평화가 그러합니다. 하느님을 감동 시킬수 있는 부단한 수행의 노력과 훈련이 절대적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진인사대천명, 100% 하느님 손에 달린 듯이 기도하고, 100% 내 손에 달린 듯이 노력한다.”
말마디들에서 한결같이 강조되는 바 노력입니다. 천재들 역시 잘 들여다보면 노력하는 천재들입니다. 천재에다 끊임없이 노력을 더해가니 당해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을 보십시오.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를 목격한 자들은, 구원의 희망의 실현을 목격한 자들은 온갖 시련과 박해를 견뎌 통과해온 주님의 전사, 희망의 전사, 승리의 전사들인 신자들입니다.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능은 우리 하느님의 것, 과연 그분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우시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
바로 오늘 묵시록 19장 하느님 승리의 찬가를 우리 가톨릭 교회는 매주일 제2저녁기도때 노래합니다. 바로 공동전례를 통해 끊임없이 승리의 찬가, 희망의 찬가를 노래하는 영적훈련이 승리의 믿음과 희망을 날로 강화해 줍니다.
오늘 복음의 종말 풍경은 얼마나 무시무시합니까? 밤이 깊으면 새벽도 동터오는 법입니다. 끝까지 버텨낸 이들이 동터오는 구원의 새벽을 맞이합니다. 복음의 마지막 장면이 하느님의 궁극의 승리와 더불어 실현되는 구원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그때에 사람이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런 하느님 승리의 영광을, 희망의 실현을 앞당겨 맛보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마다 한결같이 희망찬 삶을, 고해인생이 아닌 축제인생을, 영적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루카21,2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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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무엇 앞에 그리고 누구 앞에 있을 것인가?>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제 미사 강론 중에 종말이 닥치면 어떻게 받아들일지 여쭈었을 때 한 분이 당신은 생명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분이 그렇게 답하면 지극히 교리적인 답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제가 아는 그분은 실제로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죽음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 전의 그분은 얼굴이 어둡고, 고통과 죽음 앞에 있었으며 두려움도 있었지만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전에는 하느님 앞에도 있다가 고통과 죽음 앞에 있다가 했는데
신앙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난 뒤에는 온전히 하느님 앞에 있고 생명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징벌의 날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리고 속량의 날에 관해서도 얘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징벌의 날에 징벌을 받지만 어떤 사람은 징벌의 날에 속량을 받습니다.
징벌 앞에 있는 사람은 징벌을 받지만 회개하여 하느님 안에 있는 사람은 속량을 받습니다.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친” 자는 징벌을 받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도 하느님 안에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든” 자는 속량을 받습니다.
무엇 앞에 있을 것인가? 누구 앞에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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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21,28)
<속량의 때!>
오늘 복음(루카21,20-28)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시는 말씀'과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보면, '멸망과 죽음'은 '하느님을 저버리고 이방인의 신들을 섬기거나 하느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진 결과'입니다. 하지만 그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면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종말의 의미를 지닌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3,9)
"그러나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올 것입니다. 그날에 하늘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스러지며, 땅과 그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2베드3,10)
그렇습니다. 이미 나누어 드린 것처럼 묵시의 말씀인 요한묵시록과 다니엘 예언서의 말씀과 그리고 복음이 전하는 멸망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 우리에게 전하는 궁극적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이는 또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11월은 죽은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의 죽음에 대해서도 묵상하는 달입니다. 이 위령성월도 얼마 남지 않았고, 전례력으로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하느님의 마음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간절하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기억하면서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곧 '속량인 나의 구원'을 위해 애쓰는 지금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요한묵시록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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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루카 21, 28)
가까워진
속량의
손길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주님의
십자가를
맞이합니다.
속량이 필요한
우리 존재의
참모습입니다.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할지를
풀어주는
속량에서
배웁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계절이
멈추어 있지
않듯이
삶의 시간도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삶의
여정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향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삶의 존재방식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다시금
십자가에서
만납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온전히
만나는
참된
속량이며
구원입니다.
우리 존재의
실상을 알기에
기도와 회개로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절실한 실상이
거짓의 허상을
보게 합니다.
속량이
지나간 자리에
있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믿음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바라보는
은총의
새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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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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