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말씀드린대로 시리즈의 두번째가 나갑니다~~~ 엄습하는 콧물과 기침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누가 기다린다고...-_-;) 암튼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__) 찌라시틱한 제목은 여전합니다~
...이번에는 무헙소설 얘길 할란다. 무협소설, 많이들 좋아하시는지? 내가 처음으로 무협의 매력에 빠져든건 중3때였다. 당시 남녀공학이던 중학교에서, 짝꿍 남자애가 하도 열심히 읽길래 가사실습 시간에 구운 쿠키 몽땅 먹이고 빌렸던 책이 김용의 '영웅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영웅문 3부작 중 2부에 해당하는 '신조협려'로, 1부보다 먼저 읽게 되었다.) 무협소설 입문부터 빌린 책으로 한 셈이었다. (그때 무협지 사서 봤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ㅅ-a) 기말고사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나흘 밤 꼬박 새워가며 읽었다. (당근 시험은 종쳤다.-_-;)
진짜 난리는 그 다음부터였다. 문제의 책 '신조영웅문'을 시작으로 '사조영웅문', '의천도룡기'의 영웅문 3부작을 읽어치운 뒤에(글자 그대로 읽어치웠다;) 엄청난 금단현상이 몰려온 것이다! 호흡곤란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산소호흡기 찾듯, 허겁지겁 만화방으로 달려가 '청향비', '대승부', '천룡팔부', '소오강호', '녹정기', '설산객' 등을 필사적으로 찾아 읽었다. 심각한 일은 이 책들이 전부 무지막지하게 재미있던 나머지, 한 질당 일주일을 넘어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나온 김용 소설들을 모두 읽고 나자 무협소설에 대한 굶주림은 채워지기는 커녕 더욱더 커져버렸다.
굶주린 눈길은 자연스레 대본소용 무협지로 향했고 여러 중국무협들과 함께 국내무협들도 접하기 시작했다. 용대운, 와룡생, 사마달, 야설록, 검궁인, 철자생 등의 작가들을 알게 되었지만 누구 하나 흡족한 소설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건 뭐 문체만 조금씩 바꿨지,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근데 내가 보기에 거기서 거기란 얘기지 주변의 많은 무협독자들은 그런 것에 열광했다. 흔히들 무협지의 매력은 "대리만족"이라고 한다. 초인적인 무공으로 악당들을 물리치고,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해결하고, 누구나 우러러보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절대고수의 자리에 오르며, 절세미녀들도 줄줄이 따르는 이야기...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법한 환상이다. 그러나 어쩌랴, 나같은 "여자" 무협지 팬도 있으니 말이다.-ㅅ-a
천편일률적인 무협지들에 식상해갈 무렵, 서효원의 소설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두침침하고 담배연기 자욱한 만화방 한쪽에 가득 꽂혀 있는 무협지들. 거기서 서효원이란 이름을 달고 있는 책들은 모두 검은색 표지를 하고 모여 있었다. 빨강, 초록, 금빛과 은빛 등 밝고 화려한 표지 일색인 무협지들 사이에 중간을 차지하고 있는 이들 책을 발견하고는 가벼운 충격마저 느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뽑아든 '창궁비연' - 내가 책 한권 갖고 있지 않으면서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라고 떠벌리는 서효원과의 첫 만남이었다.
이 소설, '창궁비연'은 주인공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_-; 이중생활을 하는 자객이 주인공인데 도중에 팔이 잘려 외팔이 검객이 되고 천신만고 끝에 결국 인간적 완성에 다다르는 모습을 그린 내용은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단지 지금으로서는 그때 무슨 수를 써서든 그 책을 붙들어 두었어야 했다는 것만 안다. 물론 당시엔 그런 생각조차 못했었다. 그저 우리나라 무협작가 중에 김용만큼이나 나를 사로잡은 사람이 나타났다는게 신기할 따름이였다.
