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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27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마르코 4,26-34
하느님 나라는 꿈을 주려는 꿈이 심어지는 것
왜 애플사는 창조적일까요? 그들은 모든 경쟁사보다 훨씬 더 혁신적입니다.
왜 마틴 루터 킹 목사는 민권 운동을 이끌었던 것일까요?
그가 미국 민권운동 이전에 고통받았던 유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오직 그만이 그 시대의 훌륭한 연설가도 아니었습니다. 왜 그였을까요?
그리고 왜 라이트 형제는 동력 조절 유인 비행을 발명해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골든 써클(Golden Circle)이라 부릅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이 작은 아이디어는 몇몇 단체 그리고 리더들이 왜 영감을 줄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여기서 제가 “왜?”라고 했을 때 “이윤 창출” 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결과입니다.
“왜”라는 것은 즉, 무엇이 당신의 목적인지? 당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당신의 신념이 무엇인지를 의미합니다.
당신이 속한 조직은 왜 존재합니까? 당신은 왜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납니까?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애플사의 사례를 주로 듭니다.
애플사가 다른 여타 기업과 같다면, 그들의 마케팅 메시지는 이렇겠죠.
“우리는 훌륭한 컴퓨터를 만듭니다.
그것들은 매우 아름다운 디자인에, 쉽게 이용할 수 있고 편리합니다. 사고 싶나요?”
애플사가 실제로 선전하는 방식은 이렇죠.
“우리가 하는 모두 것들, 우리는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고,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존의 현상에 도전하는 우리의 방식은 제품을 아름답게 디자인하며, 간단히 사용할 수 있고, 편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훌륭한 컴퓨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고 싶은가요?”
분명하게 다릅니다.
저는 정보의 순서를 뒤집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라이트 형제의 일화만큼 좋은 예는 없지요.
대부분 사람은 사무엘 피에폰트 랭리(Samuel Pierpont Langley)에 대하여 모릅니다.
20세기 초, 인력에 의한 비행에 대한 추구는 오늘날의 닷컴 열기와 비슷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시도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성공 비법이라는 걸 가지고 있었죠.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미 육군성에서 5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비행기구를 발명하기 위해서 말이죠.
하버드 학위가 있고 학술 협회에서 일했으며 인맥 역시 아주 좋았죠.
그는 그 당시 모든 지식인을 알고 있었죠.
그는 풍부한 자금으로 최고의 지식인들을 고용했습니다.
이후 시장 상황은 훌륭했습니다.
뉴욕 타임스지는 어디서나 그를 취재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랭리를 지지했죠.
그런데 어째서 그에 관해 전혀 들어본 적이 없을까요?
백여 마일 건너 오하이오 데이턴에는 올 빌, 윌버 라이트 형제가 있었죠.
그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성공 비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자금도 없었고. 그들은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면서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라이트 형제 팀 중 누구도 대학교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올빌, 윌버 둘 다 말이죠.
그리고 뉴욕 타임스지는 그들을 취재하지 않았죠. 다른 점은, 올빌, 윌버 이들은 이유, 목적, 신념에 의해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비행 기계를 발명할 수 있다면, 세계 흐름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무엘 피에르폰트 랭리는 달랐습니다. 그는 부유해지고 유명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결과를 추구했죠. 그는 부유함을 추구했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꿈을 믿은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열과 성의를 다해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랭리의 직원들은 단지 월급봉투를 위해 일했죠. 랭리가 잘못된 목적에 의해 동기 부여가 되었다는 증거는 라이트 형제가 비행한 날, 그가 그만두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1963년 여름, 250,000명의 사람이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에 킹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초대장도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죠.
킹 목사만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연설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만이 미 인권운동 초기에 고통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변화하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말했죠. 그리고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의 이유를 가지고 가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몇몇 사람들은 조직화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여기 250,000명의 사람들이 바로 그날, 그 시간에 나왔죠,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말이죠.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를 위해 나온 것일까요? 제로(0).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나온 것입니다.
아무튼, 그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했죠, “계획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이 아닌.
정치가들이 그들의 12가지의 포괄적 계획에 대해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영감을 주지 못합니다.
세상에는 리더와 이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리더는 힘의 위치 혹은 권위를 쥐고 있죠.
하지만 우리를 이끄는 이들은 영감을 줍니다. 그들이 개인이건 혹은 단체이건 간에,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르죠.
우리의 의무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바라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끄는 이들을 따릅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죠.
그리고 “왜”와 함께 시작하는 이들은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거나 영감을 주는 다른 이를 찾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이먼 시넥의 TED 강연, ‘위대한 지도자들은 어떻게 행동을 이끌어낼까’ 강연의 줄거리입니다.
사이먼 사이넥은 위대한 리더들이 사람들의 행동을 끌어내는 방법을 ‘골든 서클’로 설명한다.
