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057
11월29일[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연중 제3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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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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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wueJ0a5JGUI
[서울대교구 김종욱 바오로(성산동성당 부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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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기쁨의 날, 종말!>
사흘 내내 강풍을 동반한 비와 진눈깨비가 계속 내렸습니다. 늘 잔잔하던 바다도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표지판이 넘어지고, 그간 용케 버티고 있던 단풍들도 모두 떨어져 내렸습니다. 순식간에 가을에서 한겨울로 넘어온 느낌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 무엇 하나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물건들도, 죽고 못 살던 인연들도, 목숨처럼 중요시 여겼던 일도, 직책도, 사랑도, 젊음도 다 사라져간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끝도 없이 순환을 거듭하는 자연, 부침을 거듭하는 인간사야말로 인생의 참된 깨우침을 주는 큰 스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진리를 명확히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변화무쌍한 이 세상 보다는 하느님의 말씀에 더 큰 가치와 우위성을 두고 살아갈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은혜롭게도 하느님은 변화무쌍한 우리 인간과 달리 언제나 한결 같고 든든하십니다. 영원불멸하십니다. 언제나 그곳에 서 계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어떻습니까? 세월의 흐름 앞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서서히 무너져 내립니다. 천천히 사라져갑니다.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고 태초의 상태, 무(無)로 돌아가고 맙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도 가고, 꽃다운 청춘도 다 지나갑니다. 세상도 지나가고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권세도 잠시입니다. 모든 것이 떠나가고 인간 세상과 인류 역사의 끝에 오직 한 분만 남을 것인데, 그분은 바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끝, 종말에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겠지만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실 사랑은 끝까지 남아있을 것이라는 말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끝, 재림의 시기에 하느님을 거슬러 살아온 사람들, 하느님을 거부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무시무시한 공포의 때가 확실하다.
그러나 반대로 하느님 말씀 안에 살아온 사람, 하느님만 신뢰하며 그분만 붙들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해방의 날이자 구원의 날, 기쁨과 환희의 날이 분명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종말이 공포심에 부들부들 떠는 날이겠지만, 하느님 말씀 안에 산 우리들, 그분 말씀을 열심히 실천하며 살아온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또 다른 시작, 희망과 설렘으로 가득 찬 기쁨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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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mskLziErq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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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결단력을 잃고 우유부단해지는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덴마크 왕자 햄릿은 사고에 대한 집착과 성찰이 만성적인 우유부단과 결국 비극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햄릿의 삼촌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자신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복수를 요구하는 아버지의 유령을 만난 후,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의 철학적 성격은 삶과 죽음, 정의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든 상황을 과도하게 분석합니다.
햄릿은 신속히 행동하기는커녕 유령의 진위 여부와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에 시달려 지체합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기도하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를 죽이는 것을 자제하고 그러한 행위가 클라우디우스를 저주보다는 천국으로 보낼 수 있다고 자기 우유부단함을 합리화합니다. 햄릿의 끊임없는 망설임으로 인해 클라우디우스는 의심을 하고 햄릿에 대한 음모를 꾸미게 만듭니다.
그의 지나친 생각은 폴로니우스를 충동적으로 살해하고 그를 클라우디우스로 착각하는 등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며, 이는 폴로니우스의 딸 오필리아와 궁극적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련의 사건을 촉발합니다. 그의 지나친 사색은 그를 고립시키고, 주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주며, 결국 덴마크 궁정이 붕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햄릿과 같이 고민만 하다가 결국 인생을 우유부단하게 망치고 만 사례는 많습니다. 우유부단함은 생각을 많이 한 결과이고 이는 겸손과 신중함 때문이기보다는 자기 생각을 믿는 교만 때문에 발생합니다. 그 대표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Marcus Junius Brutus)입니다. 그는 자신을 철학자라 여겼습니다. 그리고 우물쭈물하다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암살에 참여하게 되고, 우물쭈물 하다가 안토니우스가 성장할 기회를 주어 결국 자살에 이릅니다.
지나친 생각은 오류를 낫습니다. 어떤 실험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거저 주고 그것 중 일부를
기부하고 싶은 사람은 기부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기부한 사람의 기부 양이 많을까요, 아니면 오래 생각한 사람들이 기부를 많이 했을까요?
