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분열, 유신 선포, 김대중의 귀국 포기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 신민당 각 계보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당권경쟁을 벌였다. 상처를 입고 퇴진한 진산계의 쇠퇴와 신진들의 대거 진출로 계보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유진산을 정점으로 했던 범주류는 유진산 직계, 양일동계, 고흥문․김영삼계로 갈라졌고 이철승과 정해영도 독립 계보를 이루었다. 김홍일 총재 대행도 독자 세력을 이끌었다. 이에 비해 비주류는 김대중을 중심으로 단일 세력을 형성, 신민당 계보 가운데 최대의 파벌이 되었다. 범주류 계보는 김홍일 총재 대행을 밀기로 합의했다. 양일동 의원과 김대중도 당 총재 후보로 출마했다.
7월 20일 시민회관에서 902명의 대의원 중 882명이 참가한 가운데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려 총재선거를 치렀다. 김홍일 총재 대행, 양일동, 김대중 3인이 총재 후보로 출마한 1차 투표에서 김홍일 407표, 김대중 302표, 양일동 172표 기권 1표로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다. 대의원 878명이 참가한 2차 투표에서도 김홍일 425표, 김대중 340표, 양일동 111표로 역시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다. 대회가 산회한 뒤 뉴코리아 호텔에서 양일동과 김대중은 단일화협상을 했으나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7월 21일 875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3차 투표에서 김홍일 444표, 김대중 370표, 무효 61표로 과반수를 얻은 김홍일이 총재가 되었다. 전당대회는 다음 정기 전당대회를 1972년 5월 31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폐막했다.
우리는 일체의 비생산적인 당내 파쟁과 대내투쟁을 지양하는 데 다같이 노력한다.
김홍일의 총재 당선이 알려지자 대회장밖에 몰려있던 김대중 지지 세력이 폭력을 휘둘러 시민회관 앞 광장은 수라장이 되었다. 500여명을 헤아리는 폭력배와 젊은 애들이 김대중의 패배에 반발, “죽여라” 소리 지르며 전당대회장으로 난입했다. 이들은 김홍일 총재의 사진을 떼어 내 불살랐다. 김영삼, 이철승, 서범석 등 주류파 의원, 대의원들이 대회장을 나서자 이들은 각목을 휘두르며 습격했다. 최형우 의원 등 주류계 대의원들이 몽둥이와 돌에 맞아 메디칼 센터에 입원했다. 이것은 야당 전당대회 사상 처음 발생한 대규모 폭력․유혈사태였다. 당시 습격당한 의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이들은 김대중이 동원한 조직폭력배라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소문의 진위는 반드시 규명해야 할 것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김대중에게 ‘선생님’이라고 호칭 안 했다거나 비판했다고 길거리에서 맞아 죽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미 1971년의 신민당 총재 경선이 그러한 사건이 일어날 것을 보여준 셈이다.
김대중은 이 폭력사태를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우리측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다. 지지자들이 폭력사태를 일으킬 때마다 김대중이 하는 말이다. 김대중은 이 전당대회의 총재 경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시 나는 앞서 말한 자동차 사고로 인한 부상으로 몸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였지만, 이를 개의치 않고 7월말의 당수경쟁에 나서게 되었다. 나 자신에 관한 얘기를 한다는 것은 어쩐지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국민은 한결같이 내가 당수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은 “신민당은 김대중에게 나라를 맡으라고 대통령 후보로까지 추천했으면서 무엇 때문에 만장일치로 그를 당수로 당선시키지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국민의 소리와 당내 상황과의 사이에 생긴 커다란 간격은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넓혀져 갔다. 유진산씨는 그 자신이 도저히 출마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당내에 아무런 기반도 없는 김홍일씨를 내세웠고, 그에 따라 나의 라이벌인 이른바 40대 기수로 불리어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에 가담했다. 이 때의 선거는 나의 몸이 제대로 회복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과, 내가 당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등등의 이유로 인하여 부정을 완전히 방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중앙정보부의 철저한 개입 그리고 나의 지지자에 대한 협박, 매수 또는 출마 방해 등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것이다.
