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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구약성서와 고고학
구약성서와 고고학 1
성서고고학(Biblical Archaeology) 김 성 교수(연대
성서고고학)
1. 성서 고고학의 정의 및 연구 범위.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시대와 성서와 연관된 지역들의 유적과
유물들을 발굴을 통하여 추적 분석하고, 당시의 물질문명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여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재구성해 보려는 학문적인 시도이다. 학문적
관점에서 고고학이 지리적 제한을 받는이상 성서 고고학은 실제로는 1948년에 독립국가로 탄생한 이스라엘의 고고학이다.
시대적 범위에서
성서 고고학은 이스라엘의 성서 시대 즉 초기 청동기 시대 (서기전 3300-2200)부터 신약시대인 서기 1세기 까지의 고고학이 된다.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성서 고고학 연구의 시대적 범위를 팔레스타인에서 농경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던
신석기 시대 (서기전 8500-4300년)부터 신약성서의 배경인 초기 로마시대 (서기전 63-서기 135년)까지로 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성서 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는 주로 이스라엘로 국한되며, 경우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인접국가들인 요르단, 이집트, 레바논, 시리아, 터키,
이라크, 이란, 사이프러스, 그리이스, 및 이탈리아 등으로 확장될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의 주변국들이 아랍국가들로서 더이상 자국의
고고학을 유대인들의 경전인 성서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정치적 배경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국가의 영토가 실질적인 성서 고고학의 지리적
영역으로 여겨진다.
2. 성서 고고학 발굴의 역사
초기의 성서 고고학은 문자 그대로 성서의 여러가지 사건들의
역사성을 현지 탐사 및 발굴을 통하여 확인하고 증명하려 하였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도되기 전에는 현장답사를 통하여 주로 성서의 지명들을 확인하여
지도상에 표기하는 일종의 지리적 탐사작업이 수행되어졌다. 성서 고고학이 성서의 역사적 배경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이상, 성서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하여 재구성된 역사사이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초기의 성서 고고학자들은 주로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리연구에 몰두하여, 성서에 나타나는 고대 도시들을 지리적으로 확인하는 작업을 많이 하였다. 1865년에 영국에서 결성된 “팔레스타인
탐사기금 (Palestine Exploration Fund)”은 성지의 고고학, 풍속, 지리, 자연환경등을 연구하기 위하여 당시의 영국여왕을
후원자로 하여 모금하기 시작 하였다. 이 기금으로 설립된 학회의 목적은 이 연구단체가 발행하는 학회지에 다음과 같이 요약되어 있다. “성서의
쉬운 이해를 위한 성지의 역사, 고고학, 지리학, 관습 등의 정확하고도 체계적인 조사”. 19세기 말부터 일반 고고학의 발굴이 그 이전까지의
도굴과 유물채집의 수준을 벗어나 차츰 과학적인 방법론들이 도입되면서 부터 성서 고고학도 단순히 성서에만 의존하는 것을 탈피하여 고대 이스라엘
지역의 유적지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 고고학의 발굴의 기원은 1890년 페트리(F.M.
Petrie)에 의한 텔 엘헤시(Tell el-Hesi) 발굴로 부터 시작된다. 이 곳을 성서의 라기스로 착각한 페트리는 이집트에서 쌓은 발굴
경험들을 토대로 주거층에 따른 토기 모양들의 변화에 착안하여, 주거층론과 토기 연대추정을 확립하였다. 페트리의 발굴 이후에 계속해서 젤린(E.
Sellin)의 타아낙(Taanach) 발굴(1902-1904), 마칼리스터(R.A.S. Macalister)의 게제르(Gezer)
발굴(1902-1909), 젤린(E. Sellin)과 바찡어(C. Watzinger)의 여리고(Jericho) 발굴(1907-1909), 하바드
대학팀의 사마리아 발굴(1908-1910), 올브라이트(W.F. Albright)의 텔 베이트 미르심(Tell Beit Mirsim)
발굴(1926-1932), 시카고 대학팀의 므깃도(Megiddo) 발굴(1925-1939), 펜실베니아 대학팀의 벳샨(Beth Shean)
발굴(1921-33), 페트리의 텔 엘 아줄(Tell el-Ajjul) 발굴(1930-1934), 스타키(J. Starkey)의
라기스(Lachish) 발굴(1932-1938) 등이 이어지면서 발굴 방법론이 점차 발전하였다. 2차 대전이후 영국적 발굴방법인 소위
휠러-케년(Wheeler-Kenyon)식이 케년(K.M. Kenyon)의 예리코 재발굴(1952-1958)에서 적용되어 텔의 가장자리에 깊은
홈(Trench)을 파서 주로 주거층들의 수직적인(연대적인) 상관관계를 일목요연하게 규명할수 있게 되었으며, 한편으로 라이트(G.E.
Wright)가 중심이 된 미국팀의 세겜 발굴(1956-1964)에서는 텔 전체에 산재한 주요 건축물들의 시대적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수평적
개념의 발굴방법이 강조되었다.
히브리 유니온 대학(Hebrew Union College)의 게제르 재발굴(1964-1973)에서는 앞의
두 방법론을 적절히 조화시켰으며, 특히 삼차원적으로 규정한 특정 위치의 임의의 공간을 “로쿠스(Locus)”로 독립시킴으로써, 발굴된 유적과
유물들을 위상에 따른 체계적 분류 및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1948년 이후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한 발굴은 그때까지 축적된 발굴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많은 유적지에서의 대규모 발굴이 지속되었다. 야딘(Y. Yadin)의 하솔(Hazor) 발굴(1955-1958)과
맛사다(Masada) 발굴(1963-1965)을 통하여 고고학 역사상 처음으로 자원 봉사자들에 의한 발굴이 체계화 되었다. 1994년 현재
이스라엘에서 진행중인 성서와 관련된 주요 발굴들은 다음과 같다.
단(Dan), 가이사랴 빌립보(Banias), 벳세다(Tel Julia),
하솔(Hazor), 도르(Dor), 벳샨(Betn Shean), 므깃도(Megiddo), 이즈르엘(Tel Jezreel), 에크론(Tel
Miqne), 아슈켈론(Ashkelon).
3. 텔(Tell)과 발굴
성서의 배경지역들은 대략 오늘날의 중동지역과 많은
부분이 일치하는데, 이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고대의 유적지들은 독특한 형태의 언덕을 이루고 있으며, 이러한 폐허의 언덕을 아랍어로
텔(Tell)이라고 부른다. 옛날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서 정착하기 시작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장소를 선택하였다.
