闡美錄
再從姪 全鎣弼
官秩秘書擬貴人
薇軒蔭德也循因
雙箸餅香丹桂屑
一盤果碩碧桃仁
至孝不差曾氏宅
叙倫皆賀謝家隣
瑤琴玉樹荆花樂
仙膝平安任屈伸
천미록
재종질 전형필
관직은 비서이고 귀인에 견줄 수 있으니
채미헌 전오륜公의 음덕으로 인한 것이다.
향기로운 계핏가루가 뿌려진 떡에 젓가락 두 개를 놓고
과일과 크고 푸른 도인(桃仁) 한 접시가 놓여있다.
지극한 효심은 증씨 집안과 차이가 없었으며
인륜을 베푸시니 모두 축하하였고 이웃에게도 감사를 표하였다.
재능이 뛰어난 이가 아름다운 거문고로 형제의 우애를 연주하니
신선의 무릎에 기댄 것처럼 평안하니 편한 자세를 가지리라.
[국역] 전과웅
[출처] 천미록(闡美錄)
● 전형필 [ 全鎣弼 ]
요약
한국의 교육가이자 문화재 수집가로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힘썼으며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지원·경영하며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가 되었으며 광복 후, 보성중학교 교장과 문화재 보존위원을 역임하였다.
본관은 정선(旌善)이고 호는 간송(澗松)이다. 1906년 7월 29일 서울 종로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은 전영기(全泳基)이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낸 무관출신이고 배오개에서 미곡상을 경영했다.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고종 사촌형 월탄 박종화(月灘 朴鍾和)와 교류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1921년 어의동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휘문(徽文)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휘문고 시절에는 야구부로 활동하였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다. 1928년 일시 귀국하여 스승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을 만났으며 그의 조언으로 서화와 골동품 수집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오세창으로 부터 간송(澗松)이라는 아호를 받았다.
1929년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1930년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간송은 부친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는데 논 800만 평이 넘는 거대한 재산이었으며 해마다 2만 석의 쌀을 수확할 수 있었다. 간송은 조선의 중요한 서화를 수집하면서 안목을 키워나갔고 스승 오세창의 지도와 조언을 받아 문화재를 수집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사동에 소재하는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여 경영하면서 고서적과 서화, 화첩 등을 수집하였고 한국의 중요한 문화재가 일본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았다. 그의 막대한 재산은 국내 문화재를 구입하는데 사용되었다. 또한 전국의 거간꾼과 국내, 일본의 수장가를 찾아다니며 문화재를 구입하였고 경매를 통해 문화적 가치가 높은 다수의 문화재를 수집하였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1938년 개인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현 간송미술관)을 세웠다. 1940년 경영난에 빠진 보성(普成)고보를 인수하여 교주(校主)가 되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보성중학교 교장직을 1년간 맡았다. 1954년 문화재 보존위원이 되고, 1956년 교육공로자로 표창을 받았다.
그가 막대한 돈을 들여 수집한 문화재 중에는 1942년 일본인 몰래 안동에서 기와집 10채를 살 수 있는 거금 11,000원을 주고 구입한 《훈민정음(訓民正音)》 해례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서적·고서화·석조물·자기 등이 있으며, 10여 점 이상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그가 소장한 문화재 중 신윤복의 화첩도 유명하다. 1962년 문화포장, 1964년 문화훈장 국민장, 2014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형필 [全鎣弼]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 官秩 관질
1. 관등(官等). 2. 관록(官祿).
● 옥수 [ 玉樹 ]
① 옥 나무. 사람의 몸가짐이 아름다운 모양. 재능이 뛰어난 사람.
● 자형화(紫荊花)는 박태기나무의 꽃이다. 옛날 전진(田眞)의 세 형제가 모든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고 박태기나무 한 그루만 남았으므로, 의논하여 다음날에 이마저 쪼개서 나누기로 했는데, 다음날 가 보니 박태기나무가 마치 불에 탄 것처럼 말라 죽어 있었다. 형제가 뉘우치고 베지 않기로 하자 나무가 금방 다시 살아났다는 고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