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절규의 화가
몇 달 전에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에 <헤밍웨이>를 괜찮게 읽어서,
그 시리즈의 다른 인물들도 살펴 보았단다.
아빠가 흥미를 갖는 인물들이 여럿 있었어.
그 중에 <절규>란 작품으로 유명한 화가 뭉크를 읽었단다.
<절규>라는 작품은 너무나 유명한 작품인데,
그걸 그린 화가 뭉크는 이름만 알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단다.
어떤 삶을 살았길래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궁금했단다.
너희들도 그 그림을 보여주니 아는 그림이라고 했잖아.
원작보다 재미있게 패러디한 그림으로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아빠가 아는 뭉크의 그림은 <절규> 한 편이지만,
그 작품 하나만 봐도 그가 외롭고 어두운 삶을 살았을 것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실제도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하는구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삶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뭉크도 그랬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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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뭉크의 예술은 그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뭉크는 평생 외롭고 고독했다.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 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 공황 장해, 우울증,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대표작 <절규>를 비롯하여 <마돈나> <불안> <아픈 아이> <이별> <키스> 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 가져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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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규의 탄생
뭉크가 노르웨이 사람이란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단다.
1863년 노르웨이 로텐이란 곳에서 태어난 뭉크.
5살에 엄마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고,
13살에는 잘 따랐던 누나 소피에가 역시 폐결핵으로 죽었단다.
어린 시절 뭉크는 카렌 이모가 보살펴주었지만 엄마의 빈자리는 무척 컸단다.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뭉크는 어린 시절 엄마와 누나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것이 그의 삶 내내 어둠과 외로움의 색깔을 띠게 했을 거야.
나중에 그는 아팠던 누나를 떠올리면서 <아픈 아이>라는 작품을 남기에 되었어.
이 그림을 처음 출품할 때는 호평과 혹평이 함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뭉크의 대표작 중에 하나가 되었단다.
…
오슬로의 옛 명칭은 크리스티아니아라고 하는구나.
뭉크의 아버지는 늘 모범적인 종교인으로
기독교적인 삶을 뭉크에 강요를 했지만,
반항기 넘치는 젊은이들이 그것을 따르겠니.
뭉크도 예민한 성격이지만 20대는 20대였어.
20살 무렵 사교계에 참석하면서 인맥도 넓혀갔어.
한스 에게르라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와 진보 성향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한스 에게르의 영향으로 자유연애를 해서 그런지
첫사랑은 밀리 타우로비라고 하는 유부녀였단다.
하지만 이 사랑은 1년을 넘기지 못했어.
…
1889년 뭉크는 파리에 유학을 가서 3년 만에 돌아와
전시회를 열면서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가게 된단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호평과 혹평을 받게 되는데,
베를린 화단에서 뭉크가 전시회를 혹평하게 되는데,
오히려 이것이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들어서 여러 곳에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의도치 않은 노이즈 마케팅의 반전이로구나.
뭉크는 1893년 그의 어린 시절 겪은 죽음들로 인한 마음의 고통과 어둠을
그림으로 표현한 <절규>를 발표하는데,
아빠도 이 그림보다 사람 마음을 절절히 표현한 그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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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뭉크의 <절규>는 일그러진 얼굴과 독특한 분위기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사람들은 강한 인상에 압도당하고 만다. 해골 같은 얼굴에 늘어지고 비틀린 입과 턱, 강한 원색들이 혼란스럽고 불안하게 움직이는 풍경은 당시 선호되던 아름답거나 숭고하게 느껴지는 풍경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절규>는 마치 환상 속이나 꿈속에서 벌어지는 모습을 그린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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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는 <절망>, <절규>, <불안>으로 이어지는 작품 중 하나라고 하는구나.
그림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그림들이란다.
그런데 이 <절규>라는 그림이 두 번이나 절도를 당했다가 되찾았다고 하더구나.
그 두 번의 절도가 제법 최근에 있었다는 사실에 놀랬단다.
첫 번째는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에서 올린 동계올림픽 때 절도 당했다가 되찾았고,
두 번째는 2004년에 절도 당했다가 무려 2년만에 되찾았다고 하는구나.
형사가 신분을 숨긴 채 용의자의 이웃집으로 이사 와서
그와 친분을 쌓은 다음 그 그림을 되찾았다고 하니,
정말 영화 같은 이야기로구나.
또 하나 <절규>에 숨겨진 재미있는 이야기(아빠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지만…)
그림 <절규>에 글씨가 써 있다고 하더구나.
자세히 봐야 보인다고 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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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노을 부분을 보면 아주 작은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친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라는 이 글귀가 최초로 발견된 건 1904년인데, 뭉크 자신이 썼는지 다른 이가 썼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필체를 분석해 본 결과 뭉크보다는 관람객 중 누군가가 썼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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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성기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대.
아무래도 어린 시절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싶구나.
그래도 사랑을 한 적은 있었어.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유부녀 밀리와 첫사랑.
반 년 만에 끝이 난 사랑이지만 뭉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준 사랑이었을 거야.
먼 친척 율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기도 했는데,
율은 뭉크만이 아니라 당대 많은 남성들이 사랑하는 여인이었단다.
‘검은 새끼 돼지’ 라는 예술가들이 자주 모이는 주점이 있었는데,
뭉크도 그곳에 자주 가곤 했단다.