연구자들은 직관적으로 결정을 내리는 개인이 더 관대하고 더 많은 금액을 기부하거나 공동 기금에 더 많이 기부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대조적으로, 숙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 참가자들은 일반적으로 덜 이바지했습니다.
생각은 자아와의 대화입니다. 뱀과 대화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증가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만 증가합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하고 싶거든 생각을 최대한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예수님은 무언가 결정할 때 ‘자연’을 보라고 합니다.
자연의 무엇을 보라는 말씀일까요? ‘법칙’입니다. 자연엔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결정하려는 것이 자연의 법칙과 일치하는가를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햄릿형과 반대되는 형이 돈키호테형입니다. 돈키호테는 자신에게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책을 읽고 해답을 찾았고 바로 실행에 옮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실제적인 유형의 사람이 14세기 스코틀랜드 왕 로버트 브루스 덤펌린입니다.
이야기에 따르면, 스코틀랜드를 영국의 통치로부터 해방하려는 노력에서 여러 번의 패배를 겪은 후 로버트 브루스(Robert the Bruce)는 낙담하여 숨어 지내게 되었습니다. 동굴에서 피난처를 찾으면서 그는 삶을 포기할 생각을 했습니다.
동굴에 있는 동안 그는 거미줄을 돌리려고 하는 거미를 관찰했습니다. 거미는 거미줄이 계속 부러지고 떨어지면서 반복적인 실패에 직면했습니다. 거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미줄을 완성하는 데 성공할 때까지 계속해서 시도했습니다. 거미의 결단력과 인내에 영감을 받은 로버트 브루스(Robert the Bruce)는 그의 투쟁을 계속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새로운 동기에 용기를 얻은 그는 군대를 모아 결국 영국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며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확보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가장 영향을 준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이였습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될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납니다. 그러나 고치를 만드는 모험을 하지 않으면 나비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자연이 알려주는 것입니다. 자연의 법칙에서 배우고 결정한 삶을 저는 후회해본 적이 없습니다.
결국 자신을 믿는 이들은 우유부단해지고 하느님의 뜻을 외부에서 찾는 이들은 결단력 있는 존재가 됨을 알았습니다. 자연과 책, 그리스도의 모범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틀리지 않습니다. 진리가 어렵다고 하지만, 실상 진리는 나뭇가지에도 있습니다.
항상 해답을 자연과 성경, 교회와 모든 법의 원천인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류에서 자유롭고, 결단력 있게 행동하여 우물쭈물하다 멸망하지 않습니다. 외부에서 해답을 찾는 일은 자기를 믿지 않는 겸손의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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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뜻밖에 등장하면 이런 말을 합니다. ‘네가 거기에서 왜 나와?’ 사제들의 모임에 스님이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이슬람 사원에 교회의 목사님이 있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지난번 미국 대선이 있었고,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 연설에 뜻밖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를 호명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일등 공신’이라고 추켜세웠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트럼프 대통령 후보에게 2,000억 원 이상을 지원했다고 합니다. 트럼프의 공약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매주 복권을 추첨해서 100만 불을 주었다고 합니다. 언론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2,000억 원을 투자했지만, 2조 원 이상의 이익을 얻었다.” 저는 예전에 일론 머스크의 강연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화성에 인류가 이주해서 살 수 있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는 소행성과 충돌할 수 있고, 지구 자체의 원인으로 큰 재앙이 닥칠 수 있습니다. 지구는 여섯 번의 멸종을 이미 겪었습니다. 화성에 인류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면 언젠가 다가올 재앙을 피할 수 있습니다.” 화성으로 가는 방법을 찾으면서 인류의 과학 기술은 더 발전할 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일론 머스크의 꿈이 인류에게 준 긍정적인 요소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꿈은 여러 방면에서 인류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비전은 단순히 기술 발전을 넘어서, 인류의 미래와 지속 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습니다. 테슬라를 통해 머스크는 전기차와 재생 가능 에너지 사용을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화석 연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이바지를 했습니다. 머스크의 비전은 단순히 수익을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기술의 상용화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스페이스X를 통해 우주 탐사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미래의 화성 이주 가능성을 높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주여행을 넘어서, 인류의 생존 가능성을 지구 밖으로 확장하려는 장기적 목표로 인류의 존재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습니다.
