녀던 길 따라
내게 글쓰기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독자들에게 자연과 교감하며 사람 사는 향기를 같이 나누고자함이다. 엮임에 자유롭고 싶어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가락문학회는 내가 속한 유일한 문학 단체다. 달마다 동읍 어느 분재원에서 정기 모임을 가지면서 공부방이 열린다. 나는 그 모임에 매번 얼굴을 내밀지 못해 회원으로서 도리를 못다 하고 있음이 늘 마음에 걸린다.
동인회 카페에 내 이름으로 개설된 방에다 생활 속에 남기는 글들은 부지런히 올린다. 영양가 없는 글이지만 카페를 방문하는 이들이 읽어 보는지 조회 수가 수십여 회 이르는 경우도 있다. 동인회에선 매년 기행을 다녀오고 시화전을 열며 문집이 나온다. 오월 마지막 주말은 가락문학회에서 기행을 떠나는 날이다. 경주 친구 농장과 고향 형님 댁 일손 돕기는 뒤로 미루고 동참했다.
이른 아침 이웃 아파트에 사는 사무국장과 함께 문학기행 출발지 창원시청 앞으로 나갔다. 안면 있는 회원들을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누었다. 동마산 인터체인지를 앞두고 마산에 거주하는 회원들이 합류했다. 회원 가운데 오래 전 교직에서 정년을 맞은 분을 비롯해 주부도 있었다. 현업에 종사하는 회원은 많지 않은 편이지만 주말이라도 일터에서 맡은 일로 동행하지 못한 분도 있었다.
집행부에선 사전 준비가 철저했다. 중앙고속도를 따라 오르는 버스 안에서 정성을 듬뿍 담은 간식이 나오고 답사 장소를 자세히 안내했다. 일행들이 가는 곳은 영주 무섬마을을 거쳐 영양 주실마을 조지훈 문학관과 두들마을 광산문학연구소를 들리기로 했다. 지난해까지 예천 회룡포와 안동 하회 일대를 다녀왔다. 무섬마을까지 둘러보면 낙동강 상류 물돌이 마을은 모두 순례하는 셈이다.
일행이 탄 버스는 서대구를 지나 중앙고속도로를 탔다. 근래 옮겨간 경북도청이 가까운 예천 인터체인지를 내려 영주 문수면으로 들었다. 산지가 많은 경북 내륙의 산모롱이를 돌고 낙동강 지류 다리를 건너 수도리에 닿았다. 말 그대로 물돌이는 강물이 휘돌아 가는 마을이었다. 낙동강 지류 내성천은 수도리에 이르러 산 태극 수 태극으로 S자를 넘어 태극 문형을 그리며 휘감아 흘렀다.
사백 오십 년 전 입향조 반남 박 씨와 선성 김 씨가 터 잡기 전엔 태초의 땅이었다. 배산임수 지형에 양택을 정한 그들은 강나루 바깥 들판에서 농사를 지어 알곡은 달구지와 거룻배로 무섬마을로 옮겨왔다. 자손에 대한 교육을 엄격히 해 과거를 거친 후손이 줄을 잇고 양반 가옥은 오롯이 보존했다. 현대시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강인한 지사의 풍모를 보인 조지훈의 처가 동네였다.
사십여 년 전 마을 앞 콘크리트 수도교가 놓이기 전까진 외부와의 유일한 통로는 은빛 백사장을 가로지른 외나무다리였다. 책보 메고 학교 가는 아이. 장가드는 새신랑, 꽃가마 탄 새색시, 황천길로 가는 상여도 외나무다리를 건너야했다고 했다. 일행들은 그 외나무다리를 건너갔다. 나는 고소공포 때문 뒤따르지 못하고 강 하류에 있는 외나무다리를 거쳐 한옥체험 수련관까지 둘러보았다.
이동 간 버스에서 품격 있는 재담과 진도아리랑을 개사한 격조 높은 가락에 후렴구로 화답해 흥을 살렸다. 풍산 들녘을 바라보는 황소곳간에서 쇠고기전골로 점심을 들었다. 식후 시간이 제법 걸려 닿은 답사지는 영양 일월 주실마을이었다. 문화해설사로부터 조지훈 시인 일대기와 집안 내력을 훤히 소개받았다. 가락문학 전임 회장 누이는 그곳 초등학교 관리자여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일월 주실에서 석보 두들로 가는 길에 선바위 휴게소 잠시 들렸다. 수박을 잘라 갈증을 푸는 사이 한 회원은 강변에서 대금으로 ‘천년 학’과 ‘한 오백년’ 연주해 갈채를 받았다. 이어 일행들은 두들마을로 향했다. 두들마을은 우리나라 현대문학에 큰 획을 긋는 이문열의 고향이었다. 밀양에서도 소년기를 보낸 작가는 시대와의 불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분단과 이념의 장벽 앞에 서 있었다. 16.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