이유(Why) ➡ 방법(How) ➡ 결과(What)입니다.
인간 뇌를 횡단면으로 자르면 골든서클과 완벽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뇌의 겉에 있는 신경들은 행동을 지시 내리지는 못합니다. 느끼고 반응할 뿐이죠.
그러나 가운데 있는 신경은 행동하고, 말을 하라고 지시 내릴 수 있습니다.
이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실 그 이성을 움직이는 것은 그 가장 가운데 변연계라고 합니다.
거기서는 ‘믿음’이 형성됩니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어떻게 왜의 순서로 산다면, 믿음이 심겨진 이들은 왜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지의 순서로 삽니다.
육-혼-영의 순서로 사는 것이 아닌, 믿음의 사람들은 영-혼-육의 순서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하는 사람들의 특징이고 예수님께서는 이 영 안에 당신의 믿음의 씨앗을 심어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심어진 이들은 평생을 그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증명할 꿈이 없다면 아직은 말씀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꿈의 성격은 어떨까요? 예수님은 오늘 하느님 나라 둘째 비유에서 새들이 와서 쉬게 한다는 내용을 들려주십니다.
하느님 나라를 가진 사람은 주위 사람들이 와서 쉬게 하는 휴식 같은 친구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서 그냥 살아갑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그냥 환경에서 주어지는 것에 순응합니다.
그는 자신이 유태인을 죽이는 데 엄청난 공을 세웠음에도 그저 시켜서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심판받은 이유는 ‘왜?’에서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휩쓸립니다.
그리고 결국엔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 안에 주님께서 이웃에게 휴식과 에너지와 양식이 되어주라는 명령이 들어있음을 믿읍시다.
이 믿음은 방법을 찾게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이런 삶이 하느님 나라가 심겨진 이들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헤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믿음을 찾는 이들이 와서 쉬게 됩니다.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면서 주위 사람에게도 그 믿음을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월27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마르코 4,26-34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아주 특별한 서간이 하나 있는데 바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히브리서는 말 마디 그대로 히브리인들, 즉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이자 가르침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에 대한 논쟁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되어 왔는데,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습니다.
오늘날 성경학계에서는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더 이상 바오로 사도를 히브리서의 저자로 단언하지 않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더군요.
히브리서에 등장하는 어휘나 문체가 놀랄 정도로 세련되고 수준이 높아, 비교적 거칠고 투박한
바오로 사도의 표현과 맥을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과는 달리 히브리서에는 바오로 사도가 저자라는 언급은 물론 암시조차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을 인용하는 방법이나 신학적인 내용에서 바오로 사도의 서간과 큰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헬레니즘 문화의 배경을 지닌 유다계 그리스도인으로 추정합니다.
히브리서는 신약 성경들 가운에 가장 완숙한 신학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구약성경의 전통 안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탁월하게 풀어냅니다.
메시지 역시 심오하면서도 다양합니다.4
히브리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는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진 후,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답변을 이어갑니다.
베드로, 바오로 사도가 활발히 복음을 선포하던 시절 수많은 유다인들이 회개하여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잘 나가던 시절 그의 설교를 듣고 그 자리에서 회개한 유다인만 3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개종 작업이 완료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분위기였는데, 지상천국이 조만간 도래할 듯한 예감이었는데...
화려한 기적과 치유는 잠시뿐 이제 고통스럽고 지루한 광야 여정이 남아있었습니다.
이에 상심이 컸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둘 과거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던 ‘누군가’가 이 히브리 서간을 쓴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을 읽다보면 때로 지나치게 강한 경고 말씀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고 말씀 이면에 감추어진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 아버지의 진한 부성애를 느낄 수 있어 감동적입니다.
히브리서는 신앙의 위기를 맞이한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칩니다.
이를 통해 지금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를 잘 극복하도록 돕습니다.
결국 히브리서는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실체가 무엇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사제이자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된 희생 제물로서, 완전한 제사를 하느님께 바친 분임을 강조합니다.
더불어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따라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처신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무엇보다도 강한 믿음과 불굴의 인내를 간직할 것을 당부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올 이가 오리라. 지체하지 않으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자는, 내 마음이 기꺼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 멸망할 사람이 아니라, 믿어서 생명을 얻을 사람입니다.”(히브리서 10장 37~39절)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줌>
2023. 01. 27 연중 제3주간 금요일
마르코 4,26-34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한줌>
한줌 믿음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목숨 바칠
굳건한 믿음
담고 있으니까요
한줌 희망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꺼지지 않을
불타는 희망
담고 있으니까요
한줌 사랑
온 몸과 마음으로
정성껏 품어요
아낌없이 내어줄
뜨거운 사랑
담고 있으니까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