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2년 월간 ‘비정규노동’ 9월호에 게재된 같은 제목의 글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3년이 지났으나 노동계급의 삶은 갈수록 각박해지고 있고, 변혁운동의 대응 또한 크게 진전하지 못하고 있어 지난 글을 수정․보완하여 되새겨보고자 한다.
임성규(sungyulim@hanmail.net)
SF로부터의 단상
“21세기 초, 타이렐 주식회사는 [레플러컨트(Replicant)]로 불리는, 인간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진화 로봇 넥서스(Nexus) -일본 도요타자동차의 Lexus가 연상되지 않은가? 2002년에 발표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는 실제 미래자동차 Lexus가 등장한다-를 개발했다. [넥서스 6세대] 레플러컨트들은 그것을 개발한 유전자 엔지니어들보다 우월한 힘과 능력을 가졌고, 지능도 최소한 비슷하였다. 레플러컨트들은 위험한 다른 행성의 개발과 식민지화에 필요한 노동자로 이용되었다. 그러던 중 반란을 일으켜 지구 귀환이 전면 금지되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금지된 존재였으며 발견 즉시 사살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를 집행하는 특수 경찰을 [블레이드 러너]라 불렀다. 레플러컨트를 사살하는 일은 ‘처형(execution)’이라 불리지 않았다. ‘제거(retirement)’라 불렸다.”
이러한 자막이 검은 스크린을 소리 없이 밟고 올라가면서 영화 [서기 2019년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는 시작된다. 음울한 거대도시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2019년 11월, 로스엔젤레스” 시대와 공간을 설명한다. 가스 분출구인지 굴뚝인지 모를 높은 탑에서 불기둥이 폭음을 내며 치솟고, 고층빌딩이 빼곡한 하늘에는 자동차가 날아다니고, 중국풍의 배경음악 속에 제약회사의 상품을 선전하는 일본여자의 갖은 교태가 거대한 옥외 광고판을 가득 메운다.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300층 이상의 고층빌딩들, 타이렐사(社)는 그 중 더욱 돋보인다. 21세기 과학의 힘과 자본주의, 로스앤젤레스의 하늘을 지배하는 것은 동양(중국과 일본)의 자본이다. 땅으로 내려가 보자.
“우주 식민지가 당신을 부릅니다.”
새로운 인생과 성공의 기회를 잡으라는, 시그마 주식회사의 우주이민자 모집 광고방송이 메아리로 떠다니는 가운데, 더럽고 초라하고 혼란스럽고 혼탁한 거리가 펼쳐진다. 드높은 창공과 지상의 모습이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암울하고 절망적인 미래를 암시하는 장면이지만 자본주의 현실을 웅변하는 듯하다. 과학과 인간의 삶, 자본주의와 삶의 질, 상류사회와 민중의 삶이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영화는 레플러컨트(이하 ‘복제인간’)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복제인간들이 우주선을 탈취하여 금지된 지구로 귀환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전직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해리슨 포드 分)가 나서는데…
그렇다면 ‘처형’되리라는 것을, 아니 ‘제거’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애써 지구로 귀환한 까닭은 뭘까. 복제인간은 누군가의 기억이 이식되어 천하없어도 자신을 ‘인간’으로 믿는다. 그러나 살다보면 어느새 인간이 아닌 복제인간임을 깨닫게 되는데, 그 기간이 4년쯤 걸린다. 복제인간의 ‘고장’이란 바로 자아인식인 것이다 넥서스6 복제인간들은 고장 날 것에 대비하여 수명을 4년으로 제한하는 장치를 내장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목숨 걸고 지구로 잠입한 이유다. 좀더 오래 살고 싶어서, 자신들의 ‘창조주’인 엘튼 타이렐(조 터클 分) 회장을 찾아 수명을 연장 받기 위해서다.