머스크가 추진하는 다양한 혁신 기술들은 단순히 미래를 꿈꾸는 데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이퍼루프와 같은 교통 혁신, 인공지능 연구, 뉴럴링크와 같은 신경 과학 기술 등은 인간의 삶을 더욱더 효율적이고 편리하게 만들려는 노력입니다. 테슬라 특허 공개와 같이, 머스크는 기술을 독점하기보다는 인류 전체의 발전을 위해 공유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이는 개인적 성취보다 공동체의 발전을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천한 사례로, 기술과 지식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머스크의 도전적인 꿈과 비전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특히 청년층에게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실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성공 사례는 개인의 꿈이 사회와 세계에 어떤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지 보여줌으로써,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열망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의 꿈은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000년 전에 묵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었습니다. 그것은 우주선을 만들어서 새로운 별을 찾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죽어서 가는 나라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꿈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도 우주선을 타고 새로운 별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생명은 죽음이 있기에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다가올 죽음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을 찾아야 합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질지라도, 변하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찾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며, 그것은 죽음을 넘어서 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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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21,29-33: 나무에 잎이 돋으면 여름이 다가온 것을 알듯이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29-31절) 하시고 예루살렘의 파멸과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를 미리 알아서 대비하라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많이 들어온 말씀으로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있으라는 말씀이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말씀을 들은 그 세대가 가기 전, 70년에 파괴되었지만, 예수님의 재림, 세상의 종말은 아직 오지 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시기의 징표는 알 수 있으나 그날은 하늘의 천사들도, 사람의 아들도 모르고 하늘에 계신 성부만이 아신다고 하였다. 이 세상 종말이라고 하는 것은 마태 25에서 말씀하시듯이 당신이 구원하신 온 세상을 성부께 바치는 날이며, 당신을 따른 모든 이들과 함께 새로운 축복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의 완성이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세상의 종말이 언제 올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 개인의 죽음, 나 자신의 심판과 종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어떻게 종말에 대비하여야 할 것인가를 더 걱정하고 염려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그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우리는 지금의 이 순간을 하느님의 자녀로서 충실히 살아야 한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삶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항상 깨어있는 삶이다. 그날은 공포와 기쁨, 영광 등 세상에 함께 있던 것을 분명하게 둘로 가르시는 때이다. 그것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지금의 삶의 태도와 계속 연결된 결과라는 것을 암시한다. 흥청대며 허송세월한다든지, 지금의 행동이 초래할 불행을 면하기 위해서는 그때가 언제인지는 분명히 모르고, 번갯불처럼 닥쳐올 것이기 때문에 지금부터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33절) 그 말씀이 이제 우리의 삶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우리의 삶을 언제나 종말론적인 삶으로 이어가도록 항상 깨어있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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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성 안드레아 사도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이며, 베드로의 동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가장 먼저 받은 제자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와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요한 복음서에서는 베드로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따랐다고 소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따라 하루를 함께 보내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려갔습니다. 그는 가장 먼저 부르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장 먼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복음을 전한 사도입니다.(요한 1,41 참조)
안드레아 사도가 보인 행적의 특징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 때에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예수님께 이끌었으며(6,8-9 참조), 예루살렘 입성 뒤 몇몇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뵙기를 바라자 그 말씀을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12,20-22 참조) 이처럼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사람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드레아는 주님을 가장 먼저 알아보았지만, 주님을 차지하려 하거나, 적어도 가장 먼저 부름받은 지위를 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주님을 드러내었으며, 자기 사람을 만들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안드레아 사도처럼 세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 교회 스스로 주님보다 더 중요해져서는 안 되고, 세상에서 교회의 지위와 안전을 보장받으려고 주님 말씀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거나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하면서가 아니라, 주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으로 교회는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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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과 욕심만 버려도...>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29-33)
1) 당시에 그 지역에서는 여름이 추수철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추수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종말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종말이 시작되었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 날’이 되면 종말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까이 오다.’는 ‘이미 시작되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 초기에 나자렛에 가셔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보면,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 이루어졌다."(루카 4,21)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메시아 시대가, 또는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떤 사마리아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 너희는 ‘아직도 넉 달이 지나야 수확 때가 온다.’ 하고 말하지 않느냐? 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눈을 들어 저 밭들을 보아라. 곡식이 다 익어 수확 때가 되었다. 이미 수확하는 이가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알곡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씨 뿌리는 이도 수확하는 이와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요한 4,34-36) 이미 추수가 시작되어서 진행 중이라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지금’이라는 시간은, 최후의 심판이 이미 시작되어서 진행 중인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또 우리가 그것을 실감하기도 어렵고, 의식하기도 어렵지만, 또 너무 느리게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떻든 종말과 최후의 심판은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진행 중이고, 곧 완성될 때가 올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 7,29-31)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1요한 2,15-18ㄱ) 사도들의 말은, 지금 당장 인생을 정리하라는 뜻은 아니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을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라는 권고입니다.
