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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전통의 명문 경주이씨 종친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민희 中河
1. 설날 세배는 고려시대 풍속이었다. 설날아침 일찍 일어나서 어버이에게 세배를 올리고 아침밥을 먹는 것이 고려시대의 풍속이며 그때에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없었다고 한다.
다음은 高麗士人耘谷天錫所作庚午元正詩이다. 鷄鳴起坐整衣襟, 星頭欄干曉霧深. (닭 울음소리에 깨어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곱게 다듬어 입었더니, 별빛이 난간에 들어와 안개가 깊도다) 時有兒孫來再拜, 油然發動壯年心. (그때 자식·손자들이 와서 세배를 하니, 어른스러워지는 마음이 저절로 갖추어 지더라)
2. '설날제사'는 고종 33년 병신년(1896년)에 경상도 성주 땅의 수촌리(樹村里)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 이름이 '원조절사(元朝節祀)'로 되어서 老石 呂九淵(1865∼1938)의 문집인 『老石集二』卷三十三 「朝鮮人之祭其始行」에 「元朝節祀之始行」이라는 글귀가 있다. 歲拜後行祭, 其儀則誓祭稱之曰元朝節祀.(세배를 한 후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 모양이 맹세하는 것인데 그것을 일컬어 원조절사라 한다) 여기서 『其儀則誓祭也』에 눈을 여겼다. '다짐하는 제사'라는 말에 아주 무게가 있기 때문이다. 설날아침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웃어른들께 세배를 마치고 가족과 문중의 화목과 번영을 조상 앞에서 맹세하는 것이 바로 『誓祭』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4대를 합설하였으며, 축문도 만들지 않고 한 잔의 술을 올리고 다짐했다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실국시대에 와서는 총독부의 '단발령'과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겠다고 조상 앞에 맹세를 하는『誓祭』로 된 것이다. 실국시대에 조선총독부에 항거한 우리 사대부가의 대 반란이 바로 '설날제사'이다.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이 '설날차례'라고 한다. 엉터리 같은 소리다.
'차례(茶禮)'가 일본 말이다. '茶'를 일본에서는 '차'로 말하고 '우리겨레'는 예부터 '다'라고 발음했다. 그래서 '궁중다례'의 '다례(茶禮)'란 말이 있었고, '다도(茶道)' '다기(茶器)'에 이어서 훗날에 '다방'이 생기게 된 것이다. '다례(茶禮)'라는 말이 조선조 태종실록에 나온다. 중국의 사신을 대접하는 것을 '다례'라 했다. 고종 32년 을미년에 민비가 왜로들에게 시해를 당했다. 시해를 당할 때의 직첩이 왕비였다. 명성황후는 훗날에 붙여진 것이다. 시해를 당한 민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여 장사를 지내지 못하고 빈소가 궁궐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고종임금은 왕비의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자주 지내었는데 그 제사를 임금이 『다례제(茶禮祭)』라 했다. 이것을 총독부에서 왕실의 '궁중다례'와 맞먹는 가정의 의식이라 하여 '설날차례'라고 이름을 지어 놓고 우리의 궁중문화를 낮추어 버렸다. 이후 우리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설'과 '추석'에 지내는 제사를 '차례'라고 한 것이다. '다도(茶道)'를 '차도'라고 하며 '설록다'를 '설록차'라고 한다. 실국시대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한 부왜인들이 이 땅에서 학자 노릇을 하면서 모든 것을 일본식으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경상도 땅의 달성군 공산면 지묘동에 경주 최씨의 집성촌이 있고 거기에 『다천정(茶川亭)』이 있으며, 고령군에 『다산면(茶山面)』이 있다. 또한 정약용 선생의 호『茶山(다산)』을 '차산'으로 발음하는 미친놈은 우리 땅에 없다. 이는 광복 후 초등·중등·고등학교 교과서에 「설날제사」를「차례」라고 적고 괄호를 만들어 그 속에 '茶禮'라고 적고 나서이다. 거기에는 정치인들도 가세를 했으니 나라의 차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아주 큰 과오를 저지르고 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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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東國歲時記(동국세시기)』라는 책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거짓『설날』에 길들어져 있다. 『東國歲時記』라는 책은 실국시대였던 1911년 朝鮮光文會라는 출판사가 출판했던 책이다. 이 책은 지은이를 모르는 책이다. 책을 번역한 사람은 崔大林이라는 사람이고 그 번역자의 말을 빌리면 소장처가 고려대학교 도서관이라고만 했다는 것이다. 출처가 불분명한 이상스러운 책을 두고 우리겨레의 세시문화요 세시풍습이라고 우겨대는 꼴이 한심하여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꼬집어보았다. 가.『東國歲時記』라는 책의 지은이를 모른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사람이「李子有」로 되어있고, 그 서문에 의하면 지은이가「陶厓 洪友」라고 했다.
조선에는「李子有」란 이름을 가진 자가 없다. 「子」라는 글자가 '이름'이 아닌 '자(字)'에만 사용이 되는데 '자(字)'에도「子有」란 성립이 안되기 때문에 쓸 수가 없다.
통상「子正」「子健」「子守」「子强」등을 사용하여「바르게」「건강하게」「보배를 지키게」「굳세게」의 뜻을 부여하지만「子有」란 뜻이 없다.
굳이 만들려면「가지고 가게」라는 뜻인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또한 이름에 사용하면「李子」가 되어 더욱 망측스럽다.
그러므로 서문을 쓴 이는 실제로 없는 거짓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서문을 쓴「李子有」가 지은이를「陶厓 洪友」라 하여「도애」란 호를 가진「홍」씨 성의 친구라 했다. 역시 성립이 되지 않는 호이며 이름자이다. 또한 그 책의 구성내용이나 수록된 단어를 보면 더욱 우리 선조들이 엮은 서책이 아님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대표되는 몇 가지만 간추려 보았다. 먼저「見者以爲道得該備之」라는 글이 조선 선비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선의 선비는 「見」字를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余及受而卒業」에서「卒業」이 조선 선비의 글이 아니라 일본말이라는 것이다.
「儼然爲一統文字」에서는「一統」이란 말의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鳴呼, 洪君之少日, 所期者, 自謂何如」에서「洪君」이 잘못되었다. 앞에서는 「洪友」라고 해놓고 뒤에서는「洪君」이라고 했다. 벗을 「君」으로 부르는 것이 우리의 서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自元月訖臘月, 凡爲目者, 二十有三」이라는 글이 일본사람의 글이 방식이다. 조선 선비가 썼으면「自正月, 至十二月, 凡爲目者, 每有二十三事」로 될 것이었다.
이렇듯 온통 일본의 글 방식과 낯 설은 글 방식이니 결국 지은이가 없는 책이 되는 것이다. 지은이가 없어서 불분명하거나 일본사람이 쓴 僞書일 수밖에 없다.
아니 일본사람이 쓴 위서에 가깝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러므로 『東國歲時記』는 僞書이다. 그런데 이 僞書를 두고 우리의 세시풍습이니, 전통문화의 결집이라고 하는 꼴이 한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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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리송하고 몰랐던 설날 제사에 대해 잘 알았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