데커드가 제거해야 할 복제인간들은 모두 4명이다. 군용접대부, 전투용 잡역부, 암살용, 우주식민지 방위에 투입했던 A급 전투용 등. 데커드는 그것들을 하나 하나 차례로 제거해 나간다. 그것들은 인간을 향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웬 전태일 열사?)라고 말하지만, 그리고 제조회사 타이렐사가 내건 슬로건처럼 어쩌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일지 모르지만, 어쨌든 인간보다 강인한 힘과 인간에 뒤지지 않는 두뇌에 인간보다 뛰어난 순발력까지 갖춰 인간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부터는 인간에게 대단히 위험한 존재인 것이다. 데커드가 제아무리 탁월한 복제인간 사냥꾼일지라도 그것들을 처치하는 일이 만만할 리 없다.
과연, 전혀 무방비 상태로 데커드를 맞이하는 비교적 손쉬운 상대 ‘조라(암살용 복제인간)’를 제거하는 데만도 세 발의 총알을 써야 한다. 정체가 들통 나 도망치는 그녀의 등을 향해 빵! 총을 맞고도 사력을 다해 뛰어가는 부상자를 향해 빵! 피를 흥건히 흘리며 쓰러진 그녀에게 또 빵! 그리고 그 직후 전투용 잡역부인 레온과 조우하는데, 데커드는 힘과 순발력에 밀려 곧 죽음과 맞닥뜨린다.
“자, 이제 죽을 시간이야. 죽는 게 무섭지? 죽지 않고 오래 살고 싶지?”
복제인간 레온이 인간 데커드에게 묻는다. 레온 자신이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기도 하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도 복제인간에게도 동일한 것이며, 법으로 금지한다고 억누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말을 복제인간이 인간을 향해 내뱉었으니, 인간에 대한 조롱 치고 얼마나 통렬한 것인가!
데커드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데커드가 죽게 된다 할지라도 아직 이르다. 그래서 레온의 이마에 바람구멍이 먼저 뚫린다. ‘레이철’이라는 여성이 나타나 데커드를 구한 것이다. 그러나 ‘레이첼’ 또한 데커드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타이렐 회장의 여비서로 타이렐사 밖으로 나가서는 절대 안 되는, 회사 밖에서의 활동이 금지된 복제인간이다. 그녀가 데커드를 구했다는 것은 그녀 역시 제거 대상 명단에 올랐음을 의미한다. 제아무리 정의로운 일이라도 인조인간에게 주어진 임무를 넘어선 ‘주제넘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커드가 이렇게 묻는다.
“무섭지? 몹시 떨리지? 나도 그래, 일할 때마다.”
“일이라구요?”
레이첼의 반문은 데커드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의 ‘일(business)’이란 게 바로 복제인간을 제거하는 것이니까.
“저도 죽일 건가요?”
레이첼이 덧붙인다.
노동의 미래
영화 [서기 2019년 블레이드 러너]은 미국의 SF작가 필립 K. 딕이 1968년에 발표한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자양을 꿈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바탕으로 1982년에 제작되었다. 딕이 이 작품을 발표한 1968년 당시로는 50년 후 세상을 상상한 것이지만, 지금 시점(2005년)에서는 그다지 멀지 않은 14년 후의 미래가 된다. 그래서 어쩌면 딕의 상상이 빗나간 공상으로 치부되고 말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던 20세기 중반의 14년과 앞으로의 14년은 결코 같은 세월일 수 없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 단위시간에 일어나는 변화와 발전이 질적으로 양적으로 예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시간의 흐름도 빨라졌다. 14년의 시간이 어쩌면 100년 전 14개월보다 빨리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아니 사람에 따라서는 14년의 흐름이 14일간처럼 느낄지도 모른다. 게다가 인공지능로봇과 유전공학이 접목된다면? 백화점, 호텔, 병원, 철도․지하철역 입구나 엘리베이터 등에 안내원로봇이 상용화될 날도 멀지 않았다. 일본 혼다의 ‘아시모’에 이어 인공지능 로봇의 진화는 피부를 만지면 반응하는 아름답고 섹시한 백화점 안내원로봇 상용화 단계에 이르렀다. 이 로봇은 백화점 안내에 필요한 거의 모든 언어를 인간의 음성과 차이를 못 느낄 정도로 구사한다고 한다.
