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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의 행복
1988년 5월 17일
미국 텍사스 타일러에서
신의 메신저 마샬 비안 서머즈에게
계시되다
내적 삶과 내적 감수성을 기르기 시작하는 이들은 세상에서 살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당신은 지금 점점 더 감수성이 예민해지고 있다. 물질적 삶의 가혹함은 당신에게 더 거슬리고, 당신은 자극보다 조용한 곳을 더 찾는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내가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 우리가 이전 주제에서 말했듯이, 행복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순간적인 행복인데, 이 행복은 행복한 자극의 결과로 매우 즐거울 수 있으나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 다른 하나는 당신 내면에 머무는 지속적인 행복이며, 이 행복이 강해질 때 모든 상황에서 이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 이 행복이 바로 이 삶에 있는 자유의 씨앗이다.
우리는 지속적인 행복 및 이 행복이 삶에서 어떻게 확립될 수 있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단순한 개념이나 정의 이상의 것을 제공해야 한다. 세상은 매우 강력하므로, 당신은 단순히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세상은 사람들이 특정한 사고를 하도록 유도하는데, 이것은 꽤 강력하다. 당신은 특정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에 너무 익숙하여 이 특정 방식이 단지 한 사고방식일 뿐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다. 이 사고방식이 습관이 된다. 당신은 이것에 전혀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이 내적으로 마음을 열기 시작하면, 자신의 관점이 사물을 보는 그저 한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신의 관점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다. 당신은 특정 방식으로 사물을 보기 때문에 그렇게 보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놓고 논쟁하고 싸우며 고통받는다. 그들은 같은 것을 보면서도 서로 다른 관점에서 서로 다른 것으로 본다.
점차 당신 내면이 열리고, 당신 자신에 대한 인식이 더 커지고, 자신의 능력과 감수성을 기르고, 자신이 지닌 더 높은 자질을 이용하면, 당신은 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고, 자신이 사물을 보는 방식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진실을 알기는 매우 어렵지만,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사람이 진실을 느끼는 경험은 매우 비슷할 수 있다. 우리가 “느낌”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더 깊은 경험을 뜻한다.
세상은 당신에게 행복을 줄 수 없지만, 당신은 세상에 행복을 줄 수 있다. 왜냐하면 당신이 고향에서 행복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행복을 가장 먼저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행복으로 가는 길, 행복한 자극을 유지하는 방법, 고통을 피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아주 필사적으로 모든 것을 즐겁고 편안하게 유지하려고 애쓰며, 잃는 것 없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한다. 이것은 이루기가 어렵지 않은가? 당신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언할 사람들이 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아무도 성공하지 못한다.
진정한 행복은 당신이 품고 있는 어떤 것이지만, 당신 내면 깊숙이 있다. 이 행복은 당신이 삶에서 목적, 의미, 방향을 경험한 결과이다. 이것은 당신 혼자서 만든 목적, 의미, 방향이 아니며, 당신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당신은 이것을 자각한다. 이것은 단지 당신의 생각이나 신념이 아니며, 철학이나 종교도 아니다. 행복을 경험할 때 이것들을 통해 표현할 수는 있지만, 이것들은 행복의 원천이 아니다. 진정한 행복의 원천은 불가사의하며, 당신 경험의 영역과 범위 너머에 있다. 결과로 나타나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은 당신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당신이 행복에 접근하고 행복과 함께 살아가고 행복을 삶에 전하는 능력을 지닐 수 있으려면, 자신을 연마해야 한다.
사람들은 큰 경험을 몹시 갈망한다. 그들은 예수를 경험하고 싶어 하고, 신이 나타나기를 원한다. 그들은 증거를 원하고, 답을 원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그들의 역량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당신에게 어떤 것을 경험할 역량이 없으면, 당신은 그것을 경험할 수 없다. 당신은 어쩌면 삶에서 짧은 순간만 언뜻 맛볼지도 모른다. 즉 기존의 관점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체험을 하거나, 당신과 함께 사는 강력한 현존을 느끼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공감을 다른 사람에게 느낄지도 모른다. 이런 것들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행복의 반영이다.
