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벌 때 그리고 쓸 때
유튜브 방송에서 떠드는 말 속에 얼핏 이런 소리가 섞여 있었다.
“주위에 돈 있는 사람들을 보면 두 가지 생각밖에 없어. 번 돈을 어떻게 더 불리나.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식에게 물려주냐지. 나는 말이야 돈은 벌 때가 있고 쓸 때가 있다고 생각해. 돈 버는 걸 중단하고 일정시점부터 돈을 써야 돼. 자식들은 나름대로 혼자 살아가는 거고 말이야.”
그 한마디가 파도같이 가슴 깊숙이 밀려 들어와 거품을 내면서 마음의 모래 뻘에 스며들었다. 일정 시점에서 돈 버는 걸 중단하고 쓰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선한 느낌이었다.
이십대 중반 육군 중위의 작은 월급을 받는 것으로 시작해서 칠십까지 경제활동을 해 왔다.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저축하려고 애를 썼다. 내게 돈은 가족의 생존이기도 했지만 내가 갈구하는 자유를 위해 절실하게 필요했다. 속물들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이 있어야 했다.
세월이 흐르고 소박한 생활로 인생의 여백을 채울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관성이 붙어서인지 그래도 자꾸만 돈을 벌고 싶다. 언제 삶의 종착역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브레이크를 밟아 욕망의 속도를 줄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돈 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 돈을 벌려고 할 때 경쟁도 갈등도 생기지만 쓰는 데는 그리고 주는 데는 그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마지막 일원까지 다 즐겁게 쓰고 가고 싶다.
동해의 바닷가에는 일인이 하는 작은 음식점들이 많다. 하루에 필요한 식재료를 준비하고 그게 떨어지면 바로 문을 닫고 자기 시간을 즐기는 경우가 많다. 돈을 버는 시간이 있고 그 돈을 쓰는 시간이 있다. 처음에는 그 행동들이 난해했는데 이제는 이해가 간다. 그게 올바른 삶의 패턴일지도 모른다고 속으로 동의하기 시작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돈을 쓰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가난한 집에서는 쓸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에 나와 돈을 버는 방법을 배웠다. 정직한 노동으로 땀을 흘리고 받은 돈이 귀하고 가치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그걸 쓰는 방법을 배워가고 있다. 사회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분위기에 어쩔 수 없이 돈을 기부하는 것은 돈을 제대로 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어떤 면에서 빼앗기는 것이다. 주는 데서 오는 진정한 기쁨이 있어야 한다. 주는 만큼 욕망이 소멸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연히 한 할머니의 돈 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들 내외에게 얹혀살던 그 할머니는 불편했다. 다행히 아파트 한 채가 있었다. 죽은 남편과 함께 땀 흘려 번 돈으로 얻은 아파트였다.
할머니는 그 아파트를 팔고 작은 방을 얻어 거처를 옮겼다. 몇억원의 차액이 남았다. 할머니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니는 손자와 손녀가 오면 그때마다 오십만원을 줬다. 며느리가 들릴때마다 백만원을 줬다.
할머니는 이따금씩 고급 호텔 레스트랑에 가서 화려한 식사를 즐겼다. 병원에 갈 때도 비싼 콜택시를 불렀다. 친구들을 불러 자주 밥을 샀다. 단골 지압사에게도 그동안 고마웠다고 하면서 의료용 침대를 선물하기도 했다. 주위에서는 그렇게 돈을 막 쓰다가 빈털털이가 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다.
어느 날 그 할머니는 조용히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들이 죽은 어머니가 남긴 통장을 꺼내 펼쳐보았다. 통장 안에는 아직도 몇억원의 돈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돈을 그렇게 써도 되는 거구나하고 생각했다. 그 할머니는 돈이 다 없어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을까.
한동안 국립도서관에 가서 조병화 시인의 시 전집을 읽은 적이 있다. 노시인이 삶의 마지막에 하늘에 대고 걱정을 하는 모습이 시에 나오고 있었다. 시인은 이 세상을 여행하라고 받은 노잣돈이 떨어져 가는데 때를 맞추어 데려가시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고 있었다. 하나님은 적당한 시점에 천사를 보내어 그를 불러올리신 것 같았다. 그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다석 류영모 선생은 늙어서 굶어죽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돈이 없으면 마지막 순간 최후의 행진을 하다가 죽을 결의를 가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몸이 쇠약해진 노인은 걷다가 금세 죽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부자였다가 순간에 모든 걸 잃고 가난하게 된 노인이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아직도 가슴속 골짜기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제주도 별장에 말이 네 마리나 있고 요트가 있었어. 술을 좋아하고 노는 걸 즐겼지. 돈을 쓰기는 했는데 전부 여자한테 써 버린 거야. 잘못했지. 너무나 허무하게 산 거야. 만약 내가 다시 부자가 되면 정말 돈을 잘 쓸 것 같아.”
그는 돈에 대한 지혜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와 반대로 돈에 대해 무서운 통찰을 가진 사람도 본 적이 있다.
내가 변협신문에 병든 가난한 시인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선배 변호사 한 분이 그 글을 읽고 시인에게 전해주라고 온라인으로 은밀히 돈을 보내왔다.
부장판사 출신인 그 선배 변호사는 개업을 하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 그는 어느 시점부터는 돈을 쓸 때가 왔다고 하고 신림동 고시촌에 작은 봉사의 집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고시 낭인이 된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일을 했다. 그는 장인이 평생 번 재산을 상속해 주겠다는 걸 사양했다. 대신 그 재산을 모두 종교단체와 대학에 기부하게 했다.
하늘나라로 가는 장인에게 가장 멋있게 돈을 쓰는 방법을 제안하고 실행하게 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천사들을 친구로 보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것 같다.
[출처] 돈을 벌 때 그리고 쓸 때|작성자 소소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