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7월10일 저녁, 나는 공관에서 참모장, 기무부대장과 함께 식사하고 있었다. 지난 이틀 동안 서해 교전시 정보지원과 판단에 문제가 있었다 하여 기무사령부에서 우리 부대(5679부대)를 중점 조사한 바 있었다. 그때 기무부대장이 우리 부대를 잘 홍보해 주었고, 기무사 요원들이 알기 쉽도록 설명을 잘 해주었기 때문에 그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식사 중에도 「정보본부는 우리와 꼭 같은 정보를 가지고도 왜 정보 판단이 우리 부대와 180도 달랐는가」에 대해 성토했다. 기무사령부의 조사결과에 따라 정보본부는 곤욕을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북한에 대한 통신감청부대인 우리 부대가 기무사령부로부터 조사를 받는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었다. 부대 창설 이래 근 50년이 지났지만 他기관으로부터 감청내용인 특수정보(SI:Special Intelligence)를 조사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부대에 대해서 서해교전 관련 특수정보(SI) 지원이 잘 되었는지 아니면 잘못되었는지를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부대는 있는 그대로 조사를 받았다. 결정적인 특이징후는 징후대로, 그리고 장관님의 지시사항도 그대로, 또 우리와 틀린 정보본부의 판단내용도 있는 그대로 보여 주고 설명했다. 때문에 우리 부대는 조사와 관련해서 불안하거나 신경을 쓸 일이 전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기무사령부의 조사로 장관과 정보본부장에게는 긁어 부스럼 만드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혹시 좋은 일 있는 것 아닙니까』
공관 정원 잔디밭에서 즐겁게 식사를 하며 술도 두어 순배 돌아가고 분위기가 아주 좋게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부관이 메모를 갖고 와서 읽어보았더니 「내일 오후 3시30분까지 정복 차림으로 장관님실로 출두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순간 나는 물론 참모장과 기무부대장도 출두이유를 알아차릴 수 없었다.
옆에서는 『혹시 좋은 일 있는 것 아닙니까?』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장관님께서 당신과 관련된 사항을 우리가 거론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설명도 하고 이해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정복을 입고 출두하라는 단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출두 지시의 이유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궁금했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나서 10분쯤 지났을 때 부관이 팩스로 온 문서 한 장을 갖고 와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문서를 읽어 보니 여기 있는 우리 세 명 모두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순간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당시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식사를 같이 즐겁게 하던 참모장과 기무부대장도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문서의 내용은 「서해교전과 관련해 경고장을 받으러 장관실로 출두하라」는 지시였다. 시간은 오전 11시 30분이고, 대상은 5679부대장인 나와 해군작전사령관 그리고 합참 정보본부장이었다.
순간 나는 우리 부대가 1999년 연평해전 때처럼 부대표창은 못 받을망정 경고장은 받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왜냐하면 이번 서해교전의 책임은 우리 부대에 있지 않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고 소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분명 장관의 「책임전가」이고 정보본부장의 「음해」라는 판단이 섰다. 또한 기무사령관이 우리 부대를 표적조사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순간 나는 경고라는 징계를 받느니 우리 부대의 명예를 위해서 차라리 전역하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몇 분간 생각을 정리한 다음, 국방부 차관보인 오치운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그런 징계를 받느니 내일 전역하겠습니다. 내일 경고장 받으러 안 가겠습니다』라고 나의 결연한 뜻을 전하였다. 그래도 분이 삭지 않아 장관보좌관인 이봉원 준장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장관님께 李장군이 당장 직접 보고하시오. 내일 경고장 받으러 안 가겠으며 대신 내일부로 전역지원서를 제출하겠다고 보고해 주시오』라고 통보했다.
갑자기 내가 내일부로 전역지원서를 내겠다고 하자 같이 식사하던 참모장과 기무부대장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된 데 대하여 안타까워만 했다. 이어서 부관이 합참의장 전속부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고 하여 『전화를 안 받는다고 하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합참의장이 직접 전화 걸었다고 해서 받았다. 나를 설득하려는 전화였다.