왜 행복이 중요한가? 행복은 하루 종일 웃으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겉모습과 달리 그들은 내심 종종 매우 불행하다. 행복은 평화를 느끼는 것이며, 세상에서도 고향에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여기에서 편안함과 공헌과 방향이 나오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조언이 나온다. 그리하여 당신은 매우 황량한 곳에 있는 오아시스와 같다. 당신이 만나는 사람들을 둘러본다면, 세상에 행복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것에 대해 진실을 식별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그것이 삶이다.”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 정직하게 행복한 사람은 신의 증거를 준다. 신은 사람들이 가난하므로 그들에게 베풀기를 원한다. 우리가 말하는 이 행복은 당신이 자신에게서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발견하는 어떤 것이다. 행복은 경험하는 것이지 개념이 아니다. 개념으로 만족하지 말라. 완전히 새롭게 정의해 놓은 것들이 당신 삶을 기적적이고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에게는 이미 많은 정의가 있고, 당신 마음은 정의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경험이며, 여기서 우리가 한 말은 단지 행복에 가까울 수 있는 표현일 뿐이다.
당신 내면에는 앎이 있다. 앎은 아는 능력으로 심오하고, 크며, 정의할 수 없다. 당신은 거의 앎을 경험하지 못하지만, 앎을 경험하는 능력을 기를수록 앎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이때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알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이 의미를 당신에게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 있는 것은 모두 일시적이다. 당신은 일시적이지 않다. 당신이 보는 모든 것은 당신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그것을 보는 당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연히 당신의 몸은 사라진다. 당신의 생각도 사라진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당신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당신은 항상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고 여길 것이고, 행복은 당신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존이 의미가 있다. 우리는 저승에 있는 당신 삶을 나타낸다. 우리는 더이상 이곳에 살지 않지만, 세상과 매우 가깝다. 우리는 다리와 같다. 우리의 존재는 당신에게 저승의 삶이 있음을 실연하는 것이다. 소수는 지금 이곳에 있으나, 대다수는 다양한 발달 단계를 거치는 다른 측면에 있다. 그것은 마치 어항 속에도 있고 밖에도 있는 것과 같다. 당신이 어항 속에 있을 때, 그것은 온통 사로잡히는 경험이다. 그렇지만 어항 밖에 있으면, 당신은 어항 속에 있는 것들을 매우 선명하게 볼 수는 있지만, 쉽게 간섭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항 밖에 있고, 당신은 어항 속에 있다. 당신은 세상이라는 물속에 있지만, 아주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은 당신이 일시적이고 죽음이 당신을 기다린다는 믿음이며,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 당신에게 의미 있는 모든 것을 언제든지 빼앗길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이 있으면, 당신은 극도로 취약해진다. 그러면 당신의 행복은 다음 순간에 끝날 수도 있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두려운 것이 그처럼 많고, 현실이든 상상이든 당신 안녕에 대한 위협이 그처럼 많은데, 세월이 모든 것을 침식하고 있는 동안 당신 혼자서 삶의 작은 부분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어떻게 이 모든 조건에서 행복할 수 있겠는가? 물론, 행복한 순간, 즐거운 시간, 기분 전환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좋지만, 충분하지 않다. 당신은 하루 종일 놀면서 행복할 수는 없다.
당신이 자신의 삶, 자신의 내면, 당신의 관계에서 신의 현존을 더 잘 알아차리기 시작하면, 더 큰 감수성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때 당신은 자신이 느끼는 이 경험과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세상 사이에 매우 큰 차이가 있음을 알 것이다. 당신이 세상에서만 산다면, 세상에 마음이 매인다. 당신은 매우 현실적일 수도 있고, 온갖 것이 어떻고 또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등등을 알며 만물박사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 물정에 밝다고 한다. 세상 물정에 밝다는 것은 몇 가지 일에 대해서만 똑똑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당신은 훨씬 더 큰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그것에 대해 말하기는 쉽지 않다. 언어는 그것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느낌 그 이상이지만, 아마도 당신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느낌뿐일 것이다.