당수 선거는 서울 시민회관에서 2일간에 걸쳐 3차 투표까지 실시되었으나, 나는 결국 지고 말았다. 이 때 서울 시민과 지방에서 올라온 수천명의 지지자들이 비 속에서도 시민회관을 둘러싸고는 나를 당수로 당선시키라고 절규했다. 내가 회장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고, 나를 반대하는 인사가 들어가자 욕설이 빗발치는 등의 광경이 벌어졌다.
선거에서 내가 패배하자 그들은 나의 반대 세력에 분노를 터뜨리다가 드디어는 폭력사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나의 반대세력은 이 같은 소동을 내가 배후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는 멋대로 사건을 꾸며댔다. 경찰도 개입해서 조사했지만 이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행위였음이 입증되었다.
사실은 나 자신도 놀란 일이지만,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여․야당을 불문하고 당수선거에 이토록 국민이 열의를 보인 예가 없었다. 당시 서울 시내에서 택시를 타면 운전사들은 신민당이 나를 당수로 선출하지 않은 데 대해 격노하는 등 모두들 이런 얘기를 화제로 삼았을 정도였다. (『後廣金大中大全集』제 6권 독재와 나의 투쟁, 1993 P139)
김대중 말대로라면 김대중에게 반대하면 욕을 먹어야 한다. 자신의 지지자들이 폭력사태를 일으켰는데도 사과할 줄은 모르고 자신에 대한 열렬한 지지라고 오히려 자랑을 한다. 김대중 말대로라면 신민당은 당내 총재선거에서도 부정이 횡행하는 당이다. 그러한 당의 대통령 후보를 정권교체를 바라고 찍은 유권자는 무엇이 되는가. 아무리 총재경선에서 패배한 것을 변명한다 하더라도 자신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당을 이런 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이때 총재로 선출된 김홍일(金弘壹. 1898~1980)의 경력은 이러하다.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 1918년 정주 오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중국 상해로 망명, 1920년 상해독립군 군비단에 투신했다. 1921년 일본군과의 천보산 전투에서 승리한 뒤, 시베리아 이만으로 옮겨 ‘대한의용군 군사위원회’를 조직, 본격적인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김구 주석의 권유로 1945년 6월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하다 일본의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8년 귀국하여 육군사관학교 교장과 육군참모학교 교장, 육군 제 1군단장 등을 거쳐 51년 중장으로 예편했다. 이후 외무부 장관과 국회의원, 광복회장 등을 역임했다.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김홍일 장군은 1971년 야당 총재직을 놓고 김대중과 맞서 총재 경선을 벌이다가 부정선거와 중앙정보부의 공작으로 선출되었다는 비난을 김대중에게 들은 것이다.
김대중의「독재와 나의 투쟁」은 1973년 5월 일본에서 일본 독자를 상대로 일어로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을 읽은 일본인들은 김홍일 장군이 항일 무장독립투쟁을 한 사실을 모르고 부정선거와 정권의 공작으로 야당 총재가 된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민족정기 훼손의 방법도 여러 가지다). 이 책의 내용과 일본에서 출간된 것을 고려해보면 김대중은 외국에 나가 외국인 상대로 자기 나라 욕하는 자라는 인상을 준다. 이 책을 본 일본인들은 한국 현대사의 많은 부분을 오해하게 된다.
1971년은 한반도를 둘러싼 환경에 큰 변화가 일었다. 1971년 3월 주한미군 제7사단 병력 2만 명이 철수하여 주한미군은 제2사단만 남게 되었다. 주한미군은 6만 2천에서 4만 2천으로 줄어들었다. 박정희씨는 이를 북한이 다시 남침해도 미국이 남한을 돕지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받아들였다.
