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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묵상글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님과 함께 걷다.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 27 추가
^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글 일부. : 아직 / 08:20 추가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아직 / 05:1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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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님과 함께 걷다>
나를 향한
헤아릴 수 없는
님의 걸음걸음들
님을 향한
헤아릴 수 없는
나의 걸음걸음들
마침내 닿아서
가슴 벅찬 만남
나를 부르는
헤아릴 수 없는
님의 걸음걸음들
님을 따르는
헤아릴 수 없는
나의 걸음걸음들
오롯이 포개져
기쁨 가득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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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3.25 05:21
- 인성과 신성의 교환 대축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이사야의 예언, 곧 동정녀가 잉태하여
임마누엘 하느님, 메시아 하느님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진다는 얘기이고 구조입니다.
그러나 예언이 이루어진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오늘 히브리서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고,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이어도
우리 인간의 동의 없이는 절대로 이루실 수 없는데
예수님도 마리아도 그 뜻에 동의하셨고
우리도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전례의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천사의 알림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고 전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의 동의 없이는 하느님도 당신 뜻을 이루실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머리를 갸우뚱하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그럴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럴 뜻이 없으십니다.
우리의 뜻을 존중하시어 당신 뜻을 꺾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뜻을 스스로 꺾고 당신 뜻을 스스로 따르도록
당신도 당신의 뜻을 능력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우리의 사랑의 응답을 사랑과 존중의 마음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응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아무리 오시려고 해도 오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다행히도 마리아께서 주님 뜻에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리아에게 수태되신 것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마리아를 수태하신 것입니다.
두 분의 응답은 능동적인 수동태이고 위대한 수동태입니다.
사랑의 응답이었기에 이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응답이 있었기에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사람이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성탄도 그렇고 마리아의 수태도 신성과 인성의 교환이고,
그래서 오늘 전례의 본기도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동정 마리아의 모태에서 말씀이 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참하느님이시며
참사람이신 구세주의 신비를 찬양하고 그분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도 마리아처럼 신성을 잉태함으로써 주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주님 신성의 참여에 초대받는 우리가
사랑으로 응답까지 하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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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단순한 수양 : 관상
하느님의 숨
2025.03.24. 15:55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3월 24일 월요일 (호명환 번역) 열세 번째 주간: 향심(centering)과 침묵(silence), 고요(stillness)
현재의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의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리처드 로어는 정기적인 관상적 수양을 권장합니다.
현재의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 내면의 자세를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관상은 우리의 자그만 자아 - 에고 - 를 넓히려 하거나 강화하는 대신 우리가 진정 누구인지를 발견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자기들이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사고(생각)와는 별개로는 자기들인 바에 대한 실마리를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관상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과 감각들 저 밑에 있는 순순한 존재의 차원과 벌거벗겨진 의식의 차원으로 내려갑니다.
관상 기도 안에서 우리는 고요히 우리 의식의 흐름을 관찰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그 의식의 패턴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열린 마음과 이 관상의 분위기에 잘 맞추어진 몸으로 침묵 안에서 기다립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패턴이 우리를 공격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통제와 중독, 부정(negativity), 갈등, 화, 그리고 두려움의 습관이 곧바로 들고 일어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쳐지셨을 때, 처음에 나타난 것은 "들짐승들"이었다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마르 1,13). 관상 기도는 위로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이가 첫 단계에서 관상 기도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지만, 대개는 처음에 진리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
Contemplative Outreach(관상지원단)의 창설자인 토마스 키팅 신부(Fr. Thomas Keating: 1923-2018)에게서 영감을 받아 리처드는 다음과 같은 기도법을 발전시켰습니다:
여러분이 강둑 위에 앉아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작은 배들과 큰 배들 - 생각들과 느낌들과 감각들 - 이 강물을 따라 지나갑니다. 여러분 내면의 눈에 강물이 흐르는 동안 이 배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보십시오. 예를 들어, 작은 배들 중 하나를 "내일에 대한 나의 걱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큰 배가 하나가 오는데, 그것을 "내 남편의 의견에 대한 반대"라고 이름 붙일 수 있고, 작은 배 하나를 "나는 그것을 잘 할 수 없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스치는 모든 판단은 이 작은 배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것들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는 데 시간을 가진 다음, 그것들이 강물에 그저 흘러가게 내버려 두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배들 - 생각들 - 에 곧바로 올라 타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배 하나를 소유하고 그것과 여러분을 동일시하자 마자 그 배는 동력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이 기도법을 우리는 소유하지 않는 수양, 해탈의 수양, 내려놓는 수양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아이디어와 모든 이미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십시오. "아니야. 나는 그런 것이 아니야; 나는 그런 것이 필요 없어; 그건 내가 아니야."
때때로, 하나의 배가 방향을 돌려 다시 여러분의 주의를 끌기 위해 거슬러 올라올 것입니다. 이런 습관적인 생각들에 걸려 들지 않기는 어렵습니다. 때때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들에 어뢰를 쏴 폭파시키고 싶은 유혹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마십시오. 그것들을 미워하거나 단죄하지 마십시오. 관상은 또한 비폭력의 수양입니다. 여기서의 요점은 여러분의 생각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분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것은 내가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 아니야." 그러나 이 말도 아주 친근한 어투로 하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다루는 법을 배울 때 여러분은 같은 사랑의 지혜를 이 세상에 날라다 줄 수 있을 것입니다. [2]
관상을 지도하는 선생들은 대개 적어도 20분 동안 "앉아서" 온전히 관상에 임하라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관상 기도 시간이건 첫 번째 반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런 생각들과 판단들, 두려움을 부정적인 것들, 감정들을 내려놓는 데 할애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 그저 뒤로 물러 서서 그 모든 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요 목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그런 생각들과 느낌들이 실제로 "내"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눈물을 끌어안기(embracing tears)라는 주제는 저로 하여금 제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들어가도록 해 주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건강 문제로 인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제 젊은 두 아들이 저를 간호하기 위해 병원에 함께 있게 되면서 저의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 아들 둘이 자기들 직장과 가정에서 떨어져 저를 보살피기 위해 보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생각하면서 저는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좋은 느낌인지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저는 전에 없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우리 나라가 다 함께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Leanne H.
[1] Adapted from Richard Rohr, Everything Belongs: The Gift of Contemplative Prayer (Crossroad, 1999), 75.
[2] Adapted from Richard Rohr, Simplicity: The Freedom of Letting Go (Crossroad, 2004), 94–95. See Thomas Keating, Open Mind, Open Heart: The Contemplative Dimension of the Gospel, 20th anniv. ed. (Continuum, 1986, 2006), 20, 78-79, 120.
[3] Adapted from Richard Rohr, Contemplative Prayer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7).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Exisbati, Untitled (detail), 2021,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침묵은 풀밭 위에 뻗져진 저 손처럼 지금 여기에서 살갗을 스치는 풀잎 하나하나를 단순하고 깊이 의식하듯이 현재의 순간에 깊이 참여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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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성모님처럼 우리도 은총을 가득히 받았고, 받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숨
2025.03.25. 05:50
오늘은 가브리엘 대천사가 어린 마리아에게 한 인사말에 대해 성찰하며 복음 나눔을 시작하겠습니다. 특별히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라는 말에 대해서요.