이처럼 필립 K. 딕의 상상을 훌쩍 뛰어넘어 인간과 동일한 복제인간의 등장이 구체적 현실로 다가온 지금, 인류사회는 이전 140년 동안의 변화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훨씬 더 혁명적으로’ ‘훨씬 더 빨리’ 변할 것이다. 그랬을 때, 영화 [서기 2019년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세상까진 아니더라도, 2002년에 발표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처럼 모든 인간의 신분과 행적을 동공 조회만으로 간단히 확인, 추적, 감시하는 체제가 오지 말란 법도 없다. 전자 정보 문명의 발달은 ‘혁명’으로 표현해도 성에 차지 않는 엄청난 변화를 인류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변화는 빙산의 일각이요,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주의는 태어나서 이제까지 한 번도 ‘뒈진’ 적이 없는, 그 어떤 열악한 조건에서도 살아남은, 환경 적응력과 변신·파괴·지배력이 대단히 뛰어난 괴물이다. 위태위태해 보이나 어쩐지 영원할 것 같은 존재, 과연 사라지게 될까, 과연 쓰러뜨릴 수 있을까, 하는 질문조차 두려울 만큼 모질디모진 악몽이다. 더욱 두려운 것은 그 자본주의가 주도하는 미래다.
필자가 1980년에 서울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에서 승차권을 판매할 당시 세상없어도 그 일자리는 영원하리라 믿었었다. 나아가 개표, 집표, 열차운전 등도 그러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불과 5년이 지나는 사이에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었음이 드러났고, 이제는 자본이 작정하고 덤비면 지하철쯤은 완벽에 가까운 무인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는 세상이 현실로 도래했다. 이 어찌 특정 업종·산업만의 현상일까. 이미 고도로 진화한 기계들이 많은 노동자들은 길거리로 밀어냈고,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시스템이 노동자들을 집단으로 몰아내고 있다. 더욱더 발달된 기계와 시스템이 그렇게 쫓겨난 노동자들을 되불러다 심부름꾼으로 부린다.
문명의 혁명적 발달이 노동자들만 주변부로 전락시키는 것은 아니다. 시대적 변화에 조응하지 못한 자본의 일부도 쪽박을 찬다. 그래서 또 실업자와 부랑자가 양산된다. 밀려나고 쫓겨나고 전락한 노동자들이 뻔한 양의 밥을 놓고 치열한 그릇싸움을 벌인다. 이놈의 자본주의를 갈아엎지 않고서는 암울한 미래, 노동자들에게 특히 암담한 미래를 피해갈 길은 없어 보인다. 문명의 고도화가 벌써부터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키기 시작했으며, 앞으로는 숫제 추방할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위기에서 희망을
노동운동은 한때 단지 임금인상투쟁만 전개해도 민주화투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보아도 보편타당한 생존권투쟁인데 그조차 집단 이기주의로 매도당한다. 극심한 사회양극화로 노동자․민중의 삶의 질이 상대적으로 후퇴하였고, 정치와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불만도 예전보다 훨씬 두터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투쟁과의 ‘접속’을 매우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딱한 시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원인의 대부분은 노동운동 내부에 존재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조직률은 급속히, 혹은 꾸준히 증가하여 19%(약 200만 명에 육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조차 자본을 향해 힘다운 힘을 쓰고 포효할 수 있었던, 그야말로 질적으로 일정한 조건을 갖춘 조직의 양은 1987년 이후에 결성된 일부 조직노동자에 불과했다. 어쨌든 그 성과물로서 전노협(1990년 1월 22일)을 포함한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형성되었다. 마침내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1995년 11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으로 거듭나고 합법성까지 쟁취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 조직률은 10%초반으로 뚝 떨어졌다. 민주노총은 그 중 절반에도 채 못 미친다. 최근 10년 사이 노동자는 1천만 명에서 1천5백만 명으로 증가(IMF이후 불안정고용과 구직 인구 급증)했는데, 노동조합 조직률은 오히려 급격히 떨어졌고, 민주노총의 규모도 사실상 성장을 멈췄다.
