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대원군 때, 개화를 했으면 일본을 앞지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시각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이 개화를 한 다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축적되온 역사적 기반이 있었던 반면, 조선에는 그런것들이 없었기 때문이죠.
기본적인 인프라마저 없는 상황해서 개화하는 것은 애초에 성립이 안되는 유토피아인 것이죠.
그럼 본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일본의 면적은 조선의 면적의 1.5~2배입니다. 지리적으로 조선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 이뿐만 아니라 일본은 섬이라는 지형적 이점 때문에 타국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이런 특성 덕분에 해양활동과 해양기술이 뛰어나질 수 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자연적 자원은 조선에 비해 특별히 나을 바는 아니었지만, 은 생산량은 세계 어디에 비교해봐도 손색이 없었습니다. 17세기 일본은 이미 전세계 은의 1/3을 생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산업적인 면에서도 일본은 상당한 기반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16세기부터 이미 상당한 수준의 상업이 흥행했습니다. 일본인들은 호기심과 모험심이 강해서 해외활동에도 열기를 쏟았죠. 단적인 예로 17세기에 필리핀, 샴, 캄보디아에 일본인 마을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일본인들의 활방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1673년엔 에치고야가 세운 포목점에선 "현금만 취급, 가격 정찰제"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기기도 하죠. 이 포목점은 폭발적인 매출액을 올리면서 교토와 오사카에 분점을 세우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업의 발달은 도시의 발전과 집중을 필연적이게 만들었습니다.
1685년, 교토의 인구 주소 결과는 교토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풍요로운 삶을 누렸던 도시였음을 보여줍니다. 인구 조사 문서에는 의사, 시인, 저술가나 다도, 꽃꽃이, 노(能)등 각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의 이름과 함께 높은 품질의 비단, 자기, 부채, 종이, 사찰용품으로 전국적 명성을 얻었던 수백 개의 상점명도 기록되 있습니다. 그리고 인구조사가 끝날 무렵 교토의 총 인구는 30만명을 훨씬 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오사카도 도시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중이었습니다. 17세기 말의 오사카는 36만 5천명의 상인과 장인들이 도시에 활기를 부여했습니다. 1700년 오사카의 장인들은 평지씨에서 램프 기름을 추출하거나 원면을 옷으로 만드는 일에 종사하고, 중고품을 손질해서 다시 판매하는 일에 종사했습니다. 스기모토 일가를 비롯한 동銅 제련업자들은 당시 오사카에서 가장 큰 규모의 노동력 시장을 형성 했으며 17개의 제련소를 통해 대략 만 가구 이상이 생계를 꾸려갔습니다. 1710년대에는 무려 2천여명이 넘는 목수들이 오사카에서 살면서 배를 만들었고 도맹상을 비롯한 유통업자, 삯꾼, 운송업자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한 존경받던 도시관료로 하여금 이런 말을 남기도록 하였습니다: "일본의 주요한 해로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위치한 오사카는 각종 물건의 거래와 매매로 활기가 넘친다, 그런 이유로 오사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본의 부엌'이라고 불린다".
17세기에 걸쳐 건설 공사 현장의 인부와 숙련공을 비롯해 갖가지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들이 에도에 쉴 새없이 몰려왔고, 이들은 당시에 새로 등장한 무사 출신들의 행정관료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조달해 주는 역활을 했습니다. 1720년대에 이르로 무사만큼이나 많은 상인과 장인들이 에도에 거주했으며 도시의 전체인구가 100만명을 훨씬 넘어서게 되고, 이는 에도를 세계에서 최고로 집중된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에도, 오사카ㅡ 나고야, 그리고 가나자 같은 도시들은 평균적 수준인 10만을 넘어서고 일본 전체 인구의 5%-7%가 대도시에 집중됬다는 것은 당시 유럽의 2%에 비교해 보면 일본의 도시화 수준은 상당했고 이를 넘어서 일본을 아시아에서 최고로 도시집중화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상업활동이 증진되면서 교역과 운송 그리고 금융이 필연적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업의 발달은 잔혹하고 혼란스러웠던 16세기의 혹독한 전쟁기간 때 이루어진 것이었죠.
