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이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독일이 다시 일어날 때가 왔다.
스위스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타기로 했다.
아무래도 비행기가 빠르지만
난 전투기로 인해 고소공포증이 생겨서 거부했다.
바다 건너의 땅에서 월드컵이 열렸으면
더러워서 출전 안 할 뻔했다.
출국 전 기자회견
"조별 리그에서 누구와 맞붙길 원하십니까?"
"일단 헝가리만 아니면 상관없습니다."
우승을 위해 어차피 붙어야할 상대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조에서 붙게 된다면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변명같지만 결승같은 높은 무대에서 헝가리와 붙길 원했기 때문이다.
"별로 말한 것도 없지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주장으로써 나라를 대표하는 나에게
중요한 순간이였다.
쉽게 대답하질 못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다.
실망시켜서는 안 되는 상황이다.
그 압박감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독일을 이끌고
반드시 월드컵에서 우승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겠습니다."
5화 : Der Ball ist rund und ein Spiel dauert 90 Minuten.
드디어 스위스 땅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와서야 배정받은 조를 확인할 수 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조 배정표를 받았다.
제1조
브라질
멕시코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제2조
헝가리
한국
터키
서독(독일)
제3조
우루과이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티리아
스코틀랜드
제4조
스위스
이탈리아
잉글랜드
벨기에
모두 탄식하거나 할 말을 잃었다.
다들 나를 원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엠병, 누군 이렇게 될 줄 알고 말했나'
감독님이 잠깐 한숨을 쉬더니
할 수 없다는 듯 선수들에게 일정을 말했다.
"이 대회 규정을 보면 우린 먼저 터키와 첫경기를 치른다.
두번째로 붙게 될 상대가 바로 헝가리다.
한국이란 나라와는 아쉽게도 붙을 기회도 없겠지.
즉, 터키 전에서 반드시 이기고 봐야 한다."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헝가리 전,
그렇기에 8강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터키로부터 1승을 챙겨야 한다는 말이였다.
아쉬워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대회가 시작되었다.
독일 VS 터키
락커룸
감독님이 유니폼을 가져오셨다.
"드디어 시작이다. 포지션을 발표한다.
골키퍼는 토니 튜렉, 수비는 라반, 포시팔, 쾰마이어,
공격엔 에켈과 칼 마이, 하프백엔 모어록과 프리츠,
레프트 윙엔 쉐퍼, 센터엔 오트마, 라이트 윙은... 클로트."
헬무트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다들 경기에 집중할 뿐,
아무도 그를 챙겨주지 않는다.
"터키는 스페인을 누르고 올라왔기 때문에 절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다들 잊지 않았겠지? 우리의 목표는 세계 정복이라고.
고작 터키 정도에 멈춘다면 정말 곤란하다.
지지 마라. 그땐 죽인다."
감독님의 말에 살기를 느꼈다.
덕분에 비장한 각오로 그라운드로 향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축구선수의 꿈,
드디어 월드컵 무대에 섰다.
1938 월드컵 이후 세계대전으로 인해 월드컵이 중단되었고,
독일은 1954년이 되어서야 월드컵에 참가할 수 있었다.
그라운드에 들어올 때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 독일이 출전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과거를 잊고 새롭게 태어났으니까.
독일 4 : 1 터키
헝가리 9 : 0 한국
그리고 두번째 경기,
헝가리와의 만남이였다.
.
독일의 한 술집
"어떻게 되고 있소?"
"말도 걸지마. 아주 무참히 깨지고 있어."
"후보들 내세울 때부터 알아봤지."
"헝가리가 강한 건지 독일이 약한 건지"
"이 정도면 졸전이야. 졸전."
"그만해. 전쟁에도 졌으니까
경기도 지는 거야."
아직까지 패배감에서 헤어나질 못하는 독일인이였다.
헝가리 8 : 3 독일
터키 7 : 0 한국
경기 후 기자회견.
수많은 기자가 모인 가운데 헤어베르거가 말했다.
"질문하시죠."
기자들이 기다렸다 듯이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이번 헝가리 전 선수의 포지션과
우왕좌왕한 수비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죠."
"그런 건 필요없소. 다음 경기에 집중할 겁니다.
터키가 한국을 이겨 또다시 우리와 붙게 되죠.
거기서 이겨야 합니다."
"여덟 골, 우리 독일이 공을 찬 이래
이렇게 끔찍히 찌그러진 적도 없죠.
어떻게 된 거죠?"
"글쎄요. 그 공은 스위스산인데
제가 아무리 뜯어봐도 찌그러지지 않더군요."
