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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창침례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재희목사,영혼의 빛)
15년11월 천사 앞에 선 여호수아의 환상(슥3:1∼10)
스가랴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려다가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있던 시대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와 학개는 동시대 선지자로서 학개가 성전 재건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를 예언한 반면 스가랴는 상징적 환상을 통해 성전 재건과 아울러 종말에 대한 예언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가 네 번째로 본 환상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후 첫 번째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오른쪽에는 사탄이 서서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보며 그의 죄를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그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고 또한 그의 머리에 정결한 관을 씌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고 주님의 도를 지킬 때 주어지는 복과 장차 인간의 죄를 하루에 제거하게 될 메시아의 약속과 그날로 표현된 천년왕국으로의 초대를 약속하시는 환상입니다.
첫째: 대적하는 자 사탄의 고발(1-3절)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1절) 스가랴가 본 환상은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선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오른쪽에 선 사탄의 모습입니다.
1.사탄의 참소
스가랴 선지자는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대적한다는 것은 여호수아의 죄를 하나님께 참소하며 고발한다는 의미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 고발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하인들을 보내 예수님의 활동과 말씀하시는 것을 감시한 것과 같습니다.
욥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네가 어디에서 오느냐라고 하셨을 때 사탄은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왔나이다”(욥1장7절) 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으면 곧바로 하나님께 고발하는 악한 영입니다.
2.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입은 더러운 옷이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과 불에 그슬린 나무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죄라기 보다는 유대인의 죄를 말하는 것으로, 사탄의 고발은 유대인의 죄가 아직 남아 있어 더러운데 왜 벌써 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유대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특혜를 준 것에 대하여 배 아파하며 참소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유대인들이 지은 죄를 생각하면 70년의 포로 생활은 너무나도 미약한 징계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녀에게 관대하십니다. 하나님의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이사야 57장 1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자녀 이기는 부모 없듯이 하나님께서도 유대인의 죄악을 보면서 잠시 징계는 하지만 “내가 영원히 그들과 다투지는 않겠다” 고 하셨습니다. 사탄은 마치 재판장의 검사처럼 유대인의 죄에 대한 대가가 너무 약하다고 말하며, 그들이 지은 죄에 비해 용서하기가 아직은 이르다며 고발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 아름다운 옷과 정결한 관을 씌우시는 여호와 하나님(4,5절)
1.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벗기시는 하나님
사탄은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보며 하나님께 고발했지만 그 소리를 듣자마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천사에게 명령하여 여호수아가 입고 있는 더러운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 입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다”(4절)고 선포하셨습니다. 또한 머리에는 정결한 관을 씌우셨습니다. 사탄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혹 떼려다가 혹 붙인 격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이렇게 사랑하십니다. 비록 죄를 지어 징계하셨지만 사탄으로부터 참소와 고발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자식이 잘못하여 매를 들어 때리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면 화를 냅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는다 하더라도 그의 부모는 손가락질 하지 아니하며 자녀를 감싸고 지켜주는 것이 부모입니다.
▶사탄은 유대인을 고발하며 그의 죄가 아직 남아 있다고 하나님께 참소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옷을 벗기시고 죄를 제거했다고 선포하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사죄의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벗기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셨다는 것은 사죄함은 인간의 노력이나 스스로의 힘이 필요 없는 하나님의 독자적인 역사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스가랴 보다 230여 년 전에 활동하던 선지자인데 스가랴가 본 환상을 보고 말하듯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사61장10절)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을 때 벗기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의 공로가 아닌 예수님의 공로로 인하여 제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2.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며 정결한 관을 씌우시는 하나님
이 환상의 절정은 사탄이 여호수아의 죄를 고발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입은 더러운 옷을 벗기시고 그에게 아름다운 영광의 옷을 입혀주시고, 면류관을 쓰게 되는 장면입니다. 스가랴는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스가랴가 본 대제사장의 옷은 그냥 대제사장이 옷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온갖 보석들로 아름답게 꾸민 옷이며 머리에 씌운 관도 기존 대제사장의 모자가 아닌 온갖 아름다운 금으로 꾸민 면류관 같은 관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도 이와 맥을 같이 합니다. “아버지가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눅15장22절)
▶더러운 옷을 벗기는 것이 ‘사죄의 은총’이라면 아름다운 옷은 입히는 것은 ‘의와 거룩함’을 부여하는 회복의 은총이며, 머리에 정결한 관을 씌우는 것은 존귀와 영화로움을, 그리고 새 신을 신기는 것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제일 비싼 옷’을 내어다가 입혔다는 것은 아들로서 후사를 이을 수 있는 자로, 기업 이을 자로 옛 지위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도 이와 같습니다. 비록 죄를 지어 70년 간 포로생활을 했지만 사탄이 보기에는 그것 가지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의 대가가 부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셔서 이전에 지었던 모든 죄를 제거해 주시고 옛 지위를 회복시켜 하나님의 기업을 이을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주님께서는 다 제거해 주시고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구원의 면류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3.아름다운 옷은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입을 세마포 옷을 상징합니다.