조직률 두 자리 수 위협, 분명 심각한 징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조직률은 조직된 대오의 활동여하에 따라, 그리하여 조성된 환경과 조건의 변화에 따라 가파른 속도로 증가할 수도 있다. 문제는 바닥을 친 낮은 조직률에 더하여 조직된 대오마저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으로 나뉜 것은 분열이라고 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는 자본에 의해, 자본을 위해, 자본이 운동한다. 자본이 자본에 의해 작동되지 않거나, 자본을 위해 운동하지 않거나, 아예 운동을 멈춘다면 어찌될까? 무망한 일이지만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는 절로 망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망한다 해도 ‘절로 망한다면’ 자본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자본이 존재하는 한 그렇게 망한 자본주의는 또 호시탐탐 회생 기회를 노릴 것이다. 질기디질긴 것이 자본이다.
노동은 무엇에 의해, 무엇을 위해, 무엇이 운동(변혁운동이 아닌 물리적 운동을 뜻한다)하는가. 자본주의 체제 내에 존재하는 한 노동 역시 불가피하게 자본에 의해, 자본을 위해(극히 일부 노동 자신을 위해) 운동할 수밖에 없다. 다만, 노동이 운동의 주체라는 것만 다를 뿐. 노동이 자본에 의해 운동하지 않고 자본을 위해 운동하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똑같이 자본주의는 망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통쾌한 것은 자본의 싹까지 아예 뿌리 뽑힐 것이다. 그러나 노동은 자본과 다르게 살아 있는 인간으로부터 발현되는 운동이기 때문에 결코 멈추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노동이 운동을 멈춘다는 것은 곧 노동의 종말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류사회의 종말로 귀결된다.
자본주의는 망해도 세상은 망하지 않겠지만, 아니 자본주의는 망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훨씬 크지만 노동은 이러나저러나 운동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떤 운동을 할 것인가’, 자본주의에 의해 끌려 다니는 피동적 운동에 머물 것인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능동적 운동으로 변환할 것인가에 있다.
노동계급이 자본주의에 진짜 위협이 되는, 자본주의의 목을 확실히 옥죌 수 있는 계급으로 존재하려면, 그래서 최소한 대등한 상대로서 일부 타협의 산물이라도 정확히 챙기려면 기본적으로 조직률이 높아야 한다. 아니 최소한 조직된 대오만이라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문제는 최소한의 조건, 즉 조직된 대오조차 일사불란하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반타작도 못 챙긴 승리였지만, 1996년 겨울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에서 무식하게 고집만 앞세웠던 김영삼 정권으로부터 노동법 개정을 이끌어낼 때 투쟁의 정예 대오는 채 10만 명이 안 되었다. 지금은 어떤가. 당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잃고 있고, 마지막 자존심마저 사정없이 구겨지고 있으면서도 민주노총 70만 대오는 모래알이다. 젠장맞을!
노동계급의 힘이 그토록 형편없이 쇠잔해진 것이다. 그 중 상호 보완적이면서 반비례하는 지도력·집중력·단결력이 쇠잔해진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고, 자칫 일본보다 짧은 기간에 일본보다 더 형편없는 노동운동으로 퇴보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우려까지 낳고 있다.
이런 가운데 향후 노동운동의 사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자명하며, 향방을 가르게 될 커다란 문제가 IMF 이후 급속도로 대두되었는데, 우리 모두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바로 비정규노동의 문제다. 물론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다. 오랫동안 소외․외면당해 왔고, 변혁운동의 중대 과제로 편입되지 못했을 뿐 사회문제로서는 벌써 케케묵었다.