1550년-1650년 사이 일본의 농토는 두 배 가까이 증가했는데 이는 다이묘들의 전쟁물자의 필요가 가져온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하튼, 생산력의 증대는 인구 성장을 가속화 했으며, 1550년 이후로 150년 동안 일본의 전체인구는 천만200에서 3천100만 이상으로 증가했습니다. (1910년 조선 인구 2천만과 비교했을 때 많이 대조적이죠). 도시의 거대화와 집중화에 따라 해당 도시의 인구는 자급자족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따라서 다른 지역에서 물자를 조달해야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여러 지역들의 특산화를 유발시켰습니다. 특히 남큐슈산 장뇌와 시이ㅏ케산 버섯, 도사산 재목과 숯, 도야마산 약품, 고후산 포도는 대도시에서 상당한 가격에 판매된 품목들이었습니다.
다이묘의 정책들은 물물교역을 전국적으로 확대했습니다. 그들의 사업에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했고 그들의 수입은 농민들로 부터 받는 미곡이었는데, 이를 현금으로 바꾸기 위해 오사카에 보내야 했습니다. 이에 대한 결과로 해마다 100만석의 쌀이 오사카의 도매상을 통해 유통되었으며 그 양은 1720년대에 4배가 증가했습니다.
이런 활동에는 이에 합당한 교역로가 필수적인데, 일본은 그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막부의 지령으로 에도의 거상 가와무라 즈이켄은 위험한 수로와 해로를 분류하고, 등대와 수로표지판을 설비하고 구조 시설까지 정비했습니다. 그리고 육로로는 에도를 중심으로 5개의 주요 대로들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중 도카이도는 500km가 꾸준히 이어져있었고, 모래와 자갈로 땅을 평평하게 하고 평균 폭이 6m이상으로 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출발지와 도착지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이정표와 표지판이 즐비해 있었고 도카이도를 따라 53개의 역참이 존재했습니다. 이런 도로망의 효율성은 에도에서 오사카까지 가는데 이틀이면 충분한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초반 기준).
이러한 이점 때문에 금융업도 발달할 수 있었고 산업의 효율성을 위한 다양한 연구를 가능케 했습니다. 1860년에 출간된 백과사전에는 200여종의 누에 종류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인들이 더 싸고 나은 실을 생산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연구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에비록 보편화 되지는 않았지만, 수력이나 톱니장치로 돌아가는 자동화 기계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생략하고, 일본은 면직 산업에 대단히 집중했고 결과적으로 매우 다양한 색깔과 모양의 의류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일본의 민족주의 발달에 기여합니다. 17세기 중반에 요리책이 발행되면서 일본인의 전통적 식사를 어느정도 스탠다드화 했고, 여러가지 종교행사, 문화행사, 먹거리, 그리고 특히 여행, 그리고 엄청난 수의 인쇄물은(다양한 자연 풍경, 사건과 화제, 윤리적 딜레마, 정신적 가치와 믿음, 일상사의 희비를 주제로 하는) 비교적 험난하고 고립된 일본의 여러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의 공유된 가치로 이끌어 냅니다.
--근대화를 향한 탐색은 모든 것이 새롭게, 이전과는 다른 세계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일본인들의 선조가 이룩한 유산이야 말로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덧붙여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도 명백합니다.
메이지 유신은 정부의 전복이나 권력주체의 이전과 같은 단순한 쿠데타가 아니라 일본을 명백히 개혁하는 데에 그 이상을 심고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는 서구와의 관계를 매우 돈독히 하려고 했습니다.
