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7년
일선군의 홍수
동쪽 토함산의 산불이 3년 후 저절로 꺼짐
흥륜사 대문이 저절로 무너짐
북쪽 바위의 산이 무너져 쌀이 됨.
658년
"하슬라는 지역적으로 말갈과 연이어 있으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경을 폐지하여 주로 만들고, 도독을 두어 그 곳을 수비하게 하였다. 또한 실직을 북진으로 만들었다."
659년
백제가 무서워 당에 군사 요청을 하고 뒤이어 이미 세상을 떠났던 장춘과 파랑이 귀신이 되어 나타나 내년 5월에 군사가 도달할 것임을 알려줌
660년
당군 배 1천척으로 13만 군대를 상륙시킴
태자 김법민에게 배 1백척을 주어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이하게 함
김유신, 품일, 흠춘 등에게 5만의 병력으로 당군을 돕도록 함
계백과 충상, 상영등의 세 곳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백제군과 싸워 힘겹게 승리함.(병력의 수는 나와있지 않음)
""정방은 유신 등이 늦게 왔다는 이유로 군문에서 신라 독군 김문영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유신은 군사들 앞에서 “대장군은 황산 전투를 보지도 않고, 늦게 온 것을 죄주려 하는구려. 나는 죄도 없이 치욕을 당할 수는 없으니, 결단코 먼저 당 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쳐부시겠소.”라고 말하고, 곧 군문에서 도끼를 집어 들었다. 그의 노기 서린 머리털이 뻗뻗히 서고 허리에 찼던 보검이 칼집에서 저절로 튀어 나왔다. 정방의 우장 동보량은 발을 구르며 “신라 군사들의 마음이 장차 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리되자 정방이 문영의 죄를 문제삼지 않았다.""
10월 9일 태종왕이 직접 태자와 함께 이례성을 공격해 함락. 이에 20여성이 두려워 따라서 항복.
30일. 남중령을 공격해 1천 이상의 목을 벰
11월, 칠중성이 공격을 당해 군주 필부가 전사.
5일, 왕이 직접 왕흥사 잠성을 공격해 함락시키며 7백명을 벰.
22일. 수도로 돌아와 전공을 논함.
661년
2월, 백제와의 전쟁에서 고전.
5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술천과 북한산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퇴각.
이는 태종 무열왕 시기의 기록입니다.
문무왕 것도 인용해 보려 했으나 너무 길어져 그만 뒀긴 하지만........
일단 가장 의문인 것은 계백이 이끈 5천 결사대입니다.
"그가 황산벌에 이르러 세 개의 진영을 치고 있다가 신라 군사를 만나 곧 전투를 시작하려 할 때(중략)"
백제 본기에선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후 이 짤막한 황산벌 전투 이후에, 신라본기를 보면,
"전투에서 백제 군사들은 대패하였고, 계백도 전사하였으며, 좌평 충상, 상영 등 2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좌평은 계백의 관직인 달솔보다 높은 것으로써 왜 하필이면 황산벌 전투 이후에 달솔이란 사람이 이끄는 전투에서 붙잡혔을까요??
상식적으로 높은 직책의 사람이 군사 지휘권도 더 높아야 함에도 왜 계백이 이끄는 군대에서 좌평이 나왔을까요?
물론 의자왕이 좌평이란 관직을 남발하긴 했으나 결국에 어찌되었건 높은 관직이긴 합니다.
거기다가 상영은 의자왕에게 직접 당시 전투에 대한 계책을 제시한 인물로서 군권 또한 상당한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기록으로선 신라와 맞선건 계백의 5천 결사대 같긴 하지만 좀 의문이 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쨌건....
신라가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빼앗겼음에도 칠중성을 보유하고 있었다는건 그 북쪽 영토가 강원도 일대와 함께 경기도 북부를 이미 태종왕 이전에 넘어선 것이 아니었나.... 싶구요.
북한산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경기도 일대가 이미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지요.......
의자왕 시기에 신라를 많이 괴롭혀 신라가 아주 큰 위기를 맞았다곤 하지만, 실제 백제본기를 참고해 보더라도 두 국가는 "호각세"를 이루었지 신라의 일방적 패배는 아니었습니다.
신라 선덕왕 시기에도 고구려와 연합한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려 했음에도 신라의 당에 대한 원군 요청에 이를 그만둔건 분명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테고 백제로선 신라를 혼자서 제압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의자왕
2년 ; 대야성 함락.
3년 ; 당항성 공격 도중 중단
4년 ; 김유신에게 7개 성을 빼앗김
5년 ; 7개성을 신라에게서 빼앗지만 이내 신라의 침공을 받음
7년 ; 3천 기병으로 신라를 공격했다가 대패 당함
8년 ; 신라의 서쪽 10개 성을 빼앗음. 옥문곡으로 진군했다가 김유신에게 대패함.