당신은 자기 삶에서 앎의 현존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앎은 당신 내면 아주 깊숙이 있으므로, 당신은 앎을 오용할 수 없다. 앎은 마치 바다 밑바닥에 있는 보물처럼, 당신 중심부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 당신은 모든 것이 요동치고 변화무쌍한 표면에 살고 있으므로, 앎에 접근할 수 없다. 대양의 표면처럼, 하루는 삶이 잔잔하고 평화롭고, 다음날은 맹렬한 폭풍이 휘몰아친다. 하지만 당신 내면의 깊은 곳에, 신이 씨앗을 심어 놓았다. 만약 그 씨앗이 발아하고 자라고 성장하여 세상에서 형태를 갖추게 되면, 그 씨앗은 다른 사람들에게 목적과 의미와 방향의 원천이 될 것이다.
때때로 위대한 교사들이 물질계에 파견되기도 하지만, 이런 일은 꽤 드물다. 왜 드문가?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부처나 예수와 한 집에 살고 싶은가? 당신은 매우 불편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생기는 문제는 그들이 당신 곁에 사는 것을 당신은 견딜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잊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그들이 떠난 후에 그들을 숭배하는 것을 선호한다.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들이 자기 삶에 있는 것을 거의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신은 항상 무대 뒤에서 일한다. 신은 당신의 관계 속에서 일한다. 신은 작은 첩보기관처럼 생각하거나 책략을 꾸미거나 계획하지 않는다. 신은 당신을 고향으로 끌어당기는 큰 끌림과 같고, 이 끌림이 당신의 앎을 자극한다. 일단 앎이 충분히 자극받으면, 그래서 당신이 준비되고 당신의 외적 삶이 충분히 열리면, 그때 앎은 당신 내면에서 출현할 것이고, 당신은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 출현이 처음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이 출현을 매우 불신할 것이며, 자신에 대해 생각한 모든 끔찍한 것들, 매우 많은 상황에서 당신이 품는 수치심과 죄책감은 앎에서 나오는 더 깊은 성향을 받아들이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이때 당신은 순수하지 않고, 당신의 성향은 항상 믿을 만하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시작이다. 당신은 걸음마를 배우고 있으며, 당신이 배우는 것을 돕는 저승의 힘과 이승의 힘이 있다. 왜냐하면 당신 혼자서는 이것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밤낮으로 큰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한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아기와 같다. 당신은 아기를 세상에 던져 놓고 “살아남아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당신은 아기를 돌보고 아기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친다.
앎길에서 당신은 마치 아기와 같다. 당신은 지속적으로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극소수의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거나 하려는 어떤 것을 하려고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작이고, 믿음을 초월한 경험이다. 이것이 커지도록 허용하고, 당신이 발전 단계를 통해 한 계단씩 밟으면, 당신은 세상에서 행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당신에게 종교가 전혀 없을지라도, 사람들은 당신에게서 신을 느낄 것이다. 당신은 신이 아니라, 단지 더 큰 삶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게 하는 창문일 뿐이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항상 신의 메신저를 대상으로 삼고 싶어 한다. 물론 신의 메신저를 죽인 후에 그리한다. 사람들은 신을 대하기보다는 한 사람을 대하기가 더 쉬우므로 그 사람을 숭배한다. 신보다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숭배하기가 더 쉽다. 신은 매우 크다.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린 매우 유한한 존재이며, 심지어 애처롭기까지 하다. 예수는 큰 조직의 일원이며, 그 조직은 실제로 매우 크다. 이 세상에 그가 온 것이 오래전에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데 지금 인류 사회는 충분히 개방되었고 충분히 발전하여 우리가 당신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이 세계에서 전례가 없었다. 당신은 드물고 경이로운 자유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당신이 인류가 인내한 것을 고려하여 이 자유에 감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매우 좋은 기회이다.