약 30분 동안 통화했는데 너무 흥분된 상태에서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을 전부 기억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합참의장은 경고장을 수여하는 국방부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요지로 말했고, 나는 『우리 軍을 사랑하지만 장관님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지휘부에 대해서는 충성은 물론 존경하는 마음도 없어졌다』고 나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고는 내일 경고장 접수 거부와 전역지원서를 제출한다는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렇게 서로 평행된 주장만 하다가 결론도 못 내리고 전화 통화는 끝났다. 그러나 전역지원서를 내겠다는 나의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가 중인 나의 처 秋順三(추순삼·45)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나의 전역 결심을 알렸더니 묵묵부답이었다.
「事必歸正」
이튿날 아침 침통한 마음으로 출근했다. 출근과 동시에 오전 9시까지 과장급 이상 간부들을 회의실로 집합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내가 전역지원서를 제출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오전 8시30분에 참모장과 기무부대장이 사무실로 찾아와서 전역지원서 내는 것을 거두어 달라고 건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간부집합도 취소해 달라고 했다. 이유는 오전 9시에 개각발표가 있는데 金東信(김동신) 장관이 교체된다는 것이었다.
내게 장관이 교체되든 안 되든 그것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장관을 포함한 지휘부에서 왜 허약한 우리 부대까지 징계대상에 포함시켰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오해가 있었고 표적조사가 있었으며, 그 무슨 음모까지 꾸미고 있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육감이었다.
내가 지난 7월10일 징계를 불복하고 전역하겠다고 할 때만 해도 장관이 경질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내가 전역을 결심할 때는 비록 「달걀로 바위를 치는」 형국이 될지라도 장관에게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진 것이었다.
당장은 박해받을 것을 각오했다. 불의와 음모가 이기느냐 아니면 정의와 진실이 이기느냐를 시험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종국적으로는 정의와 진실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결국 오전 9시 개각 발표에 국방장관이 전격 경질되었다. 事必歸正(사필귀정)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7월10일 오후 늦은 시각, 두 시간에 걸쳐 장관실에서 징계회의를 했다는 것이다. 기무사령부에서 지난 이틀 동안 조사한 결과를 가지고 징계회의를 열었던 것이었다. 회의에는 국방장관, 합참의장, 국방차관, 기무사령관 총 4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장관은 당분간 징계 조치를 않겠다고 천명했다는데 왜 갑자기 심경에 변화가 생겼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장관이 퇴근하면서 차관보에게 나를 포함해 세 명에게 줄 경고장을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고, 대변인에게는 경고장 수여사실을 국방부 기자단에게 브리핑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나는 할 말을 잊었다.
우리 5679부대는 對北 통신감청부대로서 法的으로도 보호받게 되어 있고, 외부에 우리 부대의 존재가 알려져서는 안 되게 돼있다. 그리고 내게 경고장을 수여하게 되면 그 사실이 신문에 보도될 것이고, 우리 5679부대의 임무와 성격이 노출된다. 그러면 앞으로 對北 통신 감청에 어려움이 있으리라는 판단이 들 텐데 왜 그런 무리수를 두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 간다.
그렇다고 우리 부대가 징계를 받을 만큼 정보지원을 못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번 일로 언론에서 이미 우리 부대의 임무와 성격을 보도했기 때문에 앞으로 對北 통신 감청이라는 임무수행에 지장을 받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 부대는 平時에도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내가 장관의 징계처리에 반발하자 주위에서 많은 사람이 만류했다. 이유인즉 우선 징계권자였던 장관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징계처리가 무효화된 상태에서 계속 반발하면 軍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언뜻 들으면 그 사람들의 논리도 그럴 듯한데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장관이 서해교전의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고 전격 경질되었으며, 징계처리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징계처리를 결정한 자체가 원천적으로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軍의 명예만 중요하고 국가 안위와 국민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 부대의 명예는 무시해도 된다는 논리인가? 이번 일이 규명되는 것이 軍의 명예를 실추시킨다고 주장하는 일부 軍 고위층도 있다. 하지만 우리 軍과 국가의 安危(안위)와 국민의 生命(생명)을 위해서도 몇몇 사람이 保身(보신)을 위해서 행한 일은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거대한 댐도 조그마한 쥐구멍 때문에 무너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유념해야 한다. 나는 감히 이번 사건이 댐의 쥐구멍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이 쥐구멍을 막아서 종국적으로는 국가와 국민을 지키겠다는 뜻이다. 내가 침묵을 지켜서 몇몇 사람의 개인적인 영달을 얻도록 방관하는 것이 軍의 명예를 지키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이 행한 일들을 밝혀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국가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軍의 명예를 지키는 것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군인의 本分(본분)이 아닌가? 누가 이를 軍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하겠는가?