9년 ; 신라의 7개 성을 빼앗으려 했으나 실패
19년 ; 신라를 공격하나 결과는 알 수 없음
신라가 소국을 칭했던건 아마도 동아시아에서 고립될 상황에 직면하자 어느 정도 엄살을 부린 면도 없잖아 있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라가 당시에 실제로 소국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그 유민을 돕고 이후 당나라와 피터지게 백제 영토를 놔두고 싸우는 시기에 보여준 저력은 과연 "소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결정적 대목이라 보여지는데요.
그렇다면... 과연 당시 신라의 영토와 국력은 어느 정도가 되었을까요??? 최대 동원 병력이 5만뿐이 안되는 쪼끄만 국가인데 운이 좋고당나라 똥구멍을 살살살 잘 긁어줘서 운좋게 살아남은 국가가 정말 신라일까요???
첫댓글계백과 비슷한 경우로는 당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때 봉상청에게 주어진 낙양이 안록산 군에게 패한 후, 당 현종이 급히 자신의 여섯번째 아들인 태자 이완을 정토원수로 삼고, 고선지를 토적부원수로 임명했습니다만, 진압군에게 주어진 군대는 고선지가 모두 이끌었습니다.
대야성함락전 40여성 함락시켰죠. 게다가 대야성까지 함락된 상황이면 의자왕초에 신라피해가 엄청났을겁니다. 이후 그나마 호각지세를 보인건 오로지 김유신의 활약이 컸지요. 그나마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결정적으로 30여개 성을 빼앗겼으니, 전체적으로 보자면 결국 신라는 백제에 압도당했다고 봄이 맞을듯 싶네요.
백제는 6세기에 신라에 의해 왕이 죽임을 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었지만, 이 시기를 제외하면 크게 신라에게 눌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 이전 백제와 신라의 국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지요. 백제는 일찍이 4세기부터 고구려와 동방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무왕, 의자왕 대에 와서도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합니다.
그에 비해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모두 적으로 두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멀리 있는 당나라와 적극적으로 동맹을 맺으려 한 것도 작금의 상황을 국가적 위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제에게는 적당히 신라를 압박하면 될 문제였지만, 신라로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황이 달랐으니 이 두 나라가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셈이지요.
첫댓글 계백과 비슷한 경우로는 당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때 봉상청에게 주어진 낙양이 안록산 군에게 패한 후, 당 현종이 급히 자신의 여섯번째 아들인 태자 이완을 정토원수로 삼고, 고선지를 토적부원수로 임명했습니다만, 진압군에게 주어진 군대는 고선지가 모두 이끌었습니다.
음, 저도 이 부분이 의문인데 도대체가 북방에서만 33개의 성을 함락당학고도 상당히 북쪽에 위치한 칠중성을 어떻게 보유하고 있었던 걸까요? 그렇다고 제 눈에는 신라가 그렇게 강대국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죠.
대야성함락전 40여성 함락시켰죠. 게다가 대야성까지 함락된 상황이면 의자왕초에 신라피해가 엄청났을겁니다. 이후 그나마 호각지세를 보인건 오로지 김유신의 활약이 컸지요. 그나마 주거니받거니 하다가 결정적으로 30여개 성을 빼앗겼으니, 전체적으로 보자면 결국 신라는 백제에 압도당했다고 봄이 맞을듯 싶네요.
그런데 궁금한 것이 이 때 뺏은 신라 북방 30여성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일부는 고구려가 차치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당항성 공격은 계획에 그친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만약 고구려와 백제가 공동작전을 펼친다면 고구려는 상황적으로 수군을 이용했어야 할듯 싶은데 정권을 잡은 직후라 쉽지 않았을듯...
그건 아니고 공동작전은 있었는데 신라가 첩보를 입수하고 바로 당나라에 가서 구걸을 하니까 2개월 정도 공격했다가 성과도 없고해서 물러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 전투는 안일어났고 신라가 먼저 당에 원군을 요청하니 바로 계획 파기해 버렸습니다.
백제는 6세기에 신라에 의해 왕이 죽임을 당하는 등의 수모를 겪었지만, 이 시기를 제외하면 크게 신라에게 눌렸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 이전 백제와 신라의 국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지요. 백제는 일찍이 4세기부터 고구려와 동방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나라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무왕, 의자왕 대에 와서도 신라를 지속적으로 압박합니다.
그런 백제였기에 신라를 굳이 멸망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멸망시킨다면 백제에겐 더이상 목표물이 존재치 않아 고구려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셈입니다. 실상 고구려도 신라가 망하기보다는 백제와 대치하는 상황이 지속되기를 원했을 겁니다.
그에 비해 신라는 고구려, 백제를 모두 적으로 두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들이 멀리 있는 당나라와 적극적으로 동맹을 맺으려 한 것도 작금의 상황을 국가적 위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백제에게는 적당히 신라를 압박하면 될 문제였지만, 신라로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황이 달랐으니 이 두 나라가 전쟁에 임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한 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