기자회견장이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헤어베르거는 기자들의 짓궂은 질문을 모두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해주시죠."
축구계에 길이 남을 한 마디
"Der Ball ist rund und ein Spiel dauert 90 Minuten."
("공은 둥글고 경기는 90분 동안 계속된다.")-제프 헤어베르거-
독일과 터키의 조2위 결정전.
역시 락커룸
"선발 라인업을 발표한다.
터키와 첫 경기에서의 출전자 전원."
선수들이 유니폼을 갈아입었고 나갈 준비를 한다.
내가 나가려 하자 감독님이 문을 가로막았다.
"할말 있으니까
잠깐 좀 앉아봐."
그 한마디에 심상치 않은 일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알겠지만 8강 확정전이다. 더는 말하지 않겠다.
대신 지난 헝가리 전에 대해 고국에서 보내온 편지들이 있다."
감독님이 손에 쥐고 있던 두툼한 편지들을 한장씩 읽어나갔다.
'헤어베르거씨, 저번같은 졸전을 보여준 당신께
꼭 권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밧줄을 하나 사서 최대한 목매 죽되 밧줄은 재활용하도록'
감독님은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능청스럽게 읽었다.
'당신을 재판정에 세워야 하겠지만
책임감이 뭔지 안다면 알아서 물러가시오.'
경기를 뛴 선수들의 책임도 컸다.
선수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헤어베르거를 내쫓아라! 50대의 태형 후'
'독일에서 영원히 추방하라'
'놈은 매국노다'
더는 읽어볼 필요없는 듯
감독님은 편지들을 던지며 말했다.
"나가봐."
말이 끝나는 동시에
선수들이 미친 듯이 뛰쳐나갔다.
조 2위 결정전,
독일 7 VS 2 터키
8강 진출
독일이 헝가리에 이어 조 2위로
힘겹게 8강 진출했다.
8강에 진출했으나
대표팀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헝가리 전 이후
경기에 출전한 3명의 후보 선수들이
무단 이탈해 술집으로 간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헬무트 란도 포함돼 있었다.
설상가상 헬무트는 다음날 오전 훈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나는 이참에 그의 사연이나 들어볼 겸 그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헬무트, 그러고 있을 거야?"
"어때서요?"
"감독이 알았단 그냥 퇴출이야."
"후보 한 명쯤 없어도 신경 안 쓸거에요."
풀죽은 그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나는 그를 말리고자 했다.
'말리려 했다'
불현듯 한 사내가 떠올랐다.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왜 '헬무트 란'을 보고 그 생각이 들었을까?
'잠깐, 란? 설마...'
나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의 반응을 유도하고자 나는 자연스럽게 한 이야기를 했다.
"헬무트, 내가 소련군의 포로로 잡혔을 때 이야기야.
같이 잡힌 친한 동료가 탈출을 감행하려 했어."
헬무트가 나의 이야기에 흥미를 가진 듯 보였다.
"나는 그를 적극적으로 말렸지.
하지만 그의 의지는 꺽이지 않았어.
내가 이유를 물어봤지. 그가 다부지게 말했어.
아들에게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고 하더군."
헬무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힘겹게 물었다.
"그, 그 사람의 이름은요?"
그의 눈을 보고 나는 예감했다.
나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클레멘스 란',
내가 봐왔던 사내 중 가장 용감한 분이였지."
헬무트는 큰 충격에 빠진 듯하다.
클레멘스 란, 그리고 헬무트 란
부자 관계였던 것이다.
불행히도 부자의 상봉은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다.
클레멘스 란, 그는 어떻게 됐을까?
내가 그에 대한 생각에 젖어있을 때,
헬무트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겠죠? 훈련 말이에요."
"물론."
헬무트가 감독님께 사과하며 훈련에 임했다.
그는 훈련에 늦은 것을 만회하려는 듯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곧 연습경기에서 엄청난 골감각을 발휘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그도 분명 복잡한 심정이였을 거다.
그랬기에 이를 분출하고자 연습에 매달렸을 것이다.
그의 모습이 어느 때보다도
열정적이였거나.... 처절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의 발끝에서 시작될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감독님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란의 분위기가 달라졌군.
매우 인상적이야."
"얘기하려면 좀 깁니다."
"사연은 됐어. 이번 8강에서 유고와 맞붙게 된다.
라이트 윙에 누굴 둬야 할 지 모르겠어."
라이트 윙 자리, 란을 포함한 후보들이 출전한 헝가리 전을 제외하면
주전은 클로트의 자리였다.