이 말은 그리스어 원문에 κεχαριτωμένη(케하리토메네)로 되어 있는데, 신약성경에는 오직 한 번만 나오는 용어입니다(루카 1,28). 이 단어는 χαριτοω(하리토: "은총을 내리다", "은총을 수여하다")라는 동사의 수동 분사형으로서 보통 "은총을 입은"이나 "은총이 가득한", 혹은 "지극한 은혜를 받은" 등 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하리토]라는 단어는 사도 바오로가 하느님의 육화, 즉 하느님께서 육을 취하여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계획과 그 실현에 대해 말할 때 다시 한 번 사용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능동형 ἐχαριτώσεν(케하리토센)으로 쓰입니다. 하느님께서 주도적으로 우리 인간에 내려주시는 은총으로서 말입니다. 여기서도 역시 우리의 선택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이 강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전에도 언급해 드린 대로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은총은 하느님께서 거져 주시는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총은 인간의 공로나 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즉 인과응보의 논리를 철저히 뛰어넘는 하느님의 무한한 자유 의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 역사에 있어 그분의 선제권을 깊이 담고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근본적인 의미에서 살펴 본다면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총은총에 의해 변모된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어린 성모님은 알아들으셨을 테지만, 인간의 논리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어서 가브리엘 대천사는 다시 두 번이나 이 말에 해석을 덧붙입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그리고 또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라고요!
그러고 나서 성모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실 성모님은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알지는 못했지만 하느님의 주도하시는 일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그 믿음 안에서 온 삶을 사신 것이고요.
자, 그런데 이 단어가 다시 한번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성모님과 관련된 내용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천지창조 이전부터 이미 사랑의 선택을 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관련하여 쓰인다는 사실을 깊이 새기고 기억하고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살펴볼까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주도하시는 은총의 역사 안에서, 즉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한 역사는 물론이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한치의 어김도 없이 반드시 당신의 은총 안에서 당신의 계획을 실현시키시는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시라는 진리를 우리는 꼭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 진리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반드시 실현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이 과정에서, 성모님이 그러하셨듯이, 의혹 속에서도, 시련 속에서도, 심지어는 죽음의 어둠이 '나'를 덮치는 듯한 상황 속에서도 굳은 믿음과 희망 안에서 인내와 끈기로 그 사랑에 꼭 매달려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야 합니다.
우리가 삼종기도를 바칠 때나 사도신경을 바칠 때 머리를 숙이며 기도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에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라고 기도할 때와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라고 고백할 때입니다.
여기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이 엄청난 기적보다 우리에게 이 하느님의 사랑에 따른 계획을 더 굳건하게 확신시킬 수 있는 기적이 없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머리를 깊이 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고백을 하며 하느님이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신 만큼 우리 서로도 그렇게 존경심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대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창조주요 주님이신 하느님이 우리 중 한 사람이 되셨다면, 그리고 당신의 육화를 통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진리를 분명히 알려주시고자 하셨다면, 우리는 그만큼, 즉 하느님만큼 소중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심지어는 그 하느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극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기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이전에 함께 나누었던 아름다운 사이 - '지금' 그리고 '아직 아니'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기 (Beautiful Between - living fully in the now & not yet)라는 사이트에 올라온 이야기 마지막 부분을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아픔 때문에 인내심을 절대 잃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저의 어둠을 보여드려도 불편해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도 그분은 저에게 기운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제가 갈 곳이 어디에도 없어도 그분은 저를 절대 저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진솔함을 반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제 고통을 향해 달려 오셔서 저에게 고통을 이겨낼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울먹이며 희망찬 목소리로 그분의 속삭임에 답을 드렸습니다. "좋아요! 당신께서 저를 절대 저버리지 않으신다고 약속하시면 저는 당신과 함께 어디라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가끔 하느님께서는 치유해 주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누구의 잘못 때문에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 상처난 세상에서의 삶에 달갑지 않은 아픔의 현실이 있기도 합니다.
저의 희망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치유의 행위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희망은 다시, 또 다시 계속해서 증명해 주시는 당신의 자비와 사랑의 영원히 변치 않는 그 성향에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어둠속에서 우리를 잡아 채어 끌어내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그 어둠속을 걸어가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어둠에서마저도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걸어가시며 당신의 선과 자애를 우리에게 불어넣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저는 저에게 달려드는 거센 파도 속에서도, 심지어는 지옥의 어둠에서도 주님께 매달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 저는 그분 옷자락에 제 얼굴을 깊이 파묻고 깊은 숨을 쉬는 법을 압니다. 제 가슴이 불덩이처럼 답답하고 우울함이 덮쳐올 때도 저는 그분께 기대어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괜찮아. 이 칠흑같은 어둠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너와 함께 있어!"
아마 여러분은 오늘도 '나의' 고통 중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실지 모릅니다. 그것이 우울증이나 불안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일 수도 있고, 실패를 맛보거나 병에 걸리는 상황, 혹은 불의를 당하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당신은 여기에 계십니까? 저와 함께 계시는 겁니까?
우리가 고뇌와 아픔을 겪을 때 그분은 우리를 단죄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실망하시지도 않고, 못견뎌하시지도 않습니다. 비록 그분이 우리의 상황을 돌연 바꾸어주시지는 않으실지라도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아픔 한가운데 함께 계셔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절대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분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어둠이 늘 있다면 거기에는 늘 하느님께서도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그 어둠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흔들리는 가슴을 꼭 끌어안아 주시면서요!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어둠을 지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이 진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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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25.03.25 05:00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테이블 끝에 있는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니?”라고 말하자, 아들은 곧바로 “그럼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그냥 자기 식사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왜 소금 통을 주지 않니?”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아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가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는지 물어서 저는 줄 수 있다고 대답했죠. 소금 통을 달라고는 하지 않으셨잖아요.”
‘소금 통을 건네줄 수 있니?’라는 질문이 그냥 질문 자체로 끝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안에서는 소금을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아들은 말 그대로만 받아들여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도 그렇지 않을까요? 그 안에는 “사랑하라”는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말 그대로만 받아들이고 실제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입으로는 계속해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행동은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만 급급하다면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고를 기념하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듣게 되지요. 그때 얼마나 놀라고 두려우셨을까요? 우선 하느님의 천사를 직접 보는 사람은 곧바로 죽는다는 당시의 생각도 떠올려졌을 테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기를 갖게 된다는 것도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게 됨을 예상할 수 있게 됩니다.