첫째, 근처에서 쉽게 물을 구할수 있는곳, 둘째,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여 관측과 방어에 유리한 곳, 셋째, 주위에 경작할수 있는 비옥한 들판이
있는 곳, 넷째, 교통의 요충지로서 무역로와 군사로를 통제할수 있는 곳 등이다. 현재 중동 지방에서 흔히 볼수있는 텔은 원래부터 주위보다
현저하게 높았던 언덕에 위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너져서 퇴적된 흙벽돌들의 흙과 건물벽의 기초로 사용되었던 돌들로서 쌓여진 흙언덕을
이루고 있다.
지역적 기후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대부분의 흙벽돌 건물들은 우기의 비바람과 건기의 열풍에 의한 풍화작용으로 오래
견디지 못하고 쉽게 무너져 버린다. 그다음에 다시 집을 짓기 위해서 무너진 흙벽돌의 잔재를 평평하게 고른 다음 주거지 밖에서 돌들을 가져다가
기초를 쌓고, 주위에서 쉽게 만들수 있는 새로운 흙벽돌로서 다시 벽을 올리고 새 집들을 완성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너진 옛 집터에
새로 집을 지을때 바닥에 수북이 쌓인 돌과 흙더미를 치우지 않고 바로 그위에 다시 새집의 기초를 놓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은 마을
밖에서 마을안으로 계속해서 건축자재인 흙과 돌들을 유입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러한 집짓기 과정이 같은 장소에서 수 천년 동안 오래
지속되다 보면 주거지의 지반이 상당히 높아져서 오늘날 볼수있는 텔을 이루는 것이다. 고고학의 기초적인 방법론은 발굴인데, 성서 고고학에서는
특별히 로마시대의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흙언덕인 관계로 독특한 과장을 통해 축적된 텔의 발굴이 주된 방법론이다. 발굴 목적에 부합되는 텔을
선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지표조사(Surface Survey)를 통하여 그 곳의 주거 연대를 확인해야 한다. 다음은 발굴 예산을
확보하고 현장 지도와 분속을 맡을 고고학 전문가들로 구성된 스탭진과 발굴작업에 직접 종사하는 일반인들로 구성된 발굴단을 조직한다. 이스라엘에서의
발굴은 건기(4-10월)에 주로 행해지며 예산에 따라 한달에서 네달까지 다양한데 발굴이 여러해 동안 지속되는 만큼 한해의 수집된 유물들을 충번히
분석할수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를 고려하여 매해의 발굴 기간을 결정한다.
성서 고고학 발굴의 초창기에는 탤을 발굴할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후시대의 주거층의 전체를 한겹씩 벗겨나가는 식으로 파내려 갔지만 한번 발굴된 것은 이미 그 역사적 가치가 사라지게 되고 특별히 경제적인
관점에서 요즘에는 텔의 몇몇 중요한 부분들을 선정하여 수직으로 파내려가서 특정지역의 시대적 연속성을 규명해 보려는 발굴을 주로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텔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성벽 및 성문 지역, 텔의 중심부 약간 높은 곳에 있는 궁전과 신전 및 부속 창고들, 그 외의 일반 주거 지역등을
중점적으로 발굴하게 된다. 고고학적 발굴은 문자 그대로 땅을 파는 작업인데, 조금씩 파내려 가면서 주거층의 흙바닥들을 차례로 확인하며, 건물의
기초들을 보존하고, 그들 사이에 파묻혀 있던 온갖 종류의 유물들을 수집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대부분의 구약시대 도시들의 집들은 돌로 쌓은
기초위에 흙벽돌로써 벽을 올리고 나무가지를 걸쳐서 지붕을 엮었기 때문에 집의 무너진 잔재를 발굴하게 되면 불에 탄 지붕재료, 무너진 흙벽돌의
퇴적층, 집바닥에 널려있던 토기 조각 및 기타 유물들, 그리고 단단하게 눌리어진 집바닥층 등의 네 층으로 구분된다. 이 네 층을 모두 합쳐서
고고학적 용어로 한 주거층(Stratum)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내에서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산악지대에서는 돌을 많이 사용하였고 저지대나
광야지역에서는 흙벽돌을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약간 다른 발굴 방법론이 적용 되기도 한다.
4. 성서 고고학의 연구
방법론
성서 고고학에서 가장 기초적인 방법론인 발굴을 수행하고 나서는 밝혀진 유적과 유물들에 대한 분석 및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고고학에서 기본적으로 묻는 질문들은 첫째, 발굴된 유적과 유물이 “무엇인가”라는 구체적인 묘사에 관한것이고, 둘째는, 출토된 지점과
원래의 출처가 “어디인가”라는 유적과 유물의 지리적 기원에 관한 것이며, 마지막으로 발굴물의 시대적 기원에 관한 “언제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중에서도 특히 마지막의 유물들의 연대추정에 관한 물음은 고고학적 연구의 최종적 결론인 동시에 성격상 매우 복잡한 문제이다. 다행이 같은 지점에서
발견된 역사적 문서 및 기록물들을 통하여 비교적 쉽게 연대추정이 가능하지만,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와는 달리 발굴현장에서 기록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던 이스라엘에서는 자연히 기록물 다음으로 연대추정의 기준이 될만한 특정 유물에 의존할수 밖에 없게 되었다.
성서 고고학의 독특한 세
가지 연구 방법론은 주거층론(Stratigraphy), 유형론(Typology), 그리고 토기 연대추정(Pottery Chronology)이다.
주거층론은 텔 자체가 여러개의 주거층(Stratum)으로 구성되었다는 전제하에 상대적으로 밑의 주거층이 위의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라는 기본적인
연대추정을 가능케 한다. 따라서 특정 유물의 절대 높이가 매우 중요한데, 경사진 곳에서는 절대높이의 비교로서 유적의 상대연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집이 무너져도 원래의 상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돌기초의 위치에 따라 주거층이 결정되는 등의 비교적 복잡한 분석과 판단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유형론이란 주로 발굴에서 수집된 유물에 적용되는 방법론으로서 겉모양이 비슷한 것끼리의 비교를 통해서 유물의 지리적 시대적 기원과 발전
등을 유추하는 분석의 한 방법론이다. 이 유형론은 특별히 토기 분류에 결정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토기 연대추정은 토기의 모양중에서도 특히
아구리 부분(Rim)이 시대적으로 자주 변천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30-50년의 단위까지 세분하여 상대 및 절대 연대의 추정이 가능한 일종의
토기 유형론에 의한 연대측정 방법론이다. 19세기 말이후 지속적으로 축적된 이스라엘 여러 지방의 다양한 시대의 토기들의 유형으로 인해서
오늘날에는 토기 달력이 잘 정리 되어 있기 떄문에 어떤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라도 비교적 정확하게 연대를 추정할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현재
성서 고고학에서의 가장 믿을만한 시대판단의 기준으로서 “비교 토기연대”는 팔레스타인에서의 토기제작 시기 (서기전 6000년)이래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50년 내외의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5. 성서 고고학의 출판물
발굴의 결과는 현장의 유적과 수집된
유물들인데 이들에 대한 보고서의 출판을 통해서 비로소 일반 성서학자들이 발굴결과를 간접적으로 접하게 된다. 따라서 보고서가 출판되지 않은 발굴은
학문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성서 고고학계에서는 규정을 통하여 발굴이 끝난후 정해진 기일내에 최종 보고서를 출판하도록 하고 있다.
