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이 입을 벌릴 때/길상호
겨울잠이 풀리고
강변의 진흙은 아가리를 벌린다
물안개가 만든 꿈속을 오래 어슬렁거리느라
진흙은 배가 고프다
진흙의 아가리에 침이 고이고
검고 부드러운 입술엔
어떤 밤이 뜯어 먹다 남긴 고라니의 앞다리 두 개가 물려 있다
두툼한 뒷다리 두 개는 더 먼 곳까지 가서야
피의 걸음을 놓았다
진흙은 이빨 없이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음미하면서
목마르게 끝난 짐승의 죽음을 소화시킨다
털과 가죽과 뼈와 발굽
고라니를 물가로 이끌던 아픈 육체
진흙의 아가리 속으로
두려웠던 시간이
긴 발자국 유서와 함께 서서히 사라진다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베어 묶어 둔 빗줄기가
뒷마당에 다발로 쌓여 있었다
금낭화는
네 개의 유골단지를 쪼르르 들고
꽃가지가 휘었다
뒷산에서 잠시 내려온
아버지와 큰형과 둘째형과 똥개 메리는
대화를 나눌 입이 없고
서로를 무심히 통과하면서
물웅덩이마다 둥근 발자국을 그려 놓았다
헛기침에도
꽃이 떨어져 깨질까 봐,
그들의 빈 눈과 마주칠까 봐,
나는 먹구름과 함께 발뒤꿈치를 들고
그 집을 나왔다
봄비를 데리고 잠을 잤는데
봄이 벌써 반 이상 떨어지고 없었다
―시집 『왔다갔다 두 개의』 2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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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호 / 1973년 충남 논산 출생. 200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동나무 안에 잠들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우리의 죄는 야옹』 『모르는 척』 『왔다갔다 두 개의』 등. 산문집 『겨울 가고 나면 따뜻한 고양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