모두 죽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로 큰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4)의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곧바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모든 상황이 자기를 힘들게 할 것임이 분명하지만, 하느님을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일에 함께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굳은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해야 합니다. 더는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또 남의 사랑만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커지면서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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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삶에서 원하는 무언가가 있을 때 그것이 당신을 살아 있게 만든다(에바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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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탄생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 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 역시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 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께 결혼의 단란함과 미래뿐만이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어드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일이었습니다. 나아가서 그것을 희망하고 바라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름 하여, 말씀에 대한 ‘믿음의 봉헌’이었습니다. 그분의 희망 안에 일치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놀라운 일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기쁘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그 사랑을 퍼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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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세례명이 ‘가브리엘’입니다. 제가 정하지 않았습니다. 유아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점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모두 태어난 생일에 맞추어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9월에 태어난 큰 형은 미카엘, 12월에 태어난 작은 형은 사도 요한, 10월에 태어난 동생은 프란체스카로 정했습니다. 저는 5월에 태어났으니 마티아로 정했을 법 한데, 가브리엘로 정하였습니다. 부모님께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저는 ‘가브리엘’ 세례명이 좋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나자렛에 사는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마리아에게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복음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있으니, 저는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저의 수호천사인 가브리엘 천사가 늘 함께 있음을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위대한 마리아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 가야 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기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 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위대한 마리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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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 하느님의 외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육화한 사건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구원 사업의 시작일입니다. 말씀이신 하느님의 아들이 육화하신 이 신비는 구원의 시작, 즉 파스카 신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시작하셨지만, 그 안에 인간의 순명과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인간 구원 사업의 구성요소는 바로 순명과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순명과 믿음을 주님의 공생활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죽음 앞에서도 순명과 믿음을 하느님께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으로 가는 길의 열쇠이며 하늘나라의 열쇠입니다.
오늘은 이런 인간의 순명과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길을 걸으며 늘 시험받는 것이 바로 순명과 믿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순명과 믿음이 흔들리거나 사라졌을 때 우리는 길을 잃은 양이 될 것입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하느님은 사람의 협력을 통해 구원하고자 하시며, 마리아라는 젊은 여성을 선택했습니다. 이는 동정녀 마리아 자신에게도 큰 은총이었습니다. 인류의 대표로써 동정 마리아는 하느님이 내린 구원의 문을 인간에게 열었습니다. 믿음에 기초해 아버지 뜻에 오롯이 순종한 결과인 것입니다.
순명과 믿음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는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나로 산다는 것은....
죽음 앞에 가 본 사람들이 대부분 후회하는 것은
’나로 살지 못했다. ‘라는 것이다.
도대체 나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그저 욕망에 사로잡혀서 하고 싶은 것을 거리낌 없이 하는 것이 나로 사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동물에 가까울 것이다.
그럼 도대체 무엇인가?
모두가 부러울 만큼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들도
마지막에 후회하는 것이 바로 ’나로 살지 못했다.‘ 이다.
어쩌면 삶이 다할 때까지 늘 자신에게 질문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로 살고 있는가?
사랑하고, 가슴 뛰고, 스스로 주도적 삶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있는가? 말이다.
틀에 박히지 않고 온전한 그저 한 사람의 나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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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선물 인생을 삽시다
“정주, 경청, 순종”
새삼 묻게 되는 질문입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선물인생이 되면 참 좋겠는데 본의 아니게 짐이 되는 인생도 얼마나 많은지요? 삶의 현실은 선물인생에서 점차 짐으로 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선물인생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선물인생이 되고자 부단한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물인생으로 살 수 있을까요?
성모님의 삶이 그 모범입니다. 성모님처럼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이 얼마나 하느님의 전폭적 신뢰와 사랑을 받고 있는지는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참으로 눈밝으시고 겸손하신 하느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마리아 성모님을 방문하십니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에 들어서자 마자 한 인사말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요즘 이 말씀은 제가 고백성사 보속으로 말씀처방전에 가장 많이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실제 실명을 넣어 써드리고 꼭 읽어보도록 합니다. 얼마나 은혜롭고 고무적인 말씀인지요! 이 말씀에 몹시 놀란 마리아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합니다. 마리아 성모님께서 얼마나 깊은 내적 관상의 삶을 살고 있는지 하느님께서도 반하신 마리아입니다. 이어지는 천사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하느님의 심중을 그대로 반영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격찬입니다. 우리는 정말 고귀한 품위의 참사람 하나 바로 마리아를 만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 주신 참 좋은 선물, 참 좋은 분, 마리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마리아 성모님처럼 살 수 있을지 세 측면에 걸쳐 나눕니다.
첫째, 정주의 삶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며 늘 새롭게 시작하는 정주의 삶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 늘 새로운 정주의 삶을 살게 합니다. 나자렛 시골 마을에서 마리아 성모님은 분명 이렇게 사셨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정주의 삶에 충실하면 언젠가 그 때가 옵니다. 겸손하시고 눈밝으신 주님은 때가 되자 당신 천사를 통해 마리아를 방문하시어 격찬의 인사말을 쏟아 놓으십니다. 마리아 성모님뿐 아니라 한결같은 정주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축복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둘째, 경청의 삶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입니다. 침묵의 사랑, 침묵의 지혜입니다. 정주의 삶과 함께 가는 침묵의 삶입니다. 말없는 침묵이 아니라 주위에 활짝 열려 있는 깨어 있는 사랑의 침묵은 관상적 삶의 기초가 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맨먼저 나오는 말씀도 “들어라, 아들아!”이며 구약의 예언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한 것도 주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귀를 기울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집중하여 듣는 경청입니다. 새삼 경청도 훈련이요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천사와의 문답을 통해 마리아가 얼마나 주님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는 경청의 사람인지 단박 들어납니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도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말씀입니다만 마리아의 응답은 참 신중합니다. 얼마나 깊은 경청의 사람인지 잘 드러납니다. 마리아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묻자 천사는 거침없이 하느님의 속내를 다 털어놓습니다. 주님은 이처럼 마리아를 신뢰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셋째,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정주, 믿음의 경청, 믿음의 순종입니다. 정주의 훈련, 경청의 훈련, 순종의 훈련 그리고 습관화입니다. 자발적 사랑의 순종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마리아 성모님의 즉각적인 순종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온 인류의 전환점이 된 오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하느님은 일방적으로. 강제적으로 구원역사를 펼치지 못합니다. 인간의 자발적 응답을, 협력을 필요로 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에 하느님은 얼마나 기뻐하시고 고마워하셨을지 짐작이 갑니다. 성모님을 한결같이 끝까지 아드님과 함께 하시면서 순종의 여정에, 비움의 여정에 시종여일 충실하셨습니다. 모전자전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을 그대로 닮은 제2독서 히브리서에서 아드님 예수님의 거듭된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 두루마리에 저에 관하여 기록된 대로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
마리아와 예수님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의 공통적 삶의 의미는 나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 이 하나뿐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니에서 감동적 기도와 마지막 임종어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고 요한복음의 십자가상에서 고백의 임종어입니다.
“다 이루었다!”
마리아 성모님의 순종의 응답이 있었기에 비로소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사야서를 통한 주님의 신탁이 마침내 실현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모심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또 하나의 임마누엘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은총이 우리 모두 정주의 삶, 경청의 삶, 순종의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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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6-29)
마리아가 동정성을 하느님께 예물로 바치다
마리아는 참으로 은총이 기득한 분이셨습니다. 거룩한 은혜를 입고, 가장 훌륭한 예물인 당신의 동정성을 하느님께 바치셨으니까요. 평소 천사를 본받아 살기를 힘쓰신 분이니, 직접 천사를 만나 그의 말을 듣는 기쁨을 맛보신 것은 참으로 합당한 일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분은 은총이 가득한 분이셨습니다. 우리에게 은총과 진리를 전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요한 1,17 참조)가 그분한테서 태어나게 되었으니까요. 주님께서는 진실로 그분과 함께 계셨고, 일찍이 전례 없는 순결에 대한 사랑 안에서 그분을 들어 올려 세속의 욕망을 떠나 하늘을 사모하게 하셨으며, 그런 다음에는 당신의 신성과 인성을 동원하여 그분을 성화하셨습니다. 진실로 그분은 모든 여인가운데 복되신 분입니다. 그때까지 어느 여인도 경험하지 못한 일, 곧 처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채 어머니가 되는 영예를 누리셨으니까요. 아들이신 하느님께서는 처녀 어머니에게서 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존자 베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7
지성을 버리고 순수한 무지를 경험하라
예수가 열두 살 되던 해에도...(루카 2,42).