비정규노동자의 비중은 점점 더 늘어 마침내 정규노동자 수를 넘어버렸다. 이는 곧 정규노동자가 수치상 노동계급내의 비주류가 되었다는 뜻도 된다. 노동운동의 주력인 정규노동과 그 동안 소외되어 있던 비정규노동의 비율 역전은 대단히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당장 자본을 향해 정규노동만의 요구를 공공연하게 내건다는 것이 쉽지 않게 됐다. 그들만의 요구를 관철하자면 계급 안팎에 놓인 숱한 벽과 수많은 눈길을 피해야 한다. 그러자면 노사가 좀더 은밀해져야 하고, 어쩔 수 없이 쟁의도 자제해야 하고, 그래서 당근을 든 자본의 의도에 끌려가야 하고, 결국 옳고 그름을 떠나 전투력마저 잃고 무장 해제됨으로써 자본이 파놓은 무덤에 맥없이 고꾸라질지도 모른다. 실제 그러한 기류는 곳곳에 흐르고 있으며 보신․실리주의 노조운동에서 노조간부들의 비리까지 결코 무시 못 할 상황들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터지고 있다.
정규노동과 비정규노동의 비율 역전은 또 노동계급에 대한 자본 우위를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시장의 유연을 넘어 계급의 붕괴와 노예화가 급속히 진행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암울한 미래로 가는 전조 치고 너무나 그럴 듯하지 않은가. 그런데도 노동운동의 현주소는 우편배달부가 힘겹게 찾아 헤매야 하는 낡고 허름한 동네의 번지 없는 골목 깊이 위치하고 있다.
거대한 자본주의 앞에 노동자는 무엇을 가졌는가? 가진 게 무에 있는가? 하다못해 바늘 하나 없이 내던져진 몸뚱이 하나다. 그 몸뚱이가 유일한 힘의 원천인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주의를 상대로 작든 크든 용이라도 쓰려면 그 몸뚱이 하나 하나가 뭉쳐야 한다. 그러나 그 응집력이 바닥을 치고, 앞으로 더 가라앉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니 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가. 왜 그랬을까? 물론 지난 세기말부터 위기에 봉착한 자본의 몸살과 회복을 위한 몸부림의 결과다. 그러나 자본의 몸부림이 노동운동 침체의 주요 원인일 수는 없다. 자신의 실력은 점검하지 않은 채 자본을 너무 우습게보고 짓까불었던 준비 안 된 전투의 남발과 역으로 자본의 재채기에조차 화들짝 놀라 자빠지며 알아서 기어버린 지나친 보신·실리주의가 주요 원인이었다.
어쨌든 이제까지의 정규직 노동운동이 좌표를 잃고 흐느적거릴 때 비정규노동운동이 미약하나마 조직적 대오를 갖추고 선명한 깃발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고무적이다.
“더 살고 싶어, ××야 ( I want more life, fucker )."
노동운동,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노동자 셋만 모여도 탄압 받던 1970년대의 긴장감으로, 70년대가 기억에 없다면 학습하고 조직하고 가두로 뛰쳐나갔던 1980년대의 열정으로, 그 80년대조차 기억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숱한 죽음 앞에 눈물로 맹세했던 1990년대의 결연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희망부터 다시 꺼내들어야 한다. 희망이 뭔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사실 그것은 내 안에, 우리 안에 존재한다.
우리 모두가 아주 잘 알다시피 비정규노동 문제는 비정규노동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거의 모든 사안이 정규노동자들과 직결되어 있고, 일거수일투족이 정규노동자들의 이해와 맞물린다. 하다못해 연봉제와 성과급제 등으로 자본이 정규노동 내의 차별화까지 확대·심화시켜도 찍소리 한마디 못하고 수용하는 사례가 그렇다. 정책적 측면만이 아니라 총체적이며 정치적인 문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책적 대안을 갖되 총력을 모아 정치투쟁으로 해법을 찾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 일을 수행할 것인가. 비정규노동은 자신이 놓인 경제적 사회적 조건 때문에 혼자만으로 위력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가 어렵다. 투쟁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투쟁의 주체가 되기 위해 모두 노력해야 하지만, 그 시동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걸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정규·비정규노동이 분열·갈등하지 않고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정책적 대안은, 이 역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전 노동자․민중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회공공성이다.