10월 25일 자유중국(대만)이 UN에서 축출되고 그 자리를 중국이 차지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가 급변하였다. 국내적으로도 성남지역 5만여 빈민들의 폭동사건(8. 10)이 일어나고, 실미도에서 북한침투를 위해 훈련받던 군 특수부대원들이 경비원 23명을 사살하고 탈출(8. 23)하는 등 일련의 사건들이 한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11월 김대중은 교통사고로 다친 허벅지 통증 치료를 한다고 일본에 가서 게이오(慶應) 대학 부속병원에 입원했다. 1971년 12월 6일 박정희 씨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닉슨 대통령이 ‘아시아의 안보는 아시아인 손으로’라는 내용의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미국정부가 주한미군의 일부를 철수하고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는 등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대응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박정희씨는 비상사태에 따른 담화문을 통해 정부시책은 국가안보를 최우선으로 하고 조속한 안보태세를 확립하며, 안보상 취약점이 될 사회불안을 용납하지 않고, 모든 국민은 안보위주의 새로운 가치관을 확립할 것 등 6개항을 선언하였다.
일본에서 이 소식을 들은 김대중은 곧 귀국해 비상사태 선포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는 박대통령이 그의 독재정권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선전하는 것일 뿐, 지금 당장 북한이 침공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북한은 침공해올 수도 없고, 또 그런 계획도 현재로서는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는 사실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허구의 선전이다.
박정희씨는 다른 한편으로는 비밀리에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방북시켜 김일성과 면담하게 한 후 1972년 7월 4일 남북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모든 국민이 놀란 이 성명을 계기로 통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전국에 팽배해졌다.
1972년 5월이 다가오자 총재직을 놓고 유진산 양일동 김영삼 이철승 김홍일 김대중 등이 세를 겨루었다. 이제는 김홍일 총재와 김대중이 연합했다. 1971년 7월의 전당대회에서 김홍일을 당수로 밀던 친유진산 세력은 1972년에 와서는 김홍일을 겨누고 도전하는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다. 반대로 김홍일과 당권을 겨루었던 김대중과 양일동은 이때 김홍일과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신민당 내부구조는 정치무상을 여러 번 드러냈지만 이때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홍일과 김대중이 주축인 反유진산 연합의 요구로 전당대회는 5월 31일에서 7월 21일로 1차 연기되었다(신민당의 전당대회는 각 파벌의 표 계산 결과 승산이 없을 때나 계보간의 협상이 여의치 않을 때는 적당한 구실로 연기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7월 4일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되자 김홍일 당수와 김대중은 1973년 초까지 전당대회를 연기하여 남북협상의 진행 등 국내외 정세를 관망할 것을 주장했다. 논란 끝에 전당대회는 8월 23일에 열기로 하였다(2차 연기).
8월이 되자 김대중은 8․3 경제긴급조치 반대 지구당위원장의 대의원 임명이 불법이라 하면서 다시 전당대회 연기를 주장했다.
8월 14일 저녁 연기론을 토론하기 위해 김홍일 총재 집에서 각파 중진회의가 열렸다. 김대중은 이때 이미 유진산이 총재가 될 가능성이 높은 전당대회는 불참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 중진회의에서 전당대회는 9월 중에 열기로 했다. 9월 1일 신민당은 정무회의를 열어 전당대회일자를 9월 26일로 공고했다. 3번째 연기이며 4번째 대회날짜 공고였다.
이토록 전당대회가 거듭 연기된 이유는 유진산의 총재 복귀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김대중이 연기 전술로 맞선 탓이었다. 김대중은 유진산의 총재복귀에 따른 보복을 우려했고 김홍일 총재로서는 총재직이 연장되어 좋았다. 이렇게 전당대회가 연기되는 동안 당내 실력자들인 고흥문 김영삼 이철승 정해영 등은 유진산 쪽으로 기울어졌고 김홍일 김대중 양일동이 反유진산 연합을 형성했다.
반유진산연합은 다시 전당대회를 연기할 것을 주장했다. 9월 18일 김대중 계는 정무회의에서 대회연기를 제기하려 했으나 유진산계의 유회 전술로 실패했다. 9월 21일 정무회의에서 김홍일 총재는 “진산과 김대중의 양극대립이 해소되지 않는 한 대회를 연기할 수밖에 없다”고 선언하였다.