여러분은 일부는 여러분 자신이 준비하고, 일부는 하느님이 준비하시기를 바라겠지만,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신속하게 혹은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했건만 하느님이 준비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준비는 여러분의 몫이고, 감화를 주고 고취하는 것은 그분의 몫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자마자 곧바로 감화를 주시고 자신을 주입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내키면 일하고 내키지 않으면 일하지 않는 목수와 같은 분이라고, 자신의 뜻에 따라서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준비되어 있음을 보실 때마다, 하느님은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시고, 자신을 여러분에게 부어 넣으시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공기가 맑고 깨끗할 때 햇볕이 자신을 공기 속으로 부어 넣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이 무애(無碍)의 상태에 있음을 보시고도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지 않고, 여러분에게 큰 복을 부어 넣으시지 않으신다면,이것이야말로 하느님의 큰 결함일 것입니다.(357)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거룩한 성심에 대한 묵상, 요셉 맥도넬 신부
성심에 대한 묵상
첫 번째 시리즈
첫 금요일 신심
II. 성심을 둘러싼 가시관
자기 성찰을 위한 요점들
고난에 대한 신심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그와 함께 통치할 것이다,”라고 성 바오로가 말합니다.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실제로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고난의 기념물에 대한 신심.
다음은 그 기념물들입니다:
(a) 십자가 : 글을 쓰거나, 읽거나, 일하거나, 특히 기도할 때 항상 십자가를 내 앞에 두고 있습니까? 자주 입에 대고 헌정하며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b) 십자 성호 : 십자 성호를 경건하게, 주의 깊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서두르거나 대충 합니까? 영적인 적에 대한 보호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자주 합니까?
(c) 성심의 그림, 메달, 배지, 동상 등 : 이러한 이미지에 경의를 표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약속을 알고 있습니까? 성심의 배지나 스카풀라를 착용하여 큰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심의 그림과 동상들 앞에서 경의를 표하고 기도합니까? 어린이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권장합니까? 집에 세워질 것을 추천합니까?
(d) 십자가의 길 : 이 신심을 자주 수행하는 것은 열정을 유지해 주고, 성심에 매우 기쁘고, 연옥의 영혼들에게 큰 위안을 제공합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받는 두 번째 방법은 우리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결합하고, 그가 어떻게 고난을 견뎠는지 배우며 그것을 견디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혼 안에서 또는 몸 안에서, 또는 명예에서 고난을 겪습니다.
내 영혼에서 : 슬픔, 불안, 우울, 외로움, 걱정 등 정신적 고난을 어떻게 견디고 있습니까?
내 몸에서 : 신체적 고난, 질병, 피로, 불면증, 더위와 추위 속에서 초조하고 인내하지 못합니까?
내 명예에서 : 거짓으로 비난당하거나 의심을 받거나 중상모략을 당하거나 명예를 잃거나 친구들의 냉대나 잊혀짐에 어떻게 행동합니까?
예수님! 여기서 당신과 함께 고난받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어 나중에 당신과 함께 다스리게 하소서.(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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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생활묵상 : 이름 모르는 한 귀여운 여중생을 보며 하느님을 생각해봅니다.
강만연 [fisherpeter] 2025-03-24 ㅣNo.180997
며칠 전이었습니다. 스터디 카페에서 책을 좀 보다가 시간도 늦었고 해서 그만 집에 가려고 정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카페 존 밖에 카페에서 인쇄물을 프린트할 수 있는 곳이 있습니다. 한 학생이 모티터를 보고 있는데 잠시 표정을 보니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즘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컴으로 인터넷을 보려고 한 건 아닐 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 추측에는 프린트를 하려고 했는데 프린트기에 용지가 없어서 인쇄를 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주인이 일정 부분만 넣고 가급적이면 개인이 용지를 준비해서 사용할 것을 권장하는데 보통 학생들은 잘 지키지 않습니다. 마침 이 학생이 누군지 저는 잘 몰랐는데 제 옆 자리에 앉은 학생이었습니다. 정리를 하고 나가서 알았습니다. 저도 정리를 하고 나간 후에 프린트를 할 게 좀 있어서 인쇄를 하는데 제 인쇄물이 나오지 않고 다른 인쇄물이 나온 것입니다. 국어 문제집 인쇄물이었습니다. 제 추측이 맞았습니다.
제딴에는 인쇄를 하려고 출력을 엔터했는데 용지가 없어서 인쇄가 안 되었기 때문에 이유야 어찌 됐든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 같았습니다. 요즘 애들 표현으로는 꿀꿀한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인쇄할 용지는 제 개인 걸로 인쇄를 합니다. 그날 제가 그 여학생 프린트물을 제 용지로 출력된 것을 탁상 옆에 약 30매 정도 되는 것을 올려놓고 난 후에 나중에 그 여학생이 찾아갈 수 있도록 포스트잇에 간단한 메모를 남겼습니다. 몇 번 자리에 앉은 여고생 이 인쇄물 잘 찾아가요.... 옆 자리 앉은 아저씨가,,, 그 다음날 보니 찾아가지 않았고 또 다음날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인이 다른 곳에 보관을 해놓았습니다. 아마 3일 후에 원래 자기가 앉은 자리 제 옆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제가 그 프린트물을 가져다 주었던 것입니다. 조용히 공부만 하는 공간이라 말은 하지 않아도 주니 애가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더군요. 중간에 자리를 그 애가 비운 후에 저도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일어나 옆 자리를 보니 여고생이 아니고 중학생이었습니다.
원래 규정상 중학생은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서 저는 여고생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날도 저도 그만 집에 가려고 짐을 정리를 했습니다. 마침 공교롭게도 그 애도 그만 집을 가려고 짐을 정리해 거의 같이 카페를 나가게 됐던 것입니다. 카페를 나가니 차 하나가 있었습니다. 가만 보니 아마 부모님이었을 겁니다. 애를 픽업하기 위해 기다린 모양입니다. 그때 그 애가 차를 타기 전에 저에게 인사를 하더군요. 아마도 인쇄물을 챙겨준 것에 대한 감사함이었을 겁니다. 저는 이 상황이 그날 있었던 전체 배경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애가 한 행동을 보면서 집에 가면서 묵상을 했습니다. 지금부터는 가상이지만 저의 상상입니다.
