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코 성인은 1170년 무렵 에스파냐 칼레루에가의 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덕을 쌓는 데 몰두하던 그는 사제가 되어
하느님 말씀을 열정적으로 설교하여 사람들을 회개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1206년 설교와 종교 교육을 주로 담당하는 설교자회(도미니코 수도회)를 세우고,
청빈한 삶과 설교로 복음의 진리를 철저히 탐구하도록 독려하였다.
1221년에 선종한 그를 1234년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 직무의 권한이 되는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신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사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영광과 권능의 구세주로만 받아들이려는 베드로 사도를 책망하신다.
(마태 16,13-23)
오늘 복음을 읽으면 어릴 때 읽었던 소설이 생각납니다.
A. J. 크로닌이 쓴 『천국의 열쇠』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 신부는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화목과
사랑만을 위해 묵묵히 사는 충실한 하느님의 사제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가 가는 사목 현장마다 사람들에게 별로 환영받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보기에는 실패를 거듭하는 삶을 살지만
양심에 따라 우직하게 자신의 길을 충실히 걷습니다.
한편 그의 동료 안셀모 밀리는 치셤 신부와 대조적으로
교회 안에서 약삭빠르게 행동하고 요령을 부려 출세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
높은 지위와 명예를 획득합니다.
결국 이 책의 저자는 소설 속 두 인물을 비교하여
누가 진정으로 ‘천국의 열쇠’를 지니고 살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말씀은 마치 불교에서 참선 수행을 위해 주어지는 ‘화두’처럼 들립니다.
진정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누구이신지요?
어쩌면 우리가 배운 신앙의 지식으로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 깊이 고백하고,
고백한 것을 실천하며 사는 데에는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우리 삶에서 ‘천국을 여는 열쇠’는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묻는 물음 안에 주어졌는지 모릅니다.
이 물음 안에 해답이 담겨 있다면,
천국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도 이 물음 안에 있을 것입니다.
물음의 답을 깨달아 가는 만큼 삶 속에 천국은 열립니다.
세상 것을 얻으려고 약삭빠르게 처신하지 않고
치셤 신부처럼 누가 뭐라고 하든 자신의 믿음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이
천국을 여는 열쇠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두 가지 돌에 비유하십니다.
첫 번째는 ‘반석’이요, 두 번째는 ‘걸림돌’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신앙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여느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석인 베드로가 이내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는 하였지만,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 말씀에서 ‘물러가라’는 표현의 뜻을 잘 되새길 때,
우리가 예수님께 ‘걸림돌’이 아닌 ‘반석’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을 물리치실 때에도
“사탄아, 물러가라.”(마태 4,1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의 원어는 ‘휘파게 사타나’(hypage satana)로,
단순하게 ‘물러가라’고 추방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에게 하신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는 조금 다릅니다.
원어로 ‘휘파게 오피소 무 사타나’(hypage opiso mou satana)로,
말 그대로 번역하자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앞’이 아니라 ‘뒤’로 가라고 하심으로써,
‘다시 나의 추종자가 되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께 ‘추방’을 명령받은 것과 달리 베드로는 ‘추종’을 명령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걸림돌’이 아니라 ‘반석’이 되려면 예수님의 뒤에 있어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의 ‘뒤’가 아니라 그분의 ‘앞’에 서려고 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분께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며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한 결 같이 따르면 교회의 반석이 되지만
사람의 일만 생각하며 봉사와 희생을 외면하면
우리는 예수님의 걸림돌이 된다.
우리는 교회의 반석인가?
아니면 예수님의 걸림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