6월13일 「특이 징후」 국방부에 보고
내가 국방부의 징계에 강하게 반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서해교전과 관련해 정보지원에는 문제가 전혀 없었다. 우리 부대는 결정적인 특이 징후를 국방부에 보고했다.
3년 전 연평해전 이후에 우리가 매우 유념하고 경계해야 할 그런 종류의 특이 징후는 한 번도 없었다.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지난 6월14일에는 항공사진 전송체계장비(KCITS)를 차단한 사건과 관련한 회의석상에서 6월13일에 있었던 북한 경비정 NLL(북방한계선) 침범에 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합참 정보본부장(權寧載 중장)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는 군사정보부장(權榮達 소장), 정보사령관(金軍植 소장), 정보본부 융합처장(丁亨鎭 준장) 등 정보 고위 장성들이 참석해 있었다. 매우 민감하고 특이한 정보(교신 내용)를 설명한 다음, 이는 예삿일이 아닐 뿐만 아니라 地對艦(지대함) 미사일 발사대도 항공사진으로 찍히는 등 매우 예민한 사항이며, 6월15일이 연평해전 3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에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돌발적인 사태에 대비하여 우리 5679부대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북한의 동태를 감시하고 정보를 수집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리고 월드컵 기간인데다 요즘 북한 경비정의 동태가 심상치 않기 때문에 나 개인적으로는 6월 한 달 간 골프도 치지 않고 부대를 지키겠노라고 보고했다.
내가 정보 고위 장성들 앞에서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6월14일 배포되는 정보본부의 블랙 북(Black Book:북한군의 동태를 주로 다룬 일일 정보 보고서)에 전날의 NLL 침범을 단순 침범으로 왜곡 판단했고, 또 우리가 보고한 결정적이고 매우 특이한 특수정보(SI)를 빼버린, 정보가 속속 은폐된 것을 그날 아침에 장관이 보고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정보본부와 장관 간에 서로 박자가 척척 맞은 NLL 침범 정보보고서였다. 즉 정보본부에서는 결정적이고 매우 중요한 「특이 정보(결정적인 문구)」를 아예 삭제한 채 장관에게 보고함으로써 축소·은폐했고, 장관은 敵 의도 판단 내용 중 「의도적인 침범」이란 판단은 빼고 「단순 침범」이란 판단만을 블랙 북에 내보내라고 함으로써 정보를 왜곡 및 조작한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우리 부대에서 예하부대에 배포한 보고서의 敵 의도 내용을 「단순 침범」으로 수정하라고 해서 우리 부대에서는 訂正(정정)하여 전문을 再하달하였다.
다음은 우리 부대에서 국방부에 파견된 701단장인 윤영삼 대령(5679부대 정보단장)이 「장관님의 지시사항」이라면서 丁亨鎭 정보융합처장으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에 대하여 우리 부대로 전달한 내용을 밝힌 경위서의 일부분이다.