발굴이 진행되면서 매일 새롭게 파헤쳐진 유적은 사진촬영과 실측도를 작성하여 단계별로 기록을 유지한다. 수집된 유물들의 경우 토기류는 크기에 따라
1/5 또는 1/10의 축소그림과 사진으로 보관하며 기타 유물도 마찬가지로 사진과 축소그림 또한 물질적인 분석과 유형론적인 비교를 시도한다.
이러한 분석이 끝나면 현장의 유적과 함께 유물에 대한 보고서를 출판하게 되는데, 출판 싯점에 따라 초기 보고서(Preliminary
Report), 중간 보고서(Interim Report), 그리고 최종 보고서(Final Report)로 분류된다.
이중에서 최종
보고서가 가장 중요하며, 여기에는 발굴에 관한 총체적인 평가외에도 주로 건축물들로 구성된 유적의 객관적 묘사 및 해석과 유물들의 분석 결과를
토대로 주거층별 시대에 따른 유적지의 거주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최종 보고서의 부록편에는 유적과 유물의 사진 및 그림, 특히
주거층별로 정리된 토기도판이 수록된다. 성서와 관련된 한 장소를 발굴하여 마지막의 최종 보고서를 출판한후에야 비로소 그 장소에 관한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발굴 보고서와는 별도로 성서 고고학에 관한 저서는 성서와 관련하여 창세기부터 차례대로 해당 귀절들의 고고학적
설명을 시도한 일반서적과 이스라엘의 고고학을 시대별로 정리한 전문서적으로 양분할수 있다.
이 중에서 성서 고고학의 전문서들은 대표적
고고학자들의 저서들로 올브라이트(Albright 1939), 라이트(Wright 1957), 케년(Kenyon 1960),
아하로니(Aharoni 1982), 마자르(Mazar 1990), 벤토르 편(Ben-Tor ed. 1992), 프릿츠(Fritz 1994)등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지금까지 수행된 이스라엘의 발굴 결과들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한 네권의 “성지의 고고학 발굴 백과사전”은 성서고고학의 필수적인
자료집이 되고 있다(Avi-Yonah & Stern eds. 1975-8; Stern ed. 1993).
6. 성서 고고학의
시대구분
일반 고고학계의 시대구분은 전통적으로 고대인들이 사용했던 도구의 재질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그리고 철기 시대로
나뉘어 지는데 성서 고고학에서도 이 구분을 따르고 있으며 단지 신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일종의 금석 병용시대인 동석기 시대를 별도로
구분하고 있다.
◈ 신석기 시대(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4300).
◈ 토기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6000).
◈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6000-4300).
◈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 청동기 시대(Bronze Age: 서기전 3300-1200).
◈ 초기 청동기 시대(Early Bronze
Age: 서기전 3300-2250).
◈ 중기 청동기 시대(Middle Bronze Age: 서기전 2250-1550).
◈ 후기
청동기 시대(Late Bronze Age: 서기전 1550-1200).
◈ 철기 시대(Iron Age: 서기전
1200-586).
서기전 586년의 바빌로니아에 의한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끝나는 철기 시대 이후의 고고학적 시대구분은 당시
팔레스타인을 점령 통치했던 주변 강대국들에 따라 각각 바빌로니아 시대(서기전 586-530), 페르시아 시대(서기전 530-330), 희랍
시대(서기전 330-66), 로마시대(서기전 66-서기 330), 비잔트 시대(서기 330-630) 등으로 분류된다. 일반적으로 성서
고고학에서는 현재 이스라엘 고고학의 시대구분의 기준에 따라 철기 시대까지만 범위로 넣고 있으며, 그 이후 시대는 역사학과의 밀접한 교류에 따른
희랍과 로마시대를 포함하는 독립적인 고전 고고학(Classical Archaeology)으로 연구되고 있다. 고전 고고학의 중심지는 역시 현재의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성서 고고학의 전통적인 시대를 서기전 586년으로 한정시키는 경향도 있다. 좀더 세분된 성서 고고학의 각
시대별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Pre-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8500-6000)
이 시대의 문명은 나투프 문명(Natufian Culture)이라고도 불리우며 소위 팔레스타인에서 처음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여리고)가 건설되었고, 농업혁명으로 인한 정착경제의 발전과 목축업이 시작되었다.
(2) 토기 신석기
시대(Pottery Neolithic Period: 서기전 6000-4300)
이 시대의 문명은 야르묵 문명(Yarmukian
Culture)이라고 불리우며 이 시대에 와서야 비 로소 처음으로 토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토기가 특정지역의 고유한 민족 집단에의해 독 특하게
제작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시대구분 및 인종집단 구분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다.
(3) 동석기 시대(Chalcolithic
Period: 서기전 4300-3300)
이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인류가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금속인 구리가 도구제작에 이용되었으며,
또한 석기도 함께 사용되었다. 트랜스 요르단 사해북부의 텔레일랏 가슐 (Teleilat Ghassul)에서 이 시대의 거주흔적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시대의 문명을 가슐 문명(Ghassulian Culture)이라고도 부른다. 특별히 엔 게디 남쪽의 미슈마르(Mishmar) 동굴에서
발견된 436점의 구리제품은 이 시대에 벌써 고도의 구리제련술이 발달되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4) 초기 청동기 I 시대(EB
I: 서기전 3300-3050)
이 시대는 고대근동 전체에 있어서 역사상 처음으로 문자가 발명된 시기이고 이의 여파 로 정착경제가
가속화되고 다른 지역과의 교류도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특히 이 시대에 이집트와의 문물교류가 이루어졌음이 팔레스타인에서 발견된 이집트 토기를
통하여 밝혀 졌다.
(5) 초기 청동기 II 시대(EB II: 서기전 3050-2700)
이 때부터 본격적인 도시문명이
근동지방 전체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에서는 소위 제 1 왕조가 수립되었으며 이의 영향으로 가나안 지방에서도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 시들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6) 초기 청동기 III 시대(EB III: 서기전 2700-2250)
이 시기는 도시문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대이며, 조직적인 국제무역의 흔적을 토기나 장신구등의 물질문명에서 잘 찾아볼수 있다. 이때 번창했던 도시들로는, 하솔, 벳 예라크,
벳샨, 므깃도, 아이, 예리코, 야르뭇트, 텔 엘헤시, 텔 에라니, 텔 할리프 등을 들수 있다.