율도 그곳에 자주 오면서 많은 예술가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어.
팜파탈이라고 할까?
나중에 뭉크가 <마돈나>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율이 영감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안타깝게도 율은 팬이 쏜 총에 맞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대.
툴라라는 여인과는 약혼까지 했지만, 결국 안좋게 헤어지고 말았단다.
그러나 이런 사랑들 또한 모두 뭉크의 삶을 만들어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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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41)
스물한 살 젊은 뭉크에서 첫사랑 밀리는 ‘사랑’이라는, 그가 추구하고 탐구해야 할 예술의 구심점을 만들어 주었다. 검은 새끼 돼지 그룹에서 만난 율은 30대에 들어선 뭉크에게 여자의 ‘관성성과 마력’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그리고 30대 중후반에 만난 툴라는 뭉크에게 ‘인생’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예술을 담도록 자극한 여인이었다. 이들은 모두 예술가 뭉크에게는 다양한 자극을 주었던 반면, 한 인간으로서의 뭉크에게는 외로움과 상실감에 빠지게 했다. 밀리는 쫓아 크리스티아니아를 헤매던 청년 뭉크와 툴라와 관련된 모든 지인들에게서 멀어지고 싶어 크리스티아니아를 등진 중년의 뭉크. 뭉크의 인생은 이들과의 사랑과 이별을 통해 더욱 침잠하고 고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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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는 30대 후반 오스고쉬트란드라는 곳에 정착하게 된단다.
여름휴가가 해마다 들렀다가
나중에는 이곳에 집을 구입하여 정착하게 되었어.
이곳은 한적하고 조용한 해변 마을로,
단조롭고 외로운 생활을 해야 했지만
뭉크는 이곳에서 안정을 찾고 걸작을 만들어내게 된단다.
그렇다고 그곳에만 머문 것은 아니고,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스위스 등을 여행하기도 하고,
작품활동을 위해 외국에 가기도 했단다.
그의 유명한 작품 중에 <생의 프리즈>라는 연작이 있는데,
이것을 처음 선보인 것도 베를린이었다고 하는구나.
<생의 프리즈>는 뭉크 예술의 집약판이라고도 부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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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뭉크는 <생의 프리즈>가 탄생하게 되는 과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그림들을 그릴 때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나는 그 그림들을 모아보았을 때, 각각의 그림들이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그림들이 전시되자 그림들 사이에서 하나의 울림이 터져 나왔고, 그림들이 따로따로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교향곡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생의 프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 뭉크의 노트(MM N 46, 1930~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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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또 다른 작품으로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가 있다고 하는데,
<절규>만 알고 있던 아빠에게 좋은 상식이 되겠구나.
지금도 오슬로 대학 강당에 가면 볼 수 있다고 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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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263)
오슬로 대학 강당 벽화 작업은 뭉크 스스로에게도 큰 의미가 있었다. 대형 공공 미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뭉크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생의 고통스러운 에피소드와 그 의미에 집중했던 반면, 오슬로 대학 강당의 벽화 작업을 하면서 인류와 민족, 지식과 역사 그리고 희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젊은 시절의 깊은 방황,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한 끝없는 관찰과 집요한 탐구에 몰두했던 뭉크는 50대를 눈앞에 둔 중년의 나이에 이르자 더 큰 관점에서 인류와 역사에 대한 총체적인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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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독한 말년
중년이 되어서(1916년) 크리스티아니아 외곽 에켈리에라는 곳에 땅과 집을 구입하여
1944년 죽을 때까지 지내게 된단다.
독신을 살아서일까?
그의 말년은 외로움과 싸워야 했고, 병마와 싸워야 했단다.
뭐, 그가 언제 외롭지 않은 적이 있을까?
그가 말년에 그린 자화상들이 여럿 있는데,
그 그림에서 외로움과 고독이 절절하게 느껴지더구나.
그런 그림을 그렸을 뭉크를 생각하니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단다.
또 그의 말년은 전 세계적으로 무시무시한 2차 세계대전으로 무서운 시절이었으니,
그것 또한 그에게는 불운이었단다.
그의 작품들은 독일에도 많았는데,
나치가 집권하면서 그의 작품들은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82점이나 압수당하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나치가 망하고 독일이 전쟁에게 지기 전에
세상을 등졌으니
다시 자신의 작품들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그 또한 안타깝구나.
…
이 책을 통해서 뭉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어 좋았단다.
아빠가 화가들의 전기를 읽은 것이 있나 생각해 보니,
김홍도를 빼면 없는 것 같더구나.
미술 관련 책을 통해 단편적인 이야기들을 읽은 적은 있지만 말이야.
이번처럼 화가들의 전기를 읽은 것은 별로 없는 것 같구나.
이 책은 재미있게 잘 읽은 것 같구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 중에 화가를 다룬 것이 있으면
또 찾아서 읽어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에드바르 뭉크의 키워드는 단연 ‘절규’다.
책의 끝 문장: 아마도 인생의 희로애락이 존재하는 한, 뭉크의 그림은 앞으로도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책제목 : 뭉크
지은이 : 유성혜
펴낸곳 : 아르테
페이지 : 324 page
책무게 : 491 g
펴낸날 : 2019년 01월 21일
책정가 : 18,800원
읽은날 : 2022.08.01~2022.08.03
글쓴날 : 2022.08.22,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