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묘(哲廟.철종) 계축년(1853) 늦봄에 종남산(終南山)의 묵계산장(墨溪山莊)에서 "속난정회(續蘭亭會)"를 열었는데, 함께 모인 사람들은 소정(邵亭) 김영작(金永爵), 두산(斗山) 조영화(趙英和), 난휴(蘭畦) 조운주(趙雲周), 완계(浣溪) 조문화(趙文和), 초파(蕉坡) 박흥수(朴興壽), 다사(茶史) 서당보(徐堂輔), 종산(鍾山) 이원명(李源命), 화산(華山) 조명하(趙命夏), 추담(秋潭) 조휘림(趙徽林), 호남(鄗南) 조운한(趙雲漢), 호계(扈溪) 정영조(鄭永朝), 석거(石居) 김기찬(金基纉), 성산(星山) 조연창(趙然昌), 단천(丹泉) 조석여(曺錫輿), 주계(周溪) 정기세(鄭基世), 국하(菊下) 조연흥(趙然興), 단농(丹農) 이유응(李裕膺), 석전(石篆) 정기명(鄭基命) 및 나였다.
한결같이 계첩(禊帖)의 일에 따라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돌리고 시를 읊었는데, 시는 각자 그 원운(原韻)에 맞추어 차례대로 읊었다. 이어 이 모임을 그림으로 그려 동인(同人)들과 더불어 나누어 보관하였다.
중국의 선비 주당(周棠)은 회계(會稽) 사람으로서 난정(蘭亭) 서쪽에 살고 있는데, 나의 이번 모임에 대한 얘기를 듣고는 「영소화속난정도시(詠小華續蘭亭圖詩)」를 지어 보내 주었다.
아, 이제 우군(右軍.왕희지)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1500년이나 되는데 그동안 이 모임을 모방한 자들이 얼마나 있었는지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나, 유독 왕희지가 난정에 모였던 것만이 성대한 일로 전해져 시를 읊는 것만으로는 모자라서 그림으로까지 그리는 일이 끊이지 않는 것은, 그의 필법(筆法)이 천고(千古)에 으뜸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또한 그의 문장과 절의(節義)가 강좌(江左.양자강 동쪽 지역인 강동을 지칭하며 지금의 강소성 일대)의 제현(諸賢) 중에서 한결 탁월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를 상상하고 우러러 존경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은 문장과 절의에 있고 놀이에 있지 않은 것이니, 우리들이 어찌 후대에 전하게 하는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註: 난정회(蘭亭會)는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가 영화(永和) 9년 9월 3일에 회계산(會稽山)의 난정(蘭亭)에서 사안(謝安)을 비롯한 당시의 명사(名士) 41인과 모여 친목을 다진 모임의 이름을 말하는데, 그 뜻을 계승한 모임이라는 의미로 ‘속(續)’ 자를 붙여 속난정회(續蘭亭會)라 하였다.