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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백석(白石, 본명: 백기연, 본명 한자: 白夔衍, 1912년 7월 1일~1996년 1월 7일)은 일제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번역 문학 작가이자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본명
백기연(白夔衍) → 백기행(白夔行) → 백석(白石)
배우자
초배 우봉 이씨 부인(1937년 사별)
계배 결성 장정옥(1941년 사별)
삼취 남평 문경옥(1947년 이혼)
사취 수안 리윤희(1957년 마지막 결혼)
자녀
3남 2녀(모두 마지막 부인 리윤희 소생)
이름과 본관
본명(本名)은 백기연(白夔衍)인데, 1916년(5세 때)에 백기행(白夔行)으로 첫 개명(改名)하였으며, 1945년 8월 15일, 을유 해방(일본국 패망 및 조선국 광복)이 성립된 후 이듬해 1946년에서부터 사실상 백석(白石)으로 마지막 개명(改名)한, 그의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석(石)이라는 이름은 일본 시문학가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작품을 매우 좋아하여 그 이름의 석(石)을 썼다고 알려져 있다.
경력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
조선일보 자매지 《여성》 편집위원
《조광》 편집위원
문학신문 편집위원
생애
1912년 일제 시대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백시박(白時璞)과 이봉우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백시박은 자가 용삼(龍三)이고 후에 백영옥(白榮沃 [2])으로 개명했다. 백영옥(본명: 백시박 ; 개명: 백영삼 → 백영옥)이 태어난 해는 1882년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 신고를 몇 년씩 미루는 당시의 관습과 후에 백석의 신상조사서에 적힌 것으로 비춰볼 때 1875년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 기사 생활을 했던 아버지 백영옥은 그렇게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으나, 오산고보의 설립을 위한 학교 건축 기금을 마련하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1912년 서른여덟살(만으로 37세)에 백석을 장자(長子)로 낳은 백영옥은 그를 귀하게 여겼다. 어머니 이봉우는 1888년생으로, 1911년(24세)에 경성부(서울)에서 시집을 왔다. 백석의 외조부 이양실과 그의 기생 출신 첩 사이에서 태어난 만큼, 나이 차가 많은 백영삼(白榮三)과 결혼했다. 그 시절 평안도 지역이나 또는 황해도 같은 지역에서는 당시 결점(어머니가 아버지의 첩인 여성의 경우 등)이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특정 풍조였다.[3] 그러나 어머니 이봉우는 매사에 정결하고 음식 요리 솜씨가 뛰어나 오산학교 교장 조만식은 자주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그 정도토록 조만식은, 아버지 백영옥과 친분이 있었고 조선일보를 운영했던 방응모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전해진다. 후에 백영옥이 하숙집 사업을 시작할 때 백석 가족은 오산학교 앞쪽의 집으로 이사해 살았다.[4]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 후에 일본에서 1934년 아오야마 가쿠인 전문부 영어사범과를 졸업하였다. 1934년 5월 16일자 《조선일보》에 산문 〈이설(耳說) 귀고리〉를 발표하는 것을 시작으로 작가와 번역가로서의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 1월 20일에는 그간 《조선일보》와 《조광》(朝光)에 발표한 7편의 시에, 새로 선보이는 26편의 시를 보태어 시집 《사슴》을 당시 경성부 통의동(通義洞)에서 자비로 100권 출간했다. 이후 1948년 《학풍》(學風) 창간호(10월호)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내놓기까지 60여 편의 시를 여러 잡지와 신문, 시선집 등에 발표했으나 정작 시인 자신은 《사슴》 외에는 시집을 더 이상 출간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백석은 작품에 평안도 방언을 비롯하여 여러 지역의 사투리와 고어를 사용했으며 1948년 이후 많은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백석은 당시의 조선 땅(오늘날의 남북한)과 만주 일대를 유랑하며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시는 한민족의 공동체적 친근성에 기반을 두었고 작품의 도처에는 고향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이 담겨 있다.
남한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인이라는 이유로 백석 시의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1987년 월북 작가 해금 조치 이후로 백석의 많은 작품들이 활발히 소개되고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받고 평가되고 있다. 평북 지방을 비롯한 여러 지방의 사투리와 사라져가는 옛것을 소재로 삼아 특유의 향토주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뚜렷한 자기 관조로 한국 모더니즘의 또다른 측면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64년경 협동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한때 대한민국과 일본에 알려져 있었으나, 최근 연구 결과 1996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요 작품
《사슴》: 1936년 1월 20일 자가본(自家本)으로 발행한 시집이다.