9월 25일 저녁 세종 호텔에서 김홍일 유진산 김대중 양일동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는 예정대로 9월 26일 전당대회를 열기는 하되, 총재경선 등 다른 안건은 다루지 않고 전당대회 연기만 결의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대회연기의 구체적 시한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다음 해로 연기하자고 하다가 12월 개최를 주장했다. 양일동은 10월 말로 한 달 연기하자고 했고 유진산도 이에 동의했다. 4인은 다음날인 26일 아침 2차 모임에서 결론을 짓기로 하고 헤어졌다.
9월 26일 2차 4인 회의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가운데 유진산계의 주도로 대의원 445명이 참가한 가운데 시민회관에서 전당대회가 강행되었다. 비주류측이 대부분 불참한 가운데 이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은 총재로 선출되었다. 이날 대회에는 유진산 고흥문 김영삼 권중돈 이철승 정해영 한건수 이중재 김은하 정성태 김수한 신도환 조일환 정운갑 오세응 임종기 진의종 오홍석 양해준 이기택 황낙주 이상신 신상우 이대우 김재화 김준섭 이상조 이택희 등 39명의 신민당 의원이 참가했다. 이들은「시민회관파」라 불렸다.
이에 반발하여 반진산연합은 다음날인 9월 27일 독자적으로 전당대회를 열기로 했다. 9월 27일 효창동 김홍일 총재 자택에서 열린 또 하나의 전당대회에서는 26일 진산계의 전당대회 무효를 선언하고 12월에 전당대회를 열 것을 결의했다. 여기에는 45명의 신민당 의원과 대의원 483명이 참가했다. 이들은「효창동대회파」라 불렸다. 이 대회에서 김홍일 김대중 양일동 유청 윤제술 등으로 구성된 5인 수권위원회가 만들어져, 당 운영과 유진산계에 대한 정치적 법률적 투쟁을 맡기로 했다. 이날 저녁 김홍일 김대중계는 국일관에서 대의원들의 격려를 겸한 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대중은 격한 어조로 유진산계를 비난했다.
썩은 고구마가 가마니 속에 섞여 있으면 모든 고구마가 썩게 마련이다. 정권의 앞잡이들이 야당의 탈을 쓰고 야당을 파괴하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로서 그들은 차라리 제 갈 길을 갔다. 그것이 국민들을 위해 이로울 것이다.
김대중이 야권의 반대파를 정권의 앞잡이로 모는 버릇은 오래된 것이다. 김대중은 1987년 대선에서도 백기완 민중후보의 출마를 공작정치의 소산이라 규정했다.
2개의「半黨大會」로 인해 어느 쪽이 합법성을 가지냐는 법통싸움이 일어났다. 시민회관파가 26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당대표변경등록신청을 했다. 이에 27일 효창동파는 김홍일이 신민당 대표임을 확인해 달라는 이의신청을 냈다. 동시에 주재황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상대로 당대표 변경 등록절차를 정지해 달라는 가처분신청도 서울민사지법에 냈다. 9월 2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유진산계가 제출한「신민당대표 변경등록 신청」을 ‘형식적 요건이 구비됐다’는 이유로 수리했다.
29일 김홍일은 유진산을 상대로「정당대표위원 직무정지 가처분신청」을 서울 민사지법에 냈다. 아울러 시민회관대회의 무효를 주장하는「전당대회결의 부존재확인소송」도 냈다.
게다가 양일동계 중앙상무위원 이명환 변호사는 유진산이 1971년 5월 총선에서 전국구후보자들의 헌금 일부를 횡령했다고 서울지검에 고발했다(유진산은 정치자금을 모으는 데에는 놀라운 수완을 발휘했지만 자신을 위해 쌓아두는 법이 없었다는 것이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1974년 그의 사망이후 상도동에 있는 집은 은행에 저당이 잡혀 있었던 것이 드러났고 결국 그의 부인은 셋방살이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전투구를 해소하기 위해 조윤형 최형우 등 소장의원들은 양측 전당대회의 무효화 등을 주장했다. 김대중계는 이 제의에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법원의 판결을 기다렸다.