일단 그 애는 기본이 된 아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날 공부를 하면서 아마 잠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주 잠시 제가 그 애 얼굴을 자세히 볼 수도 없었고 또 그럴 시간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 인쇄물을 제가 프린트해 그것도 자기가 오니 챙겨준 걸 보며 감동이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찌됐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마 마지막에 그 마음을 차를 타기 전에 인사로 대신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냥 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요즘 애들이 가정교육이 잘 안 된 아이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이후 오면 어찌된 일인지 제 자리 옆에만 앉습니다. 원래 자리를 배정할 때 키오스를 보고 자기가 빈자리를 선택하는 시스템입니다. 어른이든지 보통 보면 사람의 심리가 자리를 앉으려고 선택을 할 때 가능하면 옆 자리에 사람이 있으면 잘 선택하지 않고 다른 자리를 선택하는 게 보통의 심리입니다. 조금은 흥미로웠습니다. 선택을 했더라도 또 자리를 변경하려면 얼마든지 변경을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 학생이라면 아마도 다른 자리에 여학생이 있거나 아니면 언니 같은 사람 근처로 갈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그 이유는 제가 알 필요가 없습니다. 여중생이라는 걸 우연히 안 후에 한 생각이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생각이지만 이 아저씨가 내가 그렇게 삭았단 말인가 하고 내심 생각하며 조금은 우낀 아저씨네 하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일련의 이런 일을 보면서 하느님의 마음을 묵상해봤던 것입니다. 갑자기 왠 하느님의 마음을 이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원래 규정대로라면 출입을 하며 안 됩니다. 저는 다른 곳도 아니고 그냥 이런 학생을 보면 눈감아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클레임을 거는 사람도 많습니다. 만약 엉뚱한 짓이나 하고 하면 저도 따끔하게 주인에게 아니더라도 주의를 줄 수 있지만 보니 조용히 공부만 하고 가기에 굳이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중학생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생각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궁금하시죠?
저는 하느님이 아니고 사람입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사람이지만 하느님이라고 빙의를 해서 이 상황을 바라본 것입니다. 그 여학생은 사람이라고 가정을 한 것입니다. 오늘도 조금 전에 제 옆자리에 있다가 오늘은 많이 공부를 하지 않고 조금전에 귀가를 하더군요. 이 학생이 출입규정을 위반한 것을 저는 인간이 죄를 지은 것으로 대입해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이 애가 조용히 하지 않고 조용히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제가 주의를 줬을 겁니다. 규정을 위반했어도 말입니다. 인간인 저도 이런 생각을 하는데 만약 우리 인간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런 유사한 상황이 일어난다면 과연 하느님은 어떤 생각을 하실까 하는 게 중요한 저의 화두였습니다. 우린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켜야 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걸 지켜야 하는데 지키지 못했다면 마치 그 여학생과 같은 유사한 상황인 것입니다.
근데 제가 얼마든지 규정 위반을 언급하며 주인에게 클레임을 걸 수도 있는 경우도 있고 또 그 애한테 주의를 줄 수 있지만 하지 않은 이유가 비록 규정을 위반하긴 했지만 카페에서 해야 하는 위반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도 그 테두리 안에서 잘 규정을 지킨 것이기 때문에 굳이 그 규정 위반을 탓하기엔 어려운 상황인 것이었던 것입니다. 만약 규정이라는 틀과 규칙에 매여 그 애를 쫒아내기보다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허용하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규정이 있는 근본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이와 같은 제한 때문이 아닙니다.
어린 학생들이 면학분위기를 흐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규정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취지를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이 애는 면학분위기를 흐리지 않고 조용히 카페의 목적에 잘 이용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그런 규정 때문에 제한을 가하는 것도 어쩌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학생에게는 마치 억지 논리로 주장을 한다면 학습권을 침해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런 걸로 헌법소원을 할 사람은 없겠지만 흥미로운 것입니다. 바로 복음에 나오는 내용과도 매치해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계명이 있다면 그 계명도 그 계명이 존재하는 근본적인 취지를 생각해야 하는 게 바로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그냥 단순히 그런 걸 생각하지 않고 흑백논리처럼 단순히 어긴 것에만 초점을 맞추면 비논리적인 방식으로 어떤 한 사람을 단죄하는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상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여학생에게 눈감아 준 이유는 제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입니다. 비록 우리가 나약한 인간이라 하느님의 법을 잘 못지키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조용히 이 여학생처럼 공부만 하는 행위가 마치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꾸준히 해나가게 된다면 하느님 역시도 이런 것처럼 저희의 잘못을 눈감아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때 눈감아주시는 게 그냥 모른 채 하고 넘어가실 거라는 그런 개념보다는 이게 바로 어쩌면 하느님의 자비라는 개념으로 생각해도 크게 무리는 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자비라는 게 바로 그 원천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젠 가벼운 이야기도 조금 하고 싶은데 그 이야기는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컴퓨터 자판과 노트북 모니터를 보며 타이핑을 하니 눈도 피곤하고 그래서 이젠 여기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 아이 때문에 하느님의 마음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작성한다고 책을 보는 시간을 빼앗기긴 했지만 좋을 것을 묵상할 계기를 준 여학생에게 이름은 모르지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게 없었다면 이런 걸 묵상할 기회가 없었을 테니 말입니다. 귀여운 여학생!! 아저씨가 고맙게 생각해!!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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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하느님 은총의 손길을 오직 순종으로 /
박윤식 [big-llight] 250324.19:38 ㅣNo.18099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주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로, 나자렛의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하셨다는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으셨다는 뜻이다. 본디 이 대축일은 '3월 25일’로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태중에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어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올 거슬러 계산한 것이다. 이 대축일이 성주간에 오면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로 옮겨 지낸다.
천사가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한다. “보라, 이제 네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는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릴 것이다.” 이에 그녀는 얼마나 놀라 당황하였을까? 어찌 이런 일이? 더욱이 결혼하지 않은 상태서 잉태라니. 당시 율법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런 마리아에게 천사가 용기를 북돋는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렇지만 그녀가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엄청난 불안에 휩싸였으리라. 앞날을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을 게다. 그런데 천사의 그 말은 그녀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되었을 게다. 용기를 얻은 마리아는 응답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대답이 아니다. 죽음마저 각오한 거다. 결국, 그녀는 희망과 함께 주님 뜻을 받아들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실현하려고 온 힘을 다했다. 그분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믿었기에.
우리도 살면서 시련과 고통을 겪지만, 그 어떤 일에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는 진리를 결코 잊지 말자. 그러기에 희망을 갖고 끝까지 하느님께 달려가 매달리자. 하느님께서는 나의 아픔에 동참하시며 끝까지 내 곁에 계실 것이니까. 사실 이천 년 전, 유다땅에서의 처녀 임신은 아마도 죽음을 각오한 그 이상이다. 설령 죽지 않아도, 처녀 엄마로서 미혼모 노릇을 해야만 했다. 동네에서는 끝없이 눈총을 받으리라. 아낙네들의 입방아는 참기 힘들 수도.
그러나 마리아는 하느님에 대한 신뢰로 이 모든 시련을 견디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그분 말씀이 자신에게 꼭 이루어지길 고백했다. 믿음은 다른 이들이 주는 모욕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게 한다. 믿음은 그 어떤 상처나 고통에서도 잘 버틸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믿음의 그 튼튼한 바탕은 하느님이시기에. 그분께서 사람됨을 받아들인 이 응답은 지금 우리에게도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분께서 이렇게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는 행위니까.