《사슴》에는 총 33편의 시가 4부로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1부 ‘얼럭소새끼의 영각’에 〈가즈랑집〉·〈여우난곬족(族)〉·〈고방〉·〈모닥불〉·〈고야〉(古夜)·〈오리 망아지 토끼〉 등 6편, 2부 ‘돌덜구의 물’에 〈초동일〉(初冬日)·〈하답〉(夏畓)·〈주막〉(酒幕)·〈적경〉(寂境)·〈미명계〉·〈성외〉 등 9편, 3부 ‘노루’에 〈산비〉·〈쓸쓸한 길〉·〈머루밤〉·〈노루〉 등 9편이 실려 있다. 4부 ‘국수당 너머’에 〈절간의 소이야기〉·〈오금덩이라는 곳〉·〈정주성〉(定州城)·〈통영〉(統營) 등 9편이 각각 실려 있다.
《사슴》의 판권지 상단에는 ‘詩集(시집) 사슴 百部 限定版 定價 二圓(100부 한정판 정가 2원)’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그 하단에는 ‘著作兼 發行者 白石(저작 겸 발행자 백석)’이라고 되어 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년에 발표한 시로 현실을 초월한 이상, 사랑에 대한 의지와 소망을 노래한 작품이다.
〈서행시초〉(西行詩抄): 1939년 《조선일보》에 재입사한 백석이 4회에 걸쳐 발표한 연시로 자신의 고향인 평안도를 여행하면서 발표한 작품이다.
〈팔원〉(八院): 연시 〈서행시초〉(西行詩抄)의 세 번째 시인 〈팔원〉은 승합자동차를 타고 여행하던 도중 차에 오르는 ‘나이 어린 계집아이’의 모습을 보고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한국 민족의 비극적 삶을 떠올리며 이를 형상화한 내용이다. 승합자동차 안팎의 상황을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남행시초〉(南行詩抄): 《조선일보》에 4회에 걸쳐 발표한 연시로 경상남도 통영, 고성, 창원, 사천을 여행하면서 발표한 작품이다.
작품 해석
시집 《사슴》의 구조
최근에 한 연구자는 시집 《사슴》의 구조가 J. S. 바흐가 작곡한 〈골트베르크 변주곡〉(BWV 988)을 모방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같은 작곡가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와 파르티타 2번(BWV 1004)의 '샤콘'을 구조와 내용 면에서 언어적으로 해석했다고 주장했다.[5] 김달진은 이러한 백석의 음악적 구조의 차용은 백석 자신이 독창적으로 고안한 것이라기보다는 영랑 김윤식의 전체적인 설계 아래 백석이 몸에 배인 성실함과 천부적인 언어적 재주로 바흐의 음악을 시적으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암시한다. 그러한 근거로 그는 백석의 시집 《사슴》과 김윤식의 시집 《영랑시집》이 공통으로 "하나의 주제를 얘기하고 있음을 암시[6]"하기 위한 구조를 사용하고 있으며, 영랑이 백석보다 약 세 달 앞서 시문학사에서 발행한 시집이 "총 53편의 시를 제목 없이 일련번호 아래 음악적 효과를 최대한(으로) 고려하여 자간과 행간을 배치한 독특한 편집[6]"을 사용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시가 바로 노래가 될 수 있음을 시·청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33편의 시를 수록한 백석의 《사슴》이 아리아가 수미쌍관(首尾雙關) 식으로 자리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형식에 《영랑시집》보다 더 근접해 있으며, 《사슴》 안에 〈여우난곬족〉과 〈여우난곬〉이 각각 2번째와 32번째 배치된 것은 영랑의 시집보다 백석의 시집에서 "바흐 음악의 수미쌍관 구조를 찾기[6]" 쉽게 해준다고 설명한다.
한얼생의 작품 포함 가부의 문제
최초로 백석에 대한 전기를 발행한 바 있는 송준은 1940년 7~8월 중에 《만선일보》에 '한얼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세 편의 시 〈고독〉·〈설의〉·〈고려묘자〉를 백석의 작품으로 간주하여 이를 자신이 펴낸 《백석시전집》[7]에 수록했다. 이와 관련하여 안도현 시인은 "백석의 시를 한 편이라도 더 발굴하려는 조급성이 오류를 확대재생산하고 있어 심히 우려"된다면서 한얼생으로 발표된 다른 시편 〈아까시야〉(《만선일보》 1940.11.21자 발표)를 발굴하여 자신의 백석 시론[8]에 이를 소개한 문학평론가 오양호에 대하여 "아예 백석의 이름을 시종일관 '한얼생'으로 규정하고 서술을 전개한다"[9]고 비난했다.