(7) 중기 청동기 I 시대(MB
I: 서기전 2250-2000)
서기전 2250년을 전후하여 가나안의 초기 청동기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그 이후 250여년 동안 일종의
쇠퇴기를 맞게 되며 이집트의 제1중간기(제7-11왕조)와도 일치하고 있다. 이 시대는 수직갱 무덤(Shaft Tomb)이라는 독특한 매장양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당시 성행 했던 유목민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8) 중기 청동기 II 시대(MB II: 서기전
2000-1550)
이집트의 중왕국의 발달과 함께 가나안에서도 새로운 도시국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역사시대 전체를 통하여
가나안의 문명이 최고로 발달한 시대였다. 물질문명의 척도인 토기제작면에서도 고속물레(Fast Wheel)를 이용한 고품질의 얇은 토기들이 멀리
이집트까지 수출되었고 파이안스(Faience)와 알라베스터(Alabaster) 용기들도 가나안 자 체의 기술로 대량생산 되었다.
(9) 후기 청동기 I 시대(LB I: 서기전 1550-1400)
이집트의 제15왕조인 힉소스의 추방의 여파로 중기 청동기
도시국가들이 대부분 파괴되 면서 약 100여년의 과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집트 신왕국의 제18왕조의 출범과 함께 이 집트는 역사상 처음으로
시리아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가나안은 이집트의 식민지로 전락 하게 되었다.
(10) 후기 청동기 II 시대(LB II: 서기전
1400-1200)
아마르나(Amarna)시대라 불리우는 서기전 14세기의 가나안은 이집트를 종주국으로 그 지배하에 근처의 마을들을
통치하는 도시국가들이 있었다. 발굴을 통하여 이집트식 신전 및 궁전이 므깃도와 벳샨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이집트가 이 도시들에 총독부를
두고서 가나안을 다스린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11) 철기 I 시대(Iron I: 서기전 1200-1000)
서기전
1200년을 전후해서 고대 근동지방에서 암흑기(Dark Age)라고 불리우는 문명의 위기가 발생하는데 이 쇠퇴기는 그리스에서 발생한
도리아족(Dorians)의 이동에서 부터 비롯되었다. 특별히 지중해 연안을 휩쓴 해양민족의 이동으로 막강했던 헷 제국이 몰락하 고 시리아와
가나안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파괴되면서 여러지역에서 새로운 민족의 유입 이 발생하고, 가나안 지역에서는 주변의 권력공백을 틈탄 약소민족들이 각각
아람, 페니 키아, 블레셋, 암몬, 모압, 에돔등의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목이음 항아리(Collar Rim
Jar)”의 추적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진입 과 주거분포를 추적할수 있게 되었다.
(12) 철기 II 시대(Iron
II: 서기전 1000-586)
다윗왕조의 수립과 함께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명이 발전되었으며, 비교적 구약성서의 역 사서의 기록과 발굴을
통한 주거분포가 일치하는 등 이 시대는 성서 고고학의 중심시대 로 간주된다. 북쪽의 단(Dan)에서부터 남쪽의 가데스 바네아(Kadesh
Barnea)와 쿤틸랏트 아즈루드(Kuntilat Ajrud)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독특한 양식의 요새가 많이 건설되어 서, 이스라엘의 실제적
통치영역과 고유의 물질문명의 지리적 분포를 쉽게 추정할수 있게 되었다.
【참고문헌】
Aharoni, Y.
1982
The Archaeology of the Land of Israel: From Prehistoric Beginnings to
the end of the First Temple Period. tr. by Rainey, A.F.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Albright, W.F. 1939
The Archaeology of Palestine.
Baltimore: Penguin Books.
Avi-Yonah, M. & Stern, E. eds.
1975-8
Encyclopedia of Archaeological Excavations in the Holy Land.
Jerusalem: Israel Exploration Society (4 volu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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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와 고고학 2
성서고고학
김 성 박사는 1958년 태어나 연세대학교 신학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 이스라엘 히브리대학에서 성서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이수하였다. 현재 서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이 자료는 http://saejo.pufs.ac.kr/~amos 에서 제공되었습니다
I.서론
성서는 종교적, 문학적 문서인 동시에 구체적인 역사적 시기동안 특정한 지리적 범위에서 발생한 사건들이 기록된 역사적 문서이기도
하다. 19세기 서양의 합리주의적 역사연구의 결과로 성서의 역사성이 부각되면서, 한편으로는 고고학 연구에 편승하여 당시까지 신앙적 순례의
대상이었던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성서의 땅"이 성서의 지리적 문화적 종교적 배경으로서 새로운 학문적 연구의 장으로 인식되기 시작되었다.
성서에 등장하는 지역과 도시들에 대한 지리적 확인작업으로 정확한 성지지도가 작성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중요 성서도시들이 차례로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성서의 역사적 사건들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발굴에서 출토된 제의관련 유적 및 유물들의 분석을 통하여 성서시대의 다양한
종교현상들도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에 이르렀으며, 성서의 사건들을 현장의 지리적 고고학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역사적
지리학(Historical Geography)의 발달로 성서사건들의 연구는 이젠 더 이상 형이상학적이고도 관념적인 연구방법론으로는 한계에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오늘날 성서 고고학은 성서연구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초학문 분야로 자리잡았고, 성서이해에 새로운 장을 열어 주었으며,
나날이 증가하는 현장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의 축적으로 끊임없는 성서의 재해석이 가능하게 되었다.
성서지리의
중요성
구약성서의 맨 처음 사건인 천지창조와 에덴동산, 노아홍수와 바벨탑 사건 등은 모두가 비슷한 지리적 문화적 여건을 지닌
메소포타미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출애굽 사건과 구약성서의 시가문학, 지혜문학, 특별히 왕정 초기의 행정체제나 물질문명들은 이집트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리라 추정된다. 따라서 구약성서의 역사는 고대 근동의 지리적인 관점에서 "바벨론에서 바벨론으로"와 "이집트에서 이집트로"라는
두 가지 명제로 개관할 수 있다. 즉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들은 서기전 20세기 경 메소포타미아 하류지역의 전통적인 바빌로니아
세력권의 중심도시인 갈대아 우르에서부터 시리아의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오면서 구약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면, 서기전 586년 느브갓네살에 의해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면서 구약역사가 마감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서기전 13세기 모세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것이 선민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시작이었다면, 서기전 608년경 여호아하스왕이 이집트로 잡혀가고(왕하 23:34), 유다왕국이 멸망하면서
"대소 백성과 군대장관들이" 이집트로 망명함으로써(왕하 25:26) 구약의 역사가 일단락 되었다.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소아시아(터키)의
다소(Tarsus) 출생의 바울은 기독교인 박해의 임무로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향하던 중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시리아의 안디옥, 소아시아의
버가, 이고니온, 에베소, 밀레도,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비포, 그리스의 네압볼리, 데살로니가, 아테네, 고린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순교하였다. 따라서 성서에 언급된 지역은 오늘날의 국가들 기준에서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이집트,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이란, 터키, 키프로스, 그리스, 이탈리아 등 모두 11개국에 달한다.