대부분의 무협작가들에게서(국내작가와 중국작가를 막론하고) 고질적으로 발견되는 용두사미식 전개, 억지 결말, 기연 남발, 일부다처적 연애관계-_-가 그에게는 없다. 또 문체도 확연히 다르다. 일체의 장식적인 묘사를 배제한채 건조하고 담담한 관찰자 시점으로 써내려간다. 그러나 그 표면적인 냉담함 속에는 어떤 한(恨)같은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나중에야 그가 대학시절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고 12년동안 병마와, 죽음의 공포와 싸워가며 오로지 무협창작 속에서 삶의 향기를 맡고자 했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 느낌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모두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이야기이고, 그때의 나로서는 그저 소설 찾아 읽기에만 열중했다. 쓴 사람에 관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여고로 진학해서는 같은 반 애들이 하이틴 로맨스를 돌려읽을때 나 혼자 근처 만화방에서 빌려온 그의 소설들에 푹 빠져 있었다. (나 왕따였냐고? 응.-_-) 나는 그 중 몇 편이라도 꿀꺽해 버린다는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맨처음 읽은 '창궁비연'만큼은 만화방에 도로 갖다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날때마다 피눈물 흘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또 하나 빌려읽고 반납했다가 두고두고 가슴치는 작품이 '대설'이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 상황에 떠밀려 자객 노릇을 하게 되고, 또 그런 자기 자신에게 적응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한다. 중간중간 생각 안나는 부분도 있지만,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 속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하얀 설원에서 끝났을때 - 마지막 권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막막함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책을 읽고 울었던 것도.
서울창작에서 그의 소설들이 조금씩 복간되고 있지만, 이 두 작품이 언제나 나와줄지 아직 미지수이다. 그런 기분 아실거다. 지금 미치도록 듣고 싶은데 못 듣는 음악, 미치도록 보고 싶은데 못 보고 만 영화, 미치도록 읽고 싶은데 다시 못 읽는 책. 그것들에 대한 느낌은 마치 미치도록 그리운 사람을 못 볼때와 조금 비슷하다. 특히나 한참전에 읽고서 다시 읽고 싶은데 읽지 못하는 책이 더욱 그러하다.
여타의 무협지와는 다른 서효원 무협의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을 영웅적으로 그리기는커녕 어찌나 어벙하고 답답한지 분통이 터질 지경으로 만드는 거다. 게다가 그런 주인공을 철저히 개고생시킨다.-_-; (주인공 개고생시키는 점은 우리나라 최고 - 아니 세계 최고의 무협만화가 고 이재학 선생의 '추공 시리즈'와도 비슷하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그 모자라고 부족한 점 많은 주인공들은 절대로 죽는 법이 없다. 제 아무리 절정고수라도 그를 죽일 수 없다. 주인공은 어떠한 대의명분보다도 살기 위해, 오로지 살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이어간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인물 학살은 야설록의 특기이다. 그래서 난 야설록이 싫다. 야설록 팬들께는 죄송하다;)
"암세포 속에서 진정한 삶을 배웠다"는 서효원, 그의 손에 부서져 나간 타자기와 워드 프로세서는 무려 스무 대에 이른다고 한다. 위암과 폐기종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한 젊은이가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기까지 무려 1천여권의 책을 써낸 것이다. (서효원의 작품은 모두 합해서 100질이 조금 넘는다고 알고 있다.) 그런 그의 소설들 중 내가 읽은 것은 다 꼽아봐야 삼사십질이나 될까? 아마 삼분지일도 안될듯 하다. 줄거리도 잘 생각 안나는 것이 대부분이고.
1993년 서울창작에서 출간된 그의 시산문집 '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한다'는 끝끝내 읽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읽고 싶지 않다. 하이텔 무림동의 어느 서효원 팬이 올려준 표제시를 읽은 것 만으로도 너무 슬퍼, 감히 그의 유고집을 읽고 나서 가슴아픔을 어찌 진정시킬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한다>
나는 죽어서도 새가 되지 못하리라.
그 화려한 상승은 너무도 사치스러운 것!
스스로 못박히기 위해 십자가를 만드는 목수가 되었던
나사렛 어느 슬픈 청년이 흘린 핏방울에는
날 위한 한방울 기도가 있었을까.