서울지법 합의 16부(재판장 박승호 부장판사)는 1972년 10월 2일, 7일, 14일 세 차례에 걸쳐 신민당 내분에 따른 가처분 사건을 심리했다. 10월말에 판결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야당이 분열되어 이전투구를 벌이는 가운데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 ‘공포의 대왕’은 자신이 보기에 나라를 어지럽히고 국가발전에 암적 존재인 야당에 불벼락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씨는 이미 1972년 5월 중순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에게 유신선포 준비라는 특명을 내렸다. 이후락은 ‘풍년 사업’이란 암호명으로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安家에서 3명의 법률전문가를 동원하여 이 작업을 진행하게 했다. 이들이 작성한 보고서는 매주 청와대에 넘겨져 박정희,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 등 3인 회의에서 검토했다. 유신체제의 틀은 10월 초에 완성됐다.
박정희씨는 10월 3일 개천절 경축사를 통해 야당의 분열상을 비난했다.
북한공산주의자들은 남북대화의 그늘 밑에서 우리의 혼란과 불안을 조성하고자 갖은 책동을 가해오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시점에서 민주사회의 장점인 다양성을 마치 분열로 착각하여 파쟁을 일삼는다든지, 민주제도의 운영원리인「견제와 균형」원리를 비능률의 구실로 삼으려는 이같은 정략과 간계가 우리 주변에서 횡포를 부린다면, 이 모든 것은 마땅히 광정(匡正)되어야 합니다.
야당의 만성적인 뿌리깊은 파쟁을 오랫동안 지켜본 박정희씨는 야당을 조선왕조에서 당파싸움으로 세월을 보내던 무리들과 동일시했다. 박통에게 야당은 경멸과 탄압의 대상이었지 존중의 대상은 아니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씨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켰다. 이 날 발표한 특별선언에서 박정희 씨는 야당의 추태를 지적했다.
나는 한반도의 평화, 이산가족의 재결합, 그리고 조국의 평화통일, 이 모든 것이 민족의 소명에 따라 남북의 성실한 대화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민족중흥의 위대한 기초작업이며 민족웅비의 대설계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의 주변에서는 아직도 무질서와 비능률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정계는 파쟁과 정략의 갈등에서 좀처럼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민족적 사명감을 저버린 무책임한 정당과 그 정략의 희생물이 되어 온 代議기구에 대해 과연 그 누가 민족의 염원인 평화통일의 성취를 기대할 수 있겠으며 남북대화를 진정으로 뒷받침할 것이라고 믿겠습니까.
박정희 씨가 생각하기에 자신의 평생 숙원인「조국 근대화」과업을 야당은 수행할 능력도 의도도 없었다. 그가 보기에 많은 야당 정치인이 민주주의를 팔아먹고 사는 사기협잡꾼이었다. 박정희 씨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엄청난 금권 선거로 이끌었다. 그런데 그는 선거가 끝난 후 ‘사기꾼에게 나라를 도둑맞을 뻔했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박정희 씨는 집권 이후 1971년까지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각각 3번씩 치렀는데, 이 동안 선거가 야당이 국민을 혹세무민하고 선동하는 데 악용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박정희 씨가 보기에는 장기집권과 독재도「조국 근대화」과업을 위해서는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판단이 옳았는지는 쉽게 판정할 일이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장기집권을 위한 변명으로 보이던 유신선포 사유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 이유의 대부분은 그 이후 드러난 ‘민주화 세력’의 행태와 역량에서 연유한다.
박정희씨가 작성한 명단에 의해 13명의 야당 국회의원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들은 조윤형, 조연하, 김녹영, 김경인, 홍영기, 이종남, 최형우, 박종율, 강근호, 이세규, 김상현, 유갑종, 나석호였다.
김대중은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1주일 전인 1972년 10월 11일 다리통증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돌연 일본으로 떠났다. 후일 김대중은 이경재(李敬在) 동아일보 기자에게 일본으로 떠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71년 대통령 선거 유세시에 교통사고로 다친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갔을 뿐 10․17조치에 관한 어떤 제보나 정보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총통제 개헌이 추진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언까지 했지만 그 구체적인 D데이가 10․17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어요. 만일 그같은 정보를 알았다면 결코 출국하지 않고 국내에 남아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경재 기자는 상반된 견해도 취재 보도함으로써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남겼다.