4) 만일에 ‘종말’과 ‘심판’이라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우리 앞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허무’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내세도 안 믿고, 종말도 안 믿고, 최후의 심판도 안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그렇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인생은 ‘허무’만 남게 됩니다.
사는 동안에는 허무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살다가, 죽을 때에는 허망하게 사라집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임종을 앞두고 하느님을 찾기도 하고, 다행히 세례를 받거나 대세를 받는 경우도 있긴 한데, 그것을 바라면서도 그 기회를 놓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사람의 표정에서, 저쪽 세상을 미리 보고 하느님을 안 믿었던 것을 후회하고, 그래서 그 세상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때가 많습니다. 당사자는 자신의 후회와 두려움을, 또는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을 말하고 싶어 하는데, 이미 몸이 굳어져서 뭔가를 표현하는 것이 안 되는 경우에, 그럴 때에 몹시 안타까워하는 모습도 자주 봅니다.>
5)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이 세대’는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바로 ‘나’, 또는 ‘우리’입니다.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당장 종말이 올 것 같지도 않고, 어쩌면 앞으로도 한참 동안 안 올 것 같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런데도 또 마음 한편에서는 ‘혹시 오늘 밤? 아니면 내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이 종말과 최후의 심판을 대하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떻든 방심하면 안 되고, 자만해도 안 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종말과 재림과 최후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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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연중 제34주간 미사의 독서들을 통해 점진적으로 펼쳐진 종말의 모습에 행복한 반전을 선사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기쁜 소식이지요. 이미 시작되어 완성을 향해 가는 하느님 나라는, 육안으로 선명히 드러나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합니다. 마지막 때에 벌어질 천재지변이나 전쟁, 박해와 죽음은 두렵기 짝이 없지만,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이라면 견딜 가치가 충분히 있지요.
새벽 빛이 떠오르기 전이 가장 어둡고,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 가장 숨가쁜 것처럼 하느님 나라도 이젠 꼼짝없이 죽는구나 싶은 한계를 인내와 희생으로 넘어설 때 맞이하게 될 축복입니다. 그 희열과 행복이 우리를 견디게 하고 살게 하지요.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묵시 21,1)
묵시록 저자는 세상을 헤집고 오염시킨 온갖 악의 실체들이 주님의 힘으로 하나둘 무너지고 스러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이제, 그의 눈 앞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 새로움은 적당히 고치고 덧붙인 변형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과 추측의 가능태를 뛰어넘는 완전한 새로움입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묵시 21,2)
적들에게 포위되어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예루살렘의 치욕과 수치가 주님의 신부 자리를 되찾아 아름답게 변모됩니다. 이제 새 예루살렘은 다른 우상이나 재물, 권력이 아니라 오직 신랑이신 주님만을 위해 단장하게 될 것입니다. 본래의 모습대로 정결한 주님의 신부로 거듭나 거룩하게 빛날 것입니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화답송)
새 예루살렘이 하느님에게서 내려와 사람들 사이에 자리잡습니다. 신랑은 신부인 새 예루살렘을 따라 이 지상에 거처하시지요. 하느님의 나라는 그분께서 현존하시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분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아직 미완이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현존하고 있는 신비입니다.