최초로 대중적인 백석시전집[10]을 낸 바 있는 이동순은 송준과 그의 저작물을 지목하면서 "맹목적 존경심과 숭배심으로 말미암아 백석의 시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한 작품도 백석의 작품이라 속단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편집한 시전집에 버젓이 수록한 불성실하고 비양심적인 자료들의 출현과 유통은 백석 문학 연구 풍토에 커다란 그늘과 수심을 드리웠다"[11]며, 위의 네 편의 시는 "문체나 표현방법, 전반적인 창작의 스타일로 보더라도 백석의 시작품이 아닌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일제강점기에 백석을 비롯한 여러 시인들이 베토벤의 정언적 진술 "바흐는 바다다"로부터 "시 창작을 출발"했다고 해석한 김달진은 자신이 엮은 시집에 한얼생의 〈설의〉를 백석의 시로 소개하면서 백기행은 "필명으로 주로 백석을 사용했고 이외에도 한얼생, 백정, 김춘원, 박일파 등을 사용했다"[12]고 언급한 바 있다.
〈통영〉에 등장하는 '란'의 해석에 대하여
백석이 1936년 1월 23일자 《조선일보》에 발표한 연작시 〈남행시초〉(南行詩抄)의 〈통영〉(統營)에는 '란(蘭)'이라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이를 둘러싼 연구자들 간의 해석이 분분하다.
'란'을 백석의 직장 동료인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신현중과 후에 혼사를 치르게 되는 박경련이라고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송준이었는데, 이러한 해석은 후에 박태일 문학평론가와 안도현 시인의 글에도 다시 등장한다. 박태일은 〈백석과 신현중, 그리고 경남문학〉에서 〈남행시초 : 통영〉의 창작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13]
"즐거웠고, 색달랐으며, 가슴 두근거렸을 첫 통영 길을 마친 몇 달 뒤인 이듬해 1936년 1월 초순에 백석은 다시 한 번 먼 통영으로 신현중과 함께 내려갔다. 두 번째 통영 걸음이었다. 박경련을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박경련은 방학이어서 고향 통영 집에 머물러 있을 때였다. 백석은 대구, 삼랑진을 거쳐 마산에 이른 뒤 배를 타고 통영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던 탓에 이미 서울로 되올라가 버린 박경련과 백석은 걸음이 엇갈려 만날 수가 없었다. 백석과 신현중은 박경련이 없는 통영에 내려, 박경련의 외사촌이었던 서병직의 안내를 받아가며, 이통제사순신장군의 사당인 충렬사를 비롯해 통영의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 이미 서울로 떠나버려 통영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박경련을 생각하며, 백석은 그 심회를 1월 23일 《조선일보》에서 〈統營〉이라는 시로 고스란히 담아냈다. (...)"
비슷한 맥락으로 안도현 또한 〈통영〉의 창작 배경으로 시인다운 상상력을 발휘하여 아래의 생동감 있는 대화를 재현하여 자신의 저서에서 소개하고 있다.[9]
구마산에서 통영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백석 일행은 포구 근처 오동동 객줏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여보게 현중, 이 집 주인장 딸이 참 곱게 생겼네. 내 눈에는 난이로 보인단 말이야."
"난이?"
"우리가 내일 만나게 될 통영의 박경련 말일세."
스물다섯 살 총각 백석의 가슴속에는 그녀가 꽉 들어차 있었다.
"아니, 박경련이 왜 난이라는 말인가?"
신현중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백석이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앞으로 세상에서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다 난이라고 부를 걸세."
그 이튿날, 네 시간이나 배를 타고 통영에 도착한 백석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신현중을 통해 통영에 간다고 전보까지 보내고 왔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난으로 부르고 싶은 '내 사람'은 통영에 없었다.
"경련이는 개학 준비를 해야 한다며 설을 쇠자마자 경성으로 올라갔어요."
이 말을 전해준 건 그녀의 외사촌 오빠 서병직이었다. 백석보다 두 살이 많은 서병직은 신현중과 친구 사이였다. 백석은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백석이 없었다. (...)