메소포타미아의 지리
1. 지리적
경계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는 희랍어로 "강들 사이에"라는 뜻이며, 북동쪽의 티그리스강과 남서쪽의 유프라테스강
사이의 넓은 평야지대를 지칭한다. 메소포타미아는 북서쪽에는 해발 3000-5000 미터 높은 자그로스(Zagros) 산맥으로 둘러 쌓여져 있고
남서부에는 끝없이 펼쳐진 아라비아 광야에 접하고 있다.
2. 기후와 토양 및 물
메소포타미아는 고산지대와 광야
사이에 위치한 전형적인 아열대 기후를 보이고 있다. 여러 강과 하천들의 끊임없는 범람으로 인한 기름진 퇴적토로 이루어진 경작지가 형성되었으나,
연중 강수량이 150-200 밀리미터 정도로 매우 적기 때문에 연중 흐르는 강물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이용하느냐가 농사의 성패를 좌우하게
되었다.
3. 농업과 목축업
하지만 이러한 자연적 악조건의 극복을 통하여 이곳에서 고등문명이 발생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4. 농업혁명 (서기전 10000-8000)
a) 야생 농작물의 패배
대규모의 수확이 가능하고
식품의 기본 영양분을 제공해 주는 밀과 보리 등의 곡물류는 연중강수량이 500 밀리미터 이상인 지중해변의 산악지대와 자그로스 산맥의 산기슭
지역에서 서기전 1만 년 경 처음으로 야생의 밀과 보리를 계획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위 "농업혁명"의 결과 이 곳의 거주민들은 오랜
기간의 구석기 시대의 유랑 생활을 청산하고 농사를 근거로 하는 정착생활이 시작되었다.
b) 야생동물의
각축화
야생동물들을 가축으로 길들여서 사육하기 시작하였다. 고대근동 지방에서 역사상 최초로 길들여진 가축들은 다음과 같다. 개:
서기전 11000년 경. 염소 : 서기전 8500년 경. 양 : 서기전 80000년 경. 돼지 : 서기전 7500년 경. 소 : 서기전
7000년 경. 고양이 : 서기전 7000년 경. 당나귀 서기전 4000년 경. 말 : 서기전 4000년 경(러시아 남부지역). 낙타 : 서기전
3000년경(아라비아 광야).
c) 농업혁명의 결과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좀 더 효율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일상생활
전반에 걸틴 다음과 같은 개혁들이 이루어졌다.
① 통치권의 확립 : 농사에 필수적인 관개사업은 대규모의 토목공사이기 때문에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고, 그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통치 세력이 요구되었다.
② 계획경제 : 밀이나 보리 농사는 최소한
6개월 이상이 소요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장기적 안목의 파종 및 수확 계획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대량의 곡식을 저장하고 분배하며, 나아가
잉여 농산물을 타 지방으로 수출하기 위한 조직적인 경제활동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5. 지하자원
또한 메소포타미아는
대부분의 지역이 충적지이기 때문에 목재나 석재, 기타 자원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 곳이다. 따라서 일찍부터 자그로스 산악지대와의 무역을 통하여
필요한 나무와 돌 그리고 구리나 주석 같은 금속들을 구입하기 시작하였다.
6. 도시의 발달(서기전
4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의 발달은 농업혁명의 결과 대규모의 관개사업과, 잉여 농산물의 교환 등을 주도하는 세력이
자연스럽게 건설한 요새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고학적 관점의 도시는 성벽으로 둘러 쌓인 곳으로서 성안에는 사람들이 주거지로 사용했던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착지로 규정된다. 도시들은 자연스럽게 근처의 농경지의 실 소유주로서 농사와 목축을 관장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처하며, 농산물의
교환을 주도하는 통치세력을 왕을 중심으로 확립하게 되었고, 나아가 신전과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종교도 성립되었다.
7.
메소포타미아 역사의 시대
1)도시국가(City State) 시대(서기전 4000-3000)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들은
남쪽의 수메르 지역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서기전 4000년경부터 이곳에서는 우룩(Uruk), 라가쉬(Lagash), 우르(Ur),
니푸르(Nippur), 슈루팍(Shuruppak), 키쉬(Kish) 등의 도시들이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2)왕국(Kingdom)
시대(서기전 3000-2000)
이 시대에 들어와서는 여러 도시국가들이 가장 강력한 도시를 중심으로 동맹을 맺어 일종의 왕국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남쪽의 수메르 왕국과 북쪽의 아카드 왕국으로 분류된다.
3)제국(Empire) 시대(서기전
2000-330)
서기전 2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세력권은 좀 더 북쪽으로 확장되었고, 서기전 1800년경부터는 하무라비왕이
바빌론 도시를 중심으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건설하였고 북쪽의 티그리스강 유역에서는 샴시-아다드(Shamshi-adad) 왕이 앗수르 도시를
중심으로 잇시리아 제국을 형성하였다. 이 두 세력이 함께 경쟁하며 발전하다가 서기전 1100년경부터는 앗시리아의 세력이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치하기에 이르렀으며, 서기전 612년에는 신 바빌로니아(Neo-Babylonia)가 그 통치권을 이어받았다. 서기전 539년부터는 이란지역의
페르시아가 이 지역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였으며, 서기전 330년경 마케도니아 출신의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점령함으로써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집트의 지리
1. 나일강
이집트 문명은 지구상에서 가장 긴
강(6700km)인 나일강 유역에서 발생하였다. 3세기전 5세기 희랍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집트를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표현할 만큼 이집트의
생존은 문명은 나일강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왔다. 나일강의 원류는 오늘날 수단의 수도인 카르툼에서 갈라져서 각각 청나일(the Blue
Nile)과 백나일(the White Nile)로 나뉘어진다. 청나일은 우간다, 케냐, 탄자니아의 세 나라에 걸쳐 있는 거대한 빅토리아
호수에서부터, 그리고 백나일은 이디오피아 고산지대의 타나 호수에서부터 각각 발원한다. 나일강은 이 지역의 유일한 수원지이자, 해마다 여름철의
범람으로 새로운 흙들을 실어다 주고, 나아가 유일한 교통로로서 이집트 전역을 통일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나일강은 지중로 흘러
내려오면서 해변에 거대한 삼각주를 형성하여 넓은 농경지에서 일찍부터 농경 및 목축이 가능하게 되었다.