종말은 우리 모두가 맞이하게 될 공평한 미래입니다. 그 전에 우리는 저마다 "자기 행실에 따라"(묵시 20,12.13) 사랑의 심판을 받게 되겠지요. 우리 마음이 자연의 소소한 변화에도 놀라고 들뜨듯이, 두려움을 치우고 설렘과 기쁨으로 하느님 나라를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죽음 뒤에 이어질 부활, 새 생명의 축복을 고대하며 우리 영혼이 아름답고 성숙하게 영글어 가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전례력으로 새해가 열리기 전, 마지막 시기를 보내면서, 지난 한 해 동안 각자의 삶 안에 알알이 들어와 박힌 고통과 슬픔의 보석들을 가만히 어루만지며 새 희망을 꿈꾸어 보는 오늘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그렇게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중이니, 실망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의 채비를 차리며 주님의 날을 기다립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바로 저 너머에서 손짓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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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1,33)
오늘은 ‘오광수’의 「내일을 예약합니다.」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내일을 예약합니다. 저기 저 하늘과 같이 눈부시게 파란 내일을 예약합니다. 내일은 생각이 젊어져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정열이 살아나고 내일은 가슴이 건강해져서 진리를 위해 양심의 고동을 울릴 수 있고 내일은 마음을 활짝 열어 미움이 사라지고 더불어 사는 날이길, 내일을 예약합니다. 저기 저 아침 해같이 타오르는 붉은 내일을 예약합니다. 내일은 생각이 요동쳐서 좌절했던 자리에서 도전하는 자리로 바뀌고 내일은 가슴이 뜨거워져서 사랑을 위해 진실의 고백을 나눌 수 있고 내일은 마음이 손을 잡고 시기와 질투가 없는 정스러운 날이길, 내일을 예약합니다. 남은 건 어제의 실패와 어려움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흘린 진실한 땀과 소중한 노력으로 내일을 예약합니다. 』
매일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와 같이 거의 비슷한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일이 전혀 다른 하루가 되리라는 희망에서 내일을 예약하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제와 다른 내일이 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깨어 살려는 사람은 분명 내일을 희망하면서 일상의 반복된 리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내일 모든 일이 다 성공하지는 않고 더러 실패를 맛보게 될지라도 말입니다. 때론 삶에는 본인 스스로가 계획한 적이 없는 예상치 않은 일이 벌어짐으로써 오늘과 전혀 다른 내일을 맞이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처럼 세상의 종말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올 것이며, 그날은 분명 예상하지 않을 때 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내일을 예약하면서 언제 올지 모를 내일을 오늘부터 계획하고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비록 남은 건 어제의 실패와 어려움밖에 없을지 몰라도, 오늘 흘린 진실한 땀과 소중한 노력으로 내일을 예약해야 합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21,33) 모든 것이 다 변하고 사라질지라도 하느님의 말씀만은, 하느님만은 영원하실 것임을 우리는 신앙으로 믿고 받아들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시다.”(1베1,24)라고 증언합니다. 풀꽃과 같이 우리네 인생도, 세상의 모든 것도 덧없이 사라져 버리겠지만, 하느님과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난”(1베1,23) 존재답게 하느님의 말씀에 귀의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의탁하여 새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등불이며 빛이고(시119,105), 이 말씀을 보고 맛보고 체험할 때,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고 자연의 리듬 곧 “무화과나무와 다른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21,29~30)되며,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깨달을 수가 있을 겁니다. 외부 환경을 바꿔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가 영원히 썩지 않을 생명의 말씀으로 먼저 변화되고 변모될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된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말씀으로 마음이 가난해지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살기 위해 박해를 받을 때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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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누구나 삶 안에서 최악의 기분을 느꼈던 적이 한두 번은 있었을 것입니다. 저에게 잊지 못할 일을 하나 꼽으라면, 서울 신학교에 다녔을 때 학생회장이 되어 사람들 앞에 섰을 때였습니다. 당시 세 개의 학교가 통합되었습니다. 제가 다니고 있었던 서울 혜화동에 있는 가톨릭 신학대, 부천에 있는 성심여대, 그리고 강남에 있는 가톨릭 의대가 ‘가톨릭대학교’라는 이름으로 합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통합되었던 해에 세 교정이 함께 축제를 했습니다.
이 축제에서 신학대학 학생회장이라는 이유로 무대에 서서 축제 축하 인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제가 하는 말에는 떨림이 그대로 묻어 나왔고, 너무 긴장해서 열심히 준비한 원고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사람 앞에서 횡설수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축제를 마치고, 도망치듯 학교를 빠져나왔습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제 방에 들어가 혼자 펑펑 울었습니다. ‘오늘의 일이 꿈이라면’이라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까 싶었습니다. 이때 저의 선택지는 다음의 두 가지였습니다.