만약 당신이 내면에 묻혀 있는 이 심오한 마음 상태인 앎이 드러나도록 허용하고, 앎의 학생이 되고, 앎의 방향을 따를 수 있다면, 당신은 앎을 훨씬 더 명확하게 경험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당신이 모든 단계를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마음을 열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당신은 행복의 원천이 될 것이다. 당신은 행복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당신이 순수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런 일은 이승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완벽함은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심지어 예수도 실수를 했다. 실수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그 일부이다. 완벽함은 문제가 아니다. 이 상태에 있다고 해서 당신에게 나쁜 습관이 없고 화난 생각 없이 하루 종일 행복하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뜻하는 것은 당신이 현존을 지닌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바로 이 현존이다. 이 현존은 개인적 카리스마가 아니다. 개인적 카리스마는 사람들을 잠깐 흔들 뿐이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평생 영향을 끼친다.
만약 앎이 당신 마당에서 일하는 정원사를 통해 표현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과 접촉하는 모든 사람에게 신의 현존을 가르칠 것이다. 어떤 위대한 교사들은 이런 식으로 위장하여 실제로 숨는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떤 메신저도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드러내기에는 세상에 여전히 신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많다. 두려움은 증오와 불신을 낳고, 분노와 보복을 낳는다. 그래서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배울 때,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야 했다. 이것이 완전히 노출한 대가이다. 그래서 진정한 교사들은 개인적 야망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이 야망이 그들의 진정한 사명과 안녕에 역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물론 야망을 완전히 버리기는 매우 어렵다.
세상은 험난한 곳이다. 왜 이곳에 오는가? 어디 바닷가로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왜 이곳에 오는가? 이것은 힘든 일이다. 당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생명의 싹을 지닌 채 하늘에서 떨어진 도토리와 같다. 적절한 환경, 도움, 상황이 주어지면, 당신은 큰 나무가 될 것이다. 인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노력하여 개선되고 발전하였으며, 이들이 모든 면에서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당신은 하늘에서 떨어진 도토리와 같다. 많은 도토리가 싹트지 않는다. 그래서 도토리가 많다. 모든 도토리가 큰 나무의 씨앗이 되기 위해 싹이 트지는 않지만, 이것이 그 도토리들의 가능성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곳에 왔다. 우리는 정원사이다. 우리는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보다 당신을 훨씬 더 높이 평가하며 바라본다. 당신은 오로지 자신의 어려움, 소망, 두려움, 야망만을 본다.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바깥쪽 부분인 껍데기일 뿐이다. 우리 역시 껍데기를 보지만, 우리는 당신이 지닌 씨앗도 본다. 당신에게는 삶에서 자유로운 선택권이 있다. 당신은 도토리가 될 수도 있고, 나무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사람이 나무가 될 필요는 없지만, 만약 당신이 나무가 된다면, 당신은 자신의 종족을 회생시킬 것이다.
당신에게는 행복이 있다. 행복은 내면 깊은 곳에 있다. 밖으로 나가면 당신은 행복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며, 많은 자극을 발견할 것이다. 고통이 없고, 하루 종일 즐겁게 지내고, 돈이 많고, 멋진 배우자가 있어도, 이 모든 것은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는 가능성들이다. 행복에 대한 갈망인 평화와 내적 해결에 대한 갈망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른다.
종종 사람들은 “내가 원하는 것은 삶의 진정한 동반자, 진정한 관계이다. 나는 결혼하고 싶고, 가정을 갖고 싶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다.”라고 말한다. 그러면 우리는 “좋은 생각이다. 그러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진 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그들의 만족도가 당신이 원하는 것인지 자문해 보라.”라고 말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빼앗고 싶지 않다. 결국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결혼을 하거나 가정이 있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기억 상실 상태로 산다. 어항에 갇힌 물고기처럼 살며, 세상이 그 어항이다. 당신은 물이라는 작은 세상 밖을 거의 볼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이 갇혀 있는 세상 너머에 삶이 있고, 당신이 이곳에서 그 삶을 대변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훌륭하다. 세상 마음으로 보는 사람들은 당신을 터무니없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들은 당신을 몽상가, 아니면 그보다 더 나쁜 어떤 것이라고 비난할 것이다. 당신은 행복을 발견해야 하며,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당신은 행복이 커지도록 놓아두어야 하며, 그것은 평생이 걸린다. 그래서 그 행복을 지니는 법을 배워야 하고 여전히 세상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은 영성을 삶에서 벗어나 휴가를 보내는 좋은 핑곗거리로 여기지만, 그것은 당신을 위한 우리의 의도가 아니다. 그것은 성공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멀리하고 수행만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다. 모든 사람이 그런 수행자가 된다면 인류는 지속될 수 없다. 오직 소수만이 그런 운명을 타고나며, 그들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그것은 영적 삶의 표본이 아니다. 영적 삶의 표본은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사람, 내면의 지혜를 세상으로 가져가 그 지혜가 커지도록 하는 사람이다. 이 내면의 지혜는 당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 결코 완전히 성숙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지혜는 세상보다 더 크므로 항상 발전 단계에 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우리를 체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이것의 증거이다.