2. 상부 이집트(Upper
Egypt)와 하부 이집트(Lower Egypt)
이집트는 예로부터 나일강 유역을 따라 전체 국토를 양분하였는데, 상부 이집트가
나일강 상류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하부 이집트는 지중해 쪽의 삼각주 지방을 일컫는다. 이 두 지역의 경계는 현재 카이로 남쪽 20km
지점의 멤피스(Memphis)이며, 두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이집트 고왕국 시대부터 멤피스는 정치적 종교적 수도로
발전되었다.
3. 시기구분
⑴ 초기 왕조 시대 (Early Dynastic Period) : 제 1-3왕조 (서기전
2920-2575)
⑵ 고왕국 시대 (Old Kingdom) : 제 4-6왕조 (서기전 2575-2134)
⑶ 제 1 중간기
(First Intermediate Period) : 제 9-11왕조 (서기전 2134-2140)
⑷ 중왕국 시대 (Middle
Kingdom) : 제 11-13왕조 (서기전 2040-1650)
⑸ 제 2 중간기 (Second Intermediate Period) :
제 14-17왕조 (서기전 1650-1540)
⑹ 신왕국 시대 (New Kingdom) : 제 18-20왕조 (서기전
1540-1070)
⑺ 제 3 중간기 (Third Intermediate Period) : 제 21-24왕조 (서기전
1070-712)
⑻ 후시대 (Later Period) : 제 25-30왕조 (서기전 712-332)
⑼ 희랍-로마 시대 (서기전
332 - 서기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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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지리
이스라엘은 전체 국토의 넓이가 3만 8천 평방킬로미터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40퍼센트에 불과한 작은 나라이지만, 이 곳에는
한대지방의 얼음으로 뒤덮인 툰드라 지역을 제외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종류의 지리적 조건들이 존재하는 매우 독특한 나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는
알맞은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셰펠라(Shephelah)의 농경지대, 일년중 절반은 눈에 덮여 있는 헤르몬(Hermon) 고산지대, 그리고
국토의 60 퍼센트를 차지하는 유대 광야, 네겝(Negev)과 아라바(Aravah) 광 야 지대, 여름철에는 건조하고 겨울철에는 비가 오는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는 해안 평야지대 등의 다양한 지리적 모습들을 보여준다.
1. 중앙산악 지대
성서적 사건의
핵심지역은 이스라엘이며 이스라엘 중앙산악지대이다. 중앙산악 지대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의 주된 활동 무대인 세겜의 모레 상수리, 베델,
아이, 살렘, 헤브론의 마므레 상수리, 브엘세바 등이 위치한 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은 출애굽 이후 열 두 지파중 중심적인 에브라임, 므낫세,
베냐민, 유다 지파가 차지한 곳이기도 하다. 사울 왕이 고향이 베냐민 지파 지역의 중심지인 그브아였으며, 다윗은 유다 지파의 한 소읍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헤브론에서 왕이 된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유다왕국의 수도로 삼았다. 솔로몬이 죽은 후 갈라진 북 왕국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중심지는 비옥한 골짜기 평야에 자리잡은 세겜이었으며, 그 후 디르사와 사마리아로 수도가 이전되었다. 역사적 아이러니 때문에 오늘날 중앙산악
지대의 대부분은 소위 "요단강 서안"이라 불리우는 지역으로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2. 해안평야
지대
고대로부터 해안평야를 지배하는 세력이 결국 전체 가나안 땅의 주인 노릇을 하였다. 지중해 해안 평야는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시리아, 나아가 힛타이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국제 무역로가 통과하는 곳이어서, 예로부터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자주
발생하였다.
3. 갈릴리 산악 지대
갈릴리 산악지대는 이스라엘에서 숲이 가장 많이 우거진 지역이다. 지중해 연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 작은 상수리 나무와 소나무 숲이 우거졌으며, 평균 해발 600-800 미터의 고지에다 연간 강수량도 800-1000
밀리미터로 넉넉한 편이어서 목축을 주로하고 산 사이의 골짜기 평야에는 대규모의 밀, 보리 농사도 가능한 지역이다. 특별히 갈릴리 산악 지대의
남부에는 지중해에서부터 요단 계곡에 이르는 이즈르엘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이스라엘 최대의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이 곳이야말로 샘과 하천의
물이 풍부하고 연간 기온도 온화해서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이다.
4. 요단계곡 지대
요단 계곡은
지구상에서 가장 긴 골짜기인 시리아-아프리카 대단층(Syro-African Great Rift)의 일부로서 요단강의 근원인 단(Dan)에서부터
상부 요단강을 지나 해저 210 미터의 갈릴리 호수, 그리고 하부 요단강을 따라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지대인 해저 400 미터의 사해에 이르는
약 200 킬로미터 길이의 저지대이다.
5. 요단 건너편(트랜스 요르단)
요단 건너편은 평균 해발 1000 미터
이상의 고원지대로 형성 되어 있다. 이들 지역은 북쪽으로부터 차례대로 골란, 길르앗, 암몬, 에돔 지역으로 구분되며, 이중에서 암몬, 모압,
에돔은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적대 세력들이었다.
6. 남부 광야 지대
이스라엘 전체의 약 70 펴센트를
차지하는 광야는 일년 중 거의 비가 내리지 않아서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에 부적합한 땅이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거쳐간 곳이 바로 이
지역이었고, 주변의 유목민들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저지하기 위하여 서기전 950년경 솔로몬 왕은 이 지역에 체계적인 요새들을 새로이 건설하였다.
대표적인 요새들로는 가데스 바네아, 에시온 게벨, 아라드, 브엘세바, 타마르 등이 있다.
출저:감리교 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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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와 고고학 3
성서 고고학이란 무엇인가?
박 준 서 (연세대학교
교수/구약학)
20세기가 낳은 위대한 구약학자요, 예루살렘 성서 연구소(?ole Biblique)에서 오랫동안 소장을 역임한 R.