한편 이렇게 시인 주변의 실존 인물들과 연관 지어 작품 해석을 하는 경향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은 김재용이다. 문학평론가이면 《백석 전집》의 편저자이기도 한 그는 “학계에서조차 백석과 통영과의 관계를 논할 때 유독 ‘박경련’이란 존재를 부각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며 “이는 자칫 백석의 통영 관련 시를 연애감정에 국한시킴으로써 전체를 조망하지 못하게 한다”[14]고 지적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비록 백석이 시 ‘통영’에서 ‘난’을 언급했다고는 하지만, 백석에게 통영의 풍광과 역사에 대해 알려준 이는 정작 박경련의 외사촌 오빠 서병직이었다”고, 또한, “시 〈통영 : 남행시초2〉에 깃든 리얼리티는 서병직의 존재로 인해 한층 빛나고 있다.[14]” 백석의 몇 차례에 걸친 통영 행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그가 연정을 품었던 박경련(‘난’)도, 동행했던 친구 신현중도 아닌 서병직이라는 것이다.
김달진은 《사슴》의 구조가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모방하고 있다는 주장과 같은 맥락에서 백석과 김영랑, 김기림의 작품에 등장하는 '란'을 20세기 바흐의 재발견에 가장 큰 기여를 한 두 사람 중의 하나인 반다 란도프스카를 지칭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그녀(란도프스카)는 1933년 11월 최초로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하여 EMI에서 음반을 출시했다."[15] '란'을 백석의 '란'으로만 국한하지 않고 통합적으로 해석하는 그는 백석 시의 "란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는데 / (...) / 종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와 영랑 시의 "모란이 피기까지는 /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품의 봄을"을 "아무개 란을 둘러싼 음모의 역사가 세상에 알려질 때까지 슬픔 속에서 기다리겠다는 의미[15]"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학력
평안북도 정주 오산보통학교 졸업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아오야마 가쿠인 졸업
https://naver.me/GP4OfwIW
백석(시인)
1. 개요
일제강점기, 만주국, 북한의 반제국주의 시인, 번역가.
2. 특징
『통영(統營)』, 『고향』, 『북방(北方)에서』, 『적막강산』 등 대표작은 토속적이고 향토색이 짙은 서정시들이다. 지방적·민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특이한 경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시인으로, 평안도 사투리를 시에 넣기도 하고 서사를 시에 넣은 이야기시[6]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또 그의 시에는 먹을 것들이 많이 등장하기로 유명한데, 백석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연구한 식품영양학과 논문이 있을 정도이다.
그의 문학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고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그려지는 고향은 물질적으로 풍요롭진 않지만 안식과 평화로움의 정신적 가치가 있는 일종의 신화적 공간이며 공동체적 유대가 남아 있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 고향은 현실적 조건 하에서는 이미 훼손되어 남아 있지 않는 과거의 공간이다. 그의 시가 과거지향적인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고향의 풍물, 세시풍속, 생활도구, 전통예절을 잡다하게 나열하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는 것은 훼손된 고향의 회복을 원하는 간절한 의지이며, 이것은 나아가 민족 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나는 대표작으로는 여우난 곬족이 있다.
3. 생애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청년기를 보낸 시인으로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유학했다. 일제강점기에 창작된 그의 작품이 한국 문학계에서 명성이 높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며 등단하였으며, 1935년 시 『정주성』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간행하였다.
해방전까지 만주국 공무원(통역, 세관 공무원 등)으로 근무
해방 이후 고향인 이북에서 김일성 찬양시를 쓰는 등 순수문예 활동보다는 김일성과 공산주의 선전선동 활동에 전념했으며,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논조로 인해 1960년대 즈음 북한 문단에서 숙청당했다. 이후 량강도 삼수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농부로 일했고, 부업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문학 과외를 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문단에는 복귀하지 못하고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은 백기행(白夔行)[7]으로,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 가운데 '석(石)'을 가져다 필명 겸 아호(雅號)로 삼고 백석(白石, 白奭)으로서 작품 활동을 했다. 등단 이전 1933년 12월 방응모 장학금 회보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그의 서명에 이미 '백석(白石)' 및 '백석(白奭)' 이름이 등장한다. 이 밖에 '한얼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는 설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
과거 한국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언급을 피했다. 그러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부터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절창.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이 갓 되었을 무렵에 이르기까지 백석의 영향을 받은 인물은 화가 이중섭, 시인 신경림, 동화작가 김요섭, 윤동주, 북한의 한설야 등이 있다.