여호수아가 입은 옷은 아름다운 옷입니다. 이것은 장차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입을 세마포 옷을 상징하는 것으로 요한계시록 19장 8절을 보면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반면에 타락한 세상나라 즉 바벨론 음녀들이 입었던 옷은 자주 빛 나는 붉은 옷이었습니다. 이것은 더럽혀진 옷, 죄악이 물든 옷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옷을 벗기시듯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의지한 하나님의 백성의 더러워진 옷을 벗기시는 분이시며, 아름다운 세마포 옷을 입히셔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 들여보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래의 하나님의 자녀의 위치, 기업을 이을 위치로 복원시키는 분입니다.
셋째: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의 책임과 예표의 사람(6-8절)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정결한 관을 머리에 씌우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증언하기를 “네가 만일 내 도를 행하며 내 규례를 지키면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요 내 뜰을 지킬 것이며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가운데에 왕래하게 하리라……너와 네 앞에 앉은 동료들은 내 말을 들을 것이니라 이들은 예표의 사람들이라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7절)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뜻대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을 받으며 이스라엘을 통하여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말하면 대제사장 여호수아 앞에 서 있는 네 동료들은 여호수아와 함께하는 다른 제사장을 말하지만 상징적으로는 이방인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여호수아로 묘사된 유대인들의 죄를 다 제거하셨으니 이제는 죄를 짓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면 주님께서 주신 땅을 지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이방인들까지도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왔으나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고(요1장11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복음을 거부함으로 주님의 구원의 복과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갔습니다.
▶여기에서 대체신학이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이방인이 감당하게 되었고, 이제는 이방인이 영적 이스라엘 백성이 되었다는 신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받았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은 자로서의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계명을 사랑하고 지키는 것이며,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을 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주인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싹과 하루 그리고 그날(8-10절)
본문 8,9절을 보면 “내가 내 종 싹을 나게 하리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거기에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말하는 「싹」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은 ‘언약의 백성, 영적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장차 메시아를 보내어 언약의 백성들과 이스라엘의 모든 죄악을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하루에 즉 단번에 제거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와 그의 죽음은 이러한 능력이 있습니다. 하루에 온 인류의 죄악을 제거하는 능력입니다. 초림 메시아의 오심은 죄악을 제거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을 보면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는 말씀은 성도의 휴거와 천년왕국의 비유입니다.
죄가 제거된 백성들은 천년왕국으로의 초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적 유대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구원 받은 모든 영적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을 말합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네 번째 환상을 통하여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힘으로나 능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독자적인 역사로 된다는 것을 말씀하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름다운 옷을 다시 더럽히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며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이방인에게로 촛대를 옮긴다는 말씀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아로 온 세상의 구주로서 하루에 모든 죄를 제거하는 분이며, 그분을 영접하고 그분을 통하여 죄가 사함 받은 모든 자들은 천년왕국으로 초대함을 받는다는 환상입니다.
▶지금 우리는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과 여호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제 스가랴 선지자의 네 번째 환상으로서 남은 마지막 예언의 성취는 천년왕국의 비전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죄가 제거된 성도만이 그 땅에 들어갈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거역함으로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흘러 갔듯이 우리도 우리의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주의 도를 지키고 주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감으로서 천년왕국으로 초대 받는 자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