1번, 계속한다. 2번, 그만둔다.
두 번째를 선택하면 사제의 길을 포기하는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첫 번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를 가지고 밤새워 고민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고민이었습니다. 지금 잘살고 있고, 당시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저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아, 오직 한 사람만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로 ‘나’만 제대로 기억할 뿐입니다.
그때를 떠올리면, 최악의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도 1번인 ‘계속한다’를 선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만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포기, 좌절, 절망은 어쩌면 악마의 소리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날을 미리 알려 주는 표징들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가 잎이 돋자마자 여름이 가까이 온 줄 알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단순히 잎이 돋았다고, 이제 끝이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할까요?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를 맺기 위해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교회 역사 안에서 끊임없는 박해와 순교가 있었습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을 따르면서 우리는 분명 영원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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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스미도록 가까이>
루카 21,29-33 (무화과나무의 교훈)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무화과나무와 다른 모든 나무를 보아라. 잎이 돋자마자, 너희는 그것을 보고 여름이 이미 가까이 온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미도록 가까이>
“이와 같이 너희도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31)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가까이 오듯이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가
가까이 갑니다
깊어가는
믿음으로
피어나는
희망으로
타오르는
사랑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스미듯이
하느님의 나라에
우리가
스미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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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일을 볼 수 있는 눈>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 새로운 싹이 트면 계절의 변화를 느끼듯 세상의 여러 혼돈과 징표를 보면 그것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나의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데 꼭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하나의 풍파가 몰아치면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틀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므로 “혼돈과 어둠 속에서 움터 오르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와 광명을 내다보는 눈”(이현주목사), 혜안, 영적인 눈을 가진 이는 행복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혼돈은 사라지고 하느님의 나라가 우뚝 선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또한,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마음 설레게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마음 한구석엔 두려움이 있습니다.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 ‘각자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성직자를 떠받쳐 위하고 거룩하게 보지만 그 속을 알면 누구보다도 부끄러움이 많고 자비를 간구해야 할 사람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의 소유자로 부끄러움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들은 언제나 살아있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는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대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말씀을 들었으면 그에 걸맞은 삶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모든 것이 사라질지라도 가슴에 남는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세상 것은 사라지지만 주님의 말씀을 차지한 사람은 영원합니다. 나자렛 예수는 사라질지라도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나 자신의 한계 속에 내 옆에 계시는 예수그리스도를 얼마나 의식하고 있는가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영원한 것을 붙드는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냅시다.”(프란치스코 교황)
우리가 일상 안에서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뻔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서도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후회하고 새로운 다짐과 시작을 합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날이, 오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때에 주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종말의 정확한 날짜를 감춘 것은 공포를 갖게끔 하기 위한 것이아니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사랑의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말씀 안에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청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기를 희망합니다. “당신 말씀은 제 발의 등불, 저의 길에 빛”(시편 119,105)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주님의 주권과 통치가 받아들여지고 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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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나라의 꿈>
-살아 있는 자들만 꿈꾼다!-
“보라,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묵시 21,3ㄴ)
오늘 미사중 화답송 후렴이 큰 위로가 됩니다. 2012년 수도원 설립 25주년을 맞이하여 수도공동체의 역사를 회고하며 쓴 글의 주요 내용 넷이 지금도 선명히 떠오릅니다.
1.모든 것은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필요했다.
3.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결론하여,
4.지금을 살아라(carpe diem)
이런 깨달음을 사는 이들이 진정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이런 이들은 과거를 인정하고 긍정하나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를 삽니다. “만약?”이란 질문은 부질없는 공허한 질문입니다. 하느님은 나름대로 최선, 최상의 길로 인도해주셨을 믿고 하루하루 선물로 주어지는 오늘,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입니다. 참으로 꿈꾸는 사람이 삽니다. 부단히 현실화되는 꿈입니다. 성서의 사람들, 한결같이 꿈꾸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꿈중의 꿈이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정말 사람은 꿈이, 비전이, 희망이 있어야 삽니다.
오래전 두 시가 생각납니다.