4. 작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여우난 곬족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흰 바람벽이 있어
여승
고향(故鄕)[8]
탕약(湯藥)
탕약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9] 우에 곱돌탕관[10]에 약이 끓는다
삼[11]에 숙변[12]에 목단[13]에 백복령[14]에
산약[15]에 택사[16]의 몸을 보[17]한다는 六味湯[18]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끊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어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야 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손으로 고히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맑아진다.
고독
수라
국수
모닥불
팔원
개구리네 한솥밥 : 한국전쟁 이후 아동문학에 천착하면서 쓴 동화시 중 하나. 초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오리
오징어와 검복
5. 대중매체
백석 시인은 생전에 그의 시가 남한에서 매우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교과서에도 실렸음을 알고 매우 만족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는 창작 연극 <백석우화-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에 나오는 내용으로, 비록 송준이 이윤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지만, 백석 자신이 남한에서도 인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는지에 대해서는 백석의 유가족들을 직접 인터뷰할 때까지 사실 여부를 알 수 없다. 남한 정보가 철저히 통제되는 상황에서 명예직이라도 받아 외국 손님을 접견하고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던 자리에 있는게 아니었던 백석으로서는 이러한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 모던 보이의 주인공 이해명(박해일 분)의 모델이다. 백석이 모던보이의 대명사였던 만큼 그의 스타일을 참고한 듯하다. 백석의 인생을 모티브로 한 영화는 아니며, 단지 헤어스타일이나 느낌만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 이해명은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친일파 아버지를 둔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기까지 하는 문제적 청년으로 나온다.
최항기의 소설 <홍경래의 난> 마지막에 등장해서 시 정주성을 갓 썼다고 자랑하다가 친구에게 정주성에서 왜 홍경래를 떠올리지 못하느냐고 면박을 당하고는 당황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애초에 소설 자체가 대부분 홍경래의 난에 관한 내용이고 백석은 두페이지 정도도 나오지 않는다.
김연수의 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의 주인공인 시인 '기행'이 백석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인물이다.
6. 여담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에 능통했다. 특히 러시아어는 국내 러시아문학 번역에 상당히 큰 족적을 남겼다. 월북 이후 번역국에서 일하면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니콜라이 고골, 레프 톨스토이, 안톤 체호프 등 다양한 문학가의 문학을 번역하여 북한에 소개했으며 미하일 숄로호프의 대하소설 <고요한 돈 강>은 2021년 지금까지도 백석 번역을 제외하면 일어 중역본과 축약본 밖에 없다[19]. 고요한 돈 역본은 풍부한 한국어 어휘를 적재적소에 집어넣는 탁월한 감각과 러시아어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 예술 번역, 사실상 백석의 창작품, 고유명사만 가리면 이북 배경 한국 소설이란 극찬을 듣는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 지라도를 러시아어 원문을 통해 번역한 사람이 백석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토마스 하디의 테스를 1940년 최초로 국내에 번역한 사람 역시도 백석.[20]
사랑에 관한 시를 찾아보면 대표작 중의 하나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우선 먼저 거론되는데, 이 시에서 나타샤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 편이다. 일단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작품[21]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중 하나라는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나타샤로 누구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싶었냐는 것. 다수는 '나타샤'가 일반적인 러시아의 여성들을 일컬는 이름[22]이므로 특정 여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편 하술할 고형진 교수의 경우 백석의 수필 <함흥>에서 백석이 "백계로인(白系露人)[23]의 어여쁜 처녀들"에게 빠져 있음을 지적하며, '나타샤'의 이미지 또한 이 백계로인 처녀에게서 비롯하였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4] 러시아 문학에 대한 동경과 이국적 이미지의 효과를 더하는 시어라는 점은, 문학계에서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백석의 문학 작품에 대해 초창기에 연구했던 학자들 중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에 재직 중인 고형진 교수가 권위자로 꼽힌다. 2020년에는 백석의 시집과 수필, 소설집을 정본으로 펴내기도 했고, 같은 해 열린 모스크바 국제도서전의 일환으로 특별히 그가 관심 있게 다룬 음식들을 주제로 이욱정 PD와 대담하기도 했다.