자본주의를 퇴치하지 못하는 한, 아니 퇴치하기 전까지는 어차피 우리 모두 그 체제에서 살아가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매사 경제 문제가 화근이다. 사회공공성이란 것도 일차적으로는 그 의미다. 자본은, 설사 모든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할 만큼 능력을 가졌어도 결코 완전고용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손을 털었으면 털었지. 하물며,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본조차 위기라는데 어떻게 완전한 정규고용을 기대하겠는가. 불가불 국가의 책무다. 그런데 국가조차 노동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면서 자본의 이익만을 옹호해온 현 지배세력이 제멋대로 주물러대는 전유물로 전락해 있다.
결국 노동계급이 분연히 투쟁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초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 김영삼․김대중 정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현재의 노무현 정권 역시 노동문제에 관한 한, 민생에 관한 한 철저히 자본의 편에 서 있다. 이전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기 때의 노태우 정권보다도 철저한 자본의 주구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실천보다 말이 쉬운 혁명을 선택하든지, 어렵고 지난하지만 고도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노동계급내의 조정과 상호보완, 인내가 요구되는 정치세력화에 더욱 박차를 가함과 동시에 광범위한 사회보장제도 등 사회공공성 쟁취를 위해 투쟁하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후자에 무게를 싣는다면 각각 처해진 위치에서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첫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정부와 의회를 상대로 민중의 평균적 삶이 보장될 수 있도록, 요람에서 무덤까지 개인과 사회와 국가가 공동으로 삶을 책임지는 포괄적 ‘사회보장법’ 제정을 요구․추진하고, 이에 필요한 ‘사회보장비용’ 일부를 임투와 연계하여 자본이 책임지도록 요구하면서 정치투쟁의 깃발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구체적이고 분명한 요구이자 투쟁 목표인 듯싶지만 무상의료와 무상교육만을 내건 투쟁은 설사 그것이 원하는 대로 쟁취된다 해도 다른 사회 문제들과 충돌이 일어나거나 예상치 못했던 문제를 파생시킬 것이다.
둘째, 정규노동 분야에 편중된 사업의 무게 중심을 비정규노동 분야로 과감히 옮기되, 이의 실제적 실천과 관철을 위해 조합원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교육·선전 사업, 일관되고 지속적인 투쟁 사업을 배치해야 한다. 민주노동당도 이른바 ‘민생문제’를 그 무엇보다 중심 사업으로 삼아 당력을 최대로 쏟아 부어야 한다.
셋째, 현실운동에서는 정규·비정규노동자들 모두 서로 다른 조건을 인식하고, 그 차이를 좁혀 나가기 위한 이해와 노력의 바탕 위에 각종 사업과 투쟁에서 상호 존중·협력하며, 상급단체에 대한 의무와 권리에 있어서 비정규노동자를 배려(예컨대 의무는 감면, 권리는 확대)하고, 정책입안에서 각급 회의단위까지 비정규노동현장의 현실이 반영될 수 있도록 구조화해야 한다. 이를테면 안건할당제를 도입하여 비정규노동 문제는 상하 모든 단위 회의에서 필수적으로 다뤄지도록 강제하는 방안 등이 검토되어야 한다.
넷째, 정규직 노동조합은 사내에 들어와 있는 비정규노동에 대한 기존의 정책(정규화 요구 등)을 더욱 강화함과 아울러 개별 자본에게도 사회적 책무를 요구해야 한다. 기업복지 요구는 지양하고, 예컨대 노동자연대기금 출연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니 최소한 지역 차원의 사회보장비용이라도 요구해야 한다.