“창문밖
가난한 언덕
보랏빛 은은했던
제비꽃
그 자리에
샛노한
민들레꽃
감동의 그 자리에
하얀 눈
덮여 있다
흰 눈 덮인 하얀 땅
보랏빛
샛노란 빛
봄꿈을 꾸고 있겠지”<1998.1.22>
그해 겨울은 이 ‘봄꿈’이란 시로 마음 따뜻한 겨울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엊그제 뜻밖에 내린 많은 눈으로 온누리가 눈부신 눈꽃들로 가득합니다. 흰눈을 볼 때마다 요셉수도원을 각별히 사랑했던, 지금은 고인인 된 테제 마르코 수사의 “화이트 사일런스(white silence)” 하얀 침묵이란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저절로 하얀 침묵에 젖게 하는 흰눈이요, 여기서 피어난 “봄꿈”이란 시입니다.
초봄의 부활시기에 쓴 또 하나의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 란 시도 생각납니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
죽어 있는 것들은 꿈꾸지 않는다
연초록 새싹으로
화사한 꽃들로 피어나는
봄꿈의 나무들!
살아 있는 것들만 꿈꾼다”<2009.4>
살아 있다 하나 꿈꾸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자들은 꿈꾸는 자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전례시간, 하느님을, 하느님의 나라를 꿈꾸는 시간이요 파견되면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나라 꿈을 실현하며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묵시록의 주인공 요한 사도야 말로 꿈꾸는 사람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고 모든 것은 다 지난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오늘 묵시록입니다. 마침내 이런저런 과정을 통과한후 요한의 꿈이 꽃처럼 활짝 피어났고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하느님 나라의 꿈입니다.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가 새 하늘과 새 땅이요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인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앞당겨 살게 하는 이 고마운 미사은총입니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기도 하지만 미래의 하느님 나라의 꿈이, 비전이, 희망이 현재를 만듭니다. 부단히 하느님 나라의 꿈을 현실화하면서 주님을 닮아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야하는 우리들입니다.
타고난 것들이 모두라면 절망이겠습니다만, 하느님께 희망을 둔 우리에게 날마다 새롭게 선택할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기쁨을, 평화를, 감사를, 행복을 선택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두 말씀이 우리에게 무한한 격려가 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ㄴ)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의 평생 꿈이 하느님 나라 꿈이요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 나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한 가르침이 참 고맙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나라의 표징인 이런 일들입니다.
“너희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하느님의 나라는, 주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합니다. 지금 연중 마지막 34주간은 성서주간입니다. 주제 성구 “지혜의 시작은 가르침을 받으려는 진실한 소망이다.”(지혜6,17)라는 말씀처럼 주님의 말씀을 갈망하고 배울 때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새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하는 일이 하느님 나라의 꿈과 실현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영원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당신 집에 사는 우리들! 우리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여라, 당신께 힘을 얻은 우리들! 우리들은 더욱더 힘차게 나아가리이다.”(시편84;6,8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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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가까이 있는데도 멀리 보는>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당신 말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 저는 저의 어머니가 사라질지라도 당신 말씀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말씀으로 바꿔 듣는 것이 제게는 더 실감이 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늘과 땅이 사라지는 것은 강 건너의 불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것은 강 이쪽의 불이기 때문이겠지요.
오늘 주님께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이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일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말씀하시듯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가 그제 아름다운 성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무너질 것이라는 주님 예언대로 신음하고 실제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것을 보는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시는데 강 건너 불 보듯 멀리 보기에 지난여름 온 지구가 그렇게 펄펄 끓었는데도 지구 종말의 때가 가까이 온 줄도 모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도 모릅니다.
왜 이렇게 되는 겁니까?
온수자청와(溫水煮靑蛙)라는 말이 있고, Boiling flog라는 말이 있는데 끓는 물 속의 개구리라는 뜻입니다.
뜨거운 냄비라면 개구리가 즉시 냄비 밖으로 탈출할 텐데 물이 서서히 끓는 냄비 속에 있다가 서서히 죽어간다는 비유지요.
지금 우리가 꼭 이런 개구리 같습니다. 위기를 멀리 느끼고 그래서 실감 나지 않습니다.
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위기인데 종말이 오는데도 종말이 오는 줄 모르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모르는 우리는 가까이 왔는데도 멀리 보는 개구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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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사라질 때 나타나시는>
아시다시피 제가 하는 <여기 밥상>은 예약제 식탁이고, 제가 영적인 음식인 미사와 육적인 음식인 밥도 해드리는 이중 식탁입니다.