2004년에 나왔던 송준 저 <시인 백석> 1, 2, 3권도 백석의 생애를 아주 자세하게 적고 있다. 송준은 백석 연구가로, 백석의 시에 꽂혀 백석 연구에 몰두했다. 백석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어를 익혔다. 백석 연구로 백석이 자취가 남은 곳은 안 다닌 곳이 없을 정도. 백석의 상징적 얼굴 사진도 그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에서 찾아낸 것이다. 자타 공인 백석 관련 자료 수집의 1인자이다. 그는 "90년대 초반부터 백석과 백석의 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해 책을 쓰기 시작했는데, 백석 본인이 생존해 있다는 것을 알고서는 도저히 쓸 수가 없어서 한동안 미뤘었다"고 글에서 밝혔다.
독서 마이너 갤러리에서 만든 백석 책 추천 모음
2011년 근대서지학회에서 발간하는 근대서지 2호에 백석의 미발표 번역시 167편이 발표되었다. 백석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분은 찾아보자.
백석이 살던 동네는 수원 백씨 인주공파의 집성촌인데, 백인제의 아버지 백희행(白禧行)과는 10촌 지간으로 백인제는 11촌 조카뻘이 된다. 또한 백낙준과도 친척으로 백낙준이 손자뻘이다.
시인 백석 1~3권을 저작한 송준 작가를 소개하는 Yes24 작가 소개에 충격적인 글이 올라왔다. 바로 송준 작가가# 실제로 백석을 만났다는 내용이다. 허나 이는 잘못된 내용으로, 중국과 북한 접경지역에서 부인 이윤희 씨를 만난 것이 와전된 것이다. 1994년 송준은 그간 모은 자료를 토대로 백석평전을 출간했다. 그리고 만주와 북한에서의 행적을 담은 책을 내려고 할 무렵, 그는 중국 조선족 취재원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는다. 1963년 북한에서 숙청당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백석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이후 1994년 그는 어렵사리 중국 국경에서 백석의 부인 이윤희 여사를 만난 것이다.
시인 안도현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그가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 바로 백석 평전이다.
국내 소설가 김연수의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의 ‘기행’이라는 인물로 등장한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잘 알려지지 않은 분단 이후의 백석의 행적을 김연수의 문헌정보학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소설이다. 또, 기행은 백석의 본명이기도 하다.
헤어스타일이 당시 기준에나 지금 기준에나 굉장히 특이한 편인데, 이는 따라하기 매우 힘들다.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와 네이버 인물 소개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제법 잘생겼다.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고. 근 100년 전 사람인데 지금 기준에서도 잘생긴 편에 속한다. 넷상에서는 황순원, 윤동주, 임화와 함께 근현대문학 F4라고 하기도 한다.
1912년생인데 키가 무려 185cm나 되었다고 한다. 2020년대 기준으로도 상위 약 4%에 속하는 장신이며, 저 당시 185cm는 오늘날로 치면 196cm는 되는 것이다.[25] 1930년대 조선인 징용과 관련해서 일제가 지역별 키를 분석한 결과, 남한 지역은 162~4cm 구간에 많이 포진하였으며 한국 전체에서 가장 키가 컸던 함경북도의 평균키가 167cm 였다. 당시 조선인 평균 키는 164.1cm이며 170cm만 넘어도 장신이라는 소리를 들었다.[26]
배우 신성록이 카카오톡 이모티콘인 프로도와 더불어 백석을 닮은 것으로 언급이 되었다. 해당 사진은 별에서 온 그대의 이재경. 더 많은 사진. 신성록도 백석과 닮았다는 것이 좋았는지 인스타그램에 백석의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백석대학교하고는 앞에 이름만 같을 뿐 아무 관련이 없다.
6.1. 여성편력
백석은 조선일보에 입사해 여성 소설가 최정희[27]와 친해지면서, 여러 여성 문학인을 소개받아 그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최정희와 더불어 노천명, 모윤숙과도 자주 어울렸다. 이들 여성 3인방은 백석을 사슴이라 불렀다고 한다. 2001년 <문학사상>에는 최정희가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공개되었는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힌 편지도 받았다고 한다.
무척 좋아하던 박경련(란)이 결혼한 이후에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했는데, 이 시절에는 제자 김진세의 여동생을 마음에 두었다는 설이 있다. 미모의 여인으로 함경남도 영흥군에 살았으며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다고 한다. 백석이 정식으로 청혼했지만, 박경련 때와 마찬가지로 상대 집안으로부터 거절을 당했다는 말이 있다.
여기까지가 백석이 시인으로 활동할 당시 알려진 주변 여인들로, 모두 명문학교를 다닌 신여성들이다. 이후 시간이 흘러,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여인도 나오게 된다.