드보는 성서 고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 고고학이 제공하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는 성서 연구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 말은 성서 고고학이 오늘날 성서 연구에 미치는 영향과 공헌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9세기 말 성서 고고학이 과학적 학문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래로 이 분야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된 결과, 성서를 새로운 빛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1. 성서 고고학의
정의
성서 고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현대 성서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올브라이트(W.F. Albright)는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성서 고고학이란 고고학적 연구로 조명된 성서학이다." 이 말은 성서 고고학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탐구하는 성서 연구의 한 분야라는 말이다. 성서 고고학의 이러한 학문적 성격은 지금까지의 성서 고고학자들이 거의가 다 성서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올브라이트의 제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성서 고고학 교수였던 라이트(G.E. Wright)도 같은 입장에서 성서 고고학을
정의하였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직간접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고고학적 사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성서 고고학은 성서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 고고학과는 구분된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의 목적은 성서의 기록들을 단순히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성서의 많은 기록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증명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외에도 <성서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맥락 안에서 좀 더 정확하게 이 해할 수 있게 해주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2. 성서 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역사는 진공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폭 넓은 고대 근동 세계의 역사,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왔다. 따라서 고대 근동 세계 전체가 성서 고고학의 연구 대상이다. 그러나 성서 고고학 연구의 초점이 되는 지역은 성지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팔레스티나)은 성서에 기록된 역사가 전개된 무대요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 고고학의 지리적 중심은
"성지 고고학"(Archaeology of the Holy Land 혹은 Palestinian Archaeology)이다.
다음으로 성서
고고학의 역사를 간략하게 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하기로 하고, 성서 이해에 도움을 준 성서 고고학의 연구 결과 몇 가지를
소개하겠다(성서 고고학의 역사에 대해서는 본지의 별도 기사에서 김성 교수가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참고 바란다 - 편집자 주).
3.
성서 고고학과 성서 연구
오늘날 성서 고고학의 연구 결과는 성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성서 고고학은 성서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증" 해주는 경우도 있고, "보충" 해주는 경우도 있다. 이 중에서 구약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니 하산의 벽화
구약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모습은 어떠했
을까?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이집트 카이로의 남방 250km 지점에 있는 바니
하산에서 발견된 벽화다. 이 벽화의 연대는 B.C. 1900년경 으로, 이스라엘 조상들의 연대와 매우 비슷하다. 내용은, 37명의 가나안
사람들이 고대 애굽 여자 들에게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서 애굽으로 가는 장면이다. 선두에는 검은 피부의 애굽인이 이들을 인도하고 있는데,
찬란한 채색옷을 입고 있으며(창 37:3의 요셉이 입었던 '채색옷'을 연상시킨다 ), 나귀는 물건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고학적으로
B.C. 1900년경에는 아직 말과 낙타의 사용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남자는 모두 수염을 기르고 활, 창, 도끼와 같은 무기를 들고 신발은
샌들을 신고 있다. 여자들은 모두 독특한 머리형을 하고 있으며, 남자와 다른 신발을 신고 있다. 또한 물담는 가죽 부대, 악기, 가축(염소와
산양) 등도 보인다.
(2) 마르닙타 왕의 전승기념비
1896년 애굽의 데베(Thebes)에서 마르닙타 왕(Marniptah 혹은
Merneptah, B.C. 1224-11)의 전승기념비가 발견되었다. 이 전승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스라엘은 황무하게 되었다.
그의 후손은 멸절되었다." 구약 이외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말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이다.
(3) 이스라엘의 수구(水口)
예루살렘은
천연의 요새로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에서 정착생 활을 한 이후에도 200년 이상 예루살렘만은 정복하지 못한 채,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족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자 곧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 구약 의 기록을 보면
다윗왕은 부하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수구"를 타고 올라가서 그 성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였다 (삼하 5:8). 예루살렘의 수구 발견은 지금부터 약
100년전에 영국인 C. 워런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국의 <팔레스티나 발굴 기금>은 1867년 영국군 장교 워런을 성지에 파견하였다.
워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탐색작업을 하던 중 놀랄만한 발견을 하였다. 히스기야 터널을 탐사하던 중에 암벽을 뚫어서 만든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으로 된 수직 터널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하로 뚫은 이 수직 터널을 통해서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길어 올린 장치였다. 기혼샘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水源)이었다. 그러나 기혼샘이 성밖에 있었기 때문에 적에게 성이 포위당했을 경우에는
물을 길으러 밖으로 나올 수 없었으므로 주민들은 성안에서 지하 터널을 파서 성밖으로 나오지 않고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수구인데, 다윗왕의 부하들은 이 수구를 타고 올라가 예루살렘을 정복한 것이다. 이 수구를 발견한 사람을 기념해서 "워런 수구" (Warren
Shaft)라고 부른다. 이런 방법은 하솔, 게젤, 므깃도, 기브온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4) 히스기야 터널
B.C. 701년경
유다왕 히스기야는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려고 할 때, 급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기혼샘으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기혼샘의 물을 예루살렘 성안으로 끌어들였다(왕하 20:20). 이것을 "히스기야 터널" 혹은 "실로암 터널"이라고 부른다. 이 터널은 총 길이
535m로서 완전한 암석지대를 파서 만든 터널이다. 기혼샘의 위치는 해발 636m이며, 이 물이 예루살렘성 안으로 흘러들어 생겨난 실로암못의
높이는 해발 634m이다. 즉 2m의 고저차로 535m의 지하 터널을 통해서 기혼샘에서 발원한 물이 완만하게 흐르도록 만든 것이다. 이 터널을
만든 과정은 1880년 실로암못 근처의 돌벽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서 밝혀졌는데, <실로암 기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굴이
뚫린 과정은 아래와 같다. 양편에서 중심부로 향해 파 나가다가 중간지점에 거의 도달해서 3규빗쯤 남았을 때, 우리들은 반대쪽에서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굴이 마주 만났을 때, 사람들은 돌을 깎아나갔고, 돌 깎는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혔다. 그리고
샘(기혼샘)으로부터 물은 저수지(실로암)를 향해서 1200 규빗 거리를 흘러들어갔다."
그런데 히스기야 터널에 관해서는 아직도 남아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이 터널이 직선이 아 니고, 대략 S자형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중간 지점에서 만났을 때, 양편의 고저차는
불과 30cm 미만의 오차가 있었을 뿐이었다. 왜 직선으로 파지 않고 복잡하게 곡선으로 만들었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분명하게 알
수가 없다. 일설에 의하면 근처에 있던 유대왕들의 무덤을 피하여 파기 위해서였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5) 히스기야
성벽
히스기야왕은 터널을 파서 예루살렘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성벽을 새로 쌓아 방위를 견고히 하기도 하였다.