1873년에는 비에나, 1875년에는 맬버른, 1876년에는 필라델피아, 1878년에는 파리, 1879년에는 시드니 박람회를 참가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메이지 정부 자신이 1877년에 서구식 박람회를 계막하면서 만6쳔여명의 출품자가 10만여점에 달하는 품목을 전시하고, 내용은 풍차에서 증기기관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폐막까지 하루 평균 1500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아왔습니다. 이는 일본인들의 대단한 호기심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관련해서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의 호기심과 배우려는 노력을 자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토 히로부미, 오쿠보 도시미츠를 비롯한 정부관료 49명은 불평등 조약의 재검토 외에 서구의 헌법과 제도, 교역과 산업, 금융, 세제, 통화따위의 경제적 지식 및 교육제도와 철학을 배우는 목적으로 1871년 요코하마 항을 출발했습니다. 이들은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미국 대통령 율리세스 그란트와 국무장관과 회담을 통해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통감하게 됬습니다. 그리고 견학을 도와주는 안내원들을 따라 바쁜 일정을 통해 여러가지를 배우게 됩니다. 사절단의 어떤이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기차에서 내려 숙소에 집을 풀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견학을 시작했다. 낮에는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탈곡기나 기관차를 구경하느라 바빴다. 매케한 연기를 맡아가며 우리 몸은 온통 그을음과 먼지로 뒤덮였다. 땅거미가 질 무럽에야 숙속로 돌아온 우리들은 낮에 뭍은 먼지를 털어낼 틈도 없이 우리를 위한 만찬회장으로 향해야 했다. 만찬회장에서는 기품있는 태도를 보여야만 했다. 극장에라도 초대가 되는 날이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눈과 귀를 바짝 긴장해야 했다. 이 모든 일은 우리를 매우 지치게 만들었다. 밤이 되어 잠자리에 들기가 무섭게 날이 밝아왔고 공장을 견학 시켜줄 안내원이 우리를 깨우러 왔다..."
이렇게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런 저런것을 보면서 감탄해 하였고 공식 일정을 늘려 1873년에서야 일본에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미국內의 9개 도시를 순회하고 1년동안 리버풀, 로마, 마르세유, 파리, 상페테르스부르크, 스톡홀름을 방문했습니다.
사절단은 처음에 서구의 압도적인 기술과 풍요로움에 놀랐으나 이들은 이 모든게 서구의 그 동안 축적되온 역사적 경험과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게다가 서구가 그 산업혁명을 이룩한게 불과 40년밖에 되질 않는 다는 것을 알고 희망을 가지게 됬습니다.
이런 경험을 바탕삼아 1870년대에는 시민의 자유와 자연권, 공리주의, 실증주의와 관련해, 밀, 밴담, 스펜서, 토크빌, 기조, 루소의 사상들을 일본어 번역서로 읽을 수 있게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후쿠자와 유키치는 매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학교, 산업, 군대, 함대는 단지 개화의 외형적인 모습에 불과하다, 이는 모두 돈으로 살 수 있다.....그러나 돈주고서 사거나 팔 수 없는 정신적인 무언가가 분명히 존재한다......개화의 정신이 필요하다!"
이런 기반을 통해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고, 헌법을 공표하고 일본을 비서구권에서 열강이 된 유일한 사례를 남기게 됬습니다.
대원군만 욕할 일은 아니죠. 사실 대원군은 쇄국정책만 뺀다면 상당히 통치를 잘했습니다. 60년 세도 정치동안 피폐해졌던 조선을 경북궁 건설을 추진할 정도로 제건해놓은 제주군이기도 합니다. 경북궁에 너무 집착하다 다시 말아먹은게 문제지만........ 그리고 메이지유신의 과정을 보면 뭐랄까... 스타일의 차이도 요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항이후에 너무 논쟁으로 시간을 많이 까먹은 면도 있습니다. 반면 일본의 스타일은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라....' 메이지유신 이것도 꽤 피를 많이보고 나서야 비로서 추진을 할 수 있었더군요.
그 어느 혁명도 피없이는 불가능하죠. 미국독립, 프랑스 혁명도 전부 피투성이...새로운 것을 이룩하기에는 강렬한 의지가 필요하고, 이것을 실행하기에는 Raw Power가 있어야 하는데, 논쟁만을 하다보면 의지도, 시간도, 힘도 약해지죠. 결국, 반대파를 완전 숙청하고 과감하게 밀어 붙여야만 혁명이 가능한가 봅니다.