조연하 전 신민당 의원의 증언
그(김대중)는 나를 코리아나 호텔 의원회관으로 불렀다. “조 부총무, 아무래도 몸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 같아 잠깐 일본에서 치료하고 오겠소. 또 미국서도 꼭 할 일이 생겼고.” “국정감사 도중에 나가시면 말들이 많을 터이니 끝나고 난 뒤에 떠나시지요.” “2~3일 잠깐만 다녀오겠소. 이 일는 기자들에게도 비밀로 해주시오. 혹 말이 나면 김재광 원내총무에게 내 뜻을 전해주고 조 부총무도 공항에 나오지 마시오.”
이세규 전 신민당 의원의 증언
나는 10․17선언 1주일 전 괴전화를 받았어요.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된다. 지금 서울 교외에 군부대가 준비태세에 들어갔으니 피신하라” 는 겁니다. 당시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일단 다음날 국방위에 나가면 김대중 선생에게 이를 귀띰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다음날 국방위에 나가보니 김 선생이 나오지 않았고 나중에 들으니 일본에 건너가셨다 하더군요. 나는 그때 내게 온 괴전화가 김 후보에게도 갔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을 때 상당수의 야당 정치인들이 외국에 있었다. 김영삼 의원은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의 연설을 위해 워싱턴에 머물고 있었다. 김영삼 의원은 일시 망명을 해 한국의 정세변화를 지켜본 후 귀국하라는 미국정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즉시 귀국했다. 이외 야당 정치인들은 모두 서둘러 귀국했으나 김대중은 귀국을 포기했다. 김영삼 측은 1987년 대선 당시 이것을 김영삼의 7대 결단 중 하나로 홍보하면서 김대중의 해외망명을 은근히 비난했다.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헌법개정안이 의결, 공고되었는데 개헌 반대토론이 금지되었다. 이 개헌안은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수임대의기구를 신설하고 여기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기로 한 것,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을 주고 국회의원 3분의 1을 임명하는 권한을 준 것 등이 특징이다. 이른바 ‘영도적 대통령제’를 규정한 독재 헌법이었다.
11월 6일 신민당의 법정 다툼은 소송취소로 일단락되었다. 11월 21일 개헌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91.9% 투표율에 찬성 91.5%로 가결되었다. 12월 15일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을 뽑는 선거가 열렸고 23일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단독으로 출마한 박정희 후보가 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2월 27일 박정희 씨는 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고 유신헌법으로 불리는 신헌법이 공포, 시행되었다.
유신 헌법은 개정 과정이 위헌이었다. 당시 헌법이 규정한 개헌 과정은 헌법 개정안을 헌법 절차에 의해서 공고하여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국민투표에 부쳐야 했다. 그러나 대통령 성명 하나로써 국회를 해산시키고 구헌법의 중요 조항을 정지시키고 비상 국무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인수하였다. 그리고 개헌안을 곧장 국민투표에 회부하였다.
유신헌법이 확정되고 정당 활동이 재개되자 신민당은 끝내 2개의 당으로 분열되었다. 1973년 1월 27일 反유진산 기치를 내걸었던 김홍일 양일동 등이 민주통일당을 창당, 신민당에서 분가했다. 김대중계의 윤제술 김경인 김녹영, 양일동계의 유청 박병배 등이 통일당에 참가했다(총재는 양일동). 반유진산계의 정일형 김원만 서범석 등도 신당에 참여하는 듯했으나 결국은 신민당에 머물렀다.
1973년 2월 27일 9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구마다 1명만이 당선되는 소선거구제에서 2명을 선출하는 중선거구로 제도가 변경되었다. 선거운동 과정에 두 야당은 대정부 공격보다는 상호비방에 정력을 쏟았다. 유권자들은 민주통일당을 외면하고 신민당을 지지했다. 공화당은 73석, 신민당은 52석, 통일당은 불과 3석을 얻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