히스기야왕이 쌓은 이 성벽은 1970년대 이스라엘 고고학자 N.아바가드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목이 7m나 되는 철통 같은 성벽이었는데, 흥미있는
사실은 기존의 가옥을 허물고, 민가 지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굴로 히스기야왕이 '가옥을 헐어 성벽을 세웠다'고 기록한 이사야
22장의 말씀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6) 기브온의 못
예루살렘에서 약 3km 북서쪽에 있는 기브온에 큰 못이 있었다. 이
못가에서 다윗의 장군 요압과 이스보셋(사울왕의 아들)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접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 못은 1956-57년 J.프리처드를
단장으로 한 미국팀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지름 11m 깊이 25m의 원형으로 파졌다. 그런데 발굴 결과,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하 부분에 있는 샘물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통로임이 판명되었다. 층계를 내려가서 밑바닥 부분에 이르면, 더 밑으로 내려가는
작은 입구가 있고, 입구를 통과하여 내려가면 암반을 파서 만든 경사진 터널을 만난다. 79개의 계단을 밟고 이 지하터널을 내려가면, 지하 25m
위치에 맑은 샘물이 괸 지점에 도달한다. 이 못도 "예루살렘의 수구"와 마찬가지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기브온 성 안에서 지하통로를 통해서 물을
긷기 위해 만든 것이다.
(7) 모압 기념비
1868년 모압 지방(현재의 요르단)의 디본에서 검은돌 위에 34줄로 기록된 기념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기념비는 모압 왕 메사(B.C. 830년경)가 자기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내용
중에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이 모압 지방을 정복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구약에 기록된 오므리 왕의 업적에는 그러한 사실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왕상16:23-27) 모압기념비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은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정치적 업적을 많이 남긴 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8) 앗수르 왕 살만에셀 업적비
1846년 영국인 H. 레이야드가 앗수르 제국의 중심지의 하나였던
갈라(Calah)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념비를 발굴하였다. 그 내용은 살만에셀 3세(B.C. 859-825)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독특한 형태로
된 검은 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업적비의 특이한 형태 때문에 (살만에셀의 오벨리스크)라고 부 르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예후 왕(B.C. 842-815)이 앗수르 제국을 방문하여, 살만에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새겨져있는 것이다. 이 예후 왕의 모습은 이스라엘 왕 중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유 일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 2계명 말씀을 근거해서 왕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음). 그런데 이 살만에셀 왕의 업적비에는 예후 왕이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쓰여있다. 오므리 왕조를 혁명으로 거꾸러뜨리고 왕이 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서 오므리 왕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 산헤립 왕 업적비
B.C. 701년
유다의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왕은 유다왕국을 참략하여 유다의 모든 성 읍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앗수르 군대에게 공격을 당한 예루살렘의 운명은 백척간두의 상황이었다(왕하 18-19장). 이 때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였다(사 36-37장). 그러나 히스기야왕은 금 30 달란트(1달란트는 약 34kg), 은 300달란트를 앗수르
왕에게 조공으로 바치고 굴복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1850년대 초 H.레이야드가 니느웨성의 산헤립왕 궁전에서 발굴한 기념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히스기야에 대해서 말하면, 그 유다인은 내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산헤립 왕)는
유다의 46개의 견고한 성읍들과 작은 마을들을 함락시켰다. 나는 20만 150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고, 말 나귀 낙타 소 양을 빼앗았다.
그는(히스기야) 그의 왕궁이 있는 성, 예루살렘에 새장의 새처럼 갇혀 있었다. 나는 포위하여 아무도 그 성을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히스기야는
나의 위엄에 기가 질 렸다. 그가 예루살렘을 수비하려고 모은 장병들은 우리와 감히 싸우지도 못하였다. 그는 내게 금 30달란트, 은
800달란트, 붉은 빛이 나는 석재, 상아로 장식한 침상과 의자, 또 그의 딸들과 궁전의 여자들 및 노래하는 남녀를 대신을 시켜 조공품으로
니느웨로 보내고 내게 굴복하였다."
(10) 라기스의 오스크라카
오스트라카 (단수는 오스트라콘)란 깨진 토기 조각에 글씨를 써
기록한 것을 말한다. 라기스는 유다 왕국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그런데, 1935년 라기스의 발굴에서 불탄 성문 옆 잿더미
부분에서 21개의 오스트라카를 발굴하였다. 그 연대는 588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라기스를 불질러 파괴하기 직전이었다. 그 내용은 라기스
근처의 경비초소의 책임을 맡은 호사야가 라기스의 주둔군 사령관 야오스에게 보낸 편지들로 거기에 보면, 당시 유다 왕국의 군사령관 고니야가 애굽에
내려갔다는 구절이 있다. 바벨론 군대가 침공한 위급한 상황에서 유다의 군사령관이 애굽을 방문했다는 것은 애굽에 군사원조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겔 17:15비교). 또 다른 오스트라콘에는 "우리들은 라기스의 신호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세가의 신호는 이제 끊어졌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진군하는 바벨론 군대의 말발굽 아래 유다의 도시들이 하나씩 하나씩 함락당하는 모양을 잘 나타내고 있다.
(11)
바벨론 제국 역대기
열왕기하 24장의 기록을 보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은 B.C. 59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여호야긴왕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아가고, 그 대신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발굴된 <바벨론제국 역대기>에 보면
<열왕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B.C. 605년 느부갓네살이 바벨론 왕으로 등극하고, B.C.
597년 유다 왕국을 정복하여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역사적 기록의 정확성이 고대 근동의 다른 기 록을 통하여 확인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2) 여호야긴 왕의 포로생활
열왕기의 기록은 B.C. 597년 바벨론에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포로생활의
기록으로 끝을 맺고 있다. "저의(여호야긴 왕) 쓸 것은 날마다 왕(바벨론 왕)에게서 받는 정수(定數)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왕하 25:30). 이 내용은 여호야긴 왕이 바벨론 왕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공급받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고학자 R. 콜데위는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벨론을 발굴하였고, 그는 이 발굴작업에서 바벨론 제국 왕실문서 보관소를 찾아냈다. 거기에서 많은 토판문서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포로로 잡아온 왕족과 귀족들에게 기름과 보리를 나누어 준 기록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식량 배급
명단에는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다섯 아들에게 물자를 배급해 준 기록도 들어 있다. 이러한 바벨론의 기록은 포로생활을 한 여호야긴왕의 상황을
실감나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4. 성서 고고학의 현황과 전망
성서 고고학은 약 100년 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동안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성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는 20군데 이상의 장
소에서 발굴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 발굴작업에는 전 세계로부터 모여든 "자원 발굴 자"들이 참여하여 고고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땅에는 적어도 6000개 이상의 장소에서 고고학적 예비조사가 이루어져서 발굴 가치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그 중에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곳은 약 200개소(약3%)정도이다. 200개소의 발굴지 중에서도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진행된 곳은 불과 30군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0.5%). 이러한 상황에 대해 P. 랩은 "성지고고학은 이제 유아기 단계는 넘어섰으나 아직 유년기는 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 연구가 이루어진 성지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에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것이
대단히 많이 남아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성서 고고학이 연구해야 할 분야가 무궁무진하게 남아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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