<2002년 6월14일 오전 9~10시 사이 융합처장님으로부터 사무실로 와 달라는 전화를 받아 바로 사무실로 갔습니다. 융합처장님은 일일정보보고서(B/B)를 보여 주면서, 장관님께서 세 가지 판단 중 2, 3번 판단 내용은 삭제하고 전파하라고 하셨다. 정본의 판단과 우리 부대 의견이 일치해야 예하부대에서 혼돈이 없을 것이므로 우리 부대 보고서를 수정해서 전파할 수 있도록 본부에 전화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2, 3번의 판단내용은 각각 훈련평가의 일환과 의도적인 침범이고 1번은 단순 침범이었다. 이리하여 6월13일의 의도적인 NLL침범이 단순 침범으로 왜곡·조작됨으로써 6월27일의 NLL 고의적 침범도 또 단순 침범으로 왜곡·조작되었고, 급기야는 6월29일의 서해교전으로 번져 24명의 인명피해와 고속정 1척의 침몰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내가 6월13일의 NLL 침범사건을 소상하게 설명하고 강조했는데도 불구하고 정보본부에서 받아들이는 강도는 별로였다. 설마하는 눈치였고 나름대로 월드컵 기간 동안 서해상은 조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좋은 예로 6월19일 군사 정보부장이 국방부 기자 회견시 『NLL 안전해역에서의 어선조업을 적극 통제, 남한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최대한 피하고 있는 것으로 관측됐다』(2002년 6월20일 경향신문 21면)고 밝힘으로써 서해 NLL상에 별 문제가 없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부대는 그런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고 북한군의 일거수 일투족을 하나도 놓치지 않도록 수집을 강화하여 국방부에 보고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정보본부에서는 특이 징후가 매우 민감한 사항이라고 認知(인지)하면서도 북한은 고의적으로 NLL을 침범할 의도가 없고 서해상에서 긴장을 조성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결과 정보본부에서는 블랙 북(Black Book)에 또 敵 의도는 단순 침범이라고 판단하고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특이 징후는 삭제한 상태였다. 이것 또한 정보의 축소·은폐요, 왜곡이요, 조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렇게 국방부에서 안이하게 대처한 결과, 급기야는 6월29일 서해교전이 일어난 것이다. 對北 햇볕정책을 뒷받침한다고 북한군의 특이 동태를 쉬쉬 하다가 서해교전이라는 엄청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즉 小貪大失(소탐대실)이다. 햇볕정책을 뒷받침하려다가 오히려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과연 이런 식으로 대처했던 것이 올바른 방책이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이처럼 사태를 악화시킨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나를 징계하겠다고 했으니 賊反荷杖(적반하장)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기무사령부의 표적조사」
내가 징계에 不服(불복)하고 轉役(전역)을 결심하게 된 원인은 장관과 정보본부의 정보 축소·은폐·왜곡·조작이었으나 近因(근인)은 정보본부장이 우리 부대에 대한 기무사령부의 조사 종용과 기무사의 우리 부대에 대한 소위 표적조사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 7월4일 정보본부에서 韓·美 간에 북한 경비정이 누구의 지시에 의해 선제 기습사격을 가했느냐에 대한 토의가 있었다. 이때 정보본부의 입장은 서해교전이 우발적이고 경비정의 단독 범행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보본부의 이런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회의 전에 정보본부장이 은근히 「침」을 놓는 발언까지 하였다.
그러나 나와 우리 부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었다. 서해교전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선제 기습공격이고, 이는 상부의 지시에 의한 「의도적인 도발」이라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집된 정보, 특히 6월13일 침범과 6월27일 침범시의 특이 징후만 보더라도 사전 계획된 선제 기습공격이고 의도적인 도발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정보본부는 아직도 마치 어느 특정집단의 대변자인 것처럼 「우발적」이고 「경비정 단독범행」이라고 계속 주장하길래 추가적인 자료 두 건을 갖고 정보본부의 입장에 반박했더니 버럭 화를 내면서 정보지원 미흡으로 조사하겠다고 천명하였던 것이다.
