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이용악
“겨울이 다 갔다고 생각자
조 들창에
봄빛 다사로이 헤여들게”
너는 불 꺼진 토기화로를 끼고 앉어
나는 네 잔등에 이마를 대고 앉어
우리는 봄이 올 것을 믿었지
식아
너는 때로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봄이 오기 전 할미 집으로 돌아가던
너는 병든 얼골에 힘써 웃음을 새겼으나
고동이 울고 바퀴 돌고 쥐었던 손을 놓고
서로 머리 숙인 채
눈과 눈이 마조칠 복된 틈은 다시 없었다.
일년이 지나 또 겨울이 왔다.
너는 내 곁에 있지 않다.
너는 세상 누구의 곁에도 있지 않다.
너의 눈도 귀도 밤나무 그늘에 길이 잠들고
애꿎은 기억의 실마리가 풀리기에
오늘도 등신처럼 턱을 받들고 앉어
나는 조 들창만 바라본다.
“봄이 아조 왔다고 생각자
너도 나도
푸른 하늘 알로 뛰어나가게.”
너는 어미 없이 자란 청년
나는 애비 없이 자란 가난한 사내
우리는 봄이 올 것을 믿었지
식아
너는 때로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였다.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회고적, 애상적, 비극적
◆ 특성
① 시적 대상인 '식'의 삶과 죽음에 따라 시상이 전개됨.
② 통사 구조의 반복(1, 6연)으로 의미를 강조하고 운율을 형성함.
③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구성 : 1~3연(과거의 모습), 4~7연(현재의 상황)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겨울 → 불우한 환경, 일제 강점기
* 봄빛 → 밝은 미래(조국의 광복)를 의미하는 시어
* 너(식) → 죽은 친구, 연민의 대상
* 불 꺼진 토기 화로를 끼고 앉어 → 불우한 처지, 비극적인 삶의 모습
* 네 잔등에 이마를 대고 앉어 → 화자가 친구에게 느끼는 정서적 유대감
* 우리는 봄이 올 것을 믿었지 → 밝은 미래의 도래에 대한 확신
* 때로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 → 폐결핵을 앓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음.
* 병든 얼골 → '식'의 구체적인 상황
* 힘써 웃음을 새겼으나 → 배웅하는 화자를 안심시키려는 모습
* 서로 머리 숙인 채 → 헤어짐의 아쉬움과 안타까움
* 눈과 눈이 마조칠 복된 틈은 다시 없었다. → 화자와의 이별 후, 친구가 죽었음을 드러냄.
* 일년이 지나 또 겨울이 왔다. → 시간의 경과, 기다리던 봄은 오지 않음.
* 너는 내 곁에 있지 않다 → 대상의 부재, 안타까움의 정서
* 너는 세상 누구의 곁에도 있지 않다 → '식'이 죽었기 때문에
* 기억의 실마리 → 친구와의 추억
* 오늘도 등신처럼 턱을 받들고 앉어 / 나는 조 들창만 바라본다.
→ 화자의 멍한 모습, 친구의 죽음으로 인한 허탈감과 상실감
* 푸른 하늘 → '봄'과 동일한 시어
* 너는 어미 없이 ~ 가난한 사내 → 가족의 결손,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
조국을 잃은 민족의 모습
◆ 주제 : 친구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밝은 미래의 도래에 대한 소망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봄의 도래에 대한 소망
◆ 2연 : 비극적 삶 속에서도 봄의 도래를 믿음.
◆ 3연 : 할머니의 집으로 떠난 친구 '식'
◆ 4연 : 친구 '식'의 죽음
◆ 5연 : 죽은 친구 '식'으로 인한 허탈감과 상실감
◆ 6연 : 봄의 도래에 대한 소망
◆ 7연 : 친구와의 동질감과 봄의 도래에 대한 믿음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시적 대상인 '식'이라는 친구의 비참한 죽음을 통해 일제강점 하의 민중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자인 '나'가 청자인 '너(식-죽은 친구)'를 마치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구조로, 친구인 '너'를 '피를 토하는 슬픈 동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너'는 당시 만연했던 폐결핵을 앓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친구와 화자는 소생의 봄, 밝은 미래를 기대했으나, 친구는 죽었고 화자는 허탈감과 상실감에 '등신처럼' '조 들창'을 바라보며 친구를 회상하고 있다. '어미 없이 자란 청년'인 '너'와 '애비 없이 자란 가난한 사내'인 '나'는 둘 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이러한 결손의 모습은 식민지 시대의 보편적인 개인적 · 사회적 정황이며 조국을 잃은 우리 민족의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봄이 아조 왔다고 생각자'는 화자의 말은 조국 광복에 대한 소망과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작가소개]
이용악 : 시인
출생-사망 : 1914년 11월 23일, 함경북도 경성 - 1971년
학력 : 조치대학교 신문학 학사
데뷔 : 1935년 시 '패배자의 소원'
경력 : 인물평론, 중앙신문 근무
시인. 함경북도 경성 출생.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6년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에서 수학했다. 1935년 3월 「패배자의 소원」을
처음으로 『신인문학』에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같은 해
「애소유언(哀訴遺言)」, 「너는 왜 울고 있느냐」, 「임금원의 오후」,
「북국의 가을」 등을 발표하는 등 왕성하게 창작활동을 했으며,
《인문평론(人文評論)》지의 기자로 근무하기도 했다. 1937년 첫번째 시집
『분수령』을 발간하였고, 이듬해 두번째 시집 『낡은 집』을 도쿄에서 간행하였다.
그는 초기 소년시절의 가혹한 체험, 고학, 노동, 끊임없는 가난, 고달픈 생활인으로서의
고통 등 자서전적 체험을 뛰어난 서정시로 읊었다. 이러한 개인적 체험을 일제하
유이민의 참담한 삶과 궁핍한 현실로 확대시킨 점에 이용악의 특징이 있다.
1946년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의 시 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중앙신문』 기자로
생활하였다. 이 시기에 시집 『오랑캐꽃』을 발간하였다.
1949년 8월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가 1950년 6월 28일 인민군이
서울에 진격해 오면서 출옥하였다. 시 「노한 눈들」, 「짓밟히는 거리에서」,
「빗발 속에서」 등은 이 시기에 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이 시들에는 미국에 대한
증오와 반미투쟁에 앞장선 남한 민중들의 활동을 그려놓고 있다. 1951년부터
1952년 7월까지 조선문학동맹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6년 11월부터
조선작가동맹출판사 단행본 편집부 부주필로 일하였다.
시 「원쑤의 가슴팍에 땅크를 굴리자」는 조국해방전쟁 시기에 창작한 그의 대표작이다.
전후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평남관개공사를 독특한 필치로 노래한
「평남관개시초」를 들 수 있다.
1957년에 출판된 『리용악 시선집』에는 해방 전부터 이 시기까지에 창작된 그의
우수한 시 작품들이 편집되어 있다. 그의 시 창작의 특징은 공장과 농촌,
어촌 등으로 시적 공간을 넓힌 것이며 근로하는 인민들의 생활에 대한 기쁨이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윽한 향토적 서정을 풍기고 있는 점이다.
이밖에도 시 「석탄」, 「어선 민청호」, 「위대한 사랑」, 「격류한다 사회주의에로」,
「기발은 하나」, 「꼰스딴짜의 새벽」 등을 발표하였다.
1968년에 「날강도 미제가 무릎을 끓었다」를 발표한 이후로 더 이상 시작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63년에는 김상훈과 함께 『역대 악부시가』를
번역 발간하기도 했다. 1971년 2월 15일 병으로 사망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용악 [李庸岳]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