대원군에 대한 시각은 조금 다릅니다. 대원군은 왕권강화에 주력을 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당시 세도정치 청산의 형태가 되어 일부의 순기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개화를 피하고 쇄국을 정한 것도 외세의 침략에 대한 우려에 앞서 왕조의 강화가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의 일어났던 양반제도에 대한 저항과 민권의 보호를 외면하고,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개항여부를 떠나서라도 대원군의 통치는 조선내에서도 시대착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 근처의 중국이나 러시아 등이 허접했던 운도 있었겠죠 중국이 근대화가 지지부진해서 휘청거리는 때를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또한 근대화가 부진했던 나라죠 러시아는 산업화가 스탈린시대와서야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알기로 1930년대에 러시아는 산업국가로 탈피합니다. 일본은 때를 잘만난 덕을 많이 입은 셈이죠 부럽기도 하네요
첫댓글 좋은 글이네요....저도 지금까지 대원군 요놈...이런 생각을 가끔 했습니다만....제 지식이 짧음을 한탄할수밖에 없군요....많이 배우고 갑니다...
대원군만 욕할 일은 아니죠. 사실 대원군은 쇄국정책만 뺀다면 상당히 통치를 잘했습니다. 60년 세도 정치동안 피폐해졌던 조선을 경북궁 건설을 추진할 정도로 제건해놓은 제주군이기도 합니다. 경북궁에 너무 집착하다 다시 말아먹은게 문제지만........ 그리고 메이지유신의 과정을 보면 뭐랄까... 스타일의 차이도 요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개항이후에 너무 논쟁으로 시간을 많이 까먹은 면도 있습니다. 반면 일본의 스타일은 '반대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라....' 메이지유신 이것도 꽤 피를 많이보고 나서야 비로서 추진을 할 수 있었더군요.
그 어느 혁명도 피없이는 불가능하죠. 미국독립, 프랑스 혁명도 전부 피투성이...새로운 것을 이룩하기에는 강렬한 의지가 필요하고, 이것을 실행하기에는 Raw Power가 있어야 하는데, 논쟁만을 하다보면 의지도, 시간도, 힘도 약해지죠. 결국, 반대파를 완전 숙청하고 과감하게 밀어 붙여야만 혁명이 가능한가 봅니다.
만약 대원군이 1백년 전에 태어났다면 그에 대한 평가도 지금보다 더 좋았을 겁니다.
솔직히 대원군, 대외정책 빼고는 정권의 핵심에 접근한 자들 중 가장 개혁적인 축에 드는 분이죠.
당시 조선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써는 대원군 만한 시각을 가진 사람이 없겠죠.. 우리야 당시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알기에 대원군을 비난할 수 있지만.. 당시 조선외 세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던 대원군으로써는 그정도 한게 잘한 거죠..
대원군에 대한 시각은 조금 다릅니다. 대원군은 왕권강화에 주력을 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당시 세도정치 청산의 형태가 되어 일부의 순기능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개화를 피하고 쇄국을 정한 것도 외세의 침략에 대한 우려에 앞서 왕조의 강화가 목적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당시의 일어났던 양반제도에 대한 저항과 민권의 보호를 외면하고,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개항여부를 떠나서라도 대원군의 통치는 조선내에서도 시대착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글쎄요 당시 청나라에서 일어났던 일과 제국주의적 침략 행태를 보면 과연 바로 개항을 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입니다
좋은글이네요. 저도 의견에 동감합니다
그리고 또한 일본 근처의 중국이나 러시아 등이 허접했던 운도 있었겠죠 중국이 근대화가 지지부진해서 휘청거리는 때를 잘 만났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또한 근대화가 부진했던 나라죠 러시아는 산업화가 스탈린시대와서야 제대로 이루어집니다 제가 알기로 1930년대에 러시아는 산업국가로 탈피합니다. 일본은 때를 잘만난 덕을 많이 입은 셈이죠 부럽기도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