"클로트와 란, 둘다 훌륭합니다.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게 안타까울 정도죠."
"클로트는 지금까지 잘 해왔어. 모어록과 발맞춰 공격에서 역할이 컸지.
하지만 이번 유고 전에선 수비적으로 나서야 하는데 확실한 한 방이 필요해.
그렇다면 란이 적합한 거지. 그 기대를 못 채우면 안 되는데..."
"헬무트 란,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무서운 선수로 돌변합니다.
저 기세를 봐도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미 한번 실망시켰다는 거 알지?"
역시나 훈련에 불참한 게 걸렸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보고 난 확신했다.
"걱정 마세요. 확실합니다."
8강
독일 VS 유고슬라비아
[오늘의 스타팅 멤버를 보죠.
전체적으로 변화가 없...
아! 라이트 윙에 클로트 대신 란이 출전했군요.]
독일 2 VS 0 유고슬라비아
준결승 진출
[독일, 힘겨운 승리를 거둡니다.
수비의 자책골과 헬무트 란의 골을 수비가 필사적으로 지켜냈죠.
이번엔 제법 조직력이 갖춰진 모습이네요.]
세계가 독일을 주목하기 시작한다.
이제 독일의 플레이가 진가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준결승
독일 VS 오스트리아
[비교적 약체였던 독일이 놀랍게도 준결승까지 올라왔네요.
하지만 강호 오스트리아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점쳤다.
하지만 독일의 기세는 절정에 올랐다.
나는 매경기 출전하며 감을 잡았고,
선수들을 지시하며 팀을 이끌었다.
전방으로 올라가는 쉐퍼를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다.
[골! 한스 쉐퍼의 선제골이 터졌습니다!
기분좋은 출발을 보이는 독일! 좋은 작품이 나오네요.]
[후반전에 들어서면서 주도권은 완전히 독일에게 넘어갔군요.]
[골입니다! 코너킥에서 프리츠 발터가 올렸고 또다시 쉐퍼가 넣었습니다!
선제골이 리플레이되는 순간이네요. 아주 죽이 척척 맞습니다.]
[골~ 이번엔 프리츠 발터의 골!]
[골! 동생 오트마 발터도 골을 성공시킵니다!]
[란이 올려줍니다. 모어록, 골!]
[특별한 상황이 연출됩니다.
동생이 올려준 공을 형이 골로 연결시키네요!
발터 형제의 멋진 활약!]
[어른과 아이의 경기를 보는 듯, 독일의 일방적인 경기입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경기 종료됩니다! 6 - 1 대승!
손쉽게 결승에 진출하는 독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였죠!]
드디어 세트플레이를 완성시켰다.
어려움없이 골을 성공시키며 승리를 따낼 수 있었다.
독일 6 VS 1오스트리아
결승 진출
조별 리그에서 헝가리에게 8-3으로 깨졌을 때만해도,
그 누가 독일이 결승에 진출할 줄 알았겠는가?
남들이 뭐라고 하든
우린 기적을 향해 나가고 있었고
드디어 이 곳에 왔다.
결승전이 열리는 땅,
'베른(Bern)'으로 말이다.
그리고 외나무 다리에서 만날
결승전 상대는...
[지난 월드컵 우승팀 우루과이을 누르고 연장 끝에 헝가리가 결승에 진출합니다!]
헝가리.
신의 장난이였을까?
또다시 헝가리다.
반드시 이겨야 할 상대를 결국 마지막 순간에 마주쳤다.
'결국은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는 건가...'
리벤지 매치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독일은 이전 경기에서 대패했지만,
결코 이전의 독일이 아니다.
월드컵 결승,
더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드디어 독일의 운명이 걸린 순간이 온 것이다.
독일의 세계 정복,
그 기적을 향해 여기까지 왔다.
to be continue....
헬무트 란 (Helmut Rahn)
헬무트 란은 프리츠 발터와 함께 독일을 상징했던 공격수로서
프리츠를 뒤이어 주장 자리를 맡으며 '데어 보스(Der Boss)'로 불리기도 했다.
A매치 40경기 21골과 월드컵 통산 10골로. 독일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1호로 등장한다.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가장 위대한 독일인 100인’을 발표했는데
프리츠 발터가 71위, 헬무트 란이 90위에 올랐다.
다음 편,
1954년 7월 4일 스위스 베른
월드컵 결승전
헝가리 VS 독일
세기의 대결
Coming Soon
p.s) 경기 내용이 너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알고 있지만 이 생각은 굳이 하실 필요 없습니다.
결승전은 여러분이 원하시는 경기 내용이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