6.1.1. 란(박경련)
백석은 통영을 아주 좋아했다. 경상남도 통영시에 가면 백석의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고, <통영>으로 연작시만 3개가 있을 정도이고, 백석은 통영 바다를 거닐며 <바다>라는 시를 남겼다. 이는 통영에 그가 사랑했던 란(박경련)이라는 여인이 살았기 때문이다.
백석이 박경련을 처음 만난 곳은,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장이었다. 허준은 백석의 또 다른 친구 신현중의 여동생인 신순영과 결혼했는데, 당시 24살이었던 백석은 결혼식장에서 박경련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박경련은 통영 출신으로, 당시 18살이었으며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신여성이었다.
뜨거운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백석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몇 차례 통영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고, 그녀의 부모에게 인사를 겸한 청혼을 했으나 끝내 결혼 승낙도 받지 못했다. 당시 박경련에 대한 백석의 마음은 주변인 모두가 알 정도였으며, 그 마음은 박경련이 살고 있는 통영으로 이어져서, 백석은 통영을 소재로 여러 작품을 남긴다.
그러나 백석과 박경련은 이뤄지지 못했으며, 박경련은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결혼한다. 신현중은 백석과 조선일보에 같이 근무하며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였고, 다른 여자와 약혼 중이었다가 파혼하고 박경련과 결혼한 것이다. 이에 백석은 많은 충격을 받는다.
이 과정에서 아주 너저분한 일이 있었다. 백석이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어하자, 박씨 집안의 어른들은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신현중은 따로 약혼녀가 있으면서도 내심 박경련을 좋아하고 있어서, 백석을 배신한다.
신현중은 "백석의 어머니는 기생 출신이거나 첩의 자식입니다."라고 백석의 출신을 헐뜯었다. 어머니 이봉우는 1888년생으로, 24세에 서울에서 시집을 왔다. 백석의 외조부 이양실과 그의 기생 출신 첩 사이에서 태어난 만큼, 나이 차가 많은 백영삼과 결혼했다. 그 시절 당시 결점(어머니가 아버지의 첩인 여성의 경우 등)이 있는 여성이 자신보다 나이차가 많이 나는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일반적인 특정 풍조였다. 신현중은 박씨 집안의 어른들에게 "제가 박경련과 결혼하고 싶습니다"라고 호소하여, 끝내 성공하고 만다.
박경련은 신현중의 누나 신순정의 제자였고, 신씨 집안도 통영 출신이었다. 그래서 박씨 집안과 신씨 집안은 피차에 집안 사정을 다 아는 사이였고, 부모님 대에도 서로 면식이 있었다. 또한 신현중의 아버지는 군청에 근무하여 형편도 꽤 좋았다. 반면 백석은 타향, 특히 이북 출신에 그리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장남이었다. 결국 백석과 신현중의 사이에서 저울질하던 박경련의 어머니는 신현중을 택했다.
아무튼 그렇게 결혼한 박경련과 신현중은 부부 금슬이 좋았으나, 폐결핵을 앓고 병약했던 박경련의 건강 문제인지 자식은 낳지 못했다.[28] 신현중은 언론인으로 재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교육자가 되어 경상남도와 부산 일대를 떠돌다가 1980년에 생을 마쳤다. 그리고 박경련은 한참을 더 살았다.
바다 -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통영 바다를 거닐며 연인 란에 대한 사랑을 읊은 시로, 사랑에 빠진 백석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
수필 편지(1936.2.21 조선일보) - 백석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중략)
어느 해 유월이 저물게 실비 오는 무더운 밤에 처음으로 그를 안 나는
여러 아름다운 것에 그를 견주어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좋아하시던 산새에도
해오라비에도 또 진달래에도 그리고 산호에도…
그러나 나는 어리석어서 아름다움이 닮은 것을 골라낼 수 없었습니다.
총명한 내 친구 하나가 그를 비겨서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제는 나도 기뻐서 그를 비겨 수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았던 기억은, 시 『바다』와 『통영』 3편과 『남행시초』 연작으로 남았으며, 수필 <편지>에 잘 나타나고 있다.