조사결과를 公表할 수 없다니…
내가 추가로 발표한 정보는 이미 지원된 정보에 비하면 蛇足(사족)에 해당되는 가치밖에 없는 정보였고, 정보본부에서는 숨은 뜻을 알아낼 수도 없는 한 줄짜리 정보였다. 우리 부대의 입장과 동일한 미군 드프레이터스 준장의 주장을 묵살하고 정보본부의 입장을 관철시키려고 하여 내가 중간에 제동을 걸었더니 정보본부장이 화를 냈다.
여기서 정보본부장이 우리 부대를 조사해야겠다고 작심을 하고 기무사령관과 장관에게 조사토록 보고하였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에는 정보사 정보처장도 합세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7월8일과 9일, 이틀 동안 기무사의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7월8일 기무사령관이 조사하겠다고 전화를 걸어왔을 때, 『조사하면 큰 문제가 발생하니 조사하지 말고 정보지원 문제는 정보본부와 협조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나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장관과 합참의장의 지시이기 때문에 조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조사 결과를 전비태세검열실에서 조사한 2함대사령부의 조사결과처럼 公表(공표)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안 된다』면서 『대통령에게는 보고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公表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장관님과 의장님께 항명하는 것이냐』고 하는 바람에 나도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나의 주장을 포기했다.
조사결과를 나중에 받아 보니 완전 「표적조사」였고 우리 부대에게 불리한 내용만 기술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편파적이고 무슨 의도가 숨겨진 조사결과였다. 가치가 별로 없는 정보까지 나열하여 「정보지원이 미흡」하다는 것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는 정보를 보고하느라 그것을 보고하지 못한 상태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6월13일과 6월27일에 있었던 결정적이고 매우 중요한 정보는 정확하게 보고된 상태였다. 그것만 가지면 대비태세를 갖추는 데 충분한 정보였다. 정보란 단어 하나라도 적의 企圖(기도)와 意圖(의도)를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정보지원이 미흡했다고 지적한 반면, 정보본부에는 별 지적이 없었다. 지원된 정보 중에 단순 침범 징후에만 해당되는 것을 갖고 판단했기 때문에 단순 침범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보본부에서 블랙 북에 양일간에 걸쳐 수집된 북한 경비정의 결정적이고 매우 중요한 특이 징후를 빼고 작전부대에 배포하여 작전부대가 수수방관토록 했는지에 대하여 지적을 안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왜 7월1일까지 북한군의 도발을 「우발적」이라고 했으며, 7월4일까지는 적의 「의도적인 도발」을 경비정의 「단독범행」으로 판단한 것에 대해 지적을 안 한 이유도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마디로 국방부에서 정보를 축소·은폐·왜곡·조작한 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지적을 안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장관의 의도적인 왜곡판단과 조작은 왜 지적을 안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내가 『장관님도 정보 왜곡 판단과 조작에 관여되어 있다』고 하니, 기무사령관은 괘씸죄를 내게 씌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항공사진 전송체계 장비(KCITS) 차단과 관련해 정보본부장과 정보사령관이 한편이 되어 나와 언쟁했던 사건, 그리고 SCO(보안통제 장교) 정보사 배속문제로 인한 갈등 문제 등으로 생긴 나와 정보본부장의 불협화음이 내가 마치 본부장에게 도전하는 것으로 판단해 본부장 등이 기무사령관에게 보고하여 이번에 이것까지 같이 묶어 나를 처리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부대와 나를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
나를 징계하려고 했던 장관이 경질되었으니 나보고 참으라면서 만류하는 사람도 있고 軍의 명예를 위해서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때로는 우리 부대가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르며, 나까지도 再평가될 것이라고 위협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발단은 나의 功名心(공명심) 때문도 아니요, 억하심정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 부대와 나의 명예를 위한 정당방위였던 것이다. 우리 해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도 우발적이며 경비정의 단독범행이라고 정보본부에서 분석 평가했을 때만 해도 울분만 터뜨리고 꾹 참고 있었다.