앎의 학생이 되려면 당신이 아는 것들을 주장하기 시작해야 하고, 당신이 생각하거나 원하는 것과 아는 것을 구별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당신은 이렇게 하는 법을 배워야 하므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나는 책을 많이 읽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수업도 필요 없고, 교사도 필요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그들은 그저 그들 자신만 받아들일 뿐이다. 당신이 어떻게 자신을 새로운 영역으로 이끌 수 있는가? 당신은 지금까지 있던 곳 너머로 자신을 데려갈 수 있는가? 당신이 이렇게 하려면 세상에서의 진정한 관계가 필요하고, 저승에서 온 안내도 필요하다.
앎을 회복하는 큰 길은 완전히 성공적이다. 왜냐하면 그 길에서 당신은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과 한 사람으로서의 당신의 모든 측면에 주의를 기울이며, 자신에게 완전한 조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당신 삶에 큰 길이 나타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우리는 예수에 대해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인간으로서 매우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가 누구이고, 어디에 있고,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예수는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이자, 당신이 밖을 내다볼 수 있게 해주는 창문이다. 결국,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 행복한 곳으로 갈 것임을 알면, 그때 당신의 부담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당신은 지옥에 가는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이미 지옥에 있다. 그렇다! 당신의 생각 속에 혼자 있는 것, 이보다 더 나쁜 고립이 있겠는가?
당신이 앎을 처음 경험하는 것은 아마도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 느끼거나 아는 것인 심오한 직관의 형태를 통해서 일 것이다. 이런 직관이 일어나려면 보통 매우 힘든 상황이 필요하다. 매우 편안하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갈 때는 사람들이 거의 앎을 경험하지 못한다. 상황이 어렵거나 틀어질 때, 사람들은 종종 이 경험을 한다. 당신이 준비를 시작하면, 심오한 직관으로서 앎을 처음 경험한 것들은 의사 결정에 점점 더 많이 이용될 수 있다. 그러나 앎 자체는 직관보다 훨씬 더 크다. 삶에서 앎을 완전히 발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앎을 발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당신들 대부분은 앎을 발견해야 한다. 왜냐하면 앎은 당신의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앎을 경험할 때는 당신이 ‘왜 그러는가? 왜 그러지?”하고 묻는 온갖 질문은 중요하지 않다.
처음에는 당신 역량이 매우 작을 것이다. 당신은 여기저기서 잠깐 동안만 앎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이 경험은 더 빈번해지고 더 오래 지속될 것이다. 앎의 이 경험을 통해 당신은 내면의 교사들을 통해서도 은총을 받을 것이다. 내면의 교사들은 당신을 인도하고 보살핀다. 당신은 이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마음은 특정 수준에서만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그 수준을 벗어나면, 당신은 보거나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 마음이 발전함에 따라, 당신은 점점 더 큰 우주에서 사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당신은 삶에서 현존을 더 많이 느끼게 될 것이다. 이제 삶은 움직이는 물체들의 집합체가 아니다. 당신은 점점 더 자주 자기 생각 너머를 볼 수 있을 것이고, 해석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당신이 개인적으로 길러야 할 많은 구체적인 기량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당신이 정성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다. 당신들은 모두 학생이다. 당신은 아직 이것을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당신은 학생이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는 당신이 앎의 경험을 발전시켜 나가도록 격려하고자 한다. 당신은 이 경험에서 목적과 의미와 방향에 대한 진정한 감각을 얻는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이 직면하는 일종의 문제들과 자신이 내려야 하는 중대한 결정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준비되지 않았으므로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는 없지만, 답은 있다. 왜냐하면 앎이 당신에게 답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왜 나에게 교사가 필요한가? 나는 신에게 바로 가고 싶다.”라고 묻는다. 당신은 신에게 바로 갈 수 있지만, 당신이 만나게 될 이는 당신 내면의 교사들이다. 당신은 그것을 바꿀 수 없다. 신의 마음은 저승에 있다. 신은 말하지 않는다. 교사들이 말한다. 신은 조언하지 않는다. 교사들이 조언한다. 당신은 신이 영어로 말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가? 신에게는 음성이 없다. 신은 신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신에게 있는 단 하나의 큰 한계이다.