다섯째, 이 모든 투쟁은 처음부터 기업의 벽을 허물고 지역단위를 골간으로 하는 산별노조 건설운동과 맞물리도록 기획하고 진행되어야 한다.
차라리 세상을 한꺼번에 갈아엎는 편이 더 손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갈아엎자면 우선 쟁기를 끌고 가는 황소가 튼튼하고 우직해야 하는데 당장은 그것부터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 그 사실을 모른다면 모를까 잘 알면서 그런 주장을 편다는 것은 스스로를 욕보이는 행위요, 현재의 노동운동에 대한 기만이며 오만이다.
아무튼 비정규노동을 대량으로 양산하여 인간성을 훼손하고 기본권을 짓밟음은 물론 노동계급 내의 갈등과 충돌까지 유발한 작금의 모든 현상들의 배후에는 자본이 떡 버티고 있음을 상기하자. 다시 한 번 자본과의 전면적인 전쟁을 고민해야 할 시기다. 특히 IMF구제금융 이후, 노동계급은 일방적으로 희생당해 왔고, 자본은 국가로부터 수십조 원의 공적자금을 지원 받는 등 줄곧 그들만의 잔치를 해왔다. 그러므로 자본에 대하여 선전포고할 정당성도 있다.
다시 영화 [서기 2019년 블레이드 러너]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더 살고 싶어, 새끼야(I want more life, fucker).” (극장판의 대사는 "I want more life, father."였음)
금지된 지구로 잠입한 인조인간들의 리더인 로이 베티(루트거 하우어 분)가 내뱉은 대사다.
여기에서의 ‘fucker’는 인조인간을 제조한 엘든 타이렐 회장을 지칭한다. 로이는 자신을 설계하고 제조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수명 역시 연장해 줄 능력이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타이렐을 찾아갔던 것이다. 그러나 타이렐이 “네 생명은 만들 때 정해진 것이고, (기술적으로) 변경할 수가 없어. 주어진 시간을 충분히 살아!”라고 대답함으로써 수명의 연장은 그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문제가 된다. 결국 로이가 “당신은 충실히 살았겠지요?”로 반문함으로써 ‘이제 당신은 죽을 때가 되었’음을 알린 다음, 양쪽 엄지손가락으로 타이렐의 눈을 찔러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런 다음 로이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와 만난다.
당신이 감독이라면 로이와 데커드의 싸움에서 누구를 승자로 택하겠는가? 감독 리들리 스콧은 허리우드의 법칙을 따르지 않은 것 같다. 최고의 전투용으로 제작된 로이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시켰으니까 상식을 따른 셈이다. 그러면서 비인간화하고 있는 인간에게 다시 한 번 경종을 울린다.
300층이나 되는 고층빌딩 난간에 매달려 죽음이 곧 시간문제인 데커드가 팔에 힘이 빠져 막 떨어지려는 순간, 로이가 그의 팔목을 잡아 생명을 구한다. 로이는 곧 자동으로 동작이 멎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커드를 살리고 죽는 것이다. 비인간인 로이가 인간의 비인간성을 그렇게 꼬집는다.
원작자 필립 K. 딕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관계가 역전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했다고 한다. 1972년 밴쿠버의 과학소설 대회에서 발표한 ‘안드로이드와 인간’이라는 연설문은 이 문제에 대한 그의 고민을 밀도 있게 담아내고 있다. 그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지만 비유적으로 안드로이드인 사람들이 있다”면서 “컴퓨터는 점점 인간처럼 되어가고 인간은 점점 비인간화된다”고 염려했다.
“인간은 서로의 인간성을 강화함으로써 안드로이드에 대항할 커뮤니티를 만들어야 한다. 잘못된 것을 행하라고 강요받았을 때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다.”
인간성의 회복이란 곧 윤리와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뜻하는 셈이었다. 그는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연설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우리 모두가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무덤이 아니다. 그건 저 너머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미래의 세계다.”
정규노동자, 그리고 비정규노동자 모두 가슴을 손에 얹고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지금 같은 곳을 향해 가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