나는 죽어도 새가 되지 못한다.
새가 되지 못하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이미 죽었거늘 또 죽을 수 있으랴.
다섯자루 권총이 필요하다.
온통 뼉다귀뿐인 두개골을 부셔버릴
다섯 발 탄환이 모아지면
피는 흐르다 멎을 것이다.
뇌세포는 말라 부스러진지 오래니까.
- 서효원 -
이번 글은 너무 길고, 또 어느새 무거워져 버렸네요.-_ㅜ 아씨... 고 서효원씨 얘길 쓰려니까 또 왜 이리 가슴이 아프고 눈물은 쏟아지는지...... 죄송합니다. 원래는 이렇게 쓰려고 했던게 아닌데요... 담번은 좀 밝은 분위기로 가겠습니다. (또 쓰려고?!-_-;)
나도 중딩 때 영웅문 1,2,3부 영웅문을 야금야금 읽어치웠더랬지요...그러나, 더는 안 땡기더라는...;;; 1부보다 2부에 실망을 했고, 2부보다 3부에 실망을 하면서....너무 빨리 질려버렸음...그 이후에 동사서독을 비롯한 단황 등등이 나오는 것을 한 번 읽으려고 시도만 했다가 시도로 끝난...
검궁인의 '낙화일지' - 기억날듯 합니다. 주인공이 하급살수였죠. 결국 원하는 바(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이루지도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이 대단히 파격적이었습니다.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못봤기에...--; 후속편이라는 '중원일지'는 못봤습니다.
서효원 팬이 계실 줄이야... 전 대자객교만 기억하고 있어요 그 외에 대곤륜이라든가 재미있는 게 여러 개 있긴 한데 몇 개 빼고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다른 분을은 어떨지 몰라도 전 서효원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약간의 편협함과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엿봐서리...
첫댓글 머찐 글이오.
나도 중딩 때 영웅문 1,2,3부 영웅문을 야금야금 읽어치웠더랬지요...그러나, 더는 안 땡기더라는...;;; 1부보다 2부에 실망을 했고, 2부보다 3부에 실망을 하면서....너무 빨리 질려버렸음...그 이후에 동사서독을 비롯한 단황 등등이 나오는 것을 한 번 읽으려고 시도만 했다가 시도로 끝난...
무엇인가에 빠져드는 사람을 보면 저는 참 부럽습니다. 저는 사람이든 뭐든간에 오랫동안 깊게 빠져보질 못했거든요. 맨날 얕은 구멍 내다 마는 저로선. ㅠㅠ
유전님,계~속 써주세요. 언제 기회되면 "매혹된 영혼"도 써주시고..
루카님, 저도 맨날 얕은 구멍만 내다 말아요~^ㅅ^; 우디님, '매혹된 영혼' 감상평은 본인이 직접 쓰라 하지 않았소! (버럭!!)
..... 이 시리즈를 하자고 한 내가 대견하오.
3부는 정말... 장무기때문에 보기가 힘들죠. 양과와 영호충이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 아니지, 아니야. 주백통과 도곡육선이 있었군.
좌백과 더불어 내가 제일 깊이 빠져든 무협소설가가 서효원이라오,,,,
아무도 낙화일지를 읽어본 사람은 없단 말이냐...
검궁인의 '낙화일지' - 기억날듯 합니다. 주인공이 하급살수였죠. 결국 원하는 바(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이루지도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말이 대단히 파격적이었습니다. 무협소설에서 주인공이 자살하는 경우는 거의 못봤기에...--; 후속편이라는 '중원일지'는 못봤습니다.
서효원 팬이 계실 줄이야... 전 대자객교만 기억하고 있어요 그 외에 대곤륜이라든가 재미있는 게 여러 개 있긴 한데 몇 개 빼고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다른 분을은 어떨지 몰라도 전 서효원 무협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 약간의 편협함과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엿봐서리...
오옷, 자하님! 오래간만입니다~ 요즘은 왜 딴지사커 맞춤법 안 올려주시는 겁니까? ㅡ_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