마침 울고 싶었는데 나의 뺨을 때려 준 것이다. 국방부 지휘부에서는 우리 부대에 대해 표적 조사를 하고 급기야는 조용히 울분을 참고 있는 나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전초전으로 징계처리를 결정했던 것이다. 소장 한 명 정도는 眼中(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나를 옭아매려고 했기 때문에 내가 반발한 것이다. 내가 제3者인데 주위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또는 다른 목적을 갖고 양심선언 같은 돌출행동을 한 것도 아니다. 내가 힘이 없다고 업신여기고 함부로 취급을 하면서 나를 짓밟았기 때문에 「지렁이가 꿈틀」한 것뿐이다.
7월15일 기무사령관에게 書翰(서한)을 보내 이번 정보의 축소·은폐·왜곡 등에 대한 責任所在를 분명히 밝혀 달라고 했지만 대답은 『정보지원이 미흡했고 또 장관님이 관여했다는 사실은 누구한테 들었느냐』는 것이 전부였다. 일주일이 지나도 책임 소재를 밝히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死守한 전투」를 「실패한 전투」로 卑下
그래서 나는 정면 돌파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7월22일에 전역지원서를 전격 제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런데 육군 참모총장이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또는 총장의 결정인지 모르지만 전역지원서가 반환되었다. 총장 비서실장인 임관빈 준장(육사 32기)이 전역지원서를 반려하기 위해 나를 찾았다. 그에게 『10월 인사시에 관련자들에 대해 책임추궁을 해야지 봉합을 하면 지금 곪아 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터지니까 失機(실기)해서는 안 될 것』이라 피력하자 『그렇다』고 하면서 10월에 어떤 조치가 이루어질 것 같은 뉘앙스를 풍겼다.
내가 관련자로 지목하는 대상은 장관, 정보본부장 등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이다. 장관이 대통령으로부터 再신임을 받아 교체되지 않기 위하여 全방위로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서해교전은 사안이 중요한 것인 만큼 장관이 「전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다」면서 자진하여 사표를 제출했더라면 아마도 추앙받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기무사령관 정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유도를 했어야 우리 軍이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고 軍의 명예도 손상되지 않았을 터인데 기무사령관마저 장관과 의기투합해서 오히려 말렸어야 될 직책에 있는 사람이 징계를 더 부추기는 역할을 했던 것이었다.
징계뿐만이 아니었다. 2함대 사령관은 보직해임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장관 개인이 살기 위해서 목숨으로 NLL을 死守(사수)한 전투를 「실패한 전투」로 卑下(비하)했던 것이다.
장관이 백령도 등 서해교전 지역을 방문할 때만 해도 모든 것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서해교전장을 찾아 散華(산화)한 젊은 장병들의 英靈(영령)을 달래고 위로하는 것으로 매우 순수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징계 발표를 듣는 순간 서해교전장 방문도 再신임을 받기 위한 手順(수순)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너무나 허탈했다.
정보본부장은 서해교전을 우발적이고 상부의 지시를 받지 않은 경비정의 단독범행이라고 마치 특정집단의 대변인처럼 판단했다. 그러고 난 후 그것을 韓·美軍들에게 강요했다.
그동안 만류와 설득도 많이 받았다. 합참의장, 국방차관, 장성들이 그렇게 했다. 한 개인이 조직 앞에서는 무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이런 만류와 설득을 뿌리쳤다. 우리 5679부대의 명예를 위해서 또 나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더 나아가 軍 발전의 癌(암)적인 존재를 수술하기 위해서, 종국적으로는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서해교전의 진실을 때가 되면 밝히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진실과 정의라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다. 그리고 하느님이 나를 지켜 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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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북한주민인권 원문보기 글쓴이: olive
첫댓글 이런 일이 어떻게?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정의를 보여 주신 前 5679부대장 육군 소장 韓哲鏞 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힘내시고 파이팅입니다
20~30대의 청춘으로 서해교전시 산화한 호국영령들은 울고있다. 빨간 목줄매고 일본가서 공놀이 구경한놈이나 반바지에 쓰레빠신은 놈을 귀여워서 제자식이라고 단상으로 불러올려 전세계에 중계한 넘이나 그노미 그놈....... 니들이 6.25를 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