통영(統營) - 백석
(상략)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29]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푸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하략)
란(박경련)과 헤어진 후 사건의 전말을 들은 백석이 지은 시. 절절하게 실연의 아픔이 느껴진다. 1938년 4월에 쓴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에는 사랑하는 여인과 여인과 결혼한 친구에 대해 담겨져 있다. 이 무렵 백석은 신현중에게 이끌려 그의 신혼집에서 란과 인사하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中 -백석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새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 오던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 살뜰하던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6.1.2. 배우자
"백석의 첫 번째 혼례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이루어졌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의 첫 부인 장정옥은 남북간 갈등이 고조되자 외아들을 데리고 월남했다"는 기사가 있으나, 정확한 기록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2번째 부인 문경옥(1920∼1979)은 평양의 유명 변호사인 문봉의 서녀로, 북한 최초의 여성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이다. 문경옥은 김일성의 후원을 받아, 소련 레닌그라드(現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유학하여 음악을 공부했다. 그녀의 오빠 문학수는 화가였다.
1940년 9월 백석은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 소속 측량 보조원을 그만두고 백구둔이라는 농촌에 잠시 체류하며 농사를 짓다가, 안둥시청에서 일하고 있던 소설가 염상섭이 안둥세관에 자리를 얻어주며 안동로 간다. 당시 문학수와 가까이 지내던 백석은, 문학수의 중신으로 1942년 평양에서 문경옥과 결혼식을 올린 뒤 안둥에서 살림을 시작한다. 처제 문경랑은 형부 백석에 대해, 지인인 작가 김자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매우 예민해서, 건너방에서 잔다고 할 때 웃음소리가 조금만 나도 신경질을 부린다. 가랑잎에 불이야 시인들은 다 그렇다나.
백석의 2번째 결혼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임신 8개월의 아이가 유산되며 고부갈등 등 관계가 악화되며 이혼했다고 한다.
그 후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부인 리윤희와는 3남 2녀를 두고 50년 넘게 해로했다. 백석은 1962년부터 1995년 사망할 때까지 리윤희와 삼수군 농장의 농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6.1.3. 김영한(김자야)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한 여인 중 하나는, 법정스님에게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김자야)이다. 길상사 시주가 언론에 널리 보도되면서, 당시 김영한와 백석과의 일화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김영한의 호 '자야'는 이백의 시 <자야오가>에서 나오는 여인의 이름으로,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가쿠인에 유학하면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김영한은 광복 후에 대원각이라는 큰 요정을 운영했는데, 말년에 법정스님에게 요정 전체를 시주하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당시 돈으로도 1,000억원이나 되는 거액이어서, 1987년 처음 제안을 받은 법정스님은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김영한이 몇 년에 걸쳐 끈질기게 매달려서, 결국 법정스님과 대한불교조계종은 시주를 받아들여 대원각을 길상사라는 사찰로 개조한다. 그리고 김영한은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김영한은 생전에 "1,000억 원이란 돈도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많이 생각나느냐"는 질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 등의 말을 남겼으며, 이는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백석 측과 문학계는, 김영한이 백석의 연인이었다는 설을 부인하고 나선다. 백석의 주변인들은 김영한과 백석의 교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백석은 활동 당시 셀럽처럼 인기가 있어, 그가 좋아했던 여인이나 주변 여인들은 잘 알려진 편이다. 백석이 박경련(란)을 좋아하던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편 김영한으로 인해 "백석이 기방 출입이 잦았다"는 설이 나오게 되고, "백석이 함흥의 기생과 동거하여, 이것이 김진세의 여동생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유가 되었다"는 설도 나오게 된다.
백석 연구가인 송준 역시 "김영한을 직접 만나보기까지 했으나, 그녀는 백석에 관한 그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질문을 하니 백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녀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김영한이 그렇게 돈이 많았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점도 의심했다. 그래서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짧막하게 맺는다. 백석 전문가인 이동순 영남대학교는 말년의 김영한을 내사랑 백석을 내도록 독려했다.
6.2. 윤동주 관련
당시 말 1필이 5원이었는데, 백석의 시집 <사슴>이 2원 정도였다고 한다. 1936년 1월 100부 한정 판매를 하였는데, 시인 윤동주는 이 책을 구하지 못해 [[연희전문학교]]광명중학교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이 시집을 베껴 썼고, 그 필사본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한다.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을 살펴보면 윤동주가 백석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30] 그리고 흰 당나귀는 백석과 윤동주 모두 좋아하는 이미지인데, 이는 두 시인의 시에서 담은 시인 프랑시스 잠이 좋아하는 이미지라 한다.
두 작품을 한번 비교해보자.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 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별 헤는 밤
윤동주
季節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來日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靑春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追憶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憧憬동경과
별 하나에 詩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小學校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佩패, 鏡경, 玉옥 이런 異國少女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詩人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北間島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