마리아께서 가브리엘 천사를 만났기에 삶이 바뀌었다. 주님 탄생 예고를 받아들인 것은 한순간의 응답이 결코 아니리라. 처녀 잉태로 겪을 위험은 생명을 내놓는 것 이상이고, 설령 죽음을 피했다 해도 어머니로서의 당신 모든 삶을 바쳐야만 했다. 이처럼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리라는 전갈을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과 시련을 각오하셨을 것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하늘의 힘이 끌어 주니 기쁨일 게다. 이러한 기쁨 자체가 은총이리라. 어쩌면 사업이든, 인간관계든 가끔은 생각하지도 않았던 방향으로 나아감을 곧잘 본다. 평소의 신앙생활이 어떠셨는지를 짐작할 수가. 그러기에 천사는 마리아의 ‘어떻게 그런 일이?’라는 두려움에도 답이 없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만이 하시는 것이라나. 둘러보면 하느님의 손길은 어디에나 다 있다. 그러기에 마리아는 순순히 답했다. 우리 역시 그렇게 순종하여야 한다. 서운해 하지 말아야만, 그 안에 담긴 높으신 분의 뜻을 헤아릴 수 있을 터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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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한창현 모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천사는 마리아와 나눈 대화에서 다음 세 가지를 말합니다.
‘기뻐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성령께서 내려오실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든 인간의 내면 깊은 곳까지 닿아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 세 가지를 받아들여 믿음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은총이 가득한 이라 부르며, 기뻐하라고 하였습니다.
마리아는 몹시 놀랐지만, 먼저 상황을 파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곧이어 천사는 마리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천사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일이 주는 무게감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였고,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매일미사』의 묵상 글을 써 달라는 전화를 받고,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을 받은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능력도 없는 나를 왜 섭외하려고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로 성서 전공자들이 필진을 맡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두려움이 몰려 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차피 하느님께서 하실 겁니다. 그러니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대답이 나왔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지금까지도 묵상 글을 준비하는 것이 내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끊임없이 깨닫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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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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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옵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집에 들어와 인사합니다.
'기뻐하여라, 은총이 가득한 이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사람들은 두려워합니다.
하느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면서
땅에 엎드리는 모습이 많이 나타납니다.
오늘 복음의 앞선 부분인 즈카르야 이야기에서도
그는 천사를 보고 놀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의 마리아는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즈카르야의 경우처럼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이유가 다르게 표현됩니다.
즈카르야는 천사가 나타난 것 때문에 놀라지만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 때문에 놀랍니다.
즉 천사가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그리 큰 반응은 없는 것 같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다면
이성적으로 행동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심지어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해 봅니다.
천사는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한 이'라고 표현합니다.
은총이 가득하다는 것은
이어지는 말로 설명이 되는데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이'라고 해석됩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셨기에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느님을 직접 뵙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처럼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마리아는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은총을 가득히 받았기에
마리아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인지
마리아가 그렇게 노력했기에
은총을 가득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느님 곁에 머무는 것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 노력은 이제
주님의 종인 마리아를
주님의 어머니가 되게 합니다.
우리도 하느님 곁에 머물며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마리아처럼 은총이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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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루카 1, 31)
말씀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말씀이
내일의 탄생이
됩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멈출 수 없는
말씀의
생명력입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오고 계십니다.
말씀을 따라
말씀이
잉태됩니다.
잉태와
탄생으로
당신의
말씀을
하십니다.
말씀의 길이
우리 가운데
펼쳐집니다.
말씀을
깊이
체험합니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고
중심이 되는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임만이
하느님의 탄생을
이루는 신비가
됩니다.
말씀이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말씀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말씀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말씀은
사랑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탄생하시려는
하느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께서
탄생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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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아본 적이 있으신가요?
그냥 사랑이 아니라 ‘총애’(寵愛)! 총애받는다는 것은 적당히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유난히, 각별히 사랑받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로부터 총애를 받는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릅니다.
총애로 인해 삶이 바뀝니다.
총애받게 되면 우울한 색조였던 나날이 순식간에 화사한 색조로 변화됩니다.
총애는 한 존재를 고무시키고 참 사랑에 눈뜨게 만듭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은혜롭게도 사람으로부터가 아니라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총애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녀의 소박함과 순수함, 그녀의 작음과 겸손함 때문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의 이런 덕행을 바탕으로 한 즉각적인 응답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뿐만아니라 마리아는 순명의 모델입니다.
그녀는 하느님 뜻에 전적으로 순명하는 가운데 자신의 미래를 그분 손에 온전히 내맡깁니다.
천사 가브리엘과 주고받던 대화의 결론은 ‘예!’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는 언제나 순명을 요구하십니다.
성조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 조차도 번제물로 바칠 정도로 순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아버지께 대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고,
이 세상을 떠나신 것 역시 순명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기쁘게 순명할 때만 참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단순하고 겸손 가득한 마리아의 순명에 대한 하느님의 상급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거처하시는 새로운 도읍 예루살렘 성전이 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그 안에 끊임없이 살아계시는 계약의 궤로 재탄생합니다.
참으로 오묘하고 신비로운 초대,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하느님의 초대였지만, 기꺼이 응답한 마리아로 인해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본격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 32-33)
가브리엘 천사의 말은 지극히 간단한 선언같지만, 단어 한 마디 한 마디가 지닌 포스가 엄청납니다.
마치 작열하는 태양이나 산더미처럼 높은 파도같이 장엄합니다.
마리아의 적극적인 동의와 협조로 인해 이제부터는 또 다른 형태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또 다른 형태의 왕국이 건설될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시어, 그 시간을 끝없이 연장시키실 것입니다.
이제부터 건설될 왕국은 종래의 지상 왕국과는 비교조차 안되는 영원한 왕국, 불멸의 왕국이며,
그 왕국의 장엄한 광채 앞에 지상의 왕권은 빛을 바랠 것입니다.
새롭게 왕좌에 좌정하실 왕은 만왕의 왕이 되실 것이며,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서 지니실 통치권은 한계도 끝도 없을 것입니다.
이토록 위대하고 장엄한 인류 구원 사업의 첫 출발점은 바로 마리아의 ‘Fiat’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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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26-38: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진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나온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 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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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 안에 사시는 예수님은 어떤 연령대일까?
오늘은 성모 영보 대축일입니다.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나 신자들은 가톨릭 신자들이 성모님을 신성시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모님을 공경합니다.
신부님의 어머니도 신자들이 공경합니다.
하물며 하느님을 낳으신 분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어떤 인물을 낳은 어머니는 그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공경하게 될까요?
자녀가 어머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유치원 교사가 해 준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학급에 친구들 신발까지 정리해주며,
선생님 마음 아프니까 떠들지 말자고 친구들을 다독이는 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상담해 본 결과 그 아이 어머니는 아기가 태중에 있을 때 신구약 성경을 두 번 통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날 때부터 부모님을 생각하는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또 믿을 수 없었던 하나의 장면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본 것인데, 한 어머니가 아이들 몇 명과 함께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 하는 모습입니다.