그제도 <여기 밥상>이 있었고, 식사하면서 유쾌한 대화도 나누고 유익한 대화도 나누었는데 한 자매님이 나이 먹는 것과 화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생각에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 화를 내지 않게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화를 내는 것 같다고 하시는데 제 느낌에 그것이 남 얘기를 하신다기보다는 자기도 늙어 그렇게 되지 않을까, 자기 미래를 걱정하는 얘기로 들렸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화를 내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더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자기 한계와 약함을 잘 받아들이면 화를 덜 내게 되지만 그러지 못할 때 다시 말해서 전과 다른 나랄까 점점 쪼그라드는 나를 겸손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오히려 더 화를 내게 됩니다.
특히 젊었을 때 잘 나가던 사람, 힘도 있고 영향력도 있었던 사람일수록 그러지 않은 사람보다 약해진 자기, 쪼그라든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젊었을 때부터 별로 힘이 없고 영향력이 없으며 오히려 남의 신세만 지던 사람은 늘 그러했기에, 늙어서도 더 초라해질 것이 없고 자기의 약함을 분노 없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저처럼 인간적이든 영적이든 도움을 받기보다 도움을 주던 사람, 가르침을 받기보다는 늘 가르치기만 하던 사람은 나이 먹어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만 할 때 그런 자신에 대해 화가 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나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화를 낼 것입니다.
아무튼, 나이 먹으면 사라지는 것투성이입니다. 얼굴에서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손발에서 힘이 사라지고, 몸에서 건강이 사라지고, 머리에서 인지능력이 사라지고, 지혜와 여유마저 사라지면서 사랑도 쪼그라듭니다.
나뿐이 아닙니다. 나의 형제들과 친구들도 마찬가지로 쪼그라들고,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둘씩 내 옆에서 사라집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다 사라질 때 하느님만은 사라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한 신앙인이라면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오히려 나타나시는 하느님이 되고, 모든 것이 사라질 때 오히려 하느님께서 나타나시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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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루카 21,33)
<자비와 용서를 청할 때!>
오늘 복음(루카21,29-33)은 '무화과나무의 교훈'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묵시21,1-4.11-21,2)는 요한 묵시록의 끝부분의 말씀인 '천 년 통치'와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이 '요한 묵시록이 전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악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이는 '최후의 심판'(마태25,31-46)의 끝 말씀인 '심판의 결과'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심판의 기준인 사랑 실천과 그에 따른 심판의 결과인 영원한 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요즘 우리가 듣고 있는 독서와 복음은 '믿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요 희망인 영원한 생명'을 계속해서 확인시겨주고 있고, 이 목적과 희망을 위해 '지금 얼른 정신차리고, 얼른 회개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임박한 종말의 때'에 대한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인다면, 지금 너를 쳐다볼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너의 잘못에 대해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나 자신을 바라볼 때입니다. 나의 허물(죄)을 바라보면서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자비와 용서를 청할 때입니다.
그 결정적인 때가 언제일 지 모르니, 그래서 믿는 이들의 삶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이어야 하고, 그래서 믿는 이들 안에는 회개하는 이들과 회개하지 않는 이들의 두 부류만 있을 뿐입니다.
모두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안으로, 거룩한 도성인 새 예루살렘 안으로, 곧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회개하고 또 회개하도록 합시다!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 당신께 돌아오는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입당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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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아라."(루카 21, 31)
한 해를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어떠한
말들을
진심으로
주고받고
있는지요.
말씀으로
일어나고
말씀으로
시작되는
말씀의
생명력입니다.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본질입니다.
말씀으로
모든 것은
일어납니다.
말씀이
일어나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사라지지 않을
사랑이며
사라지지 않을
말씀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말씀으로
더 이상
사라지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삶의 교훈에서
빈 손으로
떠나는
우리의 모습과
자연의 지혜에서
겨울을 맞이하는
텅빈 가지들을
보게 됩니다.
눈을 감지 않고
제대로
보는 것에서
삶이란
하느님을 향하는
넘치는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말씀으로
정신을
곧추세웁니다.
성체를
바라보고
성체를
모시면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생명을
뜨겁게
만납니다.
공허한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삶으로 드러내는
우리의 삶이며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시대의 징표를
읽고
말씀으로
변화되는
뜻깊은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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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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