우리는 당신에게 말할 수 있고, 당신은 우리 말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우리를 믿고 싶지 않다면 우리가 하는 말을 버려도 된다. 그것은 괜찮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신은 항상 교사를 통해 말한다. 왜냐하면 교사들이 신의 뜻을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경험과 형태로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교사들은 영매와 같다. 우리에게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교사들이 있다. 우리는 당신에게 전달해 주고,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준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수준에서 전달된다. 모든 이가 보살핌을 받는다. 아무도 소외되지 않는다. 당신은 자기 경험의 영역에서 신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경험이 커질수록 새로운 방식으로 신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당신에게는 말이 전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말하는 이들이다. 그것이 우리의 특정 역할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이곳에 왔지만, 말하지 않는 다른 교사들도 있다.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 당신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면, 당신은 이곳에 다시 올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세상에 봉사할 수 있고 어항 밖에 있을 수 있다. 당신이 어항 밖에 있으면, 세상이 그렇게 무섭게 보이지 않는다.
당신의 부름은 당신이 이곳에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당신은 행복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당신이 세상에 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청사진도 가져왔다. 그것 또한 당신 내면에 묻혀 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은 행동 지향적이며, 여기서 당신의 일은 당신에게 의미의 원천이다. 여기서 당신은 자신의 목적부터 찾지 않는다. 당신의 목적은 당신이 그 목적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냥 드러난다. 결국 우리가 “당신의 목적은 이것 또는 저것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단지 당신 마음속에 또 다른 논쟁만 낳는다. 그러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준비된 사람들에게 “당신의 목적은 이것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그것이 진실임을 즉시 알 것이고, 그들의 삶은 바뀔 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그들 자신의 앎과 목적으로 입문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준비된 것을 확인해 줄 뿐이지만, 우리나 우리와 같은 어떤 이가 그들과 함께 일했다. 그것은 마치 학교를 졸업하는 것과 같다. 졸업식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당신은 오랫동안 학교에 다닌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의사 결정을 하는 과정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당신이 현명한 의사 결정자가 되는 법을 배우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기 내면에서 앎을 발견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현명한 결정의 근원은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다. 결정은 이미 거기에 있다. 당신은 단순히 그 결정을 받아들여 수락하는 것을 준비할 뿐이다.
때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한정된 용어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행복은 사람들이 자신의 관계, 취미, 일 등 모든 곳에서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평화로 이끄는 더 큰 해결책인 행복을 말하고 있다. 이 행복과 만족은 이 세상에서 정말 희귀한 것이며, 이것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인류에게 주는 선물이 된다.
첫댓글 세상은 험난한 곳이다. 왜 이곳에 오는가? 어디 바닷가로 가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왜 이곳에 오는가? 이것은 힘든 일이다. 당신들은 모두 자기 내면에 생명의 싹을 지닌 채 하늘에서 떨어진 도토리와 같다. 적절한 환경, 도움, 상황이 주어지면, 당신은 큰 나무가 될 것이다. 인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사람들이 노력하여 개선되고 발전하였으며, 이들이 모든 면에서 인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그래서 당신은 하늘에서 떨어진 도토리와 같다. 많은 도토리가 싹트지 않는다. 그래서 도토리가 많다. 모든 도토리가 큰 나무의 씨앗이 되기 위해 싹이 트지는 않지만, 이것이 그 도토리들의 가능성이다. -본문 중에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