아이가 대여섯 명 되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누나가 막내 아기를 안고 있었고 엄마는 거의 만삭인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울지도 않고 어린아이들이 엄마처럼 말도 안 하고 움직이지도 않으며 한 시간 동안 성체조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아, 태중에 아기가 있을 때부터 저렇게
성체조배를 하니 아이들에게도 그 영향이 가는구나!’였습니다.
저도 만약 결혼했다면, 아기 엄마에게 억지로라도 ‘하.사.시.’를 읽게 하고 매일 ‘성체조배’를 태교로 시켰을 것 같습니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산만한 아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이 부모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기는 부모의 모든 것을 받고 자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에게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셨을까요?
하느님은 요셉 성인에게 천사를 보내시어 마리아와 혼인하고 마리아와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거나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 힘이 없으십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주저했다면, 헤로데에게 아기를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자연의 법칙에서 제외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인간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이 되어가는 과정을
‘모범’으로 보여주셔야 하는 분이셨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하느님이셨다면,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요셉 성인이 성모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것도 끔찍한 일입니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처음부터 튼튼했거나 지혜가 충만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고 충만해진 것입니다.
여기서 튼튼해진다거나, 충만해진다는 동사는 ‘미완료형’입니다.
미완료형은 지금도 반복해서 진행중인 상태라 완성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완성된 상태로 잉태되거나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형성되는 과정’을
겪으셨다는 뜻입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고 특별히 성모 마리아의 역할은 더 절대적입니다.
만약 성모 마리아가 죄에 조금이라도 물들었다면, 예수님도 죄에 물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부모의 죄는 자녀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구약에서 죄에 물들지 않아야만 하는 성모님의 모델은 ‘파라오의 딸’일 것입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전형입니다.
당시 파라오라는 사탄과 같은 존재에 의해 모두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파라오의 딸이지만, 파라오의 영향을 받지 않는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딸은 파라오의 명령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일강에 떠내려온 모세를 키웁니다.
그 공주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은 파라오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모세를 살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 여인을 찾으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런 면에서 당신 자신도 죄에 물들면
안 되는 분이셨고,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미리 마련하셨듯이 성모님도 미리 마련되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1베드 1,20)
그리스도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육체를 지니셔야 했다면,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그 육체를 주셔야 하는 성모 마리아도 미리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시며 마련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많은 신학자들은 첫 피조물인 ‘지혜’를 성모 마리아로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모시고 엘리사벳을 방문하십니다.
엘리사벳은 성모님의 인사를 받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찼습니다.
이때 성령은 누구에게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아기 예수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어떻게 오실까요?
성모 마리아의 인사를 통해 오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 안에서 ‘아기’처럼 우리가 하는 것에 따라 은총을 주시며 순종하십니다.
다만 우리 안에 죄가 있다면 그 죄 때문에 쉽게 돌아가실 수도 있는 약한 상태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예수님은 우리 안에 어떤 모습으로 살아계실지 궁금해합니다.
저는 분명 성모님께 그러하셨듯이 ‘아기 예수님’으로 계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성모님은 구원의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른으로 우리 안에 사실 수는 없습니다.
어른은 나에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예수님은 내가 죄를 지으면 내 안에 사실 수 없습니다. 영향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다만 살아계신다면 신적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이것을 깨닫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성모님을 어떻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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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26-38).”
1)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아홉 달 뒤에 이루어질 일이지만, 메시아 강생은 이미 시작된 일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첫 인사말이 “기뻐하여라.”입니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은, 마리아가 누리고 있는 ‘은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하고, ‘메시아 강생’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2) 마태오복음을 보면, 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22-23).”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라는 말에는,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마리아하고만 함께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하고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사람들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가까이 하느님께 다가가신 분이고, 온전히 하느님과 함께 사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의 모범이 되시는 분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라는 인사말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마리아를 선택하셨음을 알려 주는 말이기도 하고, 마리아 쪽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즉 마리아의 신앙생활을 찬양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주시는데, 사람들이 받는 것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고 온 삶으로 잘 받는 사람이 그 은총을 제대로 받아서 누릴 수 있습니다.>
3) ‘메시아 강생’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각 개인의 입장에서는 ‘나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오셨고, ‘나를’ 구원하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나를’ 하느님 나라로 데리고 가려고 부활하셨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자신의 힘만으로는 구원에 도달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받아 주셔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셔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낙타와 바늘구멍’ 이야기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나타냅니다.
4)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에 있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절).” 라는 천사의 말은, 원래는 동정녀의 성령 잉태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신앙생활은, ‘나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과 구원받기를 바라는 희망 속에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5)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저런 나쁜 놈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갈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의 구원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가족이든지, 친구든지, 누구든지 간에......
정말로 구제불능처럼 보이는 죄인이라도,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그를 회개시켜서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자신이 스스로 포기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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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1,26-38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합니다. 존재감 조차 없는 단역이나 ’행인 1’에 만족하는 사람은 없지요. 물론 우리들 각자는 자기 삶에서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고 해서 나의 삶이나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이는 그 점을 굉장히 답답해하고 억울해하지만 그게 삶이고 세상입니다. 내 삶을 어떻게든 내 뜻대로 해보겠다며 용하다는 무당들을 찾아다니지만 그 대가로 얻는 것은 기껏해야 자기만족과 합리화, 그리고 근거 없이 막연한 낙관론 정도이지요. 우리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안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왜 열심히 기도했는데 자기 뜻을 이뤄주시지 않느냐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망과 좌절 속에 하느님과 담을 쌓고 신앙에서 멀어지는 분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말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은 내 삶이라는 영화를 연출하시는 감독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그 감독님은 바로 내 삶과 세상 전체를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이시지요. 그러니 그 영화의 주인공인 나는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만약 주연 배우가 감독이 정한 영화의 스토리나 연출이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며 제 멋대로 바꾸려고 든다면 그 영화는 산으로 갈 것입니다. 당연히 참담한 실패라는 결과도 따르지요. 반면에 주연 배우가 감독의 영화 철학을 깊이 이해하고 긴밀히 소통하며 극의 흐름에 잘 맞는 연기를 펼친다면 당연히 그 결과물도 좋게 나올 겁니다. 마찬가지로 내 삶과 나를 둘러싼 세상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섭리해가시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라야 오해와 절망 속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삶을 의미있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 가브리엘 대천사를 시켜 마리아가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할 것을 예고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아직 약혼자인 요셉과 같이 살기도 전인데, ‘남자를 모르는’ 순결한 처녀의 몸으로 어떻게 아기를 잉태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합니다. 하느님께서 자기 삶이라는 영화를 어떤 식으로 연출해가실지 부족한 자신은 알 수 없지만, 불가능을 모르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은 어떤 고난과 역경, 인간적인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마음에 품은 좋은 뜻을 이루실 것을 굳게 믿었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 자신에게도 가장 좋은 길이라 확신했기에 그분 뜻을 받아들이고 따른 것입니다. 그 결과 인류 구원이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담은 위대한 작품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불가능을 모르시는 전능하신 분이지만, 당신 피조물인 우리의 응답과 협력을 바라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순명과 실천 없이, 당신 편에서 일방적으로 모든 걸 이루시고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수동적으로 그 결과에 휩쓸리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리고 그 뜻에 기꺼이 순명하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며 당신 뜻을 이루시는 기적의 자리가 됩니다. 그러니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느님 뜻에 ‘아멘’하고 응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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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성경의 역사를 보면 신비로운 것이 많습니다.
특히 이사야를 통하여 유다의 아하츠 왕(기원전 742-727통치)에게 전해지는
메시지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아람 임금 르친과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연합하여 유다 왕국을 침공하여 나라의
존폐가 달려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아하즈에게 북부 이스라엘은 멸망하겠지만
유다는 남아 있으리라는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제국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이르십니다.
그렇지만 두려움에 떨던 아하츠는 하느님보다는 아시리아의 왕 티글랏
필에세르(기원전 745-727)에게 도움을 청하였던 것입니다.(2열왕 16,7-9참조)
이사야는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표징을 청하라고 하지만 아하즈는 예언자의
말을 거절합니다. 결국 그는 하느님보다는 막강한 아시리아의 도움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그의 하느님께 대한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히브리어로 처녀는 ‘버툴라 בְּתוּלָה’라는 단어가 있는데 여기에서 처녀, 또는
젊은 여인을 뜻하는 ‘알마 הָעַלְמָה’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학자들 중에는 몇은 ‘알마’라는 단어가 처녀로 쓰인 성경(창세 24,4; 탈출 2,8; 시편 68,26)을
들어 젊은 여자보다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말하는 이름이 보통 인간의 이름이 아닌 ‘임마엘 עִמָּנוּ אֵל’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와 처녀와 연결시켜서보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초자연적인
더욱 살아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동정녀이신 성모님에게서 이 의미가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사야가 전한 임마누엘에 대한 예언이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졌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계획을 전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0-31)
물론 마리아는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하며 질문하지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천사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35절)
그리고 가브리엘은 친척 엘리사벳이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갖지 못하다가 임신을 해서
육개월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에 마리아는 천사에게 대답하지요.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성모님의 신앙과 순명이 담긴 마지막 문장을 풀어봅니다.
희랍어 원문에는 ‘γένοιτό μοι κατὰ τὸ ῥῆμά σου’ 이고 영어 KJV번역에는
‘be it unto me according to thy word’이고 라틴어 vulgata 번역에는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로 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피앗 fiat'이라는 말을 사랑하는데 그 뜻은 ‘그대로 이루어 지소서’이지요.
성모님의 이 대답에는 하느님께 절대적인 순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유다의 왕 아하츠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불순명 가운데 이 표징에 대한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나자렛의 한 처녀에게서는 하느님께 절대 순명하는 가운데 임마누엘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기쁜 소식은 나자렛의 한 처녀, 마리아에게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순시기에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이시는 주님의 순명과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에 순명하시는 성모님의 하느님 사랑을 묵상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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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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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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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5.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이루는 삶
<2025.3.25> 아침을 여는 묵상 (눅 15:1~10절)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이루는 삶❞
❚ 한 생명이라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 전도에 열정을 쏟는 삶이어야 합니다.
✔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도해야 합니까?
➲ 구원에는 차별함이 없어야 합니다(1~2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은 죄인으로 낙인 찍혀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어울리며 더불어 음식을 나눈다며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온 목적은 ‘...말씀을 들으러...’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심지어는 ‘...죄인을 영접...’하는 자라고까지 비난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과 식사까지 하셨으니 유대인의 관점에서는 비난받아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준과 규례를 따르지 않는 예수에 대하여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여 구원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거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특별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혐오하고 기피 했습니다. 천국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자신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의 교만과 잘못된 선민의식에 대하여 예수님은 강력하게 책망하셨습니다. 구원받을 대상을 우리 임의대로 가정하거나 결정할 수 없습니다. 혹여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도 구원의 대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전히 우리의 주변에는 삶의 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돈과 술 그리고 세상의 욕망과 분노 그리고 절망과 거짓에 찌들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희망이라는 것을 얻기 위해 세상 속에서 발버둥을 칩니다. 그러나 희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그들을 향한 편견과 정죄함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희망을 찾아가도록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는 차별이 없다는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 역시도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차별을 두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구원에는 간절함이 없어야 합니다(3~7절).
예수님은 양 백 마리를 가진 사람이 양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낼 것이라는 비유(3~4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찾다’라는 말속에는 ‘그가 그것을 찾을 때까지’라는 뜻을 담고 있어, 목자가 양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들판을 헤맸음을 보여줍니다.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애타고 간절한지, 그는 그 양을 찾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찾아낸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 하며 집으로 와서는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6절)하며 기쁨을 함께 나눕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은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7절,새번역)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귀한 영혼이 아닌 단지 죄인으로만 보인다면 내 안에 목자의 마음, 주님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논리로 보면 아흔아홉 마리를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들에 둔다는 것은 굉장히 무모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잃어버린 생명에 대한 간절한 마음과 포기할 수 없는 마음을 오늘 나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양 떼가 흩어졌을 때에 목자가 자기의 양들을 찾는 것처럼, 나도 내 양 떼를 찾겠다. 캄캄하게 구름 낀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서 내 양 떼를 구하여 내겠다...’(겔 34:12)... 잃은 양들을 간절히 찾아 다니시는 하나님의 참 목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회적 울분을 일으킬 만한 중범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하여 세상은 수많은 돌맹이를 던질지라도 그 부모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자식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 한 사람을 구원이라는 문에 들어서도록 하시기 위한 간절함이 있으셔서 한때 잃은 자로 살아가고 있었던 나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까지 구원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알찐대 나 역시도 한 사람의 영혼을 향한 간절함을 가지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구원에는 포기함이 없어야 합니다(8~10절).
예수님은 열 드라크마를 가진 여인이 그중 하나를 잃으면 온 집을 쓸며 찾을 것(8절)이라고 하는 비유를 들어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녀는 잃어버렸던 동전을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하여 벗과 이웃을 초대하여 함께 기뻐해 줄 것을 권유(9절)합니다. 동전은 여인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었으며 다시 찾은 기쁨은 말로다 표현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잃어버린 자기의 백성을 되찾을 때 매우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이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 죄인 한 명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 기쁨의 원천입니다.
세상은 한 영혼을 쉽게 포기하지만, 내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은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시기와 질투가 넘쳐나며, 음란함이 들끓으며, 분노를 참지 못하며, 용서와 이해가 부족하며, 하나님의 자녀됨을 망각하는 등 성경에서 말하는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포기는 그 어디에도 없음에 오늘도 나는 호흡하며 살아갈 수 있음이 감사할 뿐입니다. 이런 나를 껴안고 살리시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어리석은 나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 주셨고, 부활 생명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으시니 나 역시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지금의 절망적인 우리 상황도 그리고 복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논리와 이론으로 우리 자신을 무장하지 말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어 사랑으로 충만하게 무장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전도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임을 깨달아 포기하지 않고, 전도할 영혼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며 지혜를 얻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깨달아 누구에게라도 차별함이 없이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잃은 자로 있었던 나를 찾아주신 그 손길에 두려움과 염려를 이기고 소중한 복음의 가치